MYSELF/나의 영화

민욱아빠 2019. 10. 23. 10:35

  영화 도그빌의 독특한 세트는 마을 공동체에 어려 있는 어떤 정감 이면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다.  옆집에 숟가락이 개인지 알고, 문을 휙휙 열고 드나드는 스스럼없는 관계가 가린 불편과 갈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마다의 공간은 존재하지만, 물리적 공간구분이 실은 의미가 없는 마을 공동체, 그래서 어쩔 없이 드러나는 불편함과 갈등이 암묵적 합의로 가려져야 아슬한 평온이 유지될 있음을 표현한다.  세트 자체만으로도, 공동체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는 감독의 천재성에 놀랄 뿐이다. 


  아슬한 평온을 깨는 사건은 그레이스가 마을에 나타난 일이다.  작은 공동체 특유의 결속력으로 그녀에게 2주의 유예를 주고 마을에 머물게 것인지 결정을 한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는 그렇게 시작되고, 유예기간이 지난 그레이스는 대부분의 찬성으로 마을에 머물 있게 된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화 안에서 공동체의 민낯을 드러내게 하는 기제가 된다.  물론 그레이스는 마을 공동체에 도움이 되도록 마음을 다해 움직인다.  그러나, 공동체는 점점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그레이스가 처한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드러난다.  그레이스가 공동체에 들어섬으로 활기를 띄던 마을은, 그레이스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레이스를 이용한다.  그레이스는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마을 남자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마을 사람들의 착취의 대상이 된다.  영악한 아이들마저, 그레이스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레이스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톰마저 자신의 도덕적 지위와 자존감을 위해 그레이스를 이용한다.  마을 남자들의 치부에 화가 마을 여자들은 오히려 그레이스를 다그친다.  그레이스의 약점이 더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탈출마저 실패할 , 마을 사람들은 마음이 되어 그녀를 노예화 시킨다.  


  마을 공동체는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마음은 저마다의 것이고 이기심과 욕망은 각자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각자와 가족단위의 치부는 애써 외면한 , 외부인이자 철저한 약자인 그레이스에게 화살을 돌린다.  세트 자체가 암시하는 대로, 집집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밖에 없는 작은 마을은, 기회를 만난 이기심과 욕망에 춤을 추면서도 자신의 치부를 돌아보는 데엔 인색하다.  이기심과 욕망은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2018 가을, 일부가 파헤치고 잘려나간 제주 비자림로에서는 비자림로 확장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집회를 열었다.  자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가족들이 참석하는 평화로운 집회였다.  아름다운 도로이자 멸종위기 생물들이 사는 숲이 2공항과 연결되는 도로를 명목으로 잘리고 확장되는 것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반대하는 집회였다.  그러나, 인근 마을 청년회와 공항예정지역 발전위원회 등으로 생각되는 인근 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덤프트럭을 여러대 몰고 와서 집회장을 가리고, 시끄럽게 경적과 음악을 틀었으며, 아이들과 집회 참석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만행을 저질렀다.  2공항과 비자림로 확장을 찬성하는 이들이었다.  


  2공항과 비자림로 확장을 찬성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이익에 부합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분석과 자신들의 행위와 논리에 대한 돌아봄은 없다.  섬의 마을 공동체란 항상 그러했다.  마을과 지역단체를 암시하는 이름을 내세워 찬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공동체 모두의 의지이자 이익인지 없다.  해군기지를 찬성했던 강정마을 이장이나 동물테마파크를 수용한 선흘리 이장처럼, 개인 또는 공동체 구성원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기심의 발로인지 모른다.  개발에 찬성하는 방식은 언제나 기만적이고 폭력적이다.  마을사람 몇몇만을 모아놓고 찬성을 유도한다던지, 마을사람들 몰래 이장이 개발사업체와 거래를 한다던지 그런 식이었다.  더욱 비참한 사실은 도정과 개발사업체가 이러한 마을 공동체의 속성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오라동 관광단지 사업을 비롯한 수많은 개발 사업에서 마을 선주민들이 화면 앞에 나와우리 마을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결정한다.  외부인은 관심을 끊어라 개발을 지지한다.  그리고, 비자림로 집회를 훼방했던 처럼 물리력을 동원하여 무식과 폭력을 일삼는다.  이것이 마을 공동체라는 것의 가려진 민낯이다.  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이익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떤 결말에 이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가지고 있을까?


  카메라 앵글은 아주 낮게 세팅된다.  카메라와 일치하는 관객의 시선은, 저마다의 공간에서 소일하는 마을 사람들과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경계를 뚫고 들어가 사과농장주에 강간당하는 그레이스에 닿는다.  마을 공동체의 일치된 욕망은 결국 그레이스의 목에 작은 종이 달린 개목걸이를 설치한다.  그레이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보던 라즈베리 덤불을 경계짓던 쇠사슬을 떼어내서 개목걸이와 아주 무거운 철제 쇠바퀴를 연결한다.  침대 하나, 선반 하나 달랑 있는 그레이스의 집은 마을 남자들의 욕망의 분출장소이자, 톰의 도덕적 지위와 자아를 확인하는 장소로 변질된다.  동시에, 마을 여자들의 분풀이 장소가 된다.  마을 공동체의 치부와 불합리는, 그레이스라는 인격과 그레이스의 집을 경계로 드러났다 가려지기를 반복한다.  사실은, 모든 것을 통과하여 진실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앵글과 시선같이, 모두가 진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남는 것은 그레이스의 배려로 살아남은 뿐이다.  그레이스가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 배고파서 개의 먹이였던 뼈다귀를 훔쳤었다.  그레이스가 유일하게 미안함을 품을 있었던 대상이었다.  그래서 제목이자 마을 이름이 도그빌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마을 공동체가 개만 남고 사라져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민낯은 누구나 공감할 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섬의 갈등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얼마 전에 만든 영화에서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집단의 보편의 모습이지, 굳이 섬에 있는 마을 공동체만의 민낯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섬의 마을 공동체들이 보여주는 납득하기 어려운 민낯들이 설령 급격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어쩔 없는 현상 하나라 해도, 도덕적 논리적 비참을 피하기는 어렵다.  영화 도그빌은, 내가 사는 섬의 현실, 안에 가려진 노골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