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n JEJU/기고문

민욱아빠 2016. 12. 29. 09:24

  입도 첫 날, 흐린 하늘의 부슬비는 을씨년스러웠다.  공기는 따뜻해도, 바람섞인 빗방울은 이제 막 발을 디딘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차는 다음날부터 근무할 병원에 세워두었다.  점심도 걸러 배가 고픈 나는 해질녘의 낯선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묻은 거리를 조금 걷다보니 시장이 보였다.  시장골목으로 들어가면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보이겠지 싶어 좁다간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순대였다.  분식점 비닐순대가 아니라, 진짜 돼지창자에 선지와 찹쌀범벅이 그득하게 들어있는 그런 순대.  아, 저거다 싶어 식당으로 들어가 순대국밥과 한라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뜨거운 순대국밥 한 수저와 처음 마셔보는 한라산 소주 한 잔, 그것은 이제 막 발을 들인 외지인의 쓸쓸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했고, 말없이 혼자 먹는 이의 굽은 어깨를 덜 무안하게 해주었다. 



  이후로 나는 종종 동문시장내 순대국밥집을 들렀다.  요즘같이 날이 많이 추워질 때면, 유독 생각이 많이 나기도 했다.  커다란 솥단지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주인할머니는 밥이 담긴 탕그릇을 솥 끄트머리에 대고 능숙한 손길로 토렴을 한다.  그 위로 순대와 머릿고기, 두어가지 양념을 한 후, 내 앞에 올려진다.  작지만 그득한 한그릇은 투박하고 거칠다.  다대기 조금 얹어 넘칠듯한 국물을 조심스레 뒤집어 섞어 정갈하지 않은 한 술 떠 입에 넣는다.  편안하고 든든하고 따뜻하다.  거칠고 투박함이 편안함과 든든함을 선사하는 묘한 매력이 순대국밥 한 그릇에 담겨있다.

  국밥 한그릇 비우는 일은 든든한 속을 만드는 만큼 힘을 준다.  그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 너머, 이후로 주어진 일들에 대한 자신감이다.  순대국밥 한 그릇에 채워지는 자신감은 평등하다.  그래서인지, 오래전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의 선거광고는 국밥을 말아먹는 장면이었다.  정말로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자신있게 말아드신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국밥은 그렇게 누구에게든 평등하고 누구에게나 한그릇 만큼의 자신감을 부여한다.



  동문시장에 들어서면 나는 광명식당을 찾아간다.  제주의 순대에 감탄하고 순대국밥 한 그릇에 디딘 발이 편안한 자신감을 얻었을 때, 문득 알게 된 식당이다.  광명식당만의 찰지고 그득한 맛의 순대는 막걸리 한 잔 곁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고, 진하게 끓인 돼지육수에 담긴 밥과 순대는 어떤 이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보약같다’.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묵직한 깊이와 진함이 담긴 국밥 한 그릇은 개인적으로 제주에서 꼭 맛보아야 할 먹거리에서 제 일순위로 꼽는다.  이 때문에, 나의 맛집블로그 첫 집은 광명식당이기도 했다. 



  그날처럼 쌀쌀함이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던 날, 장인어른을 모시고 광명식당을 다시 찾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가격도 오르고 소소한 변화도 생기긴 했지만, 능숙하게 토렴해내는 주인할머니는 여전하셨다.  순대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하고 순대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맛도 든든해지는 속도 그대로였다.  한겨울을 앞둔 마음과 해를 넘기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서서히 시간이 쌓여가는 제주살이의 무게에 움츠렸던 어깨도 조금 펴 본다.  무언가를 시작했던 그곳이 여전함에 고마웠고, 그곳에서 여전하게 힘을 얻어 나올 수 있음에 감사했다.   

추운 겨울날 순대국밥, 따뜻하고 든든할 것 같습니다.^^
진리이죠.. 이 이상의 메뉴는 없습니다. ㅎ
가고싶어지게 하는 포스팅 입니다.
날이 추워 뜨끈한 국물이 더 생각나네요
가셔요.. 가실 수 있쟎아요.. 내려오시다 힘들면 보성시장으로라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