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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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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0. 9. 26.

   “너는 너의 현실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너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그랬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마치 내가 신성한 종교의 탐구자이자 사도라도 되는 양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나는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가 전혀 아니었지만(지금도 그렇다), 나는 내가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신비로운 비밀의 숲 속을 탐험하고 있다는 상상에 빠졌다. 비록 우연에 의해서였지만 나는 스스로 과학과 철학이라는 비밀의 숲을 발견했고, 이 숲 속에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책 속에 쓰인 철학적 언어가 안겨주는 심오함과 깊이는 나를 현혹시키고 만족스럽게 했다. 나를 매료시킨 이 거대한 환상은 그 시절의 나를 붙잡고 내 삶을 이끌었다.

 

   돌이켜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어리석었던 나를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했던 것은 나를 둘러싼 냉정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이런 소박하고 순진한 환상이었다. 실제로 전혀 대단하지 않았던 나는 스스로를 중요한 임무를 띤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책들을 대했다. 세계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보기 드문 귀한 사람. 그런 환상에 빠진 나를 주변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저 아이는 몽상에 빠져있군. 그 몽상은 너무 나약하기에 쉽사리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정말 그랬다. 이후 나는 나를 둘러싼 현실이 냉정하다는 사실, 나는 전혀 대단하지 않으며 사실 너무나도 평범해서 그 평범함을 사람들 사이에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을 거듭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투항하고 백기를 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환상이 소박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내가 처한 현실 역시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서 완전한 자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제도, 법질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 경향, 행복과 불행 혹은 기쁨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최종적으로는 인간적인 산물들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산물들이 어떻게 절대적인 참일 수 있는가?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력하고 압도적인 견해, 감정, 평가가 있을 뿐, 모든 차이들을 영원히 잠식시키는 절대적인 참과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개체가 개체로서 다른 개체들과 구분되고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다른 누구도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생성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땐 네가 몰라서 그랬지. 네가 세상 물정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판단을 다음처럼 바꾸어 표현하고 싶다. “그땐 내가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세상 물정을 알았다면 나의 무지를 힘으로 삼아 내가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개체로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싸움. 물론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생각, 감정, 평가에 관해서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부딪친다. 이러한 부대낌 속에서 비로소 이 세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사는 법을 조금씩 배워 나간다.

 

   나는 점점 자라나는 나의 딸아이를 바라본다. 딸은 나의 분신이긴 하지만 내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인간 개체다. 나는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아이의 마음 속 세계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그 세계는 내 마음 속의 세계와는 다를 것이다. 내가 아직까지도 내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가끔씩 바보 같고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것처럼, 아이 역시 많은 실수를 할 것이고 여러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고통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과거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딸 역시 자신의 환상과 무지로부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지는 딸과 내가 공유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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