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애호가의 삶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다만 느리게 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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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0. 10. 25.

   나는 나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욕망을 가졌다. 나는 학생시절 고려대학교 김종오 교수가 번역한 [상대성 이론]과 한상훈씨가 번역한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지동섭씨가 번역한 [물리 이야기]를 읽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매료되었다. 임경순 교수가 편역한 [100년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에 수록된 아인슈타인의 지적인 자서전을 읽은 것도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글 속에 통합되어 있는 물리학적이고 철학적 통찰이 학생이던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능력이, 수학적 물리학적 철학적 고찰을 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학창 시절 나의 주변에는 비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그 친구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편이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나의 욕망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른 종류의 삶, 좀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 나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욕망을 어쩔 수 없었다. 물질적인 욕심이 거의 없어 세상에 특별히 바랄게 없었던 나는 그저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과학철학, 특히 수학과 물리학의 철학이었다. 과학철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이해해주는 사람은 내 주변에 거의 없었다. 철학과에 들어가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과학철학을 하겠다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더군다나 [과학철학] 수업을 들어도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푸앵카레, 라이헨바흐 등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과학자 혹은 철학자의 글을 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고독함으로부터 큰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인슈타인이 노년에 쓴 글들로부터 고독함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후의 공부를 통해 아인슈타인에게는 친한 친구들이 제법 많았고 친근한 동료들 역시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상 아인슈타인이 쓴 글들에 현혹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철학자,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듣고 이후 그의 친한 친구가 된 철학자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한스 라이헨바흐의 철학은 내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도록 이끈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는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써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한 후 라이헨바흐의 철학(상대성 이론의 공리화)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처음부터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물리학이 아니라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논의였고, 그런 나는 다행히도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과에 의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과학철학을 유지해나가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나처럼 욕망이 능력을 앞서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새삼스럽게 또 이렇게 나의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번 [시공간의 철학] 수업 준비를 위해 다시금 아인슈타인이 직접 쓴 글들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지적인 자서전을 고등학생 시절 처음 읽었고,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발전과 상대성 이론의 의의에 대해서 쓴 글들 역시 지금 읽고 있는 것과 번역본은 다를지라도 고등학생 시절 처음 읽었다.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군 복무를 했고, 석사학위를 받았고, 취직을 했으며, 결혼을 했고, 5권의 책을 번역했고, 나와 아내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이처럼 나에게도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어 나는 다시금 아인슈타인이 쓴 글들로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느리게 걷는다. 나는 이해하고 싶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읽고,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느리게 걸으면 속도는 느리고 진도는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가 언젠가 목표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임을, 최소한 내가 지금보다 더 목표하는 곳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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