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영혼

세상다담 2017. 4. 24. 23:12




나오코, 死, 지나간 사랑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선 채, 그런 반딧불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반딧불이도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그곳에 있었다. 바람만이 우리 주위를 스쳐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티나무의 무수한 잎새가 서로 비벼댔다.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었다. 반딧불이가 날아오른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반딧불이는 뭔가 생각난 듯이 문득 날개를 펼치더니, 그 다음 순간 난간을 넘어서 희미한 어둠 속에 떠있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재빨리 포물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이 그려내는 선이 바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동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보잘것없는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어둠 속에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그마한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한 바로 앞에 있었다. (84쪽)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와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 미도리, 生, 새로운 사랑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여 있다, 온 세계에서 너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이 됐건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 세계의 잔디밭에 내리는 것 같은 침묵만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441쪽)




  상실의 시대 ( 원제 : 노르웨이의 숲 )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문학사상사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난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표하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죽음과 자살과 이별, 꿈과 이념, 우정과 사랑, 그런 모든 젊은 날에 차례차례 빚어지고 사라지는, 감격적인 환희와 슬픈 ‘상실’의 아픔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엇갈리는 가운데, 언제나 깨어나면 ‘나는 혼자’라는 고독을 깨닫게 되는, 누구나 겪게 되는 ‘젊은 시절의 나날’이란 테마가 부각되어 있다.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 상실의 시대, 324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09.12.31. (3판 69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