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책속의 역사답사기

조은뿌리 2009. 6. 27. 21:32

 

 

 

 

 

 

[맥스웰대령/소청도주민/조선관리/대청도와 소청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과 조선의 만남

 

『홀과 매클라우드의 여행기에는 조선인 관리와 주민들을 그린 삽화도 실려 있다. 알세

스트호의 해군 생도인 브라운(C.W.Browon)과 홀이 직접 그린 스케치를 토대로 하벨

(William Havell) 그린 것이다. 홀의 여행기에는 홀 일행을 문정하고 있는 대복과 이승

렬을 그린 삽화 한 장이, 매클라우드의 여행기에는 백령군도이 주민을 그린 삽화, 조대복

과 수행원을 그린 삽화 등 두장이 실려 있다.

 

홀의 여행기에 실린 삽화는 후일담을 남겼다.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조선과 류큐 탐험

을 마치고 광동으로 돌아 갔을 때, 애머스트는 북경에서 가경제를 알현하지도 못하고 귀

국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중국 정부는 애머스트에게 삼궤구고(三跪九叩, 세번 무릅

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으로, 조공사절단이 청의 황제를 알현할 때 행하는

의식)의 예를 요청하였다. 애머스트는 이를 거절했다. 가경제는 불손한 영국 사절단을 즉

시 귀국하게 하고 이후로는 사신을 보내지 말라고 영국 정부에 칙령을 보냈다.

 

이처럼 애머스트 사절단은 외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환하던 리라호는

1817 8 11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 헬레나에 잠시 기항했다. 그곳에는 폐위된 황

제 나폴레옹이 유폐되어 있었다. 홀의 아버지 제임스 홀과 나폴레옹은 친분이 있는 사이

였다. 나폴레옹은 제임스 홀이 파리의 브리엔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때 가장 아낀 후배였

다고 한다. 홀은 나폴레옹에게 조선 여행담을 들려주고 삽화를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조대복이 문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스케치를 여기저기 흝어보며 연신 감탄한다.

 

히야! 큰 갓을 쓴 길고 흰 수염의 노인장이군. 손에 든 긴 담뱃대, 중국풍의 매트,

국풍의 의상, 노인장 옆에서 글을 쓰고 있는 서기까지, 전부 또렷이 잘 그렸군!

 

나폴레옹은 홀에게 그림 속 사람들의 옷이 어디서 만들어졌고 값은 얼마인지 물었다.

하지만 홀은 대답하지 못했다. 비록 그림을 매개로 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희대의 역적

인물에게 조선인은 잠시나마 이국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박천홍/현실문화] 209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보고된 영국함대와의 조우내용 보고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19, 16(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 7 19(병인) 2번째기사

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

()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

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

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

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

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

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

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

로구(銅鑪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

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

)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

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

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

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

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

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

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

(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

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

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

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

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牋)을 모두 베껴 쓴 다음,

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牋)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3696)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

(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

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

)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

,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粤東)3697) 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

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

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3698) 21

3699)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럽의 열강들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은 15세기부터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동아시아로 제국주의의 발톱

을 세우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중국무역 거점 확보를 위한 특사로 1816년 2월 9 애머스트경을 파견하였

. 무역 확대를 위한 새로운 개항장을 확보하고 광동무역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협상차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개항장이 광동지역 한 곳으로 제한되어 무역 수출에 불편을

해소하고자 함이다. 사절단은 영국함대의 맥스웰 대령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알세스트호와

홀 대령이 이끄는 슬루프형 범선 리라호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애머스트가 중국정부와 협상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어 그들은 조선과

류큐 해역을 답사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통상요구와 측량, 기독교 선교 등이다.

 

당시 조선의 해역에는 수 많은 이양선이 출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

를 열고 각 대륙으로 식민지 개척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조선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으로 나가면서 낡은 소중화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9 1일에 백령도의 소청도에 도착하여 일부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삽화

를 그렸다. 그리고 맥스웰 대령은 제임스 홀 군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으로 내려

오면서 격렬비열도, 외연도를 측량하고 비인만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 관리인 마량진

첨사(수군첨절제사, 3) 조대복과 비인현감(6) 이승렬과 만났다. 조선 관리와 영국

인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몰랐으며 너무나 틀린 이방인의

문화였다. 새로운 문명의 충돌이었다.

 

그들은 다시 출발하여 외병도와 상조도를 방문하고 한반도의 서해지역을 측량하고 조선

의 왕은 ‘1만개의 섬을 지배하는 왕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조선 어휘도 28단어를 채

록하고 10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광동으로 돌아 갔다. 홀은 귀국하여 런던에서 1818년에 <

조선 서해안 및 류큐섬 발견 항해기>를 발간하였다.

 

홀 대령은 아프리카를 돌아서 영국으로 귀국 할 때 중간의 기착지로 세인트 헬레나 섬

을 방문하였다. 당시 섬에는 폐위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유배를 왔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섬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을 따라 프랑스의 브리엔느 유년사관학교를 다니

게 된다. 여기서 학교 후배인 홀의 부친과 만나게 된 인연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대통령이 되고 나중에는 직접 프랑스의 초대 황제로 취임한다.

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략하려다 대패하고 만다. 결국은 연합군에 의해 파리

가 함락되고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난다. 1815년 엘바섬을 극적으로 탈출하여

100일 천하를 이루었지만 워털루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여 몰락하고 남대서양의 고도인 세

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인 섬에서 1815년부터 1821 5

5일 죽을 때까지 유폐되었다.

 

그는 동아시아의 조선을 탐사하고 돌아가는 홀 일행과 만남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동양

의 신비를 맛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림과 여행기를 보고 듣고 무엇을 생각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