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탐방 그 첫 번째 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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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등등/생활 속 발견

2020. 5. 3.

 

 

 

2020.5.2. (토) 10:15~12:48 (약 두 시간 반 탐방)

 

 

지금까지 주말 대부분은 산행을 주로 다녔다.

그저께 관악산 육봉능선과 미소능선, 장군봉능선, 케이블카능선을 걸었더니 힘들다.

오늘은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고양시와 파주, 김포에 산재한 조선 왕릉을 가기로 한다.

조선 왕릉은 산자락에 있으나 마을에 더 가깝다.

왕릉을 탐방하며 왕릉에 얽힌 역사도 알아가는 동시에 산행으로 축적된 피로를 씻어내는 놀이가 시작된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수도 한양과 가까워야 한다는 입지 조건에 따라 서울과 경기권에 위치한다.

예외적으로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391년에 세상을 떠난 태조의 비인 신의황후의 제릉(齊陵)과

2대 임금인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은 북한 지역에 소재한다.

세조의 명에 따라 영월로 유배갔다가 사약을 받고 숨진 6대 임금인 단종의 왕릉인 장릉은 영월에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조선 왕릉 순례는 집에서 가까운 서오릉에 첫발을 디딘다.

 

 

서오릉엔 명릉(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둘째 계비 인원왕후의 능)

               익릉(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능)

               경릉(덕종 추존, 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능

               홍릉(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창릉(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수경원(영조의 후굴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의 원)

               순창원(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

               대빈묘(숙종의 후궁 후궁 장씨의 묘) 가 있다.

 

여기서 잠깐 능(陵), 원(園), 묘(墓)에 대하여 알아보는 게 순서다.

        능(陵)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광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이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의 무이다.

 

서오릉엔 명릉, 익릉, 경릉, 홍릉, 창릉 등 다섯 기의 능이 한양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오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용두동 475-95 (지번)

서오릉 조감도

왕릉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이므로 시종일관 조선왕릉 홈페이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홈페이지에 보니 해설은 10:30, 13:00, 15:00 등 하루 세 차례 있다고 하여 10:00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제법 넓은 주차장은 이미 만차라 뱅글뱅글 두 바퀴를 돌다가 차량 한 대가 빠져나간 자리에 겨우 주차했다.

서울은 불과 1k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인데다, 고양시도 가까워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내국인은 만 25세~만 64세까지만 입장료 1,000원을 받으며 범위 밖인 사람은 무료다.

아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운동 겸 산책 삼아 많이 다닌다.

 

매표하며 해설사가 동행하는 지 물으니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메모지까지 단단히 준비했는데, 해설사가 없다니 사진만 찍고 조선왕릉 홈페이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이후 내용은 거의 조선왕조 홈피를 인용하므로 별도로 인용이란 언급은 하지 않는다.

 

첫 번째 명릉과 인원왕후릉에 들어가는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다.

홍살문 안쪽엔 단차가 있는 돌길이다.

가운데 제일 높은 곳은 향로(香路)로 제향 할 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임금님이 행차해도 이 길로 다니지 못하고 왼쪽과 오른쪽 어로(御路)로 걸어가야 한다.

오른쪽 어로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로 방문객도 이 길을 통해 들어가라는 안내문이 있다.

 

정자각(丁字閣)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 공간의 중심적 건물이다.

 

진설(陣說): 제사 지낼 때 법식에 따라 음식을 상 위에 벌여 놓는 것

 

 

 

비각(碑閣)

비석이나 능 주인의 업적을 알리는 신도비를 세워둔 곳

 

명릉明陵(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변로를 깔아 놓아 겉으로 봤을 때 4개의 길로 보인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표석이고 또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표석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특히 숙종의 명으로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감소하기 위하여 석물 치수를 줄였다.

대표적으로 8각 장명등이 4각 장명등으로 바뀌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형태)이다.

 

서오릉에 있는 대부분의 왕릉이나 원, 묘는 높은 곳에 있어서 아래쪽에서 보면 능이 제대로 안 보인다.

일부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홈페이지에 있는 명릉 사진을 다운로드하여 같이 올린다.

 

 

숙종(肅宗) 이야기

 

숙종(재세 : 1661년 음력 8월 15일 ~ 1720년 음력 6월 8일, 재위 : 1674년 음력 8월 23일 ~ 1720년 음력 6월 8일)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74년에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하여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 기간 동안 1680년에 경신환국(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에 기사환국(경종 탄생으로 원자 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에 갑술환국(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으로

서인과 남인 정권을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양전(量田)의 실시, 화폐 주전을 통용하는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시켰다.

2대 정종의 묘호 추숭과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 『선원록』 작성 등 왕실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그 후 1720년(숙종 45)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이야기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재세 : 1667년 음력 4월 23일 ~ 1701년 음력 8월 14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1667년(현종 8)에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조정은 당파 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실의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암투가 벌어졌던 상황으로,

1689년(숙종 15)에 숙종의 후궁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원자(元子) 책봉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이 있었다.

이 일로 기사환국이 발생되어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출궁 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복위 운동 문제로 갑술환국이 발생되면서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자 왕비로 복위되었다.
이때 나온 소설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소설이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의 내용이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으로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는 의도로 지었다.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는 그 후 1701년(숙종 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가 드러나 무고의 옥(신사옥사)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원왕후(仁元王后) 이야기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재세 : 1687년 음력 9월 29일 ~ 1757년 음력 3월 26일)는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로 1687년(숙종 13)에 순화방 사저 양정재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있을 때 천연두와 홍역을 앓아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1720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시키고 양자로 입적하였다.

경종 연간에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주었으며,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757년(영조 33)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가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비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 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인원왕후 능

 

인원왕후릉

 

 

명릉을 나와 순창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조선 왕조의 능이므로 나무가 많고 우람한 숲을 걷는 느낌이 좋다.

 

 

순창원順昌園(순회세자와 공회빈)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원소는 추존 덕종의 경릉(敬陵)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과 표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원의 역사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공회빈 윤씨가 1592년(선조 25)에 세상을 떠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파천이 결정되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선조는 임시로 후원에 가매장의 명을 내리고 한양 수복 후 공회빈의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끝끝내 찾지 못하였다.

왜란이 종결된 후 겨우 신주를 만들어 봉안하였다. 1870년(고종 7)에 원호를 순창원(順昌園)이라 하였다.

※ 신주: 죽은 사람의 위패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재세 : 1551년 음력 5월 28일 ~ 1563년 음력 9월 20일)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원자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아명은 곤령?齡이고 휘는 부?이다. 1557년(명종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61년(명종 16)에 가례를 올렸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공회빈 윤씨(재세 : 1552년(?) ~ 1592년 음력 3월 3일)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 윤 씨의 딸로 생년은 미상이나,

『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552년(명종 7)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에 순회세자의 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을 중단하고,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멀리 선 본 순창원은 겨우 문인석과 석마만 보이는 정도이다.

순창원 원침

 

 

병아리꽃나무 

 

 

 

 

경릉敬陵(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으며,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덕종의 능침은 장례를 간소히 치루라는 세조의 명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여 봉분을 크게 만들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만 배치하고 나머지 석물은 생략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침은 일반 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여 봉분은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덕종(德宗) 이야기

 

추존 덕종(재세 : 1438년 음력 9월 15일 ~ 1457년 음력 9월 2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아들로 1438년(세종 20)에 경복궁 금중에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에 종실로서 도원군(桃源君)으로 봉해졌고, 1455년(세조 1)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리고 병의 치유를 빌었다.

이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457년(세조 3)에 경복궁 정실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의 아버지인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폐위하여 유배를 보냈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하였다는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였다.
덕종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유배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이후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덕종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세조는 일찍 죽은 아들에게 의경세자라는 시호와 의묘(懿墓)라는 묘호를 내리고, 현재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 1469년에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처음 성종은 예종의 양자 입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의경세자는 바로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다.

황백고(皇伯考, 백부)라 칭하고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하되 종묘에는 부묘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여,

1470년(성종 1)에 의경왕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경릉(敬陵)이라 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1475년(성종 6)에 덕종으로 추존되고 종묘에 신주를 부묘하였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이야기

 

소혜왕후 한씨(재세 : 1437년 음력 9월 8일 ~ 1504년 음력 4월 27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원부원군 한확과 남양부부인 홍씨의 딸로 1437년(세종 19)에 태어났다.

처음 도원군부인으로 봉해졌다가 1455년(세조 1)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덕종이 승하하자 정빈(貞嬪)의 칭호를 받고 출궁 하여 사저(현재의 덕수궁)에서 생활하였으며,

1465년(세조 11)에 칭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1469년에 둘째 아들 자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 인혜왕대비(안순왕후)와의 위차 문제가 논의되어 형제 서열로 정해져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보다 높은 위치로 정해졌다.

그 후 1475년(성종 6)에 인수왕대비로 높여졌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명심보감』등의 유교 서적을 재편집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간섭으로 며느리 폐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로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충격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릉 비문

조선국 덕종대왕 소혜왕후부우강

 

어느 비석이든 앞면 비문은 모두 전서(篆書)로 쓰였다.

전서라고 하는 것은 설문전(說文篆설문이 있는 전서), 이상의 고문(古文)을 일컫는 말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설문전, 재전, 소전, [종정고문(鍾鼎古文), 금문 이라고도 함] 수골귀갑문을 말한다.

전서는 글자 수도 적고 쓰기가 어려워 오늘날 실용에 쓰이지 않지만 장엄한 비문, 묘표, 인장 등에 주로 쓰인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그 이전의 전서를 대전이라 말하고, 진전을 소전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특히 소전은 대전에 비하여 예술적 아취가 있고, 청대에 등석여도 이 체를 사용하여 이름을 떨쳤다.
*초림 김미자의 서예 이론 강의에서 옮겨온 글이다. 서오릉에 있는 비분은 전부 전서체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각국의 자형이 달랐던 것을 소전체(小篆體)로 통일한 것은 한자의 자형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점에서 서체 발전 사상 큰 의미가 있다. (진태하의 "한자학 전서" 인용)

 

이 비석은 오석으로 만든 것으로 현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뒷면은 덕종의 간단한 이력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멀리서 본 경릉

 

경릉(덕종) 능침

 

 

 

 

 

 

 

 

 

 

 

 

 

제20대 경종 사친 옥산부대빈 장씨 대빈묘(大嬪墓)

 

묘의 구성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사친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묘표석을 배치하였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곡장을 둘렀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묘의 역사

1701년(숙종 27)에 희빈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진(自盡)),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1969년 6월 묘소를 서오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재세 :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는

본관이 인동인 옥산부원군 장형과 파산부부인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에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 후궁)이 되었다.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1688년(숙종 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이 되었다.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한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 일로 인해 기사환국이 발생되어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 인현왕후 복위 운동과 숙빈 최씨 독살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갑술환국이 발생되어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희빈은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혐의(무고의 옥)가 밝혀져 자진하였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1722년(경종 2)에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이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으로 본명은 장욱정이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장희빈은 유례없이 악독한 경국지색의 요부로 알려져 있지만,

숙종의 여인이자 경종의 어머니로서 당쟁과 환국으로 얼룩진 치열한 권력투쟁의 도가니 속에서 사랑과 고통,

갈등과 희망을 한 몸에 품었던 역사의 희생자(이상각의 한국사 인물열전 인용)로 그려지며

TV 사극의 단골 소재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대빈묘는 정자각은 물론 비석과 비각도 없어 단출하다.

 

 

 

홍릉弘陵(영조비 정성왕후)

 

정성왕후(貞聖王后) 이야기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재세 :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음력 2월 15일)는

본관이 대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와 잠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692년(숙종 18)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에 숙종의 왕자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 빈으로 책봉된 후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 재임을 가장 오래 하였으나 영조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다.

두 후궁에서 낳은 효장세자와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 양자로 입적하기도 하였으며,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립하게 되자 그 중심에 서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1757년(영조 33)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는 친히 왕후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홍릉 정자각

 

정성왕후 비문

 

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의 형식이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여 글을 새겼다.

능침은 숙종의 명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의 역사

 

1757년(영조 33)에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창릉 동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숙종의 명릉(明陵)제도를 참작하여 쌍릉 형식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허우제(虛右制)로 홍릉을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워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능 자리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효종의 구 영릉(寧陵) 자리로 최종 결정되어 원릉이라는 이름으로 영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이로 인해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홍릉 원침

 

 

 

 

창릉昌陵(예종과 안순왕후) 전경

 

 

창릉昌陵(예종과 안순왕후)

 

능의 구성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예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창릉의 두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왕과 왕비가 비슷하다.

예종의 능침의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고,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의 무늬가 도깨비가 아닌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다.

 

 

능의 역사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70년(성종 1)에

의경세자의 의묘(懿墓, 경릉) 북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에 안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에 창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예종(睿宗) 이야기

 

예종(재세 : 1450년 음력 1월 1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 재위 : 1468년 음력 9월 7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에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인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세조 14)에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남이의 옥사를 진압하였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장 하였다.

그러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 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안순왕후(安順王后) 이야기

 

예종의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재세 : ?년 음력 3월 12일 ~ 1498년 음력 12월 23일)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3년(세조 9)에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에 간택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에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종대왕 창릉 비석

 

 

창릉(예종 능침)

 

 

창릉(안순왕후) 능침

 

 

 

홍릉과 창릉 사이로 서어나무길이 1km 정도 계속된다.

말이 서어나무길이지 한동안 계속되는 참나무 군락을 지나면 이내 소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서오릉은 내내 황토길이라 걷기에 좋다.

 

 

이 코너를 돌면서부터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서어나무길이 끝나고 1960년대 말 소나무를 식재한 지역이 나타난다.

제비꽃

 

 

 

이 참나무는 껍질이 길게 벗겨졌었나 보다.

 

 

 

인성대군(仁城大君) 초장지(初葬地)

 

이곳은 조선 8대 예종의 첫째 아들인 인성대군의 묘가 있던 자리이다.

처음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에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무덤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 경내 왕자·왕녀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서삼릉 경내의 인성대군묘에는 봉분과 새로 제작한 표석이 있다.

곳엔 조성 당시에 만든 무석인 상석, 표석이 남아 있다.

인성대군은 예종과 장순왕후 한씨의 아들로 세조 7년(1461)에 원손으로 태어났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어린 손자에게 효소라는 시효를 내리고 인성군으로 추봉 하였다.

성종 즉위 후 어머니 장순빈이 황후로 추존되자 1472년(성종 3)에 대군으로 다시 추봉되었다.

 

서삼릉으로 이장된 후 지금은 평지 상태다.

 

 

 

 

익릉 홍살문

 

 

익릉翼陵(숙종비 인경왕후)

 

능의 구성

 

익릉은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익릉의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에서 유일하게 익랑이 설치되어 있는 정자각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의 동자석주 상단부에 12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그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고,

대부분의 석물 조각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능의 역사

 

1680년(숙종 6)에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81년(숙종 7)에 고양 경릉(敬陵) 경내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이야기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재세 : 1661년 음력 9월 3일 ~ 1680년 음력 10월 26일)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661년(현종 2)에 태어났다.

1671년(현종 1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사이에서는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고,

1680년(숙종 6)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익릉 능침

 

능침 주변의 소나무

 

 

 

 

 

수경원綏慶園(추존 장조 생모 영빈)

 

원의 구성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사친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수경원은 처음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가,

1899년(광무 3)에 수경원으로 높여지자 원의 형식에 맞게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이후 수경원은 1970년에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입구에는 대한제국 때 세운 원표석이 있고, 원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다.

그밖에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수경원 표석의 전서체 비문을 보면 지금까지 비문에 새겨진 "조선국"이란 명칭 대신 "대한"으로 쓰고 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지 505년 만에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또한 고종은 그동안 써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선포 1년 후인 1899년 수경원으로 높여지자 당시의 국호인 "대한"을 사용한 것이다.

 

원의 역사

 

1764년(영조 40)에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으로 추존되어 원호를 수경원이라 하였다.

이후 1970년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이야기

 

영빈 이씨(재세 : 1696년 음력 7월 18일 ~ 1764년 음력 7월 26일)는

본관이 전의인 증 찬성 이유번과 한 양김씨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에 입궁하여 궁녀 생활을 하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책봉되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후궁으로 영조 사이에서 1남(사도세자) 6녀를 낳았다.

사도세자의 생모였으나 아들에 대한 일을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강철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1764년(영조 40)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9년(광무 3)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 지위로 추존되어 시호를 소유(昭裕)라 하였다.
현재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입구에서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곳에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그 고개를 벌고개 또는 버리고개라 불렀다.

고개를 넘은 곳에 영빈 이씨의 수경원이 위치해 있었는데,

수경원 조성 이후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 능선을 사람들이 넘어 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 하여 통행을 금지시켰다.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라 하였으며,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로 불렸다는 설이 전해진다.

 

수경원 원침

 

 

 

나오는 길에 명릉의 한 번 더 본다.

 

오늘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은 물론 파주시의 장릉과 삼릉, 김포의 장릉까지 탐방할 생각이었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겠단 생각에 해설 시간에 맞춰 규모가 제일 큰 서오릉에 도착했다.

해설은 운영하지 않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니 두 시간 반이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점심시간이 지나 식사를 하고 나니 더 이상 탐방한다는 게 귀찮게 느껴진다.

이후 일정은 포기하고 서둘러 귀가하며 나머지 왕릉 탐방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