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방손님

꼬맹이소나무 2020. 8. 8. 14:31

[아침숲길] 수박은 깨서 먹어야 제맛 /양민주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20.08.06 19:43

더위를 식힐 겸 수박을 한 통 사와 식탁에 올려두고 칼을 가지러 간다. 그 사이에 수박이 굴러 떨어져 ‘퍽’ 하고 깨진다. 망연자실하여 수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이 가 벌어진 틈으로 붉은빛이 도는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잠깐 사이에 스스로 깨진 수박은 칼로 쪼개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 수박을 먹는 데 칼이 왜 필요한가 싶어 깨어진 수박을 들고 거실 바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신문지 몇 장을 깔고 퍼질러 앉는다.

어릴 적 아버지는 누에를 키우기 위해 야산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뽕나무 사이사이로 가족들이 먹을 만큼 수박을 심고 아담한 원두막도 지었다. 누에에게 먹일 뽕잎을 따다가 힘이 들 때나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때면 원두막에서 수박을 따 먹으며 쉬었다. 수박을 먹을 땐 칼이 필요 없었다. 그냥 주먹으로 내리쳐서 깨어지면 그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어 쪼개면 되었다. 수박 조각이 커 먹기가 어려우면 무르팍에 ‘탁’ 쳐서 분질러 먹으면 되었다. 입가에 수박 물을 묻혀가면서 씹는 둥 마는 둥 삼켜도 세상에 없는 맛이 났다.

나에게 있어 수박 맛은 누가 뭐래도 주먹으로 쳐서 깨어 먹는 맛이다. 과일 중에서 주먹으로 깨어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원두막에 앉아 수박을 깨트려 먹는 단물의 그 맛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이 맛을 수박 맛의 진수라고 해두고 싶다. 먹고 남은 껍질과 씨는 수풀 근처에 모아두었다가 썩혀서 두엄으로 쓰거나 땅을 파서 묻었다. 가을이 올 때쯤이면 수박씨를 묻은 곳에서 싹이 자라 작은 수박을 달고 있는 앙증스러운 모습도 종종 보았다.

중학 시절엔 낙동강변의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 길 양쪽 들판은 온통 수박밭이었다. 수박의 푸른 잎은 넘실대는 파도처럼 바다를 이루었다. 그 한가운데로 자전거를 타고 갈 때는 바다를 횡단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핸들에서 손을 떼고 양팔을 벌려 달리기도 했다. 달리는 시간 속에서 수박은 노란 꽃을 피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슬만 한 갈맷빛 예쁜 열매를 달았다. 하루하루 그 열매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수박이 어느 정도 자라면 곳곳에 원두막이 지어지고 주인은 거기에서 수박밭을 지키며 수박을 판매하였다. 수박을 사기 위해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트럭과 인부들이 맨손으로 수박을 차에 던져 올려 싣는 모습은 곡마단의 곡예사들이 아슬아슬하게 공연하는 것처럼 신기해 보였다. 어쩌다 친구들이랑 어울려 수박을 사 먹을 때는 원두막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강물이 도착하는 그 어딘가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그러한 기억들은 나에게 한 폭의 그림처럼 남아있다. 유년 시절 고향의 풍경으로 내 마음자리에 고이 접어두고 있다가 수박을 먹을 때면 한 번씩 꺼내 펼쳐보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처가에서는 수박 농사를 짓고 있었다. 수박과의 인연은 공교롭게 또 이렇게 이어졌다.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여름에는 노지에서 일 년 내내 수박 농사를 지었다. 처가에 들러 수박밭으로 나가면 수박 덩굴의 푸른빛이 내 마음을 얼마나 평화롭게 했는지 모른다.

신혼 초 아내가 아이를 가져 나 혼자 처가에 내려갔을 때 장모님은 커다란 수박 두 덩이를 따 스포츠 가방에 넣어주셨다. 그걸 메고 완행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해 보니 어깨에 피멍이 맺혀 있었던 일, 생일을 맞이하여 장모님이 그 너른 수박밭에서 제일 실한 놈을 따와 반으로 잘라 그 위에 커다란 초를 꽃아 생일 축하를 해주셨던 일,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박에다 소주를 부어 마셨던 일 등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수박은 많은 과일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다.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지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장모님의 따뜻한 정도 느끼게 해준다. 가만히 간직한 이 정은 변하지도 않는다. 아내는 요즘도 마트에 가면 그 무거운 수박을 잊지 않고 사 온다. 내가 잠을 자다가도 수박을 먹으라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지금 깔아놓은 신문지 위로 불그스름한 수박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깨어진 수박을 먹고 있다. 옛날 원두막에서 먹던 그때의 맛을 그리며 수박을 먹고 있다. 포만감을 느끼며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한 번쯤 퍼질러 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내리치는 수박(手搏)으로 수박을 깨어 먹으며 더위를 식혀보길 권해본다.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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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면 의령 낙동강 둑방 곁의 수박 밭에서 친척오빠들이 수박을 따 주먹으로 내리쳐선 먹어라고 건네주던 기억이 선하다.
세월은 바삐 가는데, 그 기억 속의 오빠 한분은 벌써 하늘나라에 계신다.
장대비는 내리는데, 난 세월의 강을 건너며 멀미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