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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st-i 2020. 3. 25. 06:57

로마인 이야기 ’ 15년 투혼의 여제(女帝) -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Nanami Shiono)

 

“승부 걸지 않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사람이 아니

남자가 살다보면 어느 순간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때때로 있다.

 

이 여인이냐 저 여인이냐 를 놓고

선택 할 때도 그렇겠지만,

살다보면 두 갈래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하는 ...

 

이런 저런 선택을 강요당하며

우린 승부를 봐야만 할 적이 여러번 있는 것이다.

 

머뭇거려선 아무 것도 안된다.

가만히 있어도 살 수가 없다.

뭔가 수를 내야만 한다.

 

때론

싸움터 전장터에 나가

"

과감히 싸우다 지면 죽음이요

승리하면 돈과 여자와 식량이 바로 우리의 것 ! "

이라 외치며 적진의 성문을 향해 돌격하는

어느 공격병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만서도 ...

 

하물며 동네 어느 후미진 골방 속에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화투판에서도

어느땐 이 판에 뒈져 버릴 것이냐

확 배팅을 해버려 한 몫 단단히 움켜 쥘 것이냐 를 놓고

고심하며 기꺼히 승부수를 던진다.

 

시오노 나나미 작가는 남자란

때때로 승부를 거는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갈파했다.

 

승부를 모르는 남자는

승리의 짜릿한 환희도,

실패의 처절한 아픔도 모르고

인생의 아무런 묘미도 못느끼고 사는 남자는

매력없는 남자라고 그녀는 단호히 주장한다.

 

남자들이여 !

 

세상에 널린 숱한

지도자들이여 ...

 

로마로 가는 가도 앞

루비콘강 앞에 정렬한 채

주점주점거리는 그들의 로마병사 앞머리에 우뚝 서서

우렁차게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 앞으로 돌격  ~! "

이라 외치던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 장군을 기억하겠는가?

 

그의 도강으로 로마의 역사는 통채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남자라면 쾌히 승부를 알고 즐기며

기필코 승리를 낚아 챌지어다 ~~~

 


 


 

‘또 하나의…’는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제국 탄생에서부터 전성기까지의 통치철학과 제도를 새로이 정리한 책. 시오노가 평생을 로마사에 몰두하며 파고든 주제가 다름 아닌 ‘정치 리더십’이라는 점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추천은 흥미롭다.

 

. 시오노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가 탐구한 인간학을 들여다 본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7월 7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처음 읽고,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매료된 그녀는 1963년에 가쿠슈인(學習院)대학(일본의 귀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교육기관)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시절 그녀는 좌파 학생운동에 깊이 참여했으나, 1960년 안보투쟁 이후 분열을 거듭, 목적성 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학생 운동의 현실에 질려 발을 빼게 되었다.


 “학생 때의 사회주의 운동은 한 번쯤 치러야 할 홍역이지만, 인간의 본성인 이익 추구를 부정하는 좌파사상에는 매력을 오래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졸업 후 ‘아사히 신문’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낙방한 뒤 딱히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않고 있다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한 때 그녀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고등학교 때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1년가량 공부하면서 서양 문화에 매료됐으나, 미국에서 돌아와 읽은 ‘일리아드’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영어 대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독학하면서 지중해 세계에 빠져든 것.

 

196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어떠한 공식 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으며, 이탈리아뿐만 아닌 유럽 전역,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집필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 무렵부터다. 데뷔작은 1968년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이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1970년 두 번째 작품인 장편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발표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 같은 해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하며 이탈리아 피렌체에 정착한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수 년 후 이혼했다. 그후 아들과 함께 1993년 로마로 이주해 현재 그곳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일관, 집중, 집요, 지속


그에게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쓰게 한 가스야 잇키 전 ‘중앙공론’ 편집장은 시오노의 초년병 시절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 30년 전 이탈리아에서 시오노씨를 만나 사흘 동안 그로부터 로마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상당히 건방졌다. 불끈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 르네상스에 흥미가 있다면 ‘여자’에 대해 써보는 게 어떠냐 했더니, 왜 하필 여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반 년 뒤 정말로 책을 써 왔다. …


많은 작가와 사귀었지만, 시오노가 가장 성장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많이 컸다. 집중과 지속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어찌 보면 꼭 수도하는 수녀 같다.


기독교를 경유하는 역사에 도전하고, 20세기 인간의 환상에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마지막까지 뒷받침하고 싶다.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 중)

 

그의 말대로 시오노의 작업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관성과 집중력이다.


조직에 매인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에라도 묶여 자기절제를 할 수 있지만 작가는 철저히 혼자다.


웬만한 인내력이 없이는 힘든 작업을 지속할 수 없다. 시오노는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글을 쓰기 위해 서재로 건너갈 때는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정장을 차려입는다는 그였기에 장장 15년에 걸쳐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써냈으리라.

 

그 사이 나이는 50대 중반에서 70세가 됐다.


그동안 여름휴가 한 번 안 갔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 완간 인터뷰에서 “혹 나쁜 병이라도 발견되면 일을 중단해야 하고, 일단 중단하면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 병원에도 한 번 가지 않았다”고 고백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집요함은 번역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번역을 모두 자기 돈으로 진행했다.


특정 국가가 아닌 인간 일반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고의 번역자와 감수자를 택하느라 도쿄에 집을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모두 썼다는 것이다.

 

그가 로마인 이야기 ’를 집필한 동기 는 ‘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1000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무엇인가 ’ 라는 의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바로 그 ‘의문하는 힘’이야말로 시오노에게 세상과 사람을 보는 특별한 눈을 갖게 했다.

 

 

. “호기심은 나의 힘”

 

시오노는 도쿄 도립학교인 히비야(日比谷)고교를 나왔다. 일본 전역에서 수재들이 모여드는 우수한 학교다. 졸업생의 3분의 2가 도쿄대에 진학하는 이 학교에서 시오노는 도쿄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한다.


당시를 회고하는 시오노의 말이다.

 

“당시 히비야고교에서 도쿄대에 낙방한 학생들은 ‘미야코오치’(都落ち·낙향이란 뜻으로 관청에서는 좌천을 뜻함)로 불렸는데 내가 바로 미야코오치였다.


당시 교토대로 진학해 훗날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동창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도 미야코오치였다. 나는 모범생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따르면 공부를 잘하려면 첫째 기억력이 좋아야 하고, 둘째 교사가 말하는 내용에 의심을 품지 않아야 하는데 자신은 교사가 뭔가를 말하면 곧 의심을 품는 의심덩어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를 비롯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선생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면 다른 것들을 연상해 결국 엉뚱한 것을 생각해버린다. 자연히 선생님이 말하는 다음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고교시절 나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재가 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의 고교시절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왜?’ ‘어떤 조건에서?’라는 두 가지가 설명되지 않으면 수업이 끝난 뒤 꼭 질문하는 학생을 교사들이 반길 리 없다. 더군다나 그 나이에 그리스나 로마에 관심을 갖는 아이가 몇이나 됐을까. 하지만 그는 무엇에나 의심을 갖는 것, 즉 호기심을 자신의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호기심이란 바꿔 말하면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개방적인 사람이야말로 발전 가능성이 있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찐빵 하나를 만들더라도 팥 대신 크림을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생각이 커져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낸다.

 

다른 데서 받는 자극이 없다는 것은 곧 무균상태, 면역성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서 균이 들어오면 당장 병에 걸린다.


자극이란 독(毒)이다. 요컨대 균이다. 독이니까 해롭지 않을 정도로 계속 받아들여야 면역이 생긴다.
내가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호기심이 강하다는 정도였다.


그런 ‘긍지’같은 것이 30년 뒤의 처지를 갈라놓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는 흔히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오노는 열일곱 살에 황제에 오른 사람(네로)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폭군 네로라는 기존의 평가를 전부 버리고 새롭게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됐다.


어떤 사상과 윤리, 도덕으로도 재단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 그 자체를 추적해 가는 그의 작업은 남들과 똑같은 사료, 이미 존재하는 것을 토대로 해도 자신만의 시선이 있기에 새롭게 보이도록 하는 원천이다.

 


‘리스크’를 떠안는 지도자

 

시오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뒤에도 주류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곤 한다.

 

 이탈리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 대학 교수들이 오니 만찬에 참석해라”고 요청했다가 곧 “교수들이 시오노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는 연락을 받는다거나, 누군가 출판사를 통해 마키아벨리 번역집에 발문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얼마 후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는 얘길 듣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럴 때마다 ‘두고 보자. 남보다 더 큰 성과를 내면 된다’며 작업에 매진한다고 한다.

 

그가 로마에 몰두하며 구축한 작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 정치 리더십 ’의 문제다. 단지 로마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 정치를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 로마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시오노는 이 과정에서 인텔리들에게 정치를 비하하거나 경시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정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가장 손해를 보는 집단은 서민이다. 나아가 정치는 축적된 부를 운용하고 지속시키는 작업이기에 단지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고 경영자 ·언론인, 심지어 주부들까지 동참해야 하는 분야라고 강조한다.

 

경제가 돈 버는 것이라면


정치는 번 돈을 잘 쓰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화는 성공한 경제와 정치로 번 돈을 운용하는 것이다.







한 나라가 번성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우선 경제력이 확보돼야 하고


다음은 정치 안정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문화가 꽃피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단계를 밟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운이 사회에 퍼지는 것이다.





그런 기운은 위기의식에서 나오는데,


망해가는 나라는 한결같이 뛰어난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 중)

 

그가 무엇보다 지도자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직이란 항상 강력한 리더가 있어야 움직인다. 기관차가 차량만 늘어놓았다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기관사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란 어떤 인물일까. 우선 ‘리스크(risk)를 지는 존재’다. 그의 말이다.

 

“ 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리스크가 있다. 지도자는 그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가능한 데까지 그것을 축소한다. 아무리 해도 처리할 수 없는 나머지 리스크는 자신이 직접 진다. 이것이 지도자가 하는 일이다. ”

 


지혜와 용기

 

리스크를 파악하는 것과 축소하는 비결은 ‘지혜’와 ‘용기’에서 우러난다. 지도자가 리스크에 대해 가진 지혜와 용기가 크면 클수록 구성원들은 자진해서 그 리스크를 함께 지는 데 동참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한마디로 리스크를 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쟁에 이기고도 늘 양보했다. 어제까지 적으로 맞서 싸우던 민족도 이기고 나면 언제 싸웠냐는 듯 자신들의 선진기술로 만든 무기를 건네주면서 ‘자, 이제부턴 당신들이 지켜라’, 요샛말로 방위조약을 맺었다.

 

적들이 자신들이 제공한 무기로 다시 공격해 들어올 리스크가 있었음에도 이렇게 포용한 것이 로마의 성공비결이다. 로마인은 무기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건축 기술과 인프라스트럭처 등을 비롯해 경제와 문화까지 아낌없이 피정복자에게 제공했다.

 

로마인들이 이긴 뒤에 양보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기지 않고 양보하면 질서가 생기지 않는다.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에게도 시민권을 주고 과감히 요직에 등용했다.”

 


“정치가는 지옥을 봐야”


이런 점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내가 로마인에 흥미를 갖는 것은 인간성에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인도 인간인 이상 실패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주저 없이 개혁을 단행했다. …

 

로마가 1000년 이상이나 계속된 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자질이 특별히 우수해서도 아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기개가 있었기에 번영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이 같은 현실주의적 태도야 말로 시오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두 번째 덕목이다.

 

“ 정치가는 선인(善人)이 아니다. 지옥을 봐야 한다. 정치는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길만 말하는 사람이다.

 

지도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밖에 모른다며 다같이 손잡고 가자고 하면, 자칫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게 된다.

 

동물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도 결국 싸움터다. 일단 싸움터에 나가면, 즉 프로가 되면 ‘절대로’ 이겨야 한다. 세계에는 평화롭지 않은 나라나 지방이 많다. 그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저 평화를 외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야말로 현실주의다. 그가 말하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투쟁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투쟁할 경우에는 상대를 잘 알 것, 자신의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할 것, 자신의 입으로 표현할 것, 이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

 

현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능력, 상대의 속을 읽는 ‘인텔리전스’도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시오노는 리더십에 어떤 법칙이나 방정식 같은 게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좋은 자질을 타고났어도 자신의 시대와 맞아야 리더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시대와 맞지 않아 스러져간 리더도 무수하다. 나는 그들에겐 그들대로 애정을 느낀다. 훌륭한 전술, 전쟁에 이기는 시스템을 찾아낸다고 해도 싸우는 방식은 적(敵)에 따라 달라진다. 전장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다만 승부를 걸지 않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지도자와 지식인의 차이

 

시오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그가 대단한 멋쟁이라고 전한다. 늘 고급 정장 차림에 화려한 액세서리로 단장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긴다.

 

한마디로 대단히 여성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의 대부분은 ‘남자’다.

 

그는 아예 “나는 여자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내가 여자니까. 나의 관심은 남자다. 남자의 세계에서도 특히 가장 남성적이라 할 전쟁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로마의 역사도 멋진 남자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이야기로 읽어낸다.

 

그는 영화광이기도 한데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영화 에세이집에서 자신의 남성관을 이렇게 적고 있다.

 

“30년 전 대학 여자 동급생들이 생각하는 결혼상대란 오너의 아들이거나 도쿄대 법학부 아니면 게이오대 경제학부, 사법고시나 외무고시, 행정고시 합격자였다. …

 

나는 그녀들보다 내가 훨씬 더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폭이 넓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민이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훨씬 더 좁았다. 일류대학 일류학부에 입학하는 것이나 외교관이나 변호사나 관료가 되기 위한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두뇌가 있고 공부하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대부분 남자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품위 있는 행동이라든지, 유머 감각이라든지, 절묘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모든 일에 대처하는 능력은 시험으로 측정될 수 없는 자질이다.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말이다. 대학 시절 나는 동급생들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것을 남자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남성관을 피력한 ‘남자들에게’란 책에서 이른바 인텔리 남자들이 섹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보강 정도밖에 안 되는 것(즉 본질이 아닌 것들)’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인텔리 남자들)에겐 하찮은 것을 하찮은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무슨 일이 터졌을 때 그럴듯한 이유를 얼마나 잘 생각해내느냐에 전력을 집중한다. 또 욕망은 있으나 그것이 콩알만하다.

 

정치가가 뭐라 부추기면 창피할 정도로 홀랑 넘어가고, 재계의 어느 위인이 접대해준다고 하면 기생보다 먼저 뛰어간다. 기생은 화대라도 받지만 인텔리는 하루 저녁 얻어먹을 뿐인 것을. 이런 궁상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무언가 자기 맘의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 권력이 필요하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이용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건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다.”

 

그러면서 지식인들은 지금 세상의 어디가 잘못돼 있는지에 대해 비판을 하라고 하면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는 구체적인 제안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와 지식인의 차이다.

 

 

나에겐 사전이 있다.


남들이 들고 다니는 그런 사전 말고, 스스로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규정지어 사용하는 나만의 사전을 머리 속에 넣고 다닌다.

 

그 사전 속에 '예쁘다'와 '멋지다'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있다.

서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쁘다'는 누구에게나 사용한다. 보기에 좋은 사람, 보기에 좋은 물건은 모두 '예쁘다'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쁘다'는 그리스적인 '미'의 기준을 충족시켰음을 의미하는 단어다.

 

하지만 '예쁘다'는 '매력적이다'가 될 수 없다. 그냥 예쁜 것 뿐이다.

 

'멋지다'는 '예쁘다' 보다 상위 개념이다.


간혹 예쁘지 않은 것도 '멋지다'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멋지다'는 '매력적이다' 역시 만족시킨다.

 

살다 보면 많은 여자들 중 아무리 봐도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멋진 여자들이 간혹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은 언제나 멋진 매력을 풍기게 된다.

 

'멋지다'는 '예쁘다'를 포함하지만 '예쁘다' 보다는 정신적인 요소를 수반한다.

어떤 사람은 항상 예쁘지만 늘 멋진건 아니다.

 

그러나 늘 '멋진' 사람이라고 항상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답다'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아름답다'는 아주 드물게 예술작품 속에서 발견한다.

 

어느 전시회에서 보았던 모네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웠던 것처럼 ...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그래서 상상 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예쁨, 혹은 멋짐'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아름다운것은 매력적인 것의 최고 상위층에 해당하는 매력이기도 하다.

 

상상 속의 존재는 인간의 손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인간 그 자체가 되기는 어렵다.

 

또한 아름다움과 또 다른 차원으로 인간에겐 나름의 스타일이란게 존재한다,

 

 "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줄 아는 것이 바로 스타일이다."

 

스타일이란 단어는 수입된 영어 가운데서도 가장 범용되고 있는 말이다.

 

대개 스타일이란 무의식으로 ' 패셔너블 '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스타일이란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상류사회 인간이라고 모두 스타일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그들의 거의 대부분은 스타일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스타일이란 돈주고도 살 수 없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스타일에 대하여 '대단히 뛰어난 자질'로 정의하나, 그 뜻은 추상적인 성격인 만큼 가진 사람은 가졌고 없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뿐이다.

 

이러한 스타일이 오늘날만큼 결여된 시대도 드물다.

우선 남 위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선거용으로 자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여론조사기관이나 이미지 메이커들의 조언에 매달리는 꼴이란, 참으로 스타일 부재현상을 상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학이나 PR 활동의 전문가들이 이토록 자주 불려다니는 것도 자기 내부에 신념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즉 스타일이 없다는 뜻이다. 스타일이란 겉발림과는 반대다. 강한 신념이다.

 

줄 담배에 술꾼에 심술쟁이로 유명했던 윈스턴 처칠 영국 전 수상은 본 바탕은 천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력과 강한 신념이 그를 확고한 스타일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요즘에는 스타일을 가진 정치가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스타일이 좀 있었던 근래의 정치가는 존 F. 케네디 정도로 여겨질 정도다.

 

스타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깊이 있는 인격이 저도 모르게 배어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어느새 주위 사람의 관심을 모여 든다는 점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대부분의 왕족도 스타일이 없다. 귀족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짜가 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진짜인 사람들은 누구든지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집안이 어떻다는 말도 아니고, 재산의 유무도 아니다.
개개인이 살아가는 스타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타일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시오노 나나미 『 남자들에게 』중에서 일부 발췌 - 

 

 

 


게리 쿠퍼냐, 카이사르냐

 

그가 좋아하는 남자란 한마디로 ‘스타일이 있는 남자’다.

 

스타일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다. 강한 신념을 가리킨다. 깊이 있는 인격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남자다.

 

그는 ‘남자들에게’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 경제상태 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윤리, 상식 등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독자적이고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참된 용기를 가진 자라고 해도 좋다

 

▲궁상스럽지 않은 사람.

육체적으로 멋있지 않아도 비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면 곤란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인간성에 부드러운 눈을 돌릴 수 있는 사람.

속된 말로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 진짜 휴머니스트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남자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시오노는 자신의 ‘이상향’을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남자라고 말한다.

 

미국의 영화배우 게리 쿠퍼와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300년 후에 나타나 로마제국의 설계도를 만든 인물이다. 시오노는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란 책에서 자신이 아들에게 들려준 말을 그대로 소개한다.

 

“게리 쿠퍼와 카이사르에겐 많은 공통점이 있어. 비쩍 마른 몸에 키가 크고 볼에는 세로로 주름이 잡히고 꼿꼿한 자세에 몸놀림이 우아하고 유머도 있고 광신적인 점이 하나도 없어. 하지만 근본적인 점에서 달라. 쿠퍼는 ‘위대한 평범’을 가진 사람이지만 카이사르는 ‘위대한 비범’을 지닌 사람이야.

 

그런데 만약 이 두 사람이 엄마에게 프러포즈를 하면 어떻게 할까. 쿠퍼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그의 프러포즈는 결혼을 의미하고 평생 평온과 행복한 생활을 약속해줄 거야. 그런데 카이사르는 결혼을 정치적 계산으로 하고 게다가 플레이보이로도 유명한 사람이야. 그와는 두 달 정도가 고작일 거야.”

 

하지만 시오노는 “설령 두 달이라 해도 카이사르를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 카이사르는 지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지속하는 의지, 자기제어 라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를 다 갖췄다.

 

경제와 외교 등 여러 분야에 정통했고 귀족 출신이기에 오히려 혁신적일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한 엘리트였기에 오히려 현 체제를 부수는 데 저항감이 없었다.

 

배경이 좋은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여유로 창조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가 바람둥이에 낭비벽이 있다는 점도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는 타인에게 자극을 준다, 내 개인적 의견으로는 권력은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힘이다.”

 

시오노는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제어 능력, 지속하는 의지를 지도자의 다섯 가지 덕목이라고 열거하면서 저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 이를 적시했다.

 

“민주정체에서 지도자로 산다는 것은 가느다란 로프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변하기 쉬운 민중의 마음을 능숙하게 지배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관철하는 강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지도자의 지적 능력이란 학문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는 별개다.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의 문제해결 능력이다. 선견지명도 거기에 포함된다.”

 

‘설득력’의 미덕 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강한 사람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스스로 나아가서 싸웠고, 물이 없어 병사가 괴로울 때는 자신도 물을 마시지 않고 함께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은 멀리 인도까지 함께 갔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심취하는 것은 그의 행동을 가까이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된다. 행동도 물론 중요하지만 역시 수많은 인간을 움직이려면 말로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육체적 내구력’이란 것도 체력이 강하다거나 운동능력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통치하느냐는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병약했으나 자신의 육체가 약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결코 무리하지 않아 77세까지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게 하라

 

시오노는 작가 이전에 어머니다. 그의 저작들에는 간간이 교육 문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은 이탈리아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지만, 이탈리아인으로 자랐다. 그는 아들을 세계 어디에서나 살아갈 수 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일은 외국어 습득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우선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철저히 배우게 했다. 그 다음에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를 배우게 했다.

 

“아무리 외국어를 공부해도 모국어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외국어는 하나의 도구다. 실제로 외국인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나라 말을 줄줄 지껄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은 서툴러도 무언가 전달할 것이 있는 사람 쪽이다.”

 

중요한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전달하는가, 즉 메시지라는 것이다.

 

자녀교육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매사를 철저히 ‘자기 머리’로 생각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그는 아들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마음을 썼다고 한다. 자식과 무조건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행동을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한테는 너의 관심사가 있을 테고, 엄마한테는 엄마의 관심사가 있으니까” 하는 식으로 늘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표현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녀교육과 관련된 그의 몇 가지 언급을 살펴보자.

 

“나는 다시 태어나면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싶을 정도로 여자가 프로로 살아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우량기업에 들어갔다고 걱정할 게 없는 시대가 아니다.

 

자신을 억제하는 것, 즉 자제하는 게 필요하고, 그것을 인생의 출발점에서 배우는 게 어머니와의 관계다. 난폭한 말대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한테 버릇없이 말대꾸를 하면 다른 사람한테도 거리낌이 없어진다. 어머니라면 아들의 폭언을 참아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참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들의 버릇없는 짓을 절대로 참아주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다.”

 

“우리가 교육 논의를 할 때 빠뜨리곤 하는 것이 가정교육이다. 한참 전 일이지만 모 총리가 일본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대답은 ‘이탈리아에 있는 아들이 고교생이라 혼자 둘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아들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살 수 있게 키우겠다고 늘 다짐했다. 혼혈이니까 더욱 그랬다. 그래서 방학 때면 한 달씩 영국에 보내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에 갈 때는 미국 대학으로 갈지, 유럽 대학으로 갈지 스스로 선택하게 했더니 본인이 유럽을 택했다.

 

아들을 독립시키는 조건은 매주 한 번 반드시 식사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응석도 허락한다. 세탁물은 가져와도 좋다고(웃음). 아이들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고, 자식은 어머니의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

 

“교육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름이 붙은 위원회 등에서 자문해 올 때마다 나는 ‘교육에 대해 배우려거든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말한다. 어떤 동물이든 부모는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는 성심성의껏 돌보고 키워주지만, 목표는 자식의 홀로서기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다. 부모건 학교건 빨리 잘 키워서 떠나보낼 생각을 해야 한다. 연인이나 부부, 기업은 어떻게 잘 잡아놓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지만(웃음)…. 요즘은 이런 각자의 역할을 마구 헷갈리는 듯하다. 학교나 부모가 학생을 잡아놓으려 하고 기업이 인재를 떠나보내려 하니 이건 기본이 잘못된 것이다.”

 


. 제행무상 성자필쇠(諸行無常 盛者必衰)

 

역사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인지 모른다.

 

차가운 현실인식을 무기로 냉정한 글쓰기를 해온 그이지만 ‘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란 책 말미에는 혼자 사는 그의 쓸쓸함과 치열한 작가정신이 함께 보인다.

 

“요즘 나는 오후가 되면 조깅 슈즈를 신고 로마 거리로 나선다. 조깅이 목적이 아니라 지도를 한 손에 들고 현대의 로마를 걸으면서 고대의 로마 거리를 머릿속에 재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인 노부부를 만났다. …

 

내가 가르쳐준 길을 찾아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부러웠다.

 

저런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생각하니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온 듯한 슬픈 기분이 들었다.

 

다만 멀어지는 노부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뒤를 따라가다가 내 눈의 초점은 점점 넓어져갔다. 노부부도 다른 관광객도 현대 로마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 대신에 하얀 장의(長衣) 또는 형형색색의 단의를 걸치고 회당과 신전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2000년 전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명(天命)을 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에서 ‘제행무상 성자필쇠(諸行無常 盛者必衰)’, 즉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흥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쇠한다는 말을 썼다.

 

한때 국가나 조직, 개인을 흥하게 만든 요소가 언젠가는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그의 말은 사는 일의 엄정함을 느끼게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의 성공요소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출처: https://seoul-tour.tistory.com/963 [Seoul Tour (로마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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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modest-i 2020. 2. 28. 14:26

저자


전경일
전경일 작가

1964년 강원도에서 태어나 대학에서는 문학을, 뉴욕시립대학원에서는 TV&Radio를 전공했다. 이후 미국 NBC TV와 CBS 방송국을 거쳐 삼성전자 미디어본부에서 근무하였다. IMF 시기 경영자의 길을 걷다 야후코리아 총괄이사, KTF 팀장을 지냈고, 현재는 인문과 경영의 만남을 추구하는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양대에서 대학원생들을 가르친다. 대학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99년 '세계의 문학' 으로 등단했다. 인문과 경영을 통섭하는 저술 활동을 하는 창조 지식인이자 경영인이다. 역사경영, 자기계발을 비롯해 인문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적 생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방대한 사료를 재해석해 역사와 현대 경영을 접목시킨 역사경영학 장르를 개척하였다. 10년에 걸친 세종 연구의 결과로 '창조의 CEO 세종' 을 선보였고, 우리 역사의 찬란한 영광을 경영의 관점에서 드러낸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와 청 태조의 창업 과정을 경영학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글로벌 CEO 누르하치', 대한민국 CEO 73인을 인터뷰하며 직접 발로 쓴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등을 썼다. 또 직장경영서인 '평범한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 '진정한 성공을 위한 자기경영', '성공학 책은 버려라', '10초 내에 승부하라'와 기업 위기 관리서인 '레드 플래그'는 직장에서의 생존과 삶의 지혜를 나누는 실용적 자기계발서로 평가받고 있다. 나아가 감성경영을 통해 대한민국 40대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마흔으로 산다는 것'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위치를 굳혔고, '남자, 마흔 이후', '남자, 마흔 살의 우정',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 '당신이 웃으면 세상이 웃는다'와 어른을 위한 동화 '아름다운 사막여행' 등의 무한한 저술 스펙트럼을 엿보게 했다. 통섭형 글쓰기로 지금까지 20여 권의 책을 썼으며, 대한민국 경영혁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 최고의 기업체 초빙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경영현장에 생존과 번영의 힘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멸하리라!

1 누르하치, 그는 누구인가

2 오랑캐식 경영 전략 : 전통과 방식을 벤치마킹하다

3 한 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꾸다

4 중국 M&A의 완성과 새로운 창업의 길

결코 멸하지 않으리!

참고문헌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한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는 천만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_p. 12



유목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속도와의 전쟁이다. 〔…〕


말의 기동력에 민첩성을 부여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여진족 전사들은 가볍게 몸을 치장했다.


그들은 몸놀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로 갑옷을 만들었다.

당시 여진 사람들의 갑옷 재료로는 화살에 잘 뚫리지 않는 조선종이가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_p. 27


“우리 역사의 일부인 북방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바로 이 점이다.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 〔…〕 이러한 자주적 태도는 오늘날 기업활동에서도 적용할 만하다. 〔…〕 독자적인 사업영역을 포기하는 기업에게는 자기 영역의 확보란 요원하기만 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는 기업만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역사와 경영이 맥을 같이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_p. 30



경쟁자에게서 배운 경쟁력은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예고한다.


〔…〕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던 것은 한족이 취한 이이제이 정책의 변용이었다.


〔…〕 선진국의 많은 신생기업들이 창업과 동시에 엑싯 플랜(exit plan)을 세우는 것

          설립목적에 따라 경쟁사와 경쟁방식을 설정하고 자기 사업을 도모하기 위해서다.”_p. 40


“청의 창업자는 명을 극복하는 방법이 여진족의 조직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 방안에 골몰했다.


고심 끝에 그는 여진사회의 오랜 수렵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깃발’을 떠올렸다.


그랬다! 깃발 아래 뭉치고, 깃발로 소속을 드러내며, 깃발로 험한 세상을 뚫고 나가면 될 것이다.”_p. 48



“누르하치는 명으로부터 제대로 배웠다.

적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적을 끌어들이되,

그 적이 화근이 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몽골족을 일정 지역 내 거주하게 한 것, 〔…〕 등은

모두 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_p. 56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단 13명의 기병으로 창업해 마침내 중국 대륙을 M&A한 청 태조 누르하치
400년 전, 변방의 일개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는 쉼 없이 뻗어나가는 글로벌 정신으로 마침내 제 몸집의 20여 배나 달하는 강대국 명(明)을 멸하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청(淸) 왕조는 ‘오랑캐’라 불린 여진족이 특유의 기동력과 지혜를 동반한 야생성으로 일어나 중국 대륙을 인수함으로써 그들의 생활과 경제 여건을 개선하고 삶의 비전과 꿈을 실현시킨 완성체였다. 창업 CEO 누르하치의 꿈은 이루어졌다. 한 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이 책 『글로벌 CEO 누르하치』(SERI 연구에세이 023)는 이민족의 중국지배사의 화려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청의 건국과 이 드라마틱한 역사를 실현한 주인공 누르하치의 생애, 놀라운 전략 ? 전술, 그리고 비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누르하치의 미래에 대한 투철한 믿음과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 활용한 다양한 오랑캐식 전략과 전술은 21세기의 생존비법으로서도 충분히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만하다. 『위대한 CEO 세종대왕』에 이은, 저자 전경일의 역사경영학 분야 두 번째 저작물인 이 책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생애를 기업인에서 출발해 중국 대륙을 인수합병한 최고경영자로 해석해냈다. 21세기 급변하는 국제 경영환경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시의적절한 해법으로서 누르하치의 오랑캐식 경영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누르하치가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꿈을 이룬 자의 실행력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꿈을 이룬 자’로서의 누르하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누르하치를 통해 신 노마드의 시대를 예고하는 21세기의 꿈에 대한 실현을 짚어내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각색: 모디스티


 
 
 

인물

modest-i 2020. 2. 28. 13:15

1. 누르하치, 그는 누구인가

 

1583년,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백두산에 숨어들었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강한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병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누르하치에게 13벌의 갑옷밖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13벌의 갑옷은 창업 동지들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그에게는 30여 명의 동지들과 100여 명의 부하가 생겼다.

 

누르하치는 1559년 여진 부족의 하나인 건주여진의 한 부장(部將) 집에서 태어났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한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는 천만 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누르하치는 매우 총명했다. 그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검술과 봉술에도 능했다. 귀신같은 활솜씨 때문에 신전수(神殿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5세에 독립하여, 68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40년에 걸친 누르하치의 도전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정복전은 언제나 CEO가 앞장서는 친정(親征)이었다. 스스로 앞서 나아감으로써 백성들이 따르게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창업 CEO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누르하치는 분명 시대를 앞섰던 사람이며, 나아가 21세기형 경영을 실천한 미래의 개척자였다.

 

역사 이래 광활한 중국 대륙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천하를 제패하고자 수많은 영웅호걸이 북방에서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겨레의 광개토대왕,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여진족의 아구다, 몽골족의 칭기즈칸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영웅들의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를 가슴에 품고 일어나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사실 여진족은 서주(西周)시대부터 수(), 당()대를 거쳐 송(), 요(), 금(), 원()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고난과 즐거움이 반복된 역사였다. 여진족에게 고통과 쇠락의 시기는 대부분 동족 내부의 분열로 서로를 죽이고 다툴 때였다. 여진족은 광활한 여진의 초원지대에 걸쳐 살고 있었으나, 누르하치 때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통합되지 못했으므로, 힘을 한 방향으로 모을 수 없었다. 방향 없는 힘은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한족(漢族)의 교묘한 이간책도 크게 한 몫 했다.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중국에는 금(11151234년), 원(12711368년), 명(13681644년), 청(16441912년)의 왕조가 차례로 세워졌다. 중국 역사의 상당 부분이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은 중국을 다스린 주인이 변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누르하치가 등장한 16, 17세기에도 동북아시아에서는 패권 이동의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시아의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의 옛 터전인 여진 허투알라에서 건주여진의 후예로 누르하치가 나왔던 것이다.

 

 

2. 오랑캐식 경영 전략 : 전통과 방식을 벤치마킹 하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성공 메커니즘 : 여진족이 중국대륙을 얻기까지는 칠대한(七大恨)을 내세워 대명 선전포고를 한 1618년부터 북경에 진입한 1644년까지 총 27년의 세월이 걸렸다. 세대로는 3대에 걸쳤고, 명의 잔병들까지 몰아낸 1683년까지는 66년이라는 실로 오랜 시간이 투여되었다. 명실상부한 정복사업은 태조 누르하치 때 시작해 4대 강희제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한 사람의 창업자가 단 13명의 군사를 데리고 창업한 지 6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창업은 그 완성을 보게 된 셈이다. 대를 이은 부단한 노력 끝에 얻어낸 실로 값진 성과였다. 청 왕조의 역사는 창업자 정신을 후임 CEO들이 꾸준히 이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흔히 창업은 쉽지만 수성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는 창업정신이 무뎌지지 않고, 2, 3대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창업하는 데에도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야 하는데, 수성까지 이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되겠는가. 누르하치 군대가 승리한 것은 창업 상태의 지속이라는 정신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장을 위한 제휴 : 몽골에 대한 누르하치의 장기적인 전략은 제휴와 정벌이라는 양면 병행 정책이었다. 이는 강한 세력과는 군사적 대결을 피하면서, 소규모 세력은 흡수하는 이중 전략의 일환이다. 누르하치는 제휴를 맺으면서도 기회만 생기면 계속 국지전을 일으키는 전략을 취했다. 누르하치는 명으로부터 제대로 배웠다. 적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적을 끌어들이되, 그 적이 화근이 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몽골족을 일정 지역 내 거주하게 한 것, 부족 상호 간의 왕래나 통신 등에 대해 철저한 감시를 행한 것 등은 모두 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누르하치의 몽골에 대한 이 같은 정책은 오늘날 기업 인수합병전에 흔히 등장하는 LBO(Leveraged Buy-Out)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LBO란 타인자본, 즉 외부 차입금으로 조달된 자금으로 기업을 M&A하는 것을 말한다. 누르하치는 몽골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여분의 힘을 확보함으로써 이를 레버리지해 명 왕조를 인수하는 힘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작은 만주족 군대(자기자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외부 차입금)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끌어들여(레버리지) 중국 M&A를 성공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휴 없이 혼자 대업을 이루겠다고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커다란 결실을 적을 통해 이룬 셈이다.

 

중국 정복의 대서사시-시작은 작게, 끝은 웅대하게 : 여진족은 언제부터 이런 웅장한 뜻을 품게 되었을까? 여진족의 전설적인 대서사시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였다. 준비하는 자세로 작은 성공을 쌓아가던 끝에 누르하치는 1601년 열하성(熱河省)에 정착하고 있던 부족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사불란한 전투 병력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군대가 팔기군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해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금()이라고 칭했다. 1625년에 그는 심양(瀋陽)에 수도를 정했다. 그의 뒤를 이은 태종 홍타이지는 1635년에 여진이라는 호칭을 만주로, 다음 해에는 국호를 매우 순결하다는 뜻의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이전의 부족적 의미의 여진족은 만주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이는 여진 내부의 통일을 상징하던 후금시대로부터 다음 단계인 대청(大淸)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청은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3대 종족을 아우르는 범이민족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소수민족은 다수를 어떻게 지배했을까 : 중국을 정복한 청 왕조 내에서 만주족의 수는 대략 2%밖에 되지 않았다. 지배민족의 수치고는 턱없이 적었다. 이는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것과 같았다. 얼마 전 대우버스를 인수한 영안모자가 연상된다. 모자와 버스, 외관만 보아서는 전자가 후자를 인수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인수회사가 피인수회사보다 외형이나 직원수 등 여러 면에서 훨씬 작은 탓에 과연 제대로 관리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만주족의 중국 정복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만주족은 지배민족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각종 특권과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인원이 적을수록 민족적 동질성과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탁월함의 경영 : 만주족이 중원을 얻게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어떻게 그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의 이민족을 동원해 자기 목표를 이룰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비밀은 팔기제에 있다. 팔기는 기의 색깔에 따라 8개로 구분한 군대 편성 단위였다. 처음에는 만주족 중심으로 편제되었지만, 나중에는 만주팔기와 별도로 몽골 족으로 구성된 팔기, 한인팔기가 조직되었고, 1644년 입관(入關, 북경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산해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할 때까지는 16만 9,000여 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여기에서 만주족의 숫자는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만주족은 이 같은 적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중국 정복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명의 구신(舊臣)들에 대해서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이는 인심을 얻으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한인 관리의 협조가 없으면 중국 지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청은 명의 마지막 황제를 후하게 장사 지내 북경에 묻어주었고, 이를 통해 민심의 교란을 방지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중국 지배는 자신들의 정복욕 탓이 아니라, 명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평정해 중국 땅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는 명분을 주지시켰다. 청의 이 같은 유화조치는 성공적이었다. 백성들에게는 누가 황제가 되든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만한 이원체제를 도입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그리하여 주요 관직은 양 민족이 거의 동수를 차지했다. 명실공히 성공적인 국가 인수합병전이 완수되고 공동운영체계가 성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공동경영방식을 취하는 한, 한족에게 청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누르하치는 이처럼 명분을 바탕으로 실리 획득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한족의 적은 갑자기 흐릿해지고 말았다. 만주족은 유능한 한인들을 과거를 통해 뽑아 올렸다. 이 같은 전략은 전 왕조의 무능한 경영층과 비교할 때 청 왕조 경영층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청이 명을 대체한 것은 한 국가의 경영층만 바뀌는 식이었다. 이 새로운 경영층은 무능하지 않았다. 경쟁력 우위를 지닌 채 피인수층을 끌어안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청 왕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왕조가 될 수 있었다. 성공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누르하치의 성공 배경에는 탁월한 경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화주의의 굴레를 벗어 던지다 : 12세기부터 중국은 사실상 이민족과 한족이 순차적이며, 역동적으로 지배권을 교차해왔다. 1127년 여진족에 의한 금()의 성립은 송()을 남송(南宋)으로 축소시켜놓았고, 이어 원()의 건국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주인을 몽골족으로 바꾸어 버렸다. 1368년 주원장에 의한 명의 건국은 다시 한족 정권의 대반격을 의미한다. 그 후 여진족에 의한 후금(後金), 곧 청()의 건국은 다시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한 세력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념적 정체(政體)는 현대에 와서 한족이 경영주체로 복구된 정권이다. 천안문 앞에서 이루어지는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사실상 한족에 의한 중국 지배의 유화적이며, 이이제이(以夷制夷)적 제스처다. 즉 이민족정부 대표자를 끌어들이려는 중국식 통일주의의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여전히 중국을 구성하는 피의 색깔은 다양하며, 그들 간의 역사와 이해, 요구도 현격히 다르다.

 

경영이란 인재다, 인재를 찾아내라 : 팔기를 조직한 후,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금(), 연호(年號)를 천명(天命)으로 하고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귀순한 한인과 몽골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577년에 인구 10만을 넘지 못했던 만주족은 인근 부족을 점령한 뒤에 4050만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16년에 이르자 누르하치의 세력은 북쪽으로는 흑룡강 중하류와 우수리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조선의 육진, 남쪽으로는 관전(寬甸), 서쪽으로는 요동 변경까지 세력을 넓혀 명실상부한 국가수립의 조건을 마련했다. 이 무렵 누르하치가 귀순자들을 만주팔기에 귀속시킨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조치였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쟁포로들까지 팔기에 편입시킴으로써 팔기 제도는 만주족만의 체제가 아닌, 다민족사회, 군사제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는 포괄적 민족정책의 결과였다.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인재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누르하치는 대 중국 인수합병전을 수행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또한 누르하치는 장기적인 지배의 성패는 민심을 사로잡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점령지의 민심을 달래는 데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줄곧 그의 몸과 정신에 배어 있던 야생의 냄새가 이제 서서히 지워지고 보다 차원 높은 정치력이 이를 대체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누르하치는 지배방식을 보다 유연하게 하고자 했고, 나아가 현지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3. 한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꾸다

 

동북아시아의 소()에서 대륙의 주역으로 : 1589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대부분의 부락을 통합하고 건주여진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1616년을 기점으로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만주족을 휘하에 두었고,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후금을 세운 다음해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무순(撫順)성을 함락시켰다. 후금이 명의 총대장 장승음을 전사시키고, 1만여 명의 군사들을 패퇴시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자 명 조정에서는 만주족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심양에 주력군을 파병했다.

 

산해관은 북경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해관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이 바로 영원성이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명의 장군 원숭환은 만주팔기가 승리한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부족한 병사를 신식무기로 보충하고자 했다. 당시 홍이포는 누르하치의 철기군단을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평가받았다. 원숭환이 홍이포로 무장한 사실을 모르고 총공격에 나선 누르하치의 군대 앞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을 자랑하는 대포알이 날아왔다. 이날의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포탄이 깊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병세는 나날이 깊어져갔다. 7월에 청하온천(淸河溫泉)으로 요양을 갔다가, 1626년 9월 30일 다시 심양으로 돌아오던 중, 이 야심찬 청조의 창업자는 심양에서 40여 리 떨어진 애계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 없는 정복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경영현장인 전쟁터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이때, 이 위대한 여진족 지도자의 나이는 68세였다.

 

글로벌 CEO, 누르하치 : 누르하치는 13명의 기갑병으로 군사를 일으켜, 중국 한족의 교묘한 분열정책을 극복하고, 사분오열된 동족을 통합해냈다. 그 다음, 그는 결사적으로 한족과 맞서서 중국 인수합병전에 나섰다. 이를 위해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인구와 자원을 끌어 모으는 등 비상한 경영능력과 용인술을 드러낸 것은 물론이다. 이는 누르하치만의 탁월한 경영능력이었다. 나아가 전 여진족을 팔기라는 형식적 제도로 묶어 멀티형화, 정보맨화, 전사화해냈다. 그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최강의 군단으로 여진족을 정예화한 것은 전통과 혁신을 결합시킨 가장 놀라운 경영성과로 볼 수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패권이 이동하는 기회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국제적 감각과 판단력은 가히 글로벌 CEO의 전형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없다. 그 만큼 누르하치는 희대의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는 먼저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고삐에서 풀려나는 소가 되는 날, 여진사회는 완전한 국가가 되는 것이고, 만주지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중국 M&A 프로젝트는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꿈은 결코 작지 않았다. 누르하치에게는 해가 떠서 해가 지는 끝없는 대륙의 지평선만이 목표였다. 그는 이 같은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고 창업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랑캐라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랬다, 여진족은 오랑캐였다!

 

누르하치의 이 같은 각성이 끝내 민족의 과제를 끌어안은 것이다. 한 사람의 CEO가 세상을 바꾼 셈이다. 만주족의 성공은 누르하치 개인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다. 이는 마치 오늘날 CEO의 역량이 기업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그는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등 3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국제인이었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중국몽골조선이 연결되는 동북아시아 무역 및 정치군사 구도를 파악하고 패권을 잡는 데 필요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기본토대 위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동족을 통일하고 훗날 중국 대륙을 M&A하게 만들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탁월한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모든 꿈과 희망이 실행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주족의 비전을 온몸으로 제시하며 앞으로 달려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 누르하치 성공의 11가지 비결

1. 가진 것 없이 출발했다. 

2. 혼인과 정복이라는 양면 정책으로 여진 내부를 완전히 통일해냄으로써 단결된 힘을 외부로 뻗칠 수 있었다. 

3. 강력한 군사조직인 팔기제를 만들어 이를 활용했다. 

4. 극복 대상인 중국의 역사정치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5.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마련했다. 

6. 누르하치는 중국의 권위나 화려한 생활, 나아가 중화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7. 목표를 높게 세웠다. 교역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닌,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8. 팔기의 군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민과 병을 통일시켰고, 멀티형 인간으로 훈련시켰다. 

9. 만주족은 무엇보다도 트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거대한 명분으로 포장한 명 왕조의 허상을 간파했고, 그런 까닭에 한족보다 훨씬 더 교활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10. 전략적 제휴를 통해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만주족에게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제휴하지 못할 대상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몽골한테도 그랬고, 한족 내부의 인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1. 적의 방식으로 적을 굴복시켰다. 한족의 이이제이, 기미정책을 써서 오히려 한족의 심장을 겨누어 적을 무력화시켰다.

 

4. 중국의 M&A의 완성과 새로운 창업의 길

 

경쟁을 통한 후계자 선정 : 누르하치에게는 여러 부인으로부터 얻은 16명의 자식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전왕이 차기 대권 주자를 정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자들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럴 때 잡음도 없을 것이며, 협력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참다운 후계자가 등장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8남 홍타이지가 왕위에 올랐다. 장남 추연은 이미 죽었고, 차남 대선은 남아 있었지만, 이 같은 원칙 하에 결국 중국 M&A라는 대업은 홍타이지가 이어받았다. 홍타이지는 중국 역사가들에게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역대 중국 황제 중에서 가장 지략과 전략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정복신화 : 청 왕조의 기반을 세운 CEO들의 특징을 분석하면, 누르하치는 앞장서서 밀어붙이는 깃발형 CEO였고, 홍타이지는 전략가형 CEO라고 할 수 있다. 섭정왕으로 홍타이지의 아들 순치제를 도와 중국대륙을 M&A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숙부 도르곤은 황제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코치형 지도자로 볼 수 있다. 만주족의 중국 M&A에는 다양한 리더십이 시의적절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가 아닌가요 블로그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