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재(창의적 공부)

modest-i 2017. 3. 29. 15:39

장량이 고제를 따라 촉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논함



논의하여 말한다.

“예전에 항우(項羽)고제(高帝)를 위협하여 한중(漢中 파촉(巴蜀))에 봉하였는데 장량(張良)이 포중(褒中)까지 전송하러 왔다가 떠나 동쪽으로 돌아갔다. 대개 당시에 항우가 재할(宰割)의 권세를 잡고 천하에 승세를 차지하자 보잘것없는 파촉(巴蜀)으로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여겨서 떠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장량은 고제에게 휴척(休戚 행복과 불행)과 사생을 함께하여 배반하지 않는 의리가 있었다. 그가 패상(霸上)에서 대치할 때에 승패가 이미 결정되어 목숨이 순식간에 달려 있었지만 오히려 ‘남이 위급할 때 도망을 가는 것은 의(義)가 아니다’고 말했으니, 유독 이때에 기세가 꺾였다고 해서 떠났겠는가. 이와 같다면 누가 감히 장량을 어질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장량이 진(秦)나라에 원수를 갚는 이유가 한(韓)나라를 위한 것이고 한나라의 후손 중에 아직도 살아있는 자가 있으니, 그가 한나라의 후손을 구하여 회복을 도모하는 데에 급해서 떠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천명과 인심이 이미 돌아가는 바가 있어서 잠시도 굴신(屈伸)할 수 없다. 그 성패를 논의하자면 범증(范增) 같은 무리도 이미 고제가 천자의 기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는데 장량만이 몰랐겠는가. 더구나 한나라의 후손 중에는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한 인물이 없었는데도 고제를 버리고 한나라에 종사(從事)했다면 또한 누가 감히 장량을 지혜롭다고 하겠는가. 그가 고제를 떠나간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논의를 바란다.”
“대저 천하를 잘 취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하의 형세를 먼저 얻는다. 천하의 형세를 얻으려면 반드시 요충지에 웅거해야 한다. 진실로 요충지가 있는데 남들은 알지 못하고 자기만이 안다면 몰래 엿볼 것이니, 밤낮으로 도모하는 것이 그 형세와 그 땅을 얻는 것으로 계책을 삼지 않음이 없다. 굴욕을 피하지 않고 약점을 먼저 보이니, 남이 나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남이 나에게 펼친 것이 나의 땅이 될 수 있고 내가 남에게 굽힌 것이 마침내 그 형세와 그 땅을 얻는 데에 이르러 천하가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천 리 옥토(沃土)의 비옥함이 있기 때문이다. 홍하(洪河)와 태산의 견고함과 사마(士馬)의 정예와 창고에 쌓인 것이 모두 그 땅에서 나오는데 천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상유(上游)의 형세에 웅거하는 것이 진(秦)의 고도(故都)만한 것이 있겠는가. 없다. 그래서 관중(關中)을 얻은 자는 천하를 얻고 관중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관중을 얻느냐 잃느냐가 실로 천하를 얻느냐 잃느냐의 근본이 되는데 항우와 범증은 몰랐고 고제와 장량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제(義帝)가 관중으로 들어가는 고제를 전송할 때 스스로 이미 천하의 형세와 땅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 진법(秦法)을 없애고 삼장(三章)을 약속하였으며 재물을 조금도 범하지 않았으니, 민업(民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얻을 방법을 다했다고 이를 만하다. 불행히도 항우가 잇달아 들어와서 약속을 어기고 공격을 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고제가 만일 군대를 거느리고 관중을 빠져나가 그 예봉을 피했더라면 유방과 항우는 애초에 원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무기를 가지고 그 뒤를 밟아야 했겠는가.
그가 굴욕을 꾹 눌러 참고 호랑이 같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의 성루에 나아가 사죄한 것은 오히려 항우의 노여움이 풀려 약속한 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고제와 장량이 바쁘고 위급한 사이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주선한 것이 어찌 일찍이 관중으로 계책을 삼지 않아서이겠는가. 끝내 항우는 고제에게 악지(惡地)를 주었으니, 검외(劍外)는 스산하여 용병에 알맞은 곳〔用武之地〕이 아니다. 고제가 봉지(封地)에 나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진실로 알맞은 곳이었다. 장량만은 진실로 한때에 굴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필부(匹夫)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항우와 겨루면 부딪치자마자 부서질 뿐이라고 생각하였으니,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파촉(巴蜀)은 삼진(三秦)과 인접하였으니 파촉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관중을 도로 평정하는 근본이다. 이에 고제를 권하여 봉지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항우가 관중으로 한나라 군대를 방어하는 곳으로 삼을까 우려하여 명장과 정예병〔勁卒〕으로 하여금 진(秦)과 농(隴)의 사이를 지키게 하였다면 한왕과 장량은 민아(岷峨)의 서쪽에 갇힌 두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다.
만약 항우로 하여금 한나라를 정벌하는 것으로 일삼지 않고 한나라는 우려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기게 하려면 그 방도는 무엇일까? 나의 약점을 보여 상대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제에게 잔도(棧道)를 태워버리라고 권한 것이다. 잔도가 태워졌으니 상대의 뜻을 교만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반드시 ‘왕을 보좌하는 신하를 제거하여 군정(群情)이 흩어진 형세를 보여주는 것만 못하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예전에 항백(項伯)이 밤을 틈타 위급함을 알려주고 장량과 함께 돌아가고자 했던 일이 항우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어찌 알겠는가.
고제가 술자리에서 도망할 적에 홀로 장량을 남겨 사죄하게 하여 초나라가 감히 움직일 수 없었으니, 본래 장량은 초나라의 군신들에게 탄복(憚服)의 대상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소하(蕭何)는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한신(韓信)은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초나라가 탄복하는 사람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장량을 놔두고 그 누구이겠는가. 이것이 장량이 고제를 떠나 동쪽으로 돌아간 까닭이다. 항우의 군신들은 어리석어 이것을 모르고는 장량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유방(劉邦)이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떠났으니 한나라는 우려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패왕의 기세에 둘러싸여 일찍이 한 번도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바라보지 않다가 마침내 고제로 하여금 한 번 거병(擧兵)하여 삼진을 평정하게 하자 천하가 초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한나라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기틀을 기묘하게 하고 생각을 은밀하게 하여 나의 약점을 보여 상대의 뜻을 교만하게 한 것이 어떠한가.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소하가 도망하였다고 이르자 망연자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 유독 장량이 떠남에 일찍이 그가 떠나는 것을 저지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겠는가. 그래서 ‘고제가 촉에 들어간 것은 장량의 계략이고, 장량이 따라가지 않은 것은 고제의 마음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어진이를 군신(群臣)과 사졸(士卒)에서 얻었으나 군신과 사졸이 모두 알지 못하였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역시 소하뿐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도망하자 소하가 좇아갔던 것이니, 반드시 이것으로써 깨우쳐 그를 되돌아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하가 한신을 대장으로 추천하면서 ‘반드시 한중에서 오래 왕 노릇할 작정이면 한신을 쓸 바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은, 이것으로써 그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고제가 관중으로 돌아오자 장량도 한(韓)에서 왔다. 지난날 세 사람이 주획(籌畫)했던 것이 지금에 꼭 들어맞은 것 같지만, 소하를 관중에 남겨두어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용하여 끊이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싸우면 반드시 패하였지만 위망(危亡)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대체로 관중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항우가 싸우면 비록 반드시 이겼지만 한 번 지자 돌아갈 곳이 없어서 멸망에 이른 것은 그 기반을 잃어서이다.



아, 항우가 관중을 버리려고 할 적에 한생(韓生)의 유세를 항우가 만약 받아들여 그를 채용했다면, 항우에게 있어서 한생은 고제의 장량이었을 것이다. 말이 겨우 입에서 나오자마자 끓는 물과 타는 불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항우가 대업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조짐이 이미 나타나자 고제와 장량은 가만히 서로 눈웃음을 쳤으리라.

범증(范增)이라는 사람은 항우의 모신(謀臣)이 되어 일찍이 하나의 계책을 내거나 하나의 일을 도모하지도 못하고,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여 항우를 받들고 서쪽으로 갔다.

형편이 궁해지고 일이 지난 뒤에 바로 항우를 배반하고 떠났으니,

장량이 포중에 이르러 한제(漢帝)를 떠나간 것과 같은가 다른가.

삼가 논의하였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에서 펌함

 
 
 

# 인재(창의적 공부)

modest-i 2017. 3. 29. 11:32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6/H%C3%A1n_X%C3%ACn.jpg/394px-H%C3%A1n_X%C3%ACn.jpg


청나라 때 화가인 상관주(上官周)가 지은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莊畫傳)에서 묘사한 한신의 화상

생몰년도

? ~ BC 196

이름

한신(韓信)

작위

회음후(淮陰侯)

고향

강소성 회음(淮陰)[1]

1. 개요2. 출신3. 막장 시절
3.1. 밥 좀 주십쇼3.2. 과하지욕
4. 한군의 대장
4.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4.2. 소하가 천거하다4.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5. 전설의 시작
5.1. 삼진 정벌, 관중 평정5.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은 패전과 관련되지 않았나?5.3. 위표를 박살내다
6.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
6.1. 초한전쟁의 분수령이자 대전략 배수진(背水陣)이 탄생한 정형전투(井陘戰鬪)6.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6.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6.4. 역이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6.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7.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왕의 길을 걷느냐
7.1. 제나라의 왕이 되다7.2. 천하 삼분
8. 해하 전투9.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9.1. 밥값을 갚다9.2. 회음후9.3. 다다익선9.4. 성야소하 패야소하9.5. 실제로 한신은 모반을 일으키고자 했는가?
10. 평가
10.1. 사마천의 평론10.2. 사마광의 평론10.3. 유방의 평가10.4. 이맹현(李孟賢)의 평가10.5. 안처성(安處誠)의 평론10.6. 주희, 유희춘(柳希春)의 평가10.7. 대만 역사학자 보양(栢楊)의 생각10.8. 이중톈의 생각10.9. 조선 효종의 의견10.10. 조선 순조의 의견
11. 기타12. 대중문화 속의 회음후 한신


개요[편집]

중국사의 불세출 명장.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제(漢高祖) 시대 대장군. 중국사의 명장(名將)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2]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로도 유명하다. 한고제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훗날 토사구팽을 당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

군사적으로는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의 유방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시켜 기반을 마련하였고, 결정적으로는 팽성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정예도 아닌 비정예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로 시작하여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六國) 멸망시켜 유방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명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유방(劉邦)과 여후의 견제와 본인의 처세 문제가 겹치면서, 천수를 누린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3] 사실상 '토사구팽'이라는 고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는 많은 표현과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고 훗날 용서하고 선정을 베풀어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고, 또 아낙내로부터 받은 작은 은혜를 잊지 않고 후에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으며, 소하가 유방에게 그를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고, 유방과의 대화에서 후세에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으며,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고, 병법의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전술,대전략적 의미로 바꿔만들어 지금까지도 쓰이는 전술적 혹은 결사적 각오의 의미인 배수진을 탄생시켰으며, 훗날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을 나오게 하였다.

2. 출신[편집]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한신의 출생[4]에 관해서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건 명백한 오류다. 한신의 출생지인 회음현[5]은 서주와 회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전국시대 나라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역사소설 등을 쓰는 와중에 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한왕 신이 이 한신으로 혼동되어 한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묘사하는 작가도 있었고, 이 영향으로 한신이 한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1980년대에 연재된 고우영 초한지에도 방대한 내용에 걸쳐 한신이 한나라 왕자로 설정되어 있다.[6] 강조하지만 한신은 절대 한(韓)나라와 관련이 없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모두 그저 '한신은 회음현 사람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3. 막장 시절[편집]

3.1. 밥 좀 주십쇼[편집]

한신의 집안은 왕족과는 거리가 먼, 별볼일 없고 가난한 집안에 지나지 않았다. 집안 후광이랄 것도 없고,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아래 과하지욕 고사에 나오듯이 일단 한신 본인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 장사꾼 노릇도 그럴 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안습백수 신세였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찌질이로 업신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없는 높은 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장이었어도 뜻은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묫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이 된 한신은 어느 정장(亭長)을 졸졸 따라다니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한신을 대단히 싫어해 일부러 새벽에 남편의 밥을 지어 먹여 한신이 빈대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신은 눈치가 보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벌어 먹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겨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얻어먹자, 한신은 아낙네에게 워낙 고맙기도 해서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후일, 반드시 부인들이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리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낙네는 되려 벌컥 화를 내었다.

"사내 주제에 자기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보답 운운하는가? 앞길이 창창한 왕손[7]이 밥을 굶고 있어 불쌍히 여겨 밥을 먹도록 해 주었거늘, 어찌 내가 보답을 바라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3.2. 과하지욕[편집]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까일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회음의 젊은 사람들은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멀대처럼 키가 크고 칼차기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겁만 많을 뿐이다. 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당연한 소리지만 가랑이 사이로 지나려면 무릎을 꿇고 포복 자세로 질질 기어가야만 한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라는 말은 자기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라는 소리다. 보통 어지간하면 화를 내서 싸움을 하거나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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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생각을 해보자. 다 큰 어른이 무릎 꿇고 다른 사람 가랑이 밑을 질질 기어가는 모습을... 정말 추할 것이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이 사건으로 한신은 고향에서 그야말로 웃음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렸다. 때문에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 항우와 유방[8]에서는 역이기가 팽형당하는 후반부까지 "바짓가랑이 사내"라는 멸칭이 따라붙는 걸로 처리해 버린다.

4. 한군의 대장[편집]

4.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편집]

답이 없는 찌질이가 되어 막장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이때,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 역시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너던 참이었다. 한신은 칼을 하나 차고 서둘러 항량에게 달려가 그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대반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신은 철저하게 이름이 묻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훗날 용저가 한신의 안습한 일화들을 들먹인걸 보면 오히려 안좋은 쪽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곧 항량이 싸움에서 패해 항우(項羽)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한신은 집극랑(執戟郞) [9] 자리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듯 싶기도 했지만, 한신이 무슨 제안을 올릴 때마다 항우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 시기는 유방이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한신은 그 행렬에 합류해 한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한군에서도 한신의 자리는 없었고 그저 작은 자리를 하나 얻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무슨 막장 짓을 했는지 한신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고,[10] 한신과 같이 있던 죄수들도 모두 끌려와 눈 앞에서 차례로 목이 베어졌다. 한신의 앞으로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자, 한신도 이렇게 죽기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늘을 바라보다, 마침 눈 앞에 있는 하후영(夏侯嬰)에게 소리쳤다.

"상(上)께서는 천하를 취하고 싶지 않으신가? 그렇다면 이 장사(壯士)를 참하라!"

하후영이 듣기에 묘한 소리였으므로,[11] 그는 우선 한신이 죽지 않게 했고,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키도 크고 허우대도 좋고 해서 유방에게 한신을 추천했다. 말을 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자리를 주었지만,[12] 아직은 한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4.2. 소하가 천거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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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소하는 한신과 몇번 대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고, 말을 나눠 본 후 이 사람이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장수 수십 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장수들 중에는 한신도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유방은 자기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긴 것.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쫓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쫓아간 사실을 말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여러 장수들 같으면 얻기 쉽지만, 한신같은 자라면 나라안의 선비 중 그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꼭 오래토록 한중(漢中)의 왕이 되려고만 하신다면, 한신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면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선 편안히 결정하십시오."



이때 한신은 그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하는 그 진면목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다. 유방 역시 이런 벽지에 쳐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한신을 장수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장수로 삼으신다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른 제안을 했다.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유방은 소하의 제안대로 단을 세우고 대장군을 임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다른 장수들(당시에는 번쾌나 조참이 가장 유력)은 "야 신난다! 보나마나 내가 대장군에 되겠지?"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정작 모이고 보니 웬 키만 큰 놈이 단에 오르고 있었다. 이에 장수나 병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13][14]

4.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편집]

이렇게 임명식이 끝나고 난 뒤, 유방은 따로 한신을 불러들였다. 소하가 하도 칭찬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항우에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벽지인 파촉지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단 대장군으로 뽑았으니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신은 감사의 예를 올리며 유방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늘의 적은 항왕(項王)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서 생각하시기에, 스스로 용맹하고 날래며 인자하고 강인한 것을 항왕과 비교해보신다면 어떠십니까?"


이 시기 항우는 거록의 싸움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모든 제후들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었다. 유방은 살짝 머뭇거렸지만 일전에

장량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기에 유방은 솔직하게 "내가 다 항우만 못하다."고 인정했고,


 이에 한신은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유방을 치하하며 말했다.


"저 한신 또한 대왕이 항왕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항왕을 섬겼사온대,

항왕의 사람됨을 말하고자 청합니다.


항왕이 노해 화내어 갑자기 소리치면 천 사람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해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입니다.


항왕은 남을 보면 공손히 삼가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남에게 병이 생기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다가도,

남에게 공이 있어 마땅히 봉작(封爵)해야 할 때면 인수를 새김에 각박하여 어쩔 수 없이 주니, 이는 소위 아녀자의 인자함입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해 제후를 신하로 삼았다 해도,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에 도읍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 약속을 어기고, 왕을 친애함에 제후들에게 고르지 않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을 쫓아낸 것을 보고, 모두들 또한 돌아가 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에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항왕이 지나는 곳마다 망하여 잔멸(殘滅)하지 않은 곳이 없어, 백성의 원망이 가득합니다. 백성들이 (항왕을) 의지한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되었을 뿐입니다. 이름은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론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그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진실로 그 도를 바로잡으시어,

천하의 무용(武勇)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치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봉해주면

어찌 복종치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또 삼진(三秦)의 왕은 진(秦)의 장수가 되었는데

진의 자제를 거느린 지 수년이어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또한 그 무리를 속여 제후들을 항복시켰습니다.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항왕은 진의 항졸(降卒) 20여만 명을 속여 파묻고,

오직 장한(章邯)‧사마흔(司馬欣)‧동예(董翳)만 살려주었습니다.

진의 부형들은 이 세 명을 원망함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들어가 추호도 해를 끼친 바 없고,

진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백성들에게 법 3장만 약속하여,

진의 백성들은 대왕이 진의 왕이 되지 않길 바라는 자가 없습니다.

제후들과 약속에서 대왕은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하며, 관중의 민호(民戶)들은 이것을 압니다.

왕께서 (관중의) 왕을 빼앗기고 촉으로 가셨으니, 백성들 중 이를 한탄치 않는 자가 없으니, 지금 왕이 병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가신다면, 삼진은 격문만 돌려도 평정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파촉에 처박혀 미래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유방에게, 그야말로 막힌 곳을 뻥 뚫어주는 것처럼 시원한 말이었다.

유방은 한신의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신이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여겼다.

유방은 마침내 한신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고, 한신은 유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해 각 장수들이 움직일 곳을 정했다.

드디어 한군이 동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5. 전설의 시작[편집]

5.1. 삼진 정벌, 관중 평정[편집]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군이 동진하기 위해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이 옹왕(雍王) 장한(章邯)이었다. 이는 진(秦)을 멸한 후 항우가 각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삼고 파촉의 벽지에 몰아 넣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삼진 땅에는 옛 진나라의 장수였던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를 각각 옹왕(雍王), 색왕(塞王), 적왕(翟王)으로 삼아 삼진 땅에 봉하여 군을 주둔시킴으로서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 옛 진의 명장이었던 장한에게 관중의 8백리 진천(秦川)을 봉해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유방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파촉에서 나가지 못할까 두려워 했고 한신을 등용하기 전까지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허나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는데,


이 때 한신이 제안한 전술은 성동격서에 기초한 것으로서 당시 유방은 파촉에 들어올 때, 항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군이 잔도를 모두 불태웠으니 장한은 당연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잔도를 수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충분히 대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과 장한의 저런 심리를 이용하여 잔도를 대대적으로 고치면서 장한의 주의를 끌고

다른 길을 통해 몰래 기습을 했는데 이 때 나온 말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이다.

이에 대해 흔히들 그냥 '잔도를 고치는 척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만 알고 있으며,

그 진격로나 길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은 한군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로 한군의 관중 진출에 중요한 고비인데, 이에 대한 자료나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15]

그렇기에 여기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한중(漢中)에서 관중(关中)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일단 관중으로 나가려면 한중의 북쪽을 통해 나아가야하는데 이 한중의 북쪽과 관중 사이에는 해발 3,000m의 거대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다. 훗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할 때 항상 넘어야했던 곳이 바로 이 곳인데 이 진령산맥은 매우 험준한 곳으로 그 긴 산맥 중에서도 제대로 된 길이 거의 없었으며 최단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잔도를 만들어 넘어야했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으며, 이 당시의 한중은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그나마 있는 길들 또한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장 동쪽에는 자오곡(子午谷)이 있는데, 후에 촉한(蜀漢)의 위연(魏延)이 북벌 당시 제안했던 자오곡계책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의 북쪽 구역을 자곡(子谷), 남쪽 구역을 오곡(午谷)이라 하여 자오곡(子午谷)이라 한다. 자곡의 입구가 장안(長安) 남쪽에 있어서[16] 당시에는 함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며 간혹 한신이 이 자오곡을 통해 장한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길은 한중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 그 길이가 660리에 달하고 높은 산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거의 죽음의 길이라 불리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진한교체기로서 장안성은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후에 지었으며 함양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기에 출격하더라도 거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중간에는 당낙도(儻駱道), 즉 낙곡[17]이 있었는데 계곡 길이가 420리로 장한이 도읍으로 둔 폐구와 가까워서 이 길로 나아가면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당낙도 또한 길이 험한데다가 자오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아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쪽에는 포야도(褒斜道)[18]가 있는데 이 포야도는 관중으로 가는 길 중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했으며 길이가 470리로 당락곡보다 조금 더 먼 길이다. 남쪽 구역을 포곡(褒谷)이라 하였고 북쪽 구역을 사곡(斜谷)이라 하였는데 사곡(야곡)의 입구는 미현의 남쪽으로 진한교체기 당시 이 길은 관중에서 한중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유방도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왔는데 유방이 군을 이끌고 들어간 것처럼 대군을 이끌기에 좋은 길이었는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포야도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서 포야도를 통해 출병하려면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포야도의 서쪽에 진령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 진창(陳倉)에 도달하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일찍이 관중에서 한중을 드나들 때 사용되던 주요 길이었으나 포야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버려지고 잊혀졌다. 이 길이 바로 고도(故道)인데 당시에는 진창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진창고도(陳倉故道)라 불렸다. 포야도만큼 바른 길은 아니지만 군을 이동시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양호했으며 포야도에 의해 가려진 길이라 장한 또한 경계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B.C 206년 6월~7월 사이 한신은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포야도의 잔도를 복구하는 작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주의을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19] 하여 장한은 군을 사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피로에 한군은 지쳐있을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다. 진창[20]은 교통이 발달하여 진나라 시절 최초의 현으로 설치된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옛날부터 성곽을 축조하고 많은 물자가 비축된 곳이었는데 한군은 이곳을 기습해 대량의 군량과 군수품을 얻었고 진창의 견고한 성곽을 함락시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장한은 한군을 막기 위해 진창(陳倉)으로 달려나왔으나 패했고, 이후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다시 패배했다. 그리하여 장한은 결국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한 채,

유방은 그 사이에 다른 장수들을 시켜 한 달 사이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리고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적왕(翟王) 동예(董翳)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이에 항우가 제나라 정벌에 발이 묶여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한신(한왕 신)[21]이 정창을 격파하여

한나라 땅을 탈취하였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자 유방은 그곳에 하남군을 두었다.

그리고 장한의 동생 장평(章平)과 조분(趙賁)은 농서와 북지로 퇴각해 저항하며 항우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한군이 농서를 공략하고

이듬해 정월, 북지를 공략해서 장한의 동생 장평을 생포하고 후에


폐구성을 수공으로 수몰시키자 장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유방은 관중 지역을 모조리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이 때의 공적은 한신 뿐만 아니라 한군 전체에게 공적이 있다는 점이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는데 예를 들면 번쾌는 폐구 수공에서 활약했고, 주발은 함양 일대를 장악했으며, 역상은 북지군을 함락시켰다.

즉, 당시 한신의 지위가 대장군이었기에 삼진 정벌과 관중 공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한중대책) 분명 한신이지만

총지휘는 유방이 맡았고 빠른 시일 내에 여러 곳을 공략해야 하는 과정에서[22] 직접 성이나 군을 공격하거나 함락시키는데 여러 장수들이 나섰어야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수들의 공 또한 크다는 것이다.

이때 한신이 개별적으로 움직인 경우에 대해, 당시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던 한왕(韓王) 정창(鄭昌)을 격파했던 일을 한신이 독자적으로 움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한신은 그 한신이 아니다. 한자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헷갈릴 수 있지만 이 사람은 한왕 신이다. 한서 고제기에 한(韓)의 태위(太尉)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

여하간에 마침내 삼진이 평정되었고 관중이 유방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즉, 이제 항우와 한번 싸워볼만 해진 것이다.




5.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은 패전과 관련되지 않았나?[편집]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유방은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박살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이 죽었다.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전을 당한 것.

팽성대전에 대해서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유방이

한신의 군지휘권을 빼앗고 자기가 해먹으려고 하다가 된통 당해버렸고,

한신이 이를 수습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는 사기나 한서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이러한 언급은 대부분 소설 초한지 등에서 유방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에피소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싸움에서는 유방이 한신의 지휘권같은 것을 박탈한 경우는 없고[23],

한신이 이 전투에서 관련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등 관련 기록을 모두 살펴 보아도 딱히 둘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

그냥 이 싸움은 유방이고 한신이고 한군을 비롯한 제후국 전부가 항우에게 영혼까지 쳐맞았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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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초나라군을 격파하여 그 동진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다만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해서' 유방과 만났다는 점에서 '역시 한신은 후방에서 패전에 관련되지 않았다가, 유방이 삽질한걸 수습한거 아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만약 한신이 후방에서 "패잔병을 수습"했다면 팽성에서 패배한 전투를 하남성인 형양보다 뒤에서 수습해서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그 수습한 패잔병으로 초나라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뭔가 이상한 이야기이다.

또 회음후열전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우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패잔병을 모으고 수습한게 한신만의 공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소하가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듯이 보내고 있었다.[24]

즉,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한신은 이 엄청난 패배의 똥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다. 다만 패잔병을 수습하고 경색전투(京索之战) 등에서 초군을 겨우 저지하긴 했으나 경색전투의 경우 기병대였던 관영의 활약이 컸다. 그렇기에 적어도 '유방 개색히가 한신 물먹여서 한군이 대패함 ㅈㅈ'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의 한신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면, 분명 전략적인 식견은 있으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 처럼 독보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한것은 아니었고 팽성대전이라는 참패에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 결코 나쁘지는 않은 모습이지만, 수많은 공신들을 제치고 대장군에 임명된 장수의 활약상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한신의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5.3. 위표를 박살내다[편집]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항우의 지릴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가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이 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당시 역이기는 위표를 회유하는데 실패했지만 위나라를 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군의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는데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적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그러자 역이기가 "백직(栢直)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크게 기뻐하고 웃으며 "그 놈은 젖비린내나는 더벅머리일 뿐임. 그 놈이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이냐?"[25]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위표를 치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가던 한신 또한 위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는데, 한신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경계하고 있어서 역이기에게 혹시 위표가 주숙(周叔)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역이기는 위표가 주숙이라는 인물 대신 백직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재차 답해주자, 한신은 "어린놈일 뿐이군!"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26]

이 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신은 일부러 군을 나누어 임진 쪽에 일부 군을 두고 대군으로 보이게 끔 하여 도강하려는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어 속이는 한편, 그 사이에 한신 자신과 실질적인 주력은 포판보다 더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이동시켜 목앵부를 타고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위표가 갑작스런 한군의 공격에 경악해서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자,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군이 위나라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했다. 앞뒤에서 공격받은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것.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6.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편집]

http://mlbpark.donga.com/mbs/fileUpload/201107/1310789544.jpg

한신의 이동루트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27]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를 감군으로 삼아 병사 3만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 조참을 옆에 둔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6.1. 초한전쟁의 분수령이자 대전략 배수진(背水陣)이 탄생한 정형전투(井陘戰鬪)[편집]

http://cfs6.tistory.com/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YmxvZzc5NDM1QGZzNi50aXN0b3J5LmNvbTovYXR0YWNoLzAvMTIwMDAwMDAwMDA1LmpwZw%3D%3D.JPG

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본래 대나라는 진여(陳餘)의 땅이었으나 진여가 조나라에서 조왕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대나라는 그의 측근이었던 재상 하열(夏說)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하열이 한군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28]

대나라 정벌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뒤에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계책을 내놓을 때 '한신이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군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나라의 군대가 처참히 깨진 것으로 보인다.[29]

그런데 이 무렵, 유방은 사정이 급했는지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그렇다면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예병이 모두 빠지고 신병들과 위나라, 대나라에서 군사를 개편한 오합지졸의 군대란 이야기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참에게 따로 군사를 맡겨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다.[30] 또한 대나라에서의 교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며 대나라 땅에도 군을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신의 군세는 3만은 커녕 실질적으로는 2만 내외의 오합지졸 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등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20만[31]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 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조왕과 진여(陳餘)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았으며,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우주방어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동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32]

하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음?"(...)이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만 보면 인의도덕만을 내세우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주인공이 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송양공(宋襄公)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진여가 송양공(宋襄公)을 따라한 멍청이인가하면 그건 또 아니다. 진여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정면대결로 밀어부친 것에는 나름 병법에 기초한 이유가 있었는데, 진여는 이좌거의 계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33]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즉, 조나라의 군대가 실제 20만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한군의 몇 배에 달하기에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제압해야 주변 국가들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공격만 해도 절대 질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영지인 대나라가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니 잡병 더미에 불과해보이는 한군을 최대한 빨리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여의 입지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조왕의 신하에 불과하니,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앞세워 단기결전 후 실지 회복을 노리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리고 조왕 또한 이러한 진여의 생각을 받아들여, 진여를 대장으로 삼아 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이때 진여가 선택한 이 방법은 결국 패배했기 때문에 무조건 어리석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당시 양측 군대를 비교했을 때 조나라군이 양적, 질적 우위, 홈의 이점, 보급 등 모든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진여의 대처는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으로서 완전 어리석은 판단이라거나 멍청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한신이었다는게 잘못된 것이었다.[34] 한신은 첩자를 보내 염탐하였는데, 첩자로부터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좌거의 계책은 멀리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 소식을 접한 후 한신은 지체없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누벽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한신은 정형의 약 30리 앞에서 야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을 따로 선별하여 그들 모두에게 한군의 깃발인 적기를 나눠주며, 정형 앞 샛길을 통해 몰래 병사들을 산으로 보낸 후 조나라 군대가 있는 누벽을 보게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누벽(壘壁)을 비워놓고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이에 빨리 조나라 누벽으로 들어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게다가 이후 어떤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모두가 경악할만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투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형의 조군 앞에는 '면만'(綿曼)이라 불리는 강이 있는데, 이를 면만수(綿曼水)라 불렀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한신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군사들 중 1만 정예군을 따로 조직하여 이 면만수(綿曼水)를 건너게 한 뒤, 강을 뒤에 두고 진영을 치게했다. 오래전부터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등 기라성과 같은 전쟁병법가들은 물론 많은 명장들이 강을 뒤에 두면 퇴로가 없어 전멸하게 되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금기와 같은, 심지어 일반 병졸들도 알고 있으며 절대 해서는 안될 기본 중의 기본인 등에 강을 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서는 한술 더 떠 오합지졸의 1만 정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과 노약자들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배수진만으로도 이미 요단강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데 적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 때 진여가 군사를 보냈으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우려하였으나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나올 일은 없을거라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골라 누벽을 쌓았다. 또 저들은 우리의 대장기와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한군을 일거에 소탕하여 한 번에 끝내고자 했던 진여는 한군이 병력을 나누는 아주 위험한 시점에서 공격해 들어가면 필시 한군이 도망칠 것이기에 그것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그 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조나라군은 한군의 배수진을 보고 진여는 물론 일반병사들까지 웃었으며, 진여는 "역시 한신 저 놈은 병법을 모르는게 확실하다. ㅋㅋ" 라고 여겨 한군이 가까이 공격해 오면 전군을 보내 일거에 소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신은 날이 밝자 모든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에 모여서 잔치를 하자!"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이었고,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각한 병력차와 물자 부족 및 보급 문제 그리고 도무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전으로 이길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도 건성으로 "네,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앞서 진영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한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장이와 함께 몸소 직접 조나라 군대에게 북을 울리며 도전하였다. 물론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비웃기만 했으며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여 출격하였다. 그러나 비록 한군도 두려워하며 출정할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으나, 이미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니 그들 또한 인간이였기에 살고는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고서는 오로지 살기 위해 목숨걸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신이 노렸던 점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싸우는 군사들의 패기(霸氣)와 살기(殺氣)란 실제로 엄청났다.

그래서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한 조나라 군대였지만 이러한 한군의 저항에 놀라 쉽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한 채 전투가 지속되어 그 사기가 크게 꺾였다. 허나 전력차가 워낙 컸으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한군은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싸웠으며, 도망칠 때도 리얼함을 보여주기 위해 대장기까지 버리고 강가에 쳐둔 진까지 도망쳤다. 비록 초반의 완강한 저항에 눌리긴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과 도망치는 리얼함에 속아 넘어간 진여는 요새에 있는 군대까지 모두 출격시켜 도망치는 한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하였다.

한신, 장이를 비롯한 한군이 도망쳐 강가에 있던 진영에 이르자 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였고, 진여가 정형에 있던 조나라의 모든 병마를 이끌고 누벽을 비운 채 나오자, 한신은 강가에 진을 쳐둔 1만의 정예병과 합세하여 20만 대군에 맞섰다. 그리고 이제 진짜 도망갈 곳조차 없음을 알게 된 한군은 모든 군사들이 강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질적으로는 밀리지만 목적 의식 자체가 다른 한군은 살고자 하는 일념 하에 미친개처럼 싸웠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철수하여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대의 배후로부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진영에는 조군의 깃발은 어디가고 이미 한군의 적색 깃발이 도배되어 휘날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새벽녘 양쪽 산에 숨겨둔 2천의 경기병들이 줄곧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말대로 정말 누벽을 비운 채 전군이 공격을 나가자 한신이 진영에 합세하여 배수진에서 미친듯이 버티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매복해 있던 경기병 2천이 우회하여 적의 누벽을 급습한 것이었다.[35]

이렇게 한신의 예상대로 모든 계책이 성공했고, 조나라 군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던 누벽이 한군에게 점령된 것을 보자 아연실색했다. 허와 실을 모르는 조군은 한군이 이미 누벽을 점령해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누벽에 휘날리는 많은 수의 깃발을 보자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군이 후방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포위된 채 뒤에서 한의 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 공포감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을 본 진여가 병사 몇 명의 목을 베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조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왕과 진여도 급히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한신은 조군을 추격하였고 뒤에 누벽을 점령한 병사들도 함께 공격해오자 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조군은 이제 퇴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으며 오히려 조군이 강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 곳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신과 한군은 계속해서 조군을 추격하여 지수(泜水) 부근에서 진여(陳餘)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결국 반나절만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루아침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정말 한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나라 진영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전투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신의 용병술에 탄복하면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한신의 전술을 믿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의문어린 표정과 어조로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조나라를 깬 뒤에 잔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으나, 허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전술입니까?"

그러자 한신은 여제껏 장수들이 의문을 품어왔던 전술에 대한 질문에 웃으며 명쾌히 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놓은 다음에야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을 죽을 땅에 두어서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라 하였지만, 배수진(背水陣)은 줄곧 금기처럼 여기던 전술인데 한신이라 하여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허나 한신의 말처럼 그가 이끌던 정예병은 유방이 모두 데려갔고 새로 편성된 군사들은 어딘가의 정예병이 아닌 시장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을 급히 모아 만든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위나라와 대나라에서 모병된 군사들도 많았기에 한군에 대한 애착이 없어 살 길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며 기존 한나라의 군사들 또한 신병이기에 조금만 패색이 보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병법을 응용하여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였고, 한편으론 상대의 생각을 읽어 과감한 행동으로 진여와 조나라군을 방심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하여 계획을 손쉽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즉, 한신은 이러한 한군의 상황과 진여의 교만심, 그리고 그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져 계책에 계책을 더한 용병술을 썼으며,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이자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는 금기가 아닌

전략적 배수진(背水陣)의 정의를 만들었다.



이 조나라와의 정형전투는 전략, 전술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초한전쟁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명성과 위세를 떨쳤으며,

동시에 한신이 북방에서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반면 항우는 전선이 늘어져 북쪽에 적을 두게 된 탓에 군을 나눠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유방에게는 세력 확장과 함께 불리했던 전세를 슬슬 유리하게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방 자신에게 한신이라는 두려운 존재가 생기게 되었다.



다만 덕분에 후대에 한신의 이 배수진을

얼치기로 따라하려다가 강가를 피로 물들인 양산형 배수진충(...)들을 본의 아니게 키우게 된 것도 사실이다.

좋은 예로 읍참마속의 그 마속이 있으며,

             신립탄금대 전투를 이 얼치기 양산형 배수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6]






6.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편집]

한편 한신은 정형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광무군을 포박해 데리고 왔는데 한신이 직접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주며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을 향한 채 광무군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37][38]

그리고 자신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광무군에게 "내가 북쪽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허나 광무군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무용(武勇)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나라를 존속하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한신이 광무군을 설득하고자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지만 우나라는 망했고,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안했는지, 그의 계책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이 그대의 계책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자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광무군이 주저하자 한신이 강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의 계책에 따르겠으니 더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한신이 진심으로 부탁하자 광무군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다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번은 맞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용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충심껏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며 한신에게 계책을 올렸다.


"원래 저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 되면 결국 연나라도, 제나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형전투의 승리와 조나라 평정으로 인해 지금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6.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편집]

헌데 이 무렵 유방은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한신과 달리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형양에서 1년 넘게 항우의 공격을 근근히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에 가까워진 것. 급한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하여 범증(范曾)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눈앞에 있는 항우의 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기신(紀信)이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시선을 끌고, 본인은 관중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에 다시 군대를 모집하여 성고(成皐)로 진입했지만, 항우의 공격이 너무 강력하여 하후영과 함께 간신히 몸을 피해 황하를 건너 한신과 장이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본격 유방의 기지 백도어 아니 그럼 새벽인데 자고있지 뭐해?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미역국 마시듯이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유방에겐 이상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6.4. 역이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편집]

유방의 명령대로, 한신은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이동했다. 이때, 아직 한신이 도착하기 이전, 역이기가 먼저 유방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났다.[39]

역이기의 화려한 언변을 들은 제왕 전광(田廣)은 싸워봐야 더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역하(歷下)[40]에 주둔하고 있던 제나라 군사들의 경계를 풀게 했다. 이대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한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상황. 그리고 한신 또한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이들을 불행에 넣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말 잘하는 제나라 출신의 변사였던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이대로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셈이냐고 한신을 충동질한 것. 괴철의 말에 넘어간 한신은 즉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런 유혹에 넘어갈 한신은 아니었지만, 잠자다가 유방한테 지휘권을 빼앗기고 멘탈이 깨진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41]

그리고 제나라는 한껏 준비를 하고 싸워도 승부가 어떨지 모르는 판에,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다 기습을 당했으니 상대가 될리 없었다. 한신은 황하를 건너 역하(歷下)에 있던 제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격파해 크게 승리하고 제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패주하는 적을 파죽지세로 쫓아 결국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역이기는 제나라 사람들과 좋게 술자리를 가지면서 주연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고, 놀란 전광은 역이기에게 "너 지금 당장 저 한신의 군대 못 오게 안 막으면, 삶아서 죽여주마."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불구, 기개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

결국 역이기는 인생 최대의 하이라이트 시기에 삶아져서 죽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사마천은 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蒯通)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고 하며 괴통을 비난했다.

만일 이때 괴철이 한신을 꼬셔대지 않았다면, 제나라 전씨는 유방에게 무난하게 항복했을 테고, 연왕 장도나 조왕 장오(張敖)처럼 이성왕에 임명되면서 가문을 좋게 보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42] 그러나 괴철의 이 제안 때문에 제나라는 박살이 났다.[43]

그런데 사마천은 이 일이 제나라 전씨의 몰락 뿐만 아니라,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 때 역이기는 유방의 승낙을 받고 제나라에 파견되었으며, 한신의 이 행위는 한왕 유방의 뜻을 분명하게 거스르는 행위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신에 대한 유방의 분노, 이후에 왕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한신의 행태 등이 여기서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지적은 이러한 면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6.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편집]

제왕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44]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한신은 유방의 부하이고, 유방에 적대한다면 붙을 사람은 한명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항우였고, 전광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항우 역시 한신이 초나라 북쪽을 완전히 평정하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항우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에게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용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광과 합류했다.

이때, 용저가 한신과 겨루기 전,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 한신이 이끄는 군대의 기세가 엄청나 싸우면 형세가 좋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고, 제왕 전광을 내세워 항복한 제나라의 성들을 설득하고, 초나라 20만 대군의 기세를 보이면 항복한 성들이 모두 다시 분위기를 보고 들고 일어날 것이며, 후방이 막히게 되는 한신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박살나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저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 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45]


한신이 초나라 군대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용저 역시 한신의 막장 시절 이야기는 들어본 것으로 보인다.

용저는 한신의 찌질한 일화들을 들먹이며 그를 무시했고, 즉시 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한신은 밤중을 틈타 1만 개의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잔뜩 넣어 모래 주머니를 만든 뒤, 강의 상류에 가서 그것을 던져 물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용저의 군대에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달아났고, 이를 본 용저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원래 한신이라는 위인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대를 총동원해 한군을 추격했는데, 바로 그때 상류가 다시 뚫리면서 엄청난 물이 떠밀려 왔고, 초나라군은 강을 절반도 건너지 못하고 박살났다. 이거 살수대첩에서 본 거 같은데[46] 그 와중에 한군이 재차 반격을 가하자 용저는 전사했고, 사령관이 죽으면서 초나라 군대도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제왕 전광도 달아났고, 한신은 도망치는 부대를 성양(城陽)까지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BC 203년, 마침내 한신은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5개국을 모조리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7.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왕의 길을 걷느냐[편집]

7.1. 제나라의 왕이 되다[편집]

이때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했고,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47]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 사건으로 유방의 의중을 거스른 전례도 있었고, 이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신을 공격해버리려고 했지만, 장량이[48] 유방의 발을 슬쩍 밟고 "지금 한신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해서 소리쳤다.

"사내 자식이 왕 노릇을 하려면 진짜 왕을 해야지, 가왕이 뭐라더냐?"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밥을 빌어먹고 지내던 회음의 찌질이가 제나라의 당당한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7.2. 천하 삼분[편집]

믿었던 용저까지 죽어버리고 나자, 항우 역시 한신의 기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게다가 제나라는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쪽이니, 한신이 항우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이미 팽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항우에게는 정말 가공할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항우는 우태(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고 시도했지만 한신은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항왕을 모실 때는, 관직은 낭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극(戟)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습니다. 간언을 올려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한왕은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먹게 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려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무섭도 대답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 또 괴철이 슬금슬금 한신에게 다가왔다. 괴철이 보기에 천하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를 위해 계책을 한번 내어보기로 한 것. 괴철은 처음에는 '관상을 봐주겠다.'라는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한신에게 접근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하에 처음으로 일어나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뿐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 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 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섭(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일지라도 그 화란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膠河)와 사수(泗水)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라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괴철이 설득하고, 한신이 고민하는 이 부분은 회음후 열전은 물론, 사기 전체에서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다. 한신은 이 말을 듣고, "한왕이 나에게 잘 해주었는데, 내가 배신하는게 옳겠는가?"하고 고민했다. 그러자 괴철은 다시 한 번 "어차피 평생 가는 우정 따위는 없다."는 논지로 사이가 좋았다가 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거했고,[49] 한신은 "조금 생각해 보겠다."면서 답변을 미루었다.

며칠 뒤, 애가 탄 괴철은 다시 한 번 한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한신은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자신의 공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유방이 제나라를 쉽게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괴철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유방이 승리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감인데,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이를 모면해 보려고 한 것.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괴철과 한신의 이 대담은 그야말로 완전히 밀담인데, 어떻게 사마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옆에서 본 것같이 생생하게 기록했냐는 점이다. 일단 회음후열전에서도 '주위의 사람을 물리고' 이야기를 했다고 나온다. 이는 진시황 사망 후, 이사와 조고, 호해가 사구(沙丘)에서 모의를 하는 부분과 더불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손꼽힌다.

다만 사구정변 쪽도 항목도 나오듯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다'는 부분에 반론이 있으며, 괴철의 대담 쪽은 오히려 이런 의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우선 한신과 괴철이 대담을 가졌던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한신의 사망 후에 유방은 괴철을 잡아들였으며, 이때 괴철은 "내가 한신에게 반란을 권했다."고 인정했기 때문. 자세한 대화 내용이 문제인데, 괴철이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났음을 생각해본다면 괴철이 상황을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유방이 괴철을 잡아들여 신문하는 과정에서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고, 괴철은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자백한 만큼 자세한 대화의 내용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괴철이 한신에게 그런 권고를 했다는 것이 공개된 상태에서 황제가 괴철을 친히 석방했으므로, 이후에 괴철이 대화 내용에 대해 계속 함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이전이라도 친구나 가족들에게는 말했을 수도 있다.

8. 해하 전투[편집]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51]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52]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영포(英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한신은 처음에 초나라 군대에게 밀리는 듯 물러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달아나다 자결함으로서 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유방은 최후까지 버티던 노현(魯縣)을 굴복시켜, 완전한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산둥성 딩타오(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었다(...).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하였다. 제왕은 1년 정도 공석으로 두었다가 BC 201년에 유방의 서장자 유비가 맡았다.

9.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편집]

9.1. 밥값을 갚다[편집]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금(百金)을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

"공은 소인이다. 덕을 베풀면서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몸소 실현한 것이었다. 즉, 이 이야기들은 한신의 대인배스러움 등을 나타내는 일화로 설명된다. 다만 한편으론 유방과 여후가 한신에게 꿍꿍이가 있어서 저런 식으로 인기를 끌려 한다고 의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차기 대권주자도 아니고

개중에는 유방이 장량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제일 싫어한다는 옹치를 개국공신에다 앉힌 것을 따라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여하간에 용저 등에게 조롱받았던 답이 안보였던 막장 시절의 생활이, 왕이 되고 난 후의 한신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고의 과정이었던 점만은 알 수가 있다.

9.2. 회음후[편집]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BC 201년 무렵, 문득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을 꾸민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신하들이 한신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유방이 용서해 줄거라고 믿고 그만두어버렸다. 그때, 마침 한신에게는 과거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말(鍾離昧)이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종리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그를 사로잡으려고 하던 처지였다.

이에 누군가가 '종리말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말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말은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버렸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베어 바리바리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당연히 유방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근흡(靳歙) 등은 한신을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기운다(狡兎死 走狗烹)라 한 것과 같구나!"

그 말을 들은 유방은 "아니, 니가 모반한다는 말이 있더라고."라고 하면서, 낙양에 도착해서는 한신을 풀어주었다. 다만, 한신을 초왕이 아니라 회음후에 봉했고,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53] 한신의 옛 봉국은 회수를 경계로 둘로 쪼개고 동쪽을 형나라로 떼어내 유방의 사촌 형 유가를 왕으로 삼았다. 서쪽은 초나라로 남겨두어 유방의 동생 유교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9.3. 다다익선[편집]

http://book.interpark.com/blog/blogfiles/userblogfile/1/2011/08/01/15/mer0329_6039628649.JPG

유방(劉邦)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보니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하고 불평했다. 어느날 번쾌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번쾌는 후작으로 강등당한 한신과 동급이었지만, 연신 굽신거리며 한신에게 왕대우를 했다. 그러자 뭔가 꼬인 한신은 번쾌의 이런 행동도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여,[54] "살다 보니 번쾌 따위와 같은 항렬이 되었구나!"하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 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라고 대답했고, "그럼 니는?"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 같으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잘 다스립니다."

이에 유방이 왜 그럼 자신의 수하가 되었는지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 번이나 간단하게 요리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이야 각자 알아서 해보자.

9.4. 성야소하 패야소하[편집]


이렇게 불만이 쌓이는 와중에, 진희(秦豨)라는 인물이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는 일이 생겼다. 진희는 유방이 직접 "무척이나 믿음직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받던 인물. 그런데 한신은 진희를 따로 만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속내는 바로 반란에 관한 일이었다. 진희가 부임하는 거록에는 강병들이 많으니 진희가 반란을 하고, 한신 본인이 내부에서 흔들어버리면 일은 쉽다는게 요지였다. 이에 진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BC 197년 8월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9월 달에 진희를 진압하러 떠났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같이 나서지 않았다.

한신은 몰래 진희와 연락을 계속하면서 조서를 가짜로 꾸미고 사람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는, 먼저 여후부터 족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신의 밑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죄를 지어 한신이 가두어 놓았는데, 그 사람이 여후에게 도망쳐 이 모든 일을 고해버리고 말았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게 몸보신에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이문열 초한지에서는 여후가 그간 한신의 수상쩍은 행동들을 열거하지만 한신이 도통 포기하질 않자 비웃으며 이렇게 일갈한다.

"나는 네가 위, 조, 연, 제 네 나라 왕을 사로 잡거나 항복받고 패왕 항우를 해하에서 이겼다기에 병법 뿐만 아니라 권세의 이치에도 밝은 줄 알았다.
또 육국 중에서도 맏형 격인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왕 노릇까지 하였으니 왕자의 법에도 역시 얼마간 깨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 어찌 이리 아둔하냐? 아직도 네가 왜 죽는지를 알지 못하느냐?
네가 죽는 것은 모반을 꾀했기 때문이 아니라, 네 용략이 네 임금을 떨게 한 탓이다. 그러나 네가 떨게 한 임금은 지금의 황상이 아니다. 당장 모반을 일으킨다 해도 너는 결코 우리 황상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을 태자는 다르다.
태자의 문약은 아마도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이제 그런 태자의 시대를 위해 황상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죽어주어야겠다.
정도에서 너를 사로잡고 진땅에서 너를 옭았을 때처럼 네 몇 마디면 또 마음이 물러져 살려 두고 부릴 궁리나 하실 터이니 이번에는 너를 살려 놓을 수가 없구나!


결국 장락궁(長樂宮)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 한신은, 일이 이렇게 된게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참수를 당해 죽었다.[56]

한신의 모반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소하가 관여한 사실은 분명하다.[57]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라고 기록하였다.


9.5. 실제로 한신은 모반을 일으키고자 했는가?[편집]

일세 영웅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뜬금없이 나타난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라 이 한신의 반란 의도 자체에 대해 당시의 상황과 신빙성, 근거가 적고 설득력이 낮아 옛날부터 사기에 쓰여 있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신에게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이미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특히나 제나라 정벌 후 제왕 시절에는 명성과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켜 항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군세나 세력이 커져서 유방과 항우를 합친 것보다 크거나 비슷할 정도였기에 괴철이 천하삼분을 제시하고 항우는 자신에게로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며 유방은 가왕을 요청하는 사신에게 화를 냈다가 장량의 조언에 가왕이 아닌 진짜 제왕으로 봉했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 시절 때에도 일으키고자 하였으면 반란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으며 제왕시절 때부터 해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그리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강등되었을 때에도 충분히 반란을 일으켜 성공시킬 기회는 수없이 많았으나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유방에게 당했다.

한신의 참수 이유는 '진희의 모반에 가담했다'라는 명분이었는데 당시 진희의 행적을 보면 한신과 한 번 만났다는 기록조차 엇갈리고 친분 등 다른 연계되는 부분이 전혀 없으며 진희가 한신을 거론한 적도 없고 내부동조임에도 불구하고 문서같은 것 하나 없었다. 사기에서 진희와 내응했다는 부분을 보면 모순되는 부분과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사기에서 둘이 만났을 때 진희가 아닌 한신이 먼저 진희에게 모반을 부추겼다는 식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 모반을 꾀한 주범은 진희였다. 그 또한 그를 따르는 행렬에 수 많은 빈객들과 수레로 인해 주창에게 의심을 받다가 유방의 지시에 따라 조사했더니 실제로 수레와 빈객들의 불법적 내용이 들키면서 유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해 진희가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고 그 무렵부터 모반을 꾀해 실제로 왕황, 만구신등과 내통했다.

게다가 사기의 내용을 보면 진희가 밖에서 모반하고 한신이 내부에서 동조하겠다 했는데 내통을 했다면 당연히 연락 등을 했을 것이며 상황을 살펴보았을 텐데 실제 한신이 죽은 것이 진희가 군사를 일으킨 후인지 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사에 있어서는 정점급인 그가 모반을 위해 진희를 믿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한거라면 진희의 회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나 빨리 진압되었다는 거짓을 모를리가 없다. 게다가 정말 가담했다면 최소한 도망의 시도라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신은 그냥 소하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다.

또한 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신은 그의 가신들과 짜고 밤에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 이들을 동원해서 여후와 태자를 습격하려고 했다. 각기 맡을 부서가 정해지고 진희의 회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한신의 가신 가운데 한신에게 죄를 지은 자가 있어 한신이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 가신의 아우가 여후에게 변고를 알리고 한신이 모반하려는 상황을 말했다.

모반과 관련되어 죽은 대표적인 인물이 영포와 팽월인데 이 둘의 경우 사기에서 모반과 관련된 이 둘의 신하들 이름은 물론 모반을 부추긴 자, 그것을 말린 자, 모반을 밀고한 자들의 이름이 나오며 그 외에도 관련된 자들의 최소한 이름은 나오진 않더라도 적어도 관직이나 신분조차 나왔다. 예를 들어 영포의 경우 대표적인 비혁과 영포의 애첩, 진압 과정에서는 등공, 영윤 등 수많은 자들의 이름이 나오며 팽월의 경우 장수 호첩, 태복(太僕), 왕염개 등 사건의 내용까지도 정확하게 나온다.

그런데 위의 한신의 대목을 보면 오로지 가신, 죄를 지은 가신, 가신의 아우 이 셋 뿐이다. 이름은 커녕 관직조차도 나와있지 않다. 한신의 명성만 봐도 만약 그가 모반을 일으키고자 했으면 최소한 이름난 사람 한 사람이라도 끼어있어야 하고 적어도 모반을 알린자의 이름이라도 나와야한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 전혀 없이 뭉뚱그려 한신이 모반을 꾀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소하가 한신만을 따로 불러들여 여후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이 내부에서 죽은 것은 오로지 장락궁에서 참수된 한신 뿐이었다. 그 후 삼족을 멸하였다는 내용만 있을 뿐 한신과 함께 모반을 짰다는 내부 가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죽었다는 사람조차 없고 모반을 알린자에 대한 포상 이야기도 전혀 없다. 영포는 모반을 알린 비혁이 토벌 후 기사후(期思侯)에 봉해졌고, 팽월은 그의 태복에게 화가 나 목을 베려고 했다가 태복이 달아나 알렸다. 그런데 한신만큼은 그만한 인물의 모반을 알렸는데도 그저 한신에게 죄를 지은 가신의 아우라고만 나올 뿐 더 이상 아무런 내용이 없다. 도대체 내부의 가신들은 누구이고 어떤 가신들이기에 이름 하나 나오지 않은 자들이 여후와 태자까지 잡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일까.

게다가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라는 대목을 보면 거짓 조서를 내려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었다는데 그 정도의 사건이면 시간이 조금만 지체되도, 하루만 지나도 다 발각되고 궁에서 알아채 조사를 하게 될텐데 그들을 풀어주어 놓고는 계속 진희의 회답만을 기다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한 진희의 회답을 기다려놓고 진희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가자는 소하의 제안에 자신이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놓고 그렇게 순순히 들어가는 것 또한 말이 안된다.

그리고 한신이 배신하려고 했다면 여후와 태자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군병력을 일으켜서 나라를 세우거나 한고제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한고제의 신상을 위협하거나, 가신을 제거하거나, 병력을 일으킨 것이 아닌 여후와 태자에 대한 습격이 한신의 역모의 근거가 되었다. 허나 이 방법은 한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용병술에 있어서 극에 달했던 한신이 한나라를 배신하려고 하는데 고작 여후와 태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역모를 시작할리 없이 병력을 일으켜 주요 거점을 공격/장악 하는게 제대로 된 방법이다. 따라서 한고제가 사망하자 여후가 한나라 개국공신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에 비추어 한신이 모반을 꿈꾼 것이 아니라 배신의 근거조차 여후가 조작하여 여씨천하의 최대 방해물인 한신을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애초에 확실한 기회가 있을 때에도 시도하지 않았고 한신이 불만과 원망으로 모반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으나 군사에 대해서는 통달한 그인데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진희가 유방을 상대로 성공할리가 만무한 무모한 계획을 짜 제안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게다가 당시 상황으로는 유방은 반란을 제압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모두 진압하였으며 여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실제로 옮기고 있었다. 특히나 여후는 모략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 그 대표적인게 팽월이다. 물론 팽월은 한신보다 후에 죽었지만. 그래서 회음후로 강등되어 실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에 여후가 가장 먼저 한신을 죽이기 위해 모략으로 진희의 반란에 연루시켰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한신이 정말로 모반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한신이 미쳐서 진희에게 가담했고, 경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정보가 여후에게 흘러들어갔으며,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주고서는 순순하게 소하를 따라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당시 유방은 진희를 토벌하러 갔으며 후에 돌아올 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상 유방 또한 한신이 많은 심기를 건드리긴 했지만 엄청난 공적과 오래동안 함께 해온 것에 대한 것 때문에 어떤 정이 생긴 것인지 항상 유방 자신은 한신으로부터 군권을 박탈하고 강등을 시킬지언정 직접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유방 자신 또한 한신이 위협은 되지만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회음후로 강등시켜놓고 계속 구금시켜 놓은 것이다. 게다가 한신은 모반을 꾀했다고 그냥 참수만 했는데 실제 모반은 일으키지 않고 고향으로나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팽월은 죽일 뿐만 아니라 젓갈까지 담그어 제후들에게 보내었으니... 그리고 오히려 사실상 그 시기에 한신으로부터 가장 위험을 느낀 것은 유방이 아닌 여후였다. 유방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짐작하는 내용이고 유방이 죽고 나면 자신이 권력을 잡고자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게 한신이니... 여튼 한신의 최후는 유방이 아닌 여후가 계략을 짜서 소하를 이용해 한신을 죽인 셈.

소하가 여후 등에 의해 죽음을 면했던 근거도 "애초에 배신하려면 한참 전에 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의혹을 면하는데, 한신 또한 배신하려면 가왕이 되었을 시절이나 초왕시절에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한신이 한나라 영토의 2/3을 정벌하고 항우와 유방의 군력을 합친 것보다 많거나 또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하가 위 발언으로 숙청을 면했는데, 한신이 위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도 한신의 배신이 진실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위의 내용 이외에도 한신의 모반 가담은 수 없이 많은 의혹과 의문이 자리잡고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부분 진희의 모반에 가담해 죽은 것이 아니라 여후에게 죽었다고 본다. 특히나 현대에서도 그 의문은 더 커져 사실상 진희의 모반 가담은 부정되어 여후의 계략에 죽은 것으로 인정되며 각종 드라마나 영화 매체에서도 말년에 씁쓸히 지내다가 여후의 모략으로 자신이 죽는 것을 이미 예상하며 죽는 모습이 나온다.[58] 그래서 사기와 한서 등에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불의의 진시황 부친설 등과 함께 부정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한서는 한나라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실제 사마천 또한 저술 시기가 전한의 한무제 시절이었기에 한나라에 대한 명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시각이 많이 보여진다.

10. 평가[편집]

한신은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명장이었단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한신은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59] 시작하여 여섯개의 나라를[60]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61] 그 기간은 불과 몇 년에 불과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투방법을 총동원 했고, 다 이겼다.

물론 이렇게 한신이 상대한 적들이 비록 국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실상을 보자면 초한쟁패기에 전국시대 나라의 후예들이나 군벌들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한 정권들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은커녕 이전 전국시대의 열국에도 그 체제나 동원력이 어마어마한 경우와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상대한 군사의 질이나 적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 질이 막장이기는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에게 군사를 빼앗겼을 때도 아무리 자고있다지만 한나라의 사자라는 말만 듣고서 보고 한번 없이 지휘관 막사까지 냉큼 들여보내준 일도 한신 휘하의 병사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예.[62] 즉 한신이 특별히 정예군을 이끌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적을 두들겨 팬 것도 아니었고,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한쪽은 추풍낙엽으로 당하는 역할이었던 것에 비해, 한쪽은 무패의 군단이 되어 있었다. 이는 지휘관 능력의 차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찌질이 그 자체로 평가받았고,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즉 그전에는 제대로 군사 한번 다뤄본 적이 없었던 사람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거의 타고난 명장이라고 밖에는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지휘관으로서 활약만 엄청난게 아니라, 이좌거의 이야기를 듣고 연나라를 항복시키는 등 기본적인 식견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지휘관으로서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는게 대체적인 평가. 특히 처세술에 관해서는 거의 빵점이나 다름없었다.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한고제가 견제하고, 여후가 제거하고, 소하가 협력했으며, 장량이 그 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하는 것으로 이 결단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즉 한신은 그 당시 최고 실세 전원에게 찍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유방의 신하들 중 누구도 한신을 옹호하지 않았다.[63] 한신을 등용시킨 장본인인 하후영이 오히려 적이었던 계포를 위해 유방을 찾아가 힘써준 것과 비교하면 묘한 부분.

이미 전쟁 중에 한고제를 수없이 자극했고, 정작 괴철이 독립을 권했을 때는 "그래도 날 출세시켜준 게 유방인데, 그럴 수는 없지."라고 거절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신의 인간적인 의리가 돈독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게 역이기 사망한고제가 위급해졌을 때 왕 시켜달라고 하기 이후에 나온 말이라는게 문제다. 즉, 감정적, 정치적으로 어그로는 실컷 끌어놓고, 정작 본인이 자립할 수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는 부분이다. 당장 항우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무슨 상황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너는 나 형편없이 대했는데, 유방은 인간적으로 나 잘 대해주던데?"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나중에 모반 혐의가 걸리고도 유방이 자길 죽이진 않을거라 믿었던 모습 등을 보면, 한신은 자신이 한고제의 어그로를 끌었다고 생각도 못했거나, 아니면 자기가 그정도는 충분히 용서받을 만큼 유방과 가까웠다고 여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만무례하니 걸주같다니 하는 놈들도 다 웃어넘겨준 양반이라서 순박한 한신이 착각했을 수도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줄 조언자는 한명도 없이 기껏 있다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신과 비교해도 만만찮게 의심에 시달린 소하가 위기 때마다 어리버리타다가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 버텨낸 것과 비교되는 부분. 항우와는 다른 의미로 잘난 개인의 한계를 보여준달지.(...)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심지어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구원 요청을 씹고 사과도 하지 않았던 놈을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돈으로 치환하면 파산 위기인데, 자기가 키워준 부하라는 놈이 빌려준 돈도 갚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으며 후에도 인간적으로 갚아야 할 위기에 조건이나 걸거나 한다면 과연? 물론 한신 성격상 소심한 모습도 있기 때문에 대인배인 한고조가 그냥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한고조도 그런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를 잘 하지도 않고 있었고 사실 한신은 왕을 시켜달라고 해서 한고조가 깊은 분노를 드러낸 후에도 출정에 조건을 요구하는 비범함을 보인다. 알고 딱히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요구한 것이면 진짜 성격에 문제가 있고[64], 괜히 한고조가 항우를 끝내고 한신 진영으로 닥돌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고제에게 당하는 부분을 보면 황당함을 넘어 괴이할 정도인데, 사실 한신같은 전쟁 영웅은 군주로서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신은 너무나도 싱겁게 한고제에게 당해버렸는데, 잠자다가 털리기라든지, 제나라 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습에 한 번 걸려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잡혀서 초나라 왕이 되었으며, 초나라 왕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내가 죄가 없는데 어쩌기야 하겠어?" 같은 안일한 판단 때문에 역시 칼 한번 써보지 못하고 회음후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신이 반란할 마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데 크고 아름다운 한고제카리스마에 눌린 걸지도 모른다.

그를 위한 변명을 좀 하자면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 받은 것이었고 솔직히 한신이 사람들이 자신을 잘 따르게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항우는 몰라도 유방을 적으로 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방에게 황당한 방식으로 군사를 빼앗겼을 때도 남겨진 병사들은 그렇다 치고 같이 뒤통수를 맞은(...) 장이조차 별다른 말이 없었을 정도이니 유방의 장악력이란 게 생각 이상이었을 수도 있고, 항우와의 결전 이후에도 한신의 병력은 유방이 적으로 돌아선 순간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니 한신으로서는 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유방의 구원 요청을 거절한 것도 한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방이 그대로 고인이 되는 게 최선의 방법이 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까놓고 유방의 권위 없이는 병사들을 따르게 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한신은 사람들에게 정말 엄청난 충성을 받았던 인물들과 비교하면 어이없게 세력을 빼앗기며 실제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어이없게 몰락한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신의 태도가 이해가 간다.

사실 변명에서 나온 것처럼 한신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걸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왜 군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만 했는지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준 한신이 이토록 정세 판단에 어둡고 무능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 영웅들도 사람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완벽하거나 평균 이상일 수가 없어서 은근히 이런 유형의 영웅들이 많긴하다.

다만 과거의 안습하던 시절의 행적을 보면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밥을 빌어먹었다는 부분인데, 그 말은 저잣거리에서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뭔가 일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풀렸다는 말이 된다. 역사속에 기록된 한신의 행적을 보건데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스스로의 성격탓에 적을 만들고 그 결과 뭘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식의 인생이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미스터리 라기보다는 원래 용병술쪽으로만 스탯을 몰빵한 나머지 다른 쪽으로는 안습인 케릭터였다는거..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찌질이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모습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여담이지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했다." 아무래도 그런 인물이 사라져서 부담이 덜해진 부분은 기쁘지만, 그래도 대단한 열심히 공을 세운 위풍당당한 천하 명장이 그토록 허망하게 죽어버린 일에 대해서는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신을 토사구팽해서 후일 한이 흉노의 묵돌에게 개털렸다, 사냥 안 끝났는데 사냥개를 삶았으니 저렇다라는 말도 있는데, 흉노에게 대대적으로 털렸던 백등산 포위전 때 한신은 살아있었지만 병을 핑계로 종군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한나라 입장에서는 두번째 사냥을 하려는데 사냥개가 말은 안 듣고 있던 셈.

사실 유방 입장에선 굉장한 용력을 갖췄고, 중요할 때 보상을 탐하는 못 미더운 성정을 드러냈음에도 번번히 관직을 한단계 낮추는 견제 차원의 대응으로 끝내려 한 만큼 최대 공신인 한신에게 나름대로 예우를 차렸다고 볼 수 있다. 단번에 평민으로 강등시킨 뒤 귀양을 보내려고 하다가 찜찜하자 그냥 목을 자른 팽월이나, 다짜고짜 죽이려 한 번쾌에 비하면 천지차이였다.

10.1. 사마천의 평론[편집]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에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10.2. 사마광의 평론[편집]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汉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代)를 빼앗았으며, (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자치통감(資治通鑑)


10.3. 유방의 평가[편집]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 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 사기, 진승상세가


10.4. 이맹현(李孟賢)의 평가[편집]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 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46권,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10.5. 안처성(安處誠)의 평론[편집]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중종 2권,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10.6. 주희, 유희춘(柳希春)의 평가[편집]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楚)나라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유희춘의 재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었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10.7. 대만 역사학자 보양(栢楊)의 생각[편집]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30 中


10.8. 이중톈의 생각[편집]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10.9. 조선 효종의 의견[편집]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효종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10.10. 조선 순조의 의견[편집]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조선왕조실록, 순조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꼴에 왕이라고 한고조 편드는 호구왕(...)

11. 기타[편집]

장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한고제가 전국을 통일하고 난 후 역모의 의심을 받은 한신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평소부터 그를 존경해오던 병졸이 그에게 말했다.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중국 장기는 우리와 달리 중간에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라는 것. 물론 실제로 만든건 아니고 그러기 전에 그 시대에 종이라는 자체가 없었다! 그 시대에 종이가 존재했다. 다만, 서사도구로써의 종이는 후한대의 채륜이 기존의 종이를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65] 그만큼 한신이 대단하다는 걸 표현하는 일화일 뿐이다. 현대전이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듯이 고대전도 장기가 아니니까

12. 대중문화 속의 회음후 한신[편집]

한신/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1] 진말 당시는 동해군(東海郡)에 속했다.[2] 한나라 이후로도 중국 역사에서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뛰어난 장군을 칭송하면서 '그 옛날 한신과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3] 이 고사의 유래 자체는 범려(范蠡)의 일이다. 다만 워낙 이쪽이 임팩트가 강하고 널리 알려져 사실상 한신과 유방의 일을 가리킨다.[4] 한신의 생년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서 전적으로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B.C. 24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고제와 그 비슷한 세대인 소하, 장량, 조참 같은 수하 제장 그룹 보단 어린 게 확실해 보인다. 천하통일 이후 진시황 치세 속(B.C. 221∼B.C. 210)에서 각종 찌질한 일화를 남긴 회음 시절의 정황을 보면 그 시점 한신의 나이는 대략 20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B.C. 209년 발발한 진승과 오광의 난에 호응한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나이는 대략 이립(30대) 쯤에 접어들었지 않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B.C. 232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항우보다 약간 연상의 비슷한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한신의 몰년인 B.C. 196년 쯤엔 30대 후반~40대 초반 정도로 여겨진다.[5]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도시로 치자면 대략 하비 정도의 위치에 해당하며,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강소성 회안시 회음구에 해당한다. 회안시는 저우언라이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6] 심지어 초한지보다 정사를 더 많이 다루는 십팔사략에서도 한나라 왕족으로 소개된다. 이름이 한으로 시작한다고 한나라 사람인 건 아니라구요 화백님![7] 여기서 나오는 왕손이라는 표현 때문에 한신 한나라 왕족설이 나오기도 하는데, 청년에 대한 존칭에 가깝다. 당시 육국이 멸망하며 몰락한 왕족과 귀족들이 거리에 넘쳐나 청년들에 대한 존칭이 왕손과 공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감은 어째 이 양반 저양반 하는 느낌[8] 작가가 유방 타락하는 모습 보여주기 싫다고 초나라 망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내버린다.[9] 창을 들고 대기하는 사람, 보통 윗사람의 무기를 '들고' 있다가 요구에 맞춰 건네는 역할로, 창병같은 일반 병사조차 아니다.[10] 정확히 어떤 죄인지는 한서나 사기나 언급이 없다. 이문열의 초한지에서는, 유방 쪽에서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말단직에 앉게 되자 여러 건달들과 무리를 이뤄 막장짓을 하다가 딱 걸려서 형벌을 받게 된 것으로 나온다. 중국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한신이 항우에게 실망하고 용저와 원수가 되어 항우를 떠나 유방을 다시 찾으려고 서천에 들어왔지만 보초들에게 첩자로 오해받아 감옥에 갇혔다. 한신은 자기가 유방과 장량, 소하 등과 아는 사이니 풀어달라고 하지만 첩자를 잡으면 받는 상금에 눈이 멀고 정말일 경우 자기들이 벌을 받을까 무서웠던 보초들이 입막음을 겸해 처형을 강행.[11] 초한쟁웅에서는 하후영이 지나가다 아침부터 처형하는 장면을 이상하게 여겨 물을 때 목소리를 들은 한신이 필사적으로 자기 이름을 알려서 하후영이 풀어주는 걸로 연출.[12] 몇몇 미디어 매체에서는 소하 밑으로 배속.[13] 한서 한신전의 표현을 빌리면, 한신이 대장이 되자,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14] 유방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만약 유방이 촉에 처박혀 있으려거든 내부 단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서 분란의 씨앗을 심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방의 야망의 그릇, 혹은 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위기 의식을 보여준다. 둘째로, 도박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방은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유방의 부하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항우와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0에 가까운 확률이기 때문에 도박도 걸어 볼 만하다. 셋째로, 이 도박에 있어서 소하와의 관계이다. 유방은 소하가 없으면 자신의 세력을 이끌어나가기 몹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소하의 사람됨과 능력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소하는 유방과 항우의 전쟁 중에 배신은커녕 옛 진나라의 역량을 싹싹 긁어모아 유방을 뒷바라지한 인물이기에 소하 없이 내 야망이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라면 도박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가 자신이 오만무례하다는 혹평을 면전에다 대고 했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그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는 모습 또한 비범한 면이다.[15] 삼국지를 읽는 사람에게는 더 중요하다.[16] 후에 유방이 황제로 등극한 뒤 이곳에 장락궁을 짓고 그 외곽을 장안성이라 하였다.[17] 낙곡 전투 당시의 길.[18] 는 일반적으로는 "비낄 사"로 읽지만 이 경우는 "골짜기 이름 야"로 읽으므로 포야도가 옳다.[19] 일단 포야도의 잔도 수리가 장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긴 하였으나 군을 움직이고 물자를 나르는 등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만 했기에 착실하게 행하였고 이것이 장한을 더욱더 쉽게 속일 수 있는 요소였다.[20] 진창은 현재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로, 사천 땅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요지였다.[21] 회음후 한신과 한왕 신은 이름이 똑같다. 그래서 사기 열전에서는 한왕 신의 열전을 한신 열전이라 하고 회음후 한신은 열전에서 이례적으로 작위 이름인 회음후 열전이라 하였다. 사마천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2] 당시 항우와 그의 주력군은 제나라를 공격중이었는데 초반에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죄없는 제나라 백성들에게까지 만행을 저지르자 전횡과 전광 등이 패잔병 등을 수습하고 제나라 백성들이 그에 호응하여 저항했으며 이에 항우 또한 제나라를 정벌하지 못하고 고착 상태에 빠져 고전 중이었다. 그렇기에 지원군을 빠르고 쉽게 보내기는 어려웠다.[23] 나중에 그런 모습이 나오지만 이때 시점이 아니다. 그리고 팽성대전은 유방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으니 당연히 처음부터 유방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24] 소상국세가에서 찾으려면 나오지 않고, 항우 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25] 구상유취(口尙乳臭)의 유래.[26] 위표와 백직 중 누구를 어린놈이라 표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27] 한서 한신전[28] 조상국세가에서는 하열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9] 만약 대혈전이었다면 한군의 피해도 막심했을 것이며 정형으로 바로 진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30] 이후 조참의 군대는 유방의 군대에 합류했다.[31] 호왈이다. 실제로 20만은 안된다는 것.[32] 이는 당태종이 즐겨 쓴 작전이다.[33] 손자병법의 모공편[34] 실제로 이후 해하에서 한신은 항우군의 3배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항우의 군대를 끌어들여 포위섬멸하였다.[35] 전군이 출병하여 누벽이 비었다해도 누벽에 한 명의 병사도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나, 실제 사기(史記)에서 '누벽을 비어놓고'라고 하는 구절이 있을 정도면 극소수의 병사들만 남아있었을 것이다.[36] 한신은 지형과 전력을 고려하여 정말 교묘하게 배수진을 이용하였다. 지형을 보면 강만이 아니라 산에 기병들을 매복하게 하였고 전력도 정예병은 보병의 경우 같은 보병들을 상대 역시 정예병들이 있으니 이기지는 못해도 잡병들도 있을테니 최대 10배까지는 버티면서 대적할 수 있어서 전략의 승산이 충분하였으며 기병 역시 정예 기병들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최소 5배의 보병은 이길 수 있는 전력이라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아도 후방 공격을 통하여 뭔가를 도모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망해도 기병을 이용해 포위망의 일부를 풀고 정예병들은 살릴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뒤를 잡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술이 될 수 있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정면 공격에 맞는 부대 배치를 하게 되면 뒤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나마 일반적인 해법이 원형진공방이 쉽고 부대 대형을 바꾸기에도 유리하다. 같은 것을 시도하여 유동성과 기동성을 확보해 정면과 후방, 둘 중 하나를 빠르게 공략할 방법을 찾는 것이고 아니면 방진 같은 걸 구축해 후방 공격에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정면 공격 중 기병이 뒤통수를 노리면 심히 곤란하며 꽤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이 쉽지, 현대에 비해 통신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저렇게 대응하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까놓고 후방 공격을 알게 된 순간 이미 상황이 막장으로 되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즉 한신은 사지에 진을 치면서도 만약의 경우에도 쉽게 지지 않을 작전을 짠 것이다. 다른 배수진충들은 병사들을 죽도록 싸우게 만들자는 생각만 있었을 뿐. 그와 같은 요소(다른 지형 이용, 매복 등등)들이 없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진여가 너무 멍청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실제 현실에서 병력을 숨기는 건도 생각보다 어렵고 숨길 수 있는 지형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과 상대를 속일 수 있는 머리가 필요하다.현실에서도 판단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을 속이거나 하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명장들의 각종 전략과 전술을 따라하려고 한 사람들 중에 너무 어설퍼서 망하고 조롱을 당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37] 당시 관념에서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으라 양으로,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라 음으로 생각했기에 자리를 동서로 배치할 경우 동쪽 자리를 상석, 서쪽 자리를 하석으로 여겼다.[38] 고려 시대의 이인로는 이를 보고 옛날 과하지욕의 때를 거론하며 "한 칼로써 소년들의 모욕을 보복하지 않더니, 도리어 천금을 써서 항복한 포로를 찾는구나."라고 했다.[39] 유방이 한신에게는 제나라 정벌을 명하고, 그와 동시에 역이기에게는 제나라 항복을 권유토록 하였다. 역이기 토사구팽?[40] 현재의 산둥성 리청현. BC 3,000년 경의 고대 문화인 룽산문화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다.[41] 상황이 어쨌든 쫓겨온 주군을 마중하긴커녕 잠자고 있었던데다 유방도 노골적으로 한신을 무시하고 군사권을 재정비했으니, 한신으로서도 유방의 신뢰가 떨어졌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성고 전역의 유방을 원조하지 못한 이유도 이 제나라 정벌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정벌을 역이기가 말 몇마디로 해치운다면, 자신의 체면은 완전 병X이 되고 유방에게도 지지리 도움 안 되는 놈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즉 이때 한신은 어떻게든 공훈을 세우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서 유방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던 것. 그리고 실제로 한신은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으나, 이것은 유방의 신뢰를 얻기는커녕 그를 잠재적 위협으로 각인시켰다.[42] 물론 이성왕들은 대부분 유방에게 당해버렸지만... 그러나 장사왕의 자리를 유지한 오예나, 비록 왕 자리는 잃었어도 가문은 좋게 보존한 장오처럼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한신의 군대에 박살나는 일보다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43] 여담으로 초한대전이 모두 끝난 후 황제가 된 유방은 오호도라는 섬으로 도망가있던 제왕 전광의 숙부 전횡에게 '그대를 왕으로 삼아줄 터이니 지난 날의 아픔은 잊자'고 하며 낙양으로 올 것을 명하고, 역이기의 동생 역상에게도 전횡에게 해코지할 경우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낙양으로 오던 중 '천자께서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삶아 죽인 자의 동생을 죄스러워 어찌 본단 말인가. 이제 낙양이 멀지 않았으니 여기서 내 목을 베어 가져간다면 썩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결해버렸다. 유방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고 두 식객을 도위로 임명했으나 그 두 식객마저 전횡의 무덤 앞에서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한신의 행동은 전씨와 역씨에게는 이토록 상처였고 비극이었다.[44] 산둥성 웨이팡에 있는 시.[45] 한서 한신전[46] 살수대첩이 훨씬 뒤의 이야기다.[47] 이 상황이 사기 회음후열전이나 한서 한신전에는 유방이 형양성에서 포위당하여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묘사가 되는데, 고조본기나 한서 고제기를 보면 이미 형양은 5월 기신의 일이 있었을 때 함락당했고, 한신이 용저를 격파하고 왕 자리를 요구한 일은 11월의 일이다. 한서의 언급을 보면 당시 유방은 광무(廣武)에서 대치를 하다가 성고에 머무르고 있었다.[48] 한서 한신전에는 진평도 같이 조언을 올렸다.[49] 요약하면 이렇다. "오늘날 장이진여는 원래 서로 문경지교라고 일컫던 사이였건만 논공행상에서 다툼이 생기자 서로 죽이려드는 원수가 되었고, 옛날 범려는 월왕 구천을 평생 섬기며 그를 패자(覇者)로 만들었지만 정작 그 후에 구천은 공이 높은 범려를 의심해 범려는 스스로 떠났습니다. 이제 그대(한신)와 한왕의 사이는 장이와 진여 사이만큼 각별하지도 못하고, 그대가 한왕께 보인 충성은 범려의 구천에 대한 그것만 못합니다. 게다가 그대와 한왕 사이의 갈등요소는 장이와 진여 사이의 갈등보다 훨씬 심각하고, 그대가 한왕께 바친 전공은 천하를 진동시켜 범려를 뛰어넘었습니다. 지(智)와 용(勇)이 주인을 두렵게 만들 정도의 신하는 위태로워지고, 공훈이 온 세상을 덮은 이에겐 오히려 상이 가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할진대 정녕 한왕이 그대와의 의리를 불변히 지킬 거라 믿으십니까?"[50] 신간정상평화전한서속집의 그림[51] 현 카이펑 부근[52] 하남성 태강현[53] 뒷날 고려시대 현종 때 영업전 문제로 분개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서경 유수였던 이자림이 현종에게 이 유방이 운몽에서 한신을 사로잡은 고사를 예로 들어 무신들을 토벌할 계책을 현종에게 진언했다. 현종은 이 계책을 받아들여 무신들과 함께 연회를 베푼 후 무신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이들을 진압한다.[54] 번쾌의 성격상 이는 진심으로 한신을 존중한 것이다.[55] 순서대로 소하가 한신을 따라가서 잡는 장면, 단을 쌓아 대장으로 봉하는 장면, 약법 3장을 짓는 장면. 앞의 두 폭은 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志傳)에, 마지막 그림은 경본통속연의안감전한지전(京本通俗演義安鑒全漢志傳)에 실려있는 그림이다.[56] 한신이 삶아져서 죽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분명히 참수를 당해 죽었다. 팽형에 처해졌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토사구팽' 고사의 이미지 때문으로 보인다.[57] 한신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한몫했다는 이유로 상국(相國)에 임명되었다.[58] 대표적으로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선 한신이 여후에게 죽은 것으로 나온다. 위 영화에서는 한신에 대한 재해석과 모반과 관련된 현대의 해석이 덧붙여진 영화이다. 한고제와 다른 공신들은 50-60대의 노년이지만 한신은 35세의 젊은 나이었고, 공신이었으나 강한 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위험한 가신으로 그려진다. 나아가 홍문연에서 한고제의 탈출도 한신이 도왔다고 보기까지 한다.[59] 대부분이 제대로된 정예병조차 아니였으며 실제로는 3만이 채 되지 않고 지원도 잘 받지 못하고 오히려 유방이 군사를 뺏어가는 등 상황은 항상 열악했다.[60] 대, 위, 조, 연, 제, 초[61] 진여는 대왕(代王) 이었다.[62] 그건 우리나라 군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성판만달면 안보고 그냥 통과시켜주는데 .그런데 사실 이는 좀 미묘한 것이 고대에는 신분 높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사칭할 두뇌와 배짱만 있으면 여간한 짓들은 다 통하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유방은 한신 휘하의 병사들 입장에서도 진짜 높으신 분이었다. [63] 이런 면에서 보면 한신이 번쾌를 불쾌하게 여긴 이유도 설명할 여지는 있을지도 모른다. 회음후로 강등되는 동안은 가만히 있더니 집에 찾아와서 정중하게 대한다면 한신 입장에선 심사가 꼬일 만도 하다.[64] 게다가 회음후로 강등된 이후에도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한다거나 병등을 핑계로 한고조의 평정에 응하지 않는등 태도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65] 무엇보다도 상에 해당하는건 먼 옛날에는 초나라 땅에 코끼리가 살았으니 가능하지만 포는 대포인데 이 당시에 화약무기는 없었다. 투석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없다. 즉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나무위키에서 펌함

 
 
 

# 인재(창의적 공부)

modest-i 2017. 3. 14. 23:34

큰일을 하려면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즉 인재를 부리려면
먼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상대의 가치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혜안을 가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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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점] Part 3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키워라

 

큰일을 하려면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즉 인재를 부리려면 먼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상대의 가치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혜안을 가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한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인 주발은 원래 시장에서 북치고 피리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발은 학식은 없으나 용감하고 명령을 반드시 수행했기 때문에 점점 유방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주발의 관직이 높아지자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유방에게 "왜 뛰어난 곳이 없는 주발을 중용하냐"고 묻자 유방은,

"나 역시 별다른 재주가 없는 몸인데 어떻게 여러분의 윗사람이 될 수 있었겠소?

순전히 사람을 좀 볼 줄 알기 때문 아니겠소?

성품이 간사한 자는 마음속에 꿍꿍이가 있어 기회만 이용하려고 하는 법이오.

이런 사람은 설사 큰 공이 있어도 호랑이를 키우는 꼴이기에 기용할 수 없소.

그러나 주발은 성실하고 충직하여 절대로 딴마음을 품을 위인이 아니라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

이것이 주발을 기용한 이유라오."

유방의 극진한 대우에 감격한 주발은 어려운 일에 앞장서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유방이 세상을 떠날 때, 황후였던 여후에게 "유씨를 안정시킬 것은 반드시 주발이요"라며 주발을 태위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 후 여후가 전권을 휘두르며 여씨를 왕으로 봉하려 하자 우승상 왕릉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주발은 오히려 여씨를 옹립하는데 찬성하였습니다.

그러자 왕릉은 몹시 분개해서 주발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토록 오래 고조를 보필한 자네가 이제 와서 배반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주발은 솔직히 말했습니다.

"일이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거역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젠가 저의 고충을 아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 후 왕릉은 쫓겨나고 주발은 여후에게 더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여후가 죽자 주발은 그제야 세를 규합해 여씨를 폐하고 다시 유씨를 황제로 세웠습니다.

 

주발은 형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한 대항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보전했을 뿐 아니라

훗날을 도모했습니다.


결국 유방이 주발을 제대로 본 셈입니다. ("유씨를 안정시킬 것은 반드시 주발이요")





왕릉은 총명하고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전략을 드러냈기 때문에

권세를 빼앗기고

반격할 힘마저 잃었습니다.


그에게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성사를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큰 일을 하려면 일의 경중과 선후를 잘 살펴, 큰 국면을 우선하고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어야 합니다.

 

모디스티 첨삭 / 착점에서


사람은 됨됨이가 신중해야

조바심으로 일을 그르쳐 화근을 남기지 않는다


공격의 칸날을 상대가 모르게 잘 감추고 있어야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어

일을 성사시킬 수있다




시장에서 북치고 피리불던 주발이, 개국공신이 되고 유방이 죽은 뒤에도 유씨를 안정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된 것은,

주발의 중후한 인품을 알아본 유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백락과 천리마'라는 말처럼,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있어야

천리마가 천리마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리마의 재질을 가진 말이라도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천리마가 되기 힘들 것입니다.

 





유방은 일찌기 말하길,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는 데 있어 나는 장량만 못하다.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군대의 양식을 대주는 데 있어 나는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데 있어 나는 한신만 못하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얻어 이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주발같이 재능이 없는 사람도

유방을 만나 스스로를 큰 업적을 낸 인물로 만들 수 있었다면,



정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