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전쟁:알아야

modest-i 2017. 3. 15. 19:05

1. 관도대전

 






관도대전만큼 삼국지에서 흥미로운 전투도 드물 것이다.

하북을 제압하고 중원으로 내려온 원소와 중원을 제압하고 그에 맞서 싸운 조조...

 

과거에는 친구였고 동지였지만, 둘 중 한 명은 사라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후세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소가 영토의 크기나 병사의 수, 명성에서는 조조보다 앞서 있었지만, 그 자신의 능력면에서는 조조에게 못미쳤다고 한다.

관도전투를 마지막으로 조조는 적어도 살아 생전에는 그의 세력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는 당하지 않았다.


이제 관도대전 전의 양자의 상황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조는 중원에서 거병했기에 초기부터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어 견제가 심했고

헌제를 옹립한 뒤에는 한층 더했다.


남쪽엔 강동의 손책,

형주(荊州)의 유표,

남양(南陽)의 원술,

완성(宛城)의 장수,

서쪽엔 서량(西)의 마등 ·한수,

동쪽엔 여포와 유비가 있어 조조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형세 속에서 조조는 일부 세력을 흡수하는 한편

자신에게 적대시 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배제하는데 성공하였다.

 

먼저 원술은 손책의 옥새를 바탕으로 황제를 칭하다 제일먼저 조조,손책,유비,여포에게 협공을 받고 멸망한다.


이어서 서주를 지배하고 있던 삼국지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던 여포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조조에게 패해 어이없이 죽고,


유비는 그후 조조에게 공격을 받고 원소에게 의지하러 가고 그의 지지세력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어서 완성의 장수를 달래서 싸움없이 귀순시키는데 성공한다.


마등은 연합하기로 되어있던 유비가 한싸움에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미쳐 손써보지도 못하고 정세를 지켜보게 되었고


유표는 늙어서 더이상 싸움의 뜻이 없었다.


손책은 사냥중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이없이 세상을 뜨게 된다.

 





한편 원소는 조조가 중원에서 여러 세력과 각축을 벌이는 것을 호기로 삼고 먼저 하북을 제압하기로 마음먹고는

오랜 숙적관계였던 공손찬을 공격해서 그를 제거하고 잔존세력을 모두 흡수하여 제일가는 세력을 가지게 되다.


이때 유비에게 동맹요청이 들어오고 이를 수락한후 원소또한 중원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원소는 모사 전풍의 권유와 유비의 구원요청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아서

          조조가 서주를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방관하게 된다.

 

원소는 장수,유표를 한편으로 만들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새롭게 강자로 부상한 손책을 끌어들이지만 손책이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이또한 무산된다.

만일 손책이 이때 죽지않고 건재했다면 관도대전은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손책은 원소와 더불어 조조를 칠 계획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책사후 강동이 새롭게 손권을 맞아 대대적인 내부정비에 들어가면서 조조는 한숨을 덜게 된다.







관도대전당시의 양쪽의 인물들을 보면

 

조조 진영엔 하후돈, 장요, 우금, 조홍, 허저, 서황, 관우 등의 무장과

                 순욱, 순유, 정욱, 곽가, 가후, 유엽 등의 모사가 있었고,


원소 진영엔 안량, 문추, 장합, 고람, 순우경 같은 무장과

                 전풍, 저수, 허유, 곽도, 심배 등의 모사가 있었다.


모사나 무장의 질이나 수를 보더라도 양세력 모두 비슷했었다.


하지만 그 지명도에서는 조조측이 더 알려져 있는데

원소가 공손찬 토벌뒤 큰 싸움이 없던 것에 비해서


조조는 관도대전 바로전까지 치열한 싸움을 했기에

그 이름을 날릴 기회가 조조휘하의 인물에게 더 많았기 때문이지


결코 원소의 부하들이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원소측의 인물들이 결점이 크게 보이는 이유에는 그들을 잘 아우르지 못한 원소에게 문제가 있었다.







이제 조조와 원소 둘의 능력을 살펴보자면

 

조조는 결단력이 있어서 작은 기회라도 주어지면 그것을 활용할 줄 알았지만


원소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점은 조조의 서주침공시 조조가 비워둔 허도를 공략하지 못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조조는 일단 결정이 나면 끝까지 그것을 추진력있게 밀고 나갔지만


원소는 수시로 생각을 바꾸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시행해서

참모들을 혼란시켰는데

이것은 결정적으로 원소가 조조보다 무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조조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줄 알았지만

원소는 아니었다.


원소는 지구전을 주장한 전풍을 옥에 가두고,

저수는 참모자리에서 쫒아버린다.

또한 심배와 허유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며 중요한 전투중에 심배를 어이없이 뒤로 빼돌려버린다.


방어에 능숙하지 않은 순우경에게 거점인 오소를 지킬 것을 명하고,

허유의 의견 또한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내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게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보이는 영토와 병력을 보자면

 

조조는 중원의 예주와 연주의 2주와 서주일부가 세력권이었는데 반해서

원소는 황하이북의 유주, 기주, 병주, 청주의 4개주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당연히 인구수는 원소측이 훨씬 많았고

원소는 공손찬을 멸한 이후 한동안 전투가 없었기에 비축해둔 군수물자 또한 조조보다 많았다.



동원한 군사의 수는 조조가 다른 전선에서 빼올 수 있는 한 최대한 빼와서 모은 병사가 2만정도였던데 비해서

원소는 그 수가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조조는 남쪽의 유표, 손권이나 서쪽의 마등, 한수가 밀고 올 것을 대비해서 일부 병력을 남겨야 했지만


원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관도대전 자체를 한번 살펴보자.

 

원소의 군사가 조조보다 배이상 많았기에 당연히 조조는 방어에 치중하였고 원소는 공세로 나왔다.


원소는 여양에 진영을 구축하고 싸움에 나서지만

곧이어 벌어진 백마, 연진전투에서 조조의 유인, 기만책에 말려서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잃게된다.


두 맹장을 잃은 원소는 진을 양무로 옮겨 공세를 펴게 되고


이에 맞선 조조는 소수 기마를 이용한 기동전략,  발석차 같은 신무기로 대등한 전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초봄에 시작된 전투가 가을이 되자 병참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원소가 오랬동안 식량을 비축한 것에 비하면

조조는 관도대전직전까지 전투를 했기에 군사의 수는 원소가 더 많았지만 조조의 형편이 더 어려웠다..



게다가 조조군이 선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절대적인 수가 적었기에 사망자와 부상자,탈주병을 제외하면

실제로 싸울 병사의 수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안좋아 지자 조조는 근거지인 허도까지 철수해서

그곳의 병사와 합쳐서 결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는 허도를 지키고 있는 순욱에게 밀서를 보내 뜻을 묻게된다.

 

하지만 순욱은 후퇴하면 민심이 이반되고

여러 지방호족들이 등을 돌릴것이니

후퇴불가라는 뜻을 담은 답신을

허도에서 모을 수 있는 식량과 함께 보내면서

조조를 격려한다.



이사이 원소의 참모들은 전국의 상황이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일부병력을 떼내어서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를 급습하자는 전략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원소는 조조의 함정일지 모른다며 유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

 





양측의 대치속에 시간이 지나서 어느덧 10월이 되고 조조측은 다시금 식량이 바닥을 보인다.

이에 군량을 재촉하는 밀서를 순욱에게 보내지만

밀서는 원소의 참모 허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허유는 크게 기뻐하며 밀서를 원소에게 보이며

즉시 조조의 보급로와 그에 따른 총공격를 건의한다.


그러나 원소는 함정을 의심하고

때마침 허유의 집안이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알려지면서

원소는 오히려 그를 꾸짖고는 물리친다.

 




이런 원소에게 크게 실망한 허유는 원소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날 밤 조조에게 투항해 버린다. 

사실상 여기서 관도전투의 향배가 가려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허유가 찾아 왔다는 소리를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반긴다.

허유가 밀서를 내놓고 허도 기습안을 원소가 거부한 것을 이야기하자

조조는 깜짝 놀라며 향후 계책을 묻는다.

 

허유는 원소의 군량이 관도근처 오소에 쌓여 있고

대장 순우경의 방비가 부실하니 그곳을 칠 것을 권한다.


이에 조조는 즉각 5,000명의 정병을 뽑아 앞장서서 진격을 하고


이 공격에 원소군은 군사를 나누어 반격에 나서지만


오소와 조조본진 어느 한 곳 공격을 성공못하고 대패를 하여


원소는 800기만 거느린채 간신히 근거지인 업으로 도주한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모사인 저수, 전풍은 잡혀 죽고

무장인 장합과 고람은 항복하게 되며

순우경이 죽고 7만이 넘는 군사를 잃는 등 크나큰 대패를 당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원소가 직접적으로 쓰러지게 된 창정싸움을 살펴보자.

 

창정전투는 관도전투의 연장선이자

원소가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투인데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조조는 여세를 몰아

여남에서 재기한 유비를 형주로 몰아내고는

원소군을 멸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 4주에 격문을 띄워 그

의 아들들이 이끌고 온 군사와 살아남은 병사를 정비해서 다시 한번 전투에 임하게 된다.

 

하지만 전풍, 저수, 순우경이 죽고

허유, 장합, 고람이 배신함으로써


모사의 수가 현격히 부족하게 되는데

여기서 원소는 남아있는 모사중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는 심배에게

어이없이 침략의 염려가 없는 근거지를 지킬 것을 명하게 된다.


이는 곧 조조의 계략을 간파못하고 패배로 연결된다.



창정에서 만난 양군의 초기접전에서 원소군은 조조군의 기세를 꺽고 대등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에 놀란 조조는 계략을 쓰기로 하고는

이전처럼 기습안을 채택해서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원소는 이에 즉각 대응하고 반격에 나서지만

각지에 매복해 있던 조조군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하고

대배하여 다시 업으로 도망가게 된다.





그후 원소는 비통해하며 숨을 거두게 되며

그의 사후 아들들은 일치단결하여 조조와 싸우지 않고 계승권을 놓고 다투고

모사들 또한 분열됨으로써 어이없이 하북을 조조에게 내주게 된다..




결국 원소는 마지막까지 후계자를 명확히 하지 못함으로서 그 결단력 없음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는 말았다.



 



공인중개사 주택관리사 모임 카페에서 펌하고 모디스티가 각색함    2017,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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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st-i 2015. 11. 26. 18:58
(24) 끝나지 않은 전쟁-시리즈 完.

늘 전쟁터를 서성이다

1946년의 겨울은 혼란스러웠다. 고향인 평양을 떠나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의 풍경을 접했을 때 느낌이 그랬다. 군사영어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한반도 남쪽의 군문(軍門) 생활에 접어든 지 14년에 나는 군복을 벗었다. 4.19가 벌어진 직후였다. 그런 뒤에 나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60년 자유중국(대만) 대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5.16이 벌어진 뒤에는 다시 주(駐)프랑스 대사로서 서방 6개국, 아프리카 13개 국가의 대사를 겸임했다. 우리의 국력이 약해 여러 나라에 동시에 대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뒤 나는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교통부 장관을 약 1년 반 정도 지낸 뒤 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맡아 석유화학 산업의 근기(根基)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산업화를 이뤄 국력을 키우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나라가 부유해져야 병(兵)을 키우는 법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전사자 명부를 보고 있다. /조선일보 DB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전사자 명부를 보고 있다. /조선일보 DB

 

 

동양사회의 오랜 꿈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선후(先後)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지 않으면 강병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해방 뒤의 혼란에 김일성 군대의 남침은 그 도를 크게 더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우리는 우선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꺾은 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편승해 국력을 놀라울 정도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전쟁 뒤의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산업화에 전력을 기울인 까닭이다. 그 모든 과정은 정말이지,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4.19 뒤 외교관으로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펼쳐지는 산업화의 일선에서 그런 점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교관으로 약 10년 동안 해외에 주재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에 대사로 주재할 때였다. 사람들이 간혹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나서는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발걸음은 유럽의 옛 전쟁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전쟁터 주변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접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의아심을 품기도 했다. 나는 나폴레옹 군대와 영국의 웰링턴 군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던 워털루 전쟁터를 아주 여러 번, 미군 주도의 연합군이 상륙했던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비치 등을 자주 배회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진격하면서 독일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라인강의 강변 또한 내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싸움을 회고했다. 사람 사이의 전쟁은 왜 벌어지는가, 그리고 전쟁은 어떻게 펼쳐지는가, 누가 그런 싸움에서 이기며 어떤 이가 질까, 왜 이 지형에서 커다란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 벌어졌을까 등을 묻고 또 물었다.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런 싸움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품어야 한다. 그런 참혹한 싸움에 나서는 군인의 어깨는 따라서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내게 군대를 좀 더 일찍 떠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 때문이었다. 1956년 5월 25일에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3선에 성공했다. 부통령 투표가 화제였는데,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 장면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개표 시비가 벌어져 정국이 매우 소란했다.

6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호출했다. 경무대에 들어서자 대통령은 “자네, 내무부 장관 자리를 맡게”라고 했다. 개표 시비로 사직한 김형근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내무부 장관은 매우 비중이 높은 자리였다. 그로써 개인적인 영달은 이루겠지만, 전국 각 지역의 행정과 선거 등을 관리하는 자리여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민감했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며칠 생각해 본 뒤 결정하겠다”고만 했다.

사흘 뒤 나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의견을 피력했다. 가족과 상의한 결과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끝까지 군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만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러나 그런 내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4.19가 벌어진 뒤 타의에 의해 군문에서 일찌감치 떠났고, 예기치 않았던 외교관 생활에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 초석 닦기에 나서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전쟁터를 쉬이 떠날 수 없었다. 외교관 시절에 유명 전쟁터를 찾아다녔고, 석유화학산업에 종사할 때도 각종 전쟁 기록을 찾아 읽었다.

그런 나의 습성은 아무래도 참혹했던 6.25전쟁터를 누볐던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전쟁의 기록을 살피면서도 내 마음은 늘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터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 싸움에서 제대로 싸웠던 것일까’를 물으면서 말이다.

당시의 전쟁에 나섰던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은 대개 경험이 없었다. 그를 대신할 교육의 기회도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느닷없이 벌인 김일성 군대의 침략 전쟁의 초반에는 우리 모두 당황했다. 쉽게 나아가고, 쉽게 무너져 등을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싸우려는 의지는 약하지 않았으나 싸움터의 참혹함을 견디면서 침착하게 적의 약점을 노리는 일에는 강하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할 때는 매우 용감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요동을 칠 때는 쉽게 무너지는 모습도 보였다. 오랜 훈련과 치밀한 조직을 통해 성장한 군대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

 

나를 이겨야 남을 이긴다

따라서 중공군 개입과 1951년 봄까지 벌어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보였던 우리의 싸움 방식은 스스로 지닌 기질, 습성, 사고 등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봐야 옳다. 그런 방식은 여러 교훈을 준다. 감성적 반응은 활발했지만 전쟁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면서 움직이는 이성적 측면은 부족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나아감은 빠르지만, 불리한 경우에 도달하면 스스로 공황상태에 쉽게 빠져들어 물러섬이 또한 신속했다.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옆에서 함께 싸우는 아군과의 연계를 쉽게 잊은 점도 눈에 띈다. 그로써 전선을 허물어뜨리고 옆의 아군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인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상황이 자주 닥친다. 결정적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할 때가 전쟁터에 선 군인에게는 잦다는 얘기다. 그럴 때의 결단(決斷)이 부족하다는 점도 당시 전쟁터의 한국군 지휘관에게 자주 눈에 띈다.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이 무너졌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일이다. 피비린내 가득 풍기는 전쟁터에 서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아주 일반적인 감성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두려움에 젖어 스스로를 먼저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다.

오랜 훈련, 치밀한 조직, 그를 뒷받침하는 화력과 장비 및 물자 등이 싸움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내면적인 요소를 따지면 결국 두려움을 비롯한 사사로운 감정을 누가 억누르고 싸움터에 나서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 점을 극기(克己)라는 낱말로 표현할 때가 많은 편이다.

장병(將兵)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일반 사병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 기능을 숙지하면서 유사시에 대오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장교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오랜 사고와 훈련을 통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싸움을 이어가며 승리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제 나라 군대가 그렇게 가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치적으로는 무풍(無風) 지대를 형성하고, 장병 개개인이 군대의 조직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낌없는 지원이 덧붙여져야 하고, 나라 경제의 강고함을 이뤄 물자와 화력 등을 철저하게 받쳐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까. 우리 장병들은 60여 년 전의 전쟁 경험을 살려 전기(戰技)와 함께 정신적 역량을 제대로 쌓고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의 모든 과정이 싸움과 다름이 없다면, 우리사회는 그런 싸움의 철리(哲理)를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두루 마음에 걸려 이 회고를 적었다. 성원해주신 많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스러져간 6.25전쟁의 숱한 영웅들을 기리며-. 끝.

<정리=유광종>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투자=전쟁:알아야

modest-i 2015. 11. 22. 20:06

모디스티 들어가기

 

몇 년 전 마샬을 정독하고 정독하여 많은 감명을 받았다

 

2015.11.21 중앙일보에 '인간의 품격'이라는 서평에서 '자신을 낮춰서 더 빛난 사람들'에 마샬이 들어가 내용을 보고

다시 한 번 더 마샬을 접하게 되면서 유용할 자료가 될 것 같아 펌하고 각색을 하였다

 

                              2015.11.22  모디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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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육군준장 | 2010-02-17 11:17:42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영웅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미 육군은 규모가 17만 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1차대전 직후 중립법안에 의해 다른 나라의 정책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먼로독트린의 영향 때문에 군을 급격하게 감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군대를 불과 5년만에 830만이라는 대육군으로 증강시킨 사람이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마셜 장군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군대를 무려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보급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하고 뒷받침하는 병참능력을 설비한 장군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떨쳤고

 

개성과 자존심이 강했던 대통령과 대영제국의 수상 사이를 원만하게 조율하였을 뿐만 아니라

패튼과 맥아더를 조율했고,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전장을 동시에 지휘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 육군과 해군간에 유례없는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끌어 내었고 연합군을 통합하여 단일지휘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미 육군과 공군 사이의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끌어내 마침내 전승을 거둔 승리의 설계자(Orgnizer of victory)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마셜을 “마지막 위대한 미국인”이라 평가하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역사상 미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군인”이라고 칭송하였으며,트루만 대통령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2차대전 후 몰락한 유럽 동맹국들과 독일 등 적국들이 폐허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전후복구 부흥계획인 마셜계획을 입안하여 집행함으로써 유럽의 경제 재건과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공산화의 확산을 막고 자유진영의 보루를 강화하였다. 이 경제 부흥안의 성공으로 평화를 유지하였고 정치, 경제, 군사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마셜은 미 대통령의 중국특사, 미국 적십자사 총재, 국방장관 등 대단히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특히 미국은 국방장관으로 임명 시 현역에서 옷을 벗고 10년이 경과해야 국방장관을 할 수 있는데, 마샬은 이 조항을 누르고 임명되었다.

그만큼 그는 직무를 공정하게 수행했고 이에 대해서는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성 장관도 인정하였다.

 

 

 

그는 마셜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중에 가장 자기희생적인 공직자였다”고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그 결과 타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1943년과

전후 냉전이 절정에 다달았던 1947년 두 번에 걸쳐 마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마셜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또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기회와 보상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령, 인종, 성별을 불문하고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발탁하여 활용하였다.

 


 

 

 

 

 

조지 마셜의 성장기와 전쟁준비

 

마셜은 1880년 12월 31일 펜실베니아주 유니온 타운에서 석탄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 버지니아 주립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마셜은 첫 부임지인 필리핀에서 2년을 근무한 후 미 본토 중서부 지역에서 군부대와 훈련소에서 몇 가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지와 험난한 지역에서 근무를 하면서 그는 인내심과 극기심을 연마하였고, 평생 연구하는 습관을 체득하였다.

 

1906년에 육군 보병 및 기병학교에 입교하였고 수석졸업한 성적우수자로 2년동안 교관으로 재직할 수 있었다.

그는 이때에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그의 전기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교관 중 한사람이었던 모리슨 소령으로부터

규칙 위주의 구식교리 대신 새로운 생각이 접목된 시각을 가져야 함을 배웠고

 

                                     모든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

 


 

 

 

 

 

지휘참모대에 재직하는 동안 마셜은 주 방위군과 민병대에서도 근무하였고 1913년에 다시 필리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 대위로 승진하여 참모장교로서 프랑스 전선에서 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참전하였다.

대전후 퍼싱 장군의 부관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유능한 장교”라는 극찬을 받고

1924년까지 5년동안 육군 참모총장 보좌관직을 수행했다.

1924년 마셜은 3번째 아시아 근무를 했는데 이전과 달리 중국 텐진에 주둔한 15연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그는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의 중국어 실력은 법정에서 증인들이 진술하는 것을 중국어로 받아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3년 후 마셜은 미 육군대학원의 교관으로 선발되었으나 아내의 사망으로 이 보직을 포기하고 육군 보병학교 교수부장직을 택하였다. 이때 그는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현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도상 전술훈련과 전투실상 간에 차이점을 이해 시키고 이론에 치우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셜 보병전술(infantry in battle)’을 저술하여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들의 관점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전쟁에는 교통법규와 같은 규칙은 없으며,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상황과 조건에서 발생하는 전투에서는

                     똑같은 상황이 두 번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현대전은 신속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이길 수 없는 게임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2차대전에서 활약하게 되는 다수의 뛰어난 장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셜은 200여 명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장군들을 교육하였다. 특히 오마 브래들리는 “나는 효과적인 지휘에 관한 모든 것을 마셜에게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관들에게 “학생들을 지도할때는 학생들이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상상하게 만들라”고 강조하면서

해답찾기식의 교수법을 버리고

창의력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교수법을 채택하였다.

 

또 그는 다음 전쟁의 초기 6개월을 연구하라는 훈시를 학생장교들에게 하곤 하였다.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몰트리에의 제8보병연대장을 역임하고 군문에 들어선 지 35년이 지난 1936년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워싱턴주 포트밴쿠버에서 3사단 예하의 여단장을 수행하였다.

 

마셜의 화려한 경력은 1938년에 그가 워싱턴주를 떠나 미국방부 전쟁기획국장에 보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미 육군 참모총장에 발탁되면서 시작되었다.

 

 

 

 

 

 

국방부 핵심직위에 발탁된 마셜은 미 육군의 현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특히 공군력의 증강 및 향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공석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원로 장군 32명 대신 마셜을 선발하였다. 1

939년 9월 1일은 마셜이 미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이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미 육군 장군들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략계획 수립에 익숙하지 않았다.

마셜은 미 본토 방위를 넘어선 새로운 전략이 필요함을 직감하고 전쟁준비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앞서가면서 미리 준비하였으며,

                                       동료들이나 경쟁자들보다 한걸음 앞섰던 사람이었다.

 

 

1920년대에 이미 미래의 미군 장군들을 선발하였으며 1930년에는 미국의 전쟁준비를 위해 노력했고, 1940년에는 독일과의 전세계에 걸친 전쟁가능성에 대비하여 참모들을 준비시켰다.

그의 한발 앞선 것 중 가장 놀라운 점은 미국이 유럽에서 독일과, 태평양에서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발생하였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예측하고 전후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마셜은 육군 휘하에 향후 민사문제를 전문으로 담당할 부서를 창설하였고 이 부서에 일본과 독일에 대한 점령정책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참모들에게도 전후 1차대전 직후에 벌어졌던 문제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패전국 처리문제에 대비하고 효과적인 점령정책을 준비하라고 강조했다.

 


 

 

 

 

먼로독트린에 의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미 상하원의원들은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의원들을 일일이 설득하였다. 1940년 초 전쟁이 전세계로 확산되자 마셜은 노력을 배가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육군의 평시동원을 단행하였고, 현대전에 대한 이해와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원로장군들을 전역시키고 열정적인 젊은 장교들을 중용하였다. 육군과 해군의 관계를 호전시켜 전시 원활한 합동작전수행에 필요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1941년 3월 11일, 당시 전쟁을 지속할 물자와 재정이 부족한 연합군들에게 대륙양여법(Land lease)을 채택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를 하였다. 미국의 대륙양여법에 의해 영국이 310억 달러, 소련이 110억 달러, 프랑스 30억 달러, 중국 15억 달러 등 486억 달러를 지원하였다. 마셜은 의회와 국민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가 징병을 실시하였고, 이 조치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였을 때 빛을 발했다.

 

 

 

 

 

 

 

 

 


참모총장 기용 배경과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위 선택

 

1938년 11월 4일 미 육군 참모차장이었던 마셜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참모총장을 선발하는 데에 대통령의 의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셜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육군 항공단의 증강을 위해 항공기 1만 대를 제작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자 마셜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루스벨트는 항공기 1만 대 제작에 필요한 비용 승인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항공기 정비와 조종사 양성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통령이 회의에 참석한 참모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셜에게도 의견을 묻자 그는 “ 대통령 각하 죄송하지만 저는 각하의 계획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라고 냉정하게 답변하였다.

순간 당황한 루스벨트는 회의를 서둘러 종료하였다.

 


 

 

 

이후 6개월이 지나자 루스벨트는 마셜을 백악관으로 불러 그를 참모총장에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대통령은 마셜의 정직한 직언에 감동했던 것이다.

 

마셜은 총장직 수락 직전에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 드릴 것이며 때때로 저의 태도는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루스벨트는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이것은 소장 22명, 중장 8명을 뛰어넘는 파격인사였다. 그는 준장에서 대장으로, 그것도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바로 진출한 장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가장 치열했던 1943년 말, 마셜은 유럽본토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륙작전의 필요성 문제가 일단락되자 세인들의 관심은 과연 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알려진 사상 최대의 군사작전을 지휘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마셜은 연합군을 지휘할 사령관이 되는 데 문제점이 없었다.

 


 

 

 

 

루스벨트도 마셜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했으며 그가 이 직책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고려하면서 아이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참모총장보다 최고사령관을 기억할 것이므로 나는 마셜을 임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내리는데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전쟁 전체에서 마셜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장군들이 있었지만 마셜만큼 전략적 안목을 겸비한 인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통령은 진퇴양난의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대통령은 마셜이 사령관직을 요구할 경우에만 그를 임명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때 마셜은 자신의 이익과 입장보다는 국가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통령의 지시에 따를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게 하여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위는 아이크에게 돌아갔다.

 

아이크는 이 직책을 발판으로 하여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마셜은 항상 국가에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5월 8일 스팀슨 전쟁성 장관은 마셜에게 “이기적인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셜 당신이 진정한 위인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셜은 아이크의 일을 대신할 수 있지만,

아이크는 마셜의 일을 대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마셜이 최고사령관이 되지 못한 이유이자 루스벨트가 결심을 굳힌 요인이었다.

 


 

 

 

 

 

마셜의 전략적 리더십

 

전략적 리더란 다가올 미래에 대해 주로 초점을 맞추는 사람으로서

 

그는 조직이 달성하기를 바라는 장기 최종상태의 그림을 그리는 전략적 비전을 발전 시켰다.

 

 

 

1952년 자신의 제자이자 부하였던 아이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셜은 당선을 축하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특히 강조하였다. ‘나는 당신이 좋은 인재를 선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바로 이들이 당신에 대한 역사의 기록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에 맞는 훌륭한 인재를 찾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셜의 조언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던 중 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마셜에게 전혀 새로운 전쟁으로 접어들었다고 하면서 중국에 대한 대량보복을 건의하였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에 반대하였으며 자기의 반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트루먼은 이 상황에 대해 마셜에게 조언을 구했다. 마셜은 숙고한 끝에 맥아더를 해임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마셜은 맥아더가 전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증가가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타임지는 이에 대해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을 해고한 사건이라고 했다. 최종적으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기로 결정한 트루먼은 특정개인의 인기보다 문민통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으며 마셜도 이에 동조하였다.

 


 

 

 

마셜은 전후에 미국 적십자 총재직을 수락했다. 그가 이 직책을 수락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물리적,심리적 의료지원이 필요한 수많은 참전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은퇴한 이후에도 마셜은 자신의 부하였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사기와 복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마셜 리더십의 요체

 

마셜이 지상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완벽한 임무수행과 책임감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신만의 독특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무감,

 

자기절제,

 

청렴,

 

정직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마셜은 후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인물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강직하고 근면하며 겸손한 리더십은 세계대전의 승리의 설계자이자 좌절에 빠진 유럽 경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

 

 

다재다능한 인재를 발굴하는 마셜의 뛰어난 능력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아이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2차대전 초기 마셜은 당시 중령에 불과한 아이크를 선발하여 그보다 계급이 높은 350명의 선배장교를 제치고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한국전쟁 중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로톤 콜린스도 소령을 17년 달았는데 마셜은 콜린스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3년 후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마셜이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여 취한 최초의 조치는 육군의 진급제도 개선이었다.

역사가들은 마셜이 취한 조치가 미 육군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마셜의 은퇴는 며칠 가지 않았다. 그가 참모총장에서 물러난 지 10일 후 대통령 특사로서 중국에 가서 모택동과 장개석 간의 내전을 말리는 중재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 역할을 성공하지 못했지만 트루먼은 1947년 1월 그를 국무장관에 발탁하였다. 그는 과로로 건강이 좋지 않아 스스로 국무장관직을 물러났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1950년 다시 국방장관직에 기용하였다. 마셜은 이 자리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등 유엔군과 나토군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옹호하였다. 그는 1951년 공직에서 완전 은퇴하였으며, 1953년에 유럽부흥 마셜계획의 성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장교후보생들에게 그는 리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위대한 리더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전투와 전쟁은 장비부족, 식량 고갈, 물자부족등 이겨내야 할 어려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위대한 리더는 다가온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는 자질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대가(大家)란 말하는 대신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티내지 않고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공을 넘기는 사람이다.”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세기의 리더였던 마셜 장군은 1959년 10월 16일 워싱턴에서 서거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첫째, 그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 정직의 문화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리더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비평이나 의견을 수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가 정직함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나는 귀관들에게 실망했다. 왜냐하면 일주일 내내 내가 처리한 수많은 일에 대해 단 하나의 반대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며 좋은 인상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직의 결정에 대한 비판과 반대 의견을 발굴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그는 항상 인내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1910년 버지니아 주립 사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셜은

                                                                        짧은 휴가의 대부분을 영국 육군의 활동에 대해 연구하며 보냈고,

                                                                        1913년 휴가중에는 1905년 러일전쟁 전적지를 연구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전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도 여행하였다.

 

어느 누구도 마셜에게 여행과 연구를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았고

 

 

 

후배들에게 “기회는 언젠가 온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군 내 그를 대체할 참모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참모 재능은 오히려 그의 진로의 발목을 잡을 정도였다.

 

미국 시민들이 군사력 증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셜은

                                                                                         미래전쟁에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시민군을 들고,

                                                                                         만약 시민군 육성에 실패하면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첫 일년간은 매우 힘든 상황이 될 것임을 예측하였다.

 

 

미군이 2차대전에 무리없이 돌입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마셜의 판단에 기인하였다.

 


 

 

 

 

 

 

셋째, 그는 선배들이 피 흘려 치르고 배운 경험을 높이 평가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셜은 병사들이 앞으로 싸우게 될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면 알수록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쟁의 이유와 배경 그리고 전쟁에서 배워야 할 교훈과 승리하는 군대의 비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그는 전쟁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전쟁의 결과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미국이 마셜이 주도했던 것과 같은 준비와 대비를 하지 못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7년이나 1948년까지 계속 되었을 것이고

수 천만 명이 더 희생 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처칠은 평시에 미 육군이 보유했던 소규모 참모진이 어떻게 대규모 군대를 건설하고 뛰어난 지도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며,

그것은 예술의 경지였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마셜은 국가의 산업생산력을 전시 생산력으로 전환시킨 주무자였다.

 


 

 

 

 

 

 

 

넷째, 그는 항상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마셜은 전쟁의 위험에 대하여 계속 경고음을 발산하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을 호소하였으나 미 의회는 마셜의 경고를 여러 차례 무시하였다.

 

그는 위기를 측정하고 대비하며

       조직의 경보시스템을 갖추고

       모의훈련을 하고,

 

        그 결과를 피드백 하는

            위기관리 절차에 따라

            대책을 강구하였다.

 

마셜은 한국전쟁 중 또 다시 미 육군을 재건하면서 모든 것이 이완되어 있으며 나태와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3번의 큰 전쟁에서 모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마셜은 강한 군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방예산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다섯째, 그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이를 간결하고 요약된 형태로 설명하거나 브리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지 마셜은 모든 면에서 간결한 형태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어떤 문제든 한 페이지 이내로 간략히 요약되어 있지 않으면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문서보고나 구두보고를 간략하게 줄여야 하며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사전에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했다면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처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퍼싱 장군의 부관을 하면서도 그랬고,

 

참모총장시절 대통령에게도 “각하 제게 3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하고 대통령에게 준비된 자료를 브리핑했다.

 

육군의 상황에 대한 참모총장의 간결하고 솔직한 보고에 대해 루스벨트는 마음을 움직여 마셜의 건의를 대부분 수용하여 결정을 내렸다.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