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동학의 부활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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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2020. 6. 2.

 

 

시일식 전야 동덕님들과의 대화

 

 

 

비가 내리는 숙소에서의 아침

 

 

 

 

 

 

 

 

 

 

이 기념탑은 당초 동학혁명기념탑 부근에 건립하려 했지만, 유족들의 뜻에 따라 독립자금의 최초 모금처였고 시발지였던

회진면 신상리에 건립하기로 하고 2008년 5월 15일에 제막식을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 근대 장흥의 개화를 앞당긴 회진면 덕도德島(명덕明德) 역사 이야기
덕도는 회진항과 연계된 섬(島嶼)이었다. 덕산리, 장산리, 대리, 신상리, 신덕리 5개 마을이 덕도라고 불리었으며 또 다른 섬인 노력리까지 포함되어 그 지역을 덕도 혹은 명덕이라고 지칭 하였다. 지리적으로는 장흥의 남단이며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1964년 연륙이 되기까지는 주민들의 일상 생활이 많은 제약을 받는 오지奧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덕도 주민들의 역사 의식은 장흥군 전역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근대사의 변환기에는 민족성이 투철하고 일찍이 개화를 수용한 선진 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덕도 주민들의 개화의식과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회진면 근대 교육의 시원은 장덕長德 신학술강습회가 그 효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김재계 선생께서 5월에 신상리에 장흥교구사범 198호 강습소를 개원하여 이어서 연정리蓮亭 연지리蓮池에도 설립 수백명의 청년 자제들에게 신문화를 교육 하였다.
그 후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신학술강습회는 덕도사립양영학교로부터 출발 하였다. 1921년 천도교리 강습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병후 명의로 인가를 신청하여 당시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지사로부터 인가를 얻었고 매년 갱신하여 1924년까지 운영 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천도교 교인들의 주축이 되어 민족 정신을 구현하는 강의를 빌미 삼아 인가를 보류 하였다.
덕도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0년 덕도 신상리 천도교 교회당에서 덕도 간이 학교를 개설하여 그해 4월 19명의 학생을 모집 하여 개교 하였다. 이 학교가 명덕초등학교의 전신인바 덕도의 신식 교육의 시초는 111년의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민족 종교인 천도교의 교리와 민족 자정의 의식으로 출범한 간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항일의 의식 교육과 근대의 시대에 대응하는 개화의 교육 과정으로 덕도 주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1906년 (포덕布德47년) 장흥의 천도교인들은 장흥군 부내면 교촌리에 (현 장흥읍 교촌리) 천도교 교구를 창립하고 각 면단위에 전교실을 세워 신앙과 전도에 대대적으로 정진하였다. 장흥이 낳은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재계(1888-1942) 선생 같은 탁월한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무인멸왜. 독립성취 기도와 시천주 주문이 덕도 일원을 덮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덕도의 천도교인들과 주민들은 기도와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항일 독립 운동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덕도의 신덕마을 앞에는 2006년에 조성된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중임을 맡고 있던 김재계 선생을 비롯하여 김재반, 황생주, 황 업주 등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중앙본부에 전달 하였다.
1918년을 전후 해서는 3.1독립만세운동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으며 이에 그 해 3월6일 군내郡內에서 모금한 거금 5백원을 전달 하였다. 이 자금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하여 서울에서 전남 일원으로 날라다가 비밀리에 배부하는 역활을 감당하였다. 그런 연유로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의 거사일인 3월 1일에는 정작 조직적인 만세 운동에 동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3월15일을 전후 해서 장흥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의 지도자들과 장흥의 애국 지사들은 일경日警과 헌병憲兵의 대대적이고 치밀한 감시와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지속적이고 산발적인 기습 만세 시위로 장흥인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의 후유증으로 일제의 탄압이 문화 침탈 내선일체의 고도화된 모양으로 전개되고 조직적인 감시는 강화 되었다, 그러나 덕도의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6년을 전후하여 독립자금의 헌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열성과 참여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무려 235인의 주민들이 헌성 모금을 하였으며 그렇게 모금된 자금은 관산 대평리 거주 김영화 교인의사敎人義士와 회진 명덕 거주 한오화 교인의사敎人義士 두분이 부인婦人의 처지임에도 불구 하고 회진에서 영산포까지 걸어가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일경과 왜헌병의 감시를 피해 중앙본부에 전달 하였다.


출처: https://jhculture.tistory.com/800 [장흥문화원]

 

 

정남진

 

 

 

타워에 올랐으나  조망이 영~~~

 

 

 

 

 

 

시일을 모시기 위해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동덕님들.

 

 

 

천도교 장흥교당

 

 

 

 

 

 

 

 

 

 

 

 

시일식

집례 : 정덕재 동덕님

 

 

 

 

 

 

장흥교구장님의 심고

 

 

 

 

 

 

 

 

 

 

오늘 입교식을 갖는 동덕님의 경전봉독

 

 

 

 

 

 

성강현 동덕님의 설교

 

 

 

 

 

 

 

 

 

시일식에 이어진 입교식에서의 전교자 두 분

 

 

 

전교자와 다섯 분의 수교자

 

 

 

 

 

 

 

 

 

 

 

 

 

오늘의 전교자 중 한 분이신 판화가 박홍규 화백

 

 

 

수교자

 

 

 

수교자

 

 

 

수교자

 

 

 

수교자

 

 

 

 

 

 

 

 

 

 

 

 

 

 

 

 

 

 

청수분작

 

 

 

 

 

 

 

 

 

 원불교 교무님과  스님께서 천도교 시일식에 와주셨습니다.

 

 

 

교당에 내걸린 박홍규 동덕님의 작품 들

 

 

 

 

 

 

 

 

 

 

 

 

 

일포 이우원 선도사님의 환영 소리 '천명'

 

 

 

 

 

 

 

 

 

前 종무원장님의 강의

 

 

 

 

 

 

 

 

 

 

 

 

영회당 오름길 마삭줄의 향기

 

 

 

 

 

 

시일식을 마치고 남산 자락에 자리한 '영회당'을 찾았다.

장흥 동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꼭 찾아봐야 할 유적이라는 생각에서다.

 

 

 

 

 

 

 

박헌양부사 순절비각

 

 

 

 

 

 

 

 

 

역사의 편린을 어줍잖은 이내 알량함으로 헤아리고 주절거리기엔,

지금까지도 서로간에 앙금이 남아있다는데야....

 

 

 

귀로, 원불교 장흥 교당을 방문하여 교무님과 환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