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나라임자 2020. 5. 2. 07:20
조선말 죽이기는 조선민족 없애기 정책
  •  리대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  승인 2020.05.01 08:20
  •  댓글 0

일본은 조선민족독립 막으려 조선어학회사건 조작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전쟁에 우리 겨레를 동원하려고 내선일체정책을 펴고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을 안 하고 학생들이 우리말을 쓰지도 못하게 하면서 1940년에는 일본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행한다. 그리고 1941년에 미국의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동남아와 중국까지 침략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우리 겨레를 그 전쟁터에 군인, 노무자, 위안부로 끌고 간다. 그리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펴면서 소학교 이름도 ‘국민 학교’로 바꾸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민족주의자들을 회유 친일분자로 만들고 민족 운동 단체를 해산한다.

그러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해 조선어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그 도움이들까지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학회도 강제 해산시킨다. 내선일체 정책으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친일파가 되었는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어사전 만들기는 민족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8명을 조사하고 33명을 입건한 것이다. 이 학회의 여러 인물들이 우리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고 지난날 신간회와 수양동우회 사건 인물들이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하거나 민족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 집결지로 본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33명은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이중화, 이우식, 김법린, 이인, 김양수, 김도연, 장현식, 장지영, 정열모, 김윤경, 이석린, 권승욱,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서승효, 윤병호, 이은상, 정인섭, 서민호, 안재홍, 신현모,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 들이었는데 사전 만들기 전문가인 국어학자와 민족운동가, 재정지원자와 후원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모진 고문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돌아가셨다. 기소된 33명 말고도 곽상훈, 정세권, 김두백, 백낙준, 임형규, 김연준 들 표준어 만들기와 후원금을 낸 이들도 유치장에 가두고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1949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인 십일회 모습 찍그림.
1949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인 십일회 모습 찍그림.

일제는 이들을 형무소에 가두고 민족독립 운동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물 먹이기, 공중에 매달고 때리기, 메어치기, 난장질하기, 불로 지지기, 동지끼리 서로 때리기 들들 모진 고문을 했다. 그렇게 옥살이를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망했는데도 조선어학회 분들을 옥에서 내보내지 않아 함흥 유지들이 형무소에 항의해 8월 17일에 풀려나왔는데 어떤 분은 들것에 실려서, 어떤 분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오더란다. 만약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지 않고 더 세월이 흘렀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우리 말글과 민족은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유럽, 미국, 일본들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편한 직장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것을 우러러볼 일이다.

다행히 광복이 되어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말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찾고 조선어학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해 교과서도 우리 말글로 만들고 우리말 사전도 낼 수 있었다. 광복 뒤 조선어학회는 한글교과서를 만들어 미국 군정청에 기증하고 미국 군정청에 최현배(편수국장)와 장지영(편수 부국장) 이병기(편수과장)와 김선기(편수관)가 들어가서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한글 교육 책임자로 일했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한글교사를 양성하면서 일제가 못쓰게 한 우리말을 도로 찾아서 쓰기 운동을 했다. 미 군정청은 1946년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경축했다. 1947년에는 안재홍이 미 군정청 민정장관이 되는 등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많은 일을 한다.

조선어학회가 한글로 만들어 미 군정청에 기증한 교과서 “한글 첫 걸음”
조선어학회가 한글로 만들어 미 군정청에 기증한 교과서 “한글 첫 걸음”

그런데 조선어학회 주장과 정신은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해서 우리겨레 얼을 지키고 튼튼한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광복 뒤 남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조선어학회 사람들도 둘로 갈라져서 남북에서 활동한다. 남쪽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때 조선어학회 회원인 안호상이 초대 문교부장관이 되어 한글전용법을 만들고 2대 문교부장관에 백낙준, 3대 문교부장관에 김법린, 문교부 차관에 김선기, 편수국장에 최현배들이 임명되어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한글 살리고 빛내기에 힘쓴다. 또한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에 이인, 재무부장관에 김도연 들 학회 회원이 맡아 나라 기틀을 잡는 일을 했다.

북쪽은 주시경 제자 김두봉과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낸 이극로와 이만규 들 여러 회원들이 조선어학회 주장과 정신을 남쪽보다 더 잘 실천했다. 그러나 남쪽은 이희승이 일본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적자는 한자혼용을 주장해서 오랫동안 문자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한글전용과 한자혼용 주장자들이 싸웠다. 다행히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하자는 주장이 승리하는 가 했더니 미국말 섬기기 바람이 일어 우리 말글이 다시 어렵게 되었다. 하루빨리 남북이 하나 되어 일제 때 목숨을 바쳐서 우리말을 지킨 조선어학회 정신으로 우리 말글을 빛내야겠다. 우리 말글은 빛내는 일은 우리 겨레가 빛나는 일이다.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은 일은 그 어떤 겨레사랑운동보다 가장 크고 훌륭한 독립운동이고 건국 준비운동이었다. 이 이 큰 말글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목숨을 잃은 분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말 독립운동에 앞장을 서다가 1940년에 우리 말글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일본에 항거해 194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명균님과 우리 말글을 지키고 살리려고 애쓴 모든 분들, 그리고 조선어학회가 그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절을 한다. 그리고 또 다시 나라 빼앗기고 제 말글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없기를 빌고 다짐한다.

 
 
 

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나라임자 2019. 11. 8. 16:13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교과서 ‘사민필지’와 ‘독립신문’ 우리 말글 독립위한 새벽빛이고 말글살이 혁명이었다
  •  리대로 한국인공지능학회 회장
  •  승인 2019.11.07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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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회장
이대로 회장

1446년부터 한글을 썼지만 조선시대 배움 책은 한자로만 썼다. 그런데 545년이 지난 고종 때인 1991년에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한글로 ‘ᄉᆞ민필지’란 배움 책을 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놀라운 일이고, 거룩한 일이다. 그리고 그 5년이 지난 고종 때인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이 주시경과 헐버트 도움을 받아 한글로 ‘독립신문’을 냈다. 이 둘 모두 한자를 한 글자도 안 쓰고 우리말을 한글로만 쓴 것으로서 어두운 밤을 밝히고 새벽을 여는 빛이었다. 또 두 일은 우리말 독립운동 발자취에서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 다음으로 가장 크고 뜻이 깊은 큰일이었다. 그것도 외국인이 나서서 그렇게 한 것은 매우 남다른 일이고 뜻 깊은 일이다.

왼쪽은 1891년 나온 ‘사민필지’ 머리 글, 오른쪽은 1896년 나온 ‘독립신문’ 제1권 제 1호.      사민필지는 띄어쓰기는 안 했지만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한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이다.
왼쪽은 1891년 나온 ‘사민필지’ 머리 글, 오른쪽은 1896년 나온 ‘독립신문’ 제1권 제 1호. 사민필지는 띄어쓰기는 안 했지만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한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이다.

‘ᄉᆞ민필지’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이 한글로 쓴 배움 책이다. 헐버트는 고종 때인 1886년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서양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 선생으로 왔는데 한국에 ‘한글’이란 제 글자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글자는 중국 한자보다 더 훌륭한 글자인데 한국인들은 안 쓰고 한자로 쓴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스스로 우리 말글을 배워서 3년 만인 1889년에 “선비나 백성들 모두 꼴 알아야 할 것이란 뜻을 담은 ‘ᄉᆞ민필지(士民必知)’란 세계 사회지리책을 써서 1891년에 출판한 것이다. 헐버트는 이 책 머리글에서 제 말글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좋은데 한국인들이 쉬운 제 말글로 세상 공부는 하지 않고 한문으로 쓴 책을 더 좋아하고 배우고 읽는 것이 안타까워 이 책을 낸다고 말하고 있다.

헐버트는 한글을 배우면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을 만든 세종을 우러러보게 되었고 영문으로 세계에 한글과 세종을 알리는 글을 썼으며, 한국인보다 한글과 한국을 더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신식 교육을 반대하는 한국 선비들과 한국인들을 깨우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방해해서 ‘육영공원’이 1991년에 문을 닫게 되어 헐버트는 그 해 12월에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한국이 좋아서 1993년에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 안에 있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그 출판사에서 인쇄를 하면서 영문판 조필로 일한다. 그 때 한글판 조필은 배재학교 학생으로서 독립신문사 간사로 일하는 주시경이 맡았다. 독립신문은 ‘건양’이란 우리 연호를 쓰고 한양을 ‘서울’이라고 우리 토박이 이름을 쓴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이 사민필지는 배재학당과 여러 학교에서 교과서도 이용했으며 일반인들도 읽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주시경은 1898년 6월 역사지지특별과를 졸업했는데 세계 사회지리책인 사민필지로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신분으로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고 1900년에 배재학당 보통과에서 영어를 전공하면서 외국어 문법공부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글학자가 되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와 학부 안에 설립한 국문연구소에서 주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주시경과 배재학당을 다닌 이승만이 1898년에 한글신문인 ‘협성회회보(학생회지)’를 만들고 이 신문이 한글 전용 일간지인 매일신보로 발전하는데 모두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로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영향으로 보인다.

한글로 쓴 사민필지(왼쪽)로 공부한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8년 한글로 쓴 일간신문 매일신문.
한글로 쓴 사민필지(왼쪽)로 공부한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8년 한글로 쓴 일간신문 매일신문.

그런데 한글로만 만든 사민필지를 1895년에 한문으로 번역해서 내고, 1889년에 유길준이 그의 일본인 스승인 일본 사상가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이란 것을 보고 국한문 혼용 교과서인 ‘서유견문’을 내고, 1895년 학부가 ‘소학독본’을 내고 1902년에 “만국지리지”란 교과서를 한자혼용으로 낸다. 또한 1898년 처음 윤치호가 ‘대한황성신문’이란 이름으로 한글로 만들던 신문을 8월에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이 뒤면서 장지연, 남국억 들이 인수해 ‘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한자혼용으로 낸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1899년에 폐간되었다. 그러니 우리말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는 우리말 독립 꿈은 물거품이 되고 일본식 한자혼용 세상으로 가다가 1910년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왼쪽부터 1895년 한글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바꾼 한문 士民必知, 1998년에 유길준이 일본인 스승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을 보고 한자혼용으로 쓴 서유견문, 1895년 학부가 낸 한자혼용으로 낸 책.
왼쪽부터 1895년 한글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바꾼 한문 士民必知, 1998년에 유길준이 일본인 스승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을 보고 한자혼용으로 쓴 서유견문, 1895년 학부가 낸 한자혼용으로 낸 책.

[사민필지 머리 글: 매우 뜻이 깊은 글이라 현대어로 풀어 바꿔 소개한다]

천하 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각각 본지방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 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는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각국 풍습을 어찌 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접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에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면 정의가 서로 두덮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 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갖게 한 연후에야 외국 교접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또 생각건대 중국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땅덩이와 풍우박뢰의 어떠함을 먼저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 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교접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보시기를 그윽이 바라옵나이다.

조선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씀


 
 
 

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나라임자 2019. 11. 6. 15:18
'조선왕조실록' 등 한글로 집필했다면 어떤 역사 나왔을까
  •  리대로 한국인공지능학회 회장
  •  승인 2019.11.0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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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세종대왕과 그 아들인 세조, 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년 동안 정부에서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그 뒤 연산군 때부터 그런 흐름이 사라졌다
이대로 회장
이대로 회장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그 아들인 세조, 그리고 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년 동안 정부에서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그 뒤 연산군 때부터 그런 흐름이 사라졌다. 500여년 동안 정부 공문서를 한글로 쓰지 않았다. 조선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도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고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한글전용법을 만들고도 한 동안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깨어있는 나라임자들이 한글을 써야 된다고 외치고 애써서 이제 간신히 한글이 살아나고 공문서는 한글로 쓰고 있다.

나는 우리 말글 독립운동 발자취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 왕조실록부터 한글로 쓰기 시작하고, 공문서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중국 지배를 받고 한글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는 어쩔 수 없이 한자로 썼더라도 중국 지배를 벗어난 1894년 대한제국 때부터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아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라도 공문서를 한글로 썼으면 한글이 살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이 세종대왕처럼 자주, 개혁 창조 정신이 없는데다가 뿌리 깊은 남의 말 섬기는 버릇(언어 사대주의)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세종은 새 글자를 알리려고 성스러운 조선왕조와 종교 이야기, 그리고 동전까지 한글로 썼다.
세종은 새 글자를 알리려고 성스러운 조선왕조와 종교 이야기, 그리고 동전까지 한글로 썼다.

 

조선시대 말글살이 모습. 한문으로 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시대 교지(이순신에게 내린 임명장)
조선시대 말글살이 모습. 한문으로 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시대 교지(이순신에게 내린 임명장)

1894년 조선 고종은 칙령 1호 공문식(公文式) 14조에서 “모든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漢文)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용한다”고 발표한다. 이 일은 한문만 쓰던 공문서를 국문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정한 것이 첫째 큰 의미가 있고 다음으로 언문, 반절, 암클들로 불리던 우리 글자를 처음으로 ‘나라글자(국문)’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데 큰 뜻이 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본식 한자혼용(1886년 창간한 한성주보가 혼용)이 시작되어서 국한문 혼용도 같이 하게 했다는 것이 큰 부끄러움이다. 그 때 지배층은 한글보다 한문을 더 좋아하고 한글을 잘 모르는 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고종 때 한글(국문)을 살려서 쓰려고 지석영, 주시경 들이 연구하고 애썼다. 그러나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자리에서 쫓겨나면서 그 기세가 꺾인다. 1907년에 지석영, 주시경들은 정부에 국어연구소를 차리고 한글을 살려 쓸 정책을 마련하려고 애썼으나 그 해 일제에 의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다. 한편 주시경은 상동교회에서 조선어 강습원을 차리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쓰게 하려고 애썼으며 1908년에서 그가 한글을 가르친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 민간 국어연구학회(오늘날 한글학회 처음 이름)을 창립한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894년 고종 31년 11월 21일(계사) 칙령 제1호를 발표한 관보. 이때까지 공문은 한문이다.
1894년 고종 31년 11월 21일(계사) 칙령 제1호를 발표한 관보. 이때까지 공문은 한문이다.
고종 때 공문서는 한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칙령에 따라 쓴 한글과 한문, 혼용 글.
고종 때 공문서는 한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칙령에 따라 쓴 한글과 한문, 혼용 글.

주시경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나 한글을 살려서 우리 겨레와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은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 나라가 되었으니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글이 국문이 되었으니 우리말을 국어, 우리 글자를 국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글자를 한겨레의 글, 으뜸가는 글, 한국의 글이라는 뜻을 담아서 우리 말글로 ‘한글’이라고 지었다. 우리말은 한겨레의 말, 으뜸가는 우리글이라는 뜻을 담아 ‘한말’이라고 새 이름을 지어서 부르며 우리 말글을 살리려고 애를 쓴 것이다. 주시경은 한글책 보따리를 들고 여러 학교를 다니며 가르치고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를 만들다가 1904년에 갑자기 이 세상을 뜨니 한글은 빛을 잃는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이 세상을 뜨면서 3월 1일에 기미독립운동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때 기미독립선언서도 일본처럼 한자혼용이었다, 그 해에 중국 상해에서 망명한 애국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그 뒤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문서도 한자혼용이거나 한자로만 썼었다. 그 때 주시경 제자요 한글전용 주장자인 김두봉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공문서를 한글로 쓰지 않은 것이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중국 땅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보지만 내부 문서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한자로만 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왼쪽)와 성명서(오른쪽).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한자로만 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왼쪽)와 성명서(오른쪽).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이 이 땅을 점령하고 미국 군정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에 모든 교과서를 한글로 쓰고 공문서도 영어와 함께 한글로 쓴다. 그 때 조선어학회 출신인 안재홍이 민정장관(미국 민정장관과 동격), 이인이 법무부장, 재무부장에 김도연이 활동하고 교과서 만들기에 최현배가 참여하면서 1947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었다. 모든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공문서도 영문과 함께 한글로 썼다. 참으로 잘한 일이고 다행스러웠다.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어쩔 수 없을 때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법(법률 제6호)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한글을 쓰기 시작한 1446년부터 500년 동안 공문서 하나도 한글로 쓰지 않았다. 세계 으뜸가는 제 글자가 있는데도 안 썼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고 뉘우치고 이제라도 잘해야 할 것이다. 매우 잘못된 일이고 뉘우칠 일이다.

한자혼용으로 쓴 1961년 계엄사령관 공고문(왼쪽), 오른쪽은 1962년 한국은행 공고문.
한자혼용으로 쓴 1961년 계엄사령관 공고문(왼쪽), 오른쪽은 1962년 한국은행 공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