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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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좋은 시

2020. 2. 11.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 정일근

 

第 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 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마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자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宣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이천리 대해 밧게 잇난 마암

 

정일근

  

 

세한도를 그리는 밤 오늘따라 대정바다는 참으로 고요합니다 부인. 지난 달 초사흘 가복을 통해 보내주신 서책과 편지를 이 달 하순 늦게야 반가이 받아 읽으며, 이순의 나이에도 천 리 뭍길과 천 리 물길 큰 바다를 건너온 그리운 묵향내음에 그만 울컥 눈물이 솟아올라 한참이나 바다에 나가 망망한 제주바다 끝을 바라보며, 그 끝너머 지붕과 흰 옷 입은 사람들과 낯익은 길들이 하마 뵐까 돋움발을 하며 오래오래 서있었습니다. 대저 그리움이란, 불시에 찾아와 대정마을 마른 풀 한 포기, 버려져 잠든 돌멩이 하나 남김없이 흔들어 깨워 윙윙윙 울리다가 바다로 달아나는 붙잡을 수도 없는 무형의 저 겨울바람만 같아, 문득문득 지난 날들이 찾아올 때면 참으려 참으려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이제는 오랜 버릇인 양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인 오늘 저녁도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먹고 내 배소 앞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날 저물고 샌다한들 내 이름 부르며 찾아올 이 없는 위리안치, 이보다 이천 리 밖 더욱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외로울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치와 당을 멀리하고 시와 글씨에 열중하였더라면 뜬구름 같은 한세상 은은한 묵향과 힘찬 시문으로 경영하며, 이렇게 늙어 서로 쓸쓸하고 등 시린 이 나이에 작은 초가 한 칸으로도 넉넉할 것을, 마주대는 한 뼘 등덜미로도 치운 겨우살이 또한 지극히 따뜻할 것을, 이 밤늦도록 홀로 먹을 갈아 세한도를 그리며 언뜻언뜻 덮쳐오는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죽음의 아득한 예감들을 애써 떨치며, 뒤돌아보노라면 내 배소 뒤 대밭 사이로 쏴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소리보다 더욱 허허로운 지난 세월들을 하얀 여백으로 비워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며 살아갈 날들 또한 하얀 여백으로 묵묵히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