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國史

마틴신 2020. 7. 6. 07:22

 

 

 

장미전쟁은 백년전쟁 직후인 15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 때 발생한 내전으로 두 귀족 가문인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인 권력쟁탈전이다.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각각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란을 종식시킨것은 권력다툼의 당사자였던 랭커스터나 요크가문이 아니라 튜터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헨리 튜터(헨리 7세)는 튜터가의 문장으로 화합을 상징하기 위해서 흰장미와 붉은장미를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이 내전은 장미전쟁이라는 이름과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참혹한 권력투쟁전이였으며 1455년에 발발하여 무려 30년간이나 지속되면서 잉글랜드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대규모 전투가 10 여차례 이상 벌어지면서 실로 많은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1485년에 보스워스 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헨리 튜터에 의해 장미전쟁은 끝이 났으며 전쟁 초기 대비 약 7할에 해당하는 귀족들이 사망하였다.

 

 내전의 전반기에 랭커스터 가문이 연패하여 몰락하며 랭커스터 왕조가 끓어지고 1461년 요크 가문에 의해 요크 왕조가 개창되었다. 그러나 안정되어가는 듯 하던 요크 왕조 역시 내분에 휩싸이며 외척과 개국공신들에 의해 정치적인 혼란을 겪다가 24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1485년 헨리 튜터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요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리처드 3세가 이끄는 군대를 무찌르며 튜터 왕조를 개창하였고 잉글랜드는 다시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장미전쟁의 영향 (귀족몰락, 왕권강화, 젠트리 계층의 급부상)

장미전쟁은 일반 백성들과는 무관하였으며 귀족들 간에 벌어진 세력다툼으로 귀족들 중에도 주로 왕가와 연계된 종친과 대귀족들이 랭커스터와 요크, 이 두 가문을 주축으로 한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백년전쟁 후 돌아온 병사들 중 농토로 복귀하지 못한 자들은 무리를 지어 종친과 대귀족의 수족 역할이나 사병으로 전락했는데 이런 사병과 용병을 동원하여 전투가 이루어졌다. 모든 귀족들이 내전에 참여하였던 것은 아녔으며 중립적 입장에서 관망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그래서 본격전인 내전에 돌입한후 이런 귀족들은 포섭하기 위한 노력도 벌어졌다. 

 

장미전쟁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 이전의 여타 전쟁에서와는 달리 포로로 잡힌 귀족들의 신병처리에 있어서 몸값을 받고 풀어주던 기존 관례를 깨고 그냥 참수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적으로 만나면 죽이고 포로로 잡히더라도 목을 날려버리는 양상이 벌어지면서 전사자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1485년 전쟁이 종료되어 헨리 튜더(헨리 7세)가 국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살아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 전의 3할에 불과했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져 갔으며 내전의 특성상 국제전 보다는 더 감정적이고 참혹한 결과가 빚어졌다. 종친들도 많이 사망함으로 인해 왕가의 손도 상당히 귀해졌으며 많은 귀족들이 몰락하여 귀족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왕권이 강해지면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잉글랜드도 중세 봉건시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또 다른 큰 특징은 내전후 사회계층 간에 큰 변동이 발생하였다는 것인데, 특히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는 신흥세력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에 봉건귀족들이 담당하던 사회적,정치적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그 빈자리를 젠트리들이 채우게 된 것이다. 젠트리는 귀족과 요먼 사이에 위치한 계층으로 직접 노동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 속에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성장한 이들은 행정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국가 요직을 차지했으며 튜더 왕조의 국왕들은 이들과 도모해 왕권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젠트리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 여론을 주도하는등 사회적인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키워 나갔다. 의회에도 많이 진출하였는데 기존의 의회는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으나 젠트리에 진출로 의회는 이들간의 합의와 견제의 장이 되어 탄력적이면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와 같이 이들 젠트리가 사회분야와 관료, 정치에 많이 진출함으로 인해 훗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바탕이 되었고 왕가 역시 프랑스 시민혁명(1789년)과 같은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형태의 혁명을 피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유능한 엘리트와 특유의 의회민주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덕에 영국은 유럽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섬나라에서 근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대영제국의 찬란한 영광은 결코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이 이룬 업적만은 아니며 이 젠트리들이 견인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왕위쟁탈전의 기본배경 (두 가문의 유래).....랭커스터 vs 요크
내전을 벌인 주축이 되는 두 가문은 모두 전대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에서 14세기 중반에 분파되어 개창된 방계 가문으로 그 시조는 에드워드 3세(1327-1337)의 셋째아들과 넷째 아들이다. 에드워드 3세는 4명의 장성한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흑태자는 병사하여 왕통을 이어받지 못했고 그의 아들인 리처드 2세(에드워드 3세의 손자)가 즉위했다 그러나 실정을 일삼다가 사촌형인 헨리 4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한후 사망하여 대가 끓어졌다. 
 
차남 클레런스공 역시 아들이 없어 후계를 이어가지 못했으나 3남과 4남의 가문은 번성하였다. 그래서 셋째 아들 '곤트의 존'은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가 되었으며 넷째 아들, 에드먼드는 요크 가문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후손들 간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이 장미전쟁이다. 내전이 발발한 1455년은 두 가문이 갈라져 나온지 100년도 안 되는 시점이고 보니 왕위계승을 두고 다툰 주요 인물들의 촌수는 대부분 8촌 이내였으며 따라서 장미전쟁은 왕족간의 집안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중 다수가 이 두 가문, 랭커스터家와 요크家를 중심으로 갈라져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두 가문의 계보에 대한 자세한것은 첨부된 가계도를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