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國史

마틴신 2020. 7. 8. 14:12
요크파의 내분 (에드워드 4세 vs 워릭 백작)
요크 가문의 승리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종식되는듯 했으나 에드워드 4세와 워릭백작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랭커스터파와의 내전으로 워릭백작의 위세는 지나치게 강대해져 있었다. 에드워드 4세는 이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국정현안에 대해 두 사람은 많은 의견차가 있었기에 대립하였다. 대표적인 사안들은 대 프랑스 외교정책, 왕실의 혼사문제, 왕비가문인 외척의 문제등이였다. 양자간에 사이가 벌어지게 된것은 신흥세력의 이간질도 한몫했다. 왕은 워릭 백작의 지나친 국정 간섭을 싫어했고 워릭백작은 의도적으로 충언을 멀리하고 자신을 모함하는 정적들을 가까이하는 왕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워릭 백작의 불만 (에드워드의 토사구팽)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스승이자 충신이였다. 어리고 미숙했던 에드워드에게 군사,행정,정치등을 가르치고 경험을 쌓도록 해준 사람이 워릭이였다.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고모부가 전사하여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요크파를 수습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노샘프턴과 타우턴전투의 승리등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에드워드를 왕으로 옹립한 일등공신도 워릭이였다. 부모와 형제를 잃고 자신의 영지와 재산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워릭이 열심히 일했던 원인은 오로지 요크 왕가가 안정되고 나라가 평안해지길 바랬기 때문이였다. 외교사절이 되어 국제외교무대에서 잉글랜드를 위해 사심없이 일했는데 외척을 비롯한 간신배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노골적으로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퇴물취급을 하고 귀찮아 하는 것이였다. 사사건건 대립하며 갈등이 깊어져가자 워릭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 워릭에게 있어 자신이 옹립한 에드워드4세에게 남은 감정은 오직 분노 뿐이었다
 
 
워릭백작의 반란 (노장의 한계)
1469년 7월, 워릭백작은 국정농단의 괴수들을 처단하고자 한다는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은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에지코트 무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아니라 왕의 신병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했다. 실권을 장악하자 우드빌파등 정적숙청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왕의 부재가 지속되자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불만이 들어나며 귀족들간에 충돌과 또 다른 반란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워릭백작 혼자서 수습하는데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불가피하게 왕을 전면에 내세워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사태를 수습하게 된다. 
 
이 과정중에 에드워드 4세는 자연스럽게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귀족들의 충돌과 폭동을 워릭과 왕이 함께 진압해가며 워릭백작의 반란은 유야무야하게 끝을 맺었으나 왕은 그를 처벌할수 없었다. 대귀족으로서 평민들의 신임이 두텁다는 그의 위상을 확인했으며 국정운영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감시속에 폭풍전야 같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워릭 백작은 2차반란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에드워드 4세가 이번에는 신속하게 대처하였다. 1470년 3월 루즈코트 전투에서 반란군이 패배하자 워릭백작은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로 도주를 하였다.
 
 
적과의 동침 (배신의 끝판왕)
워릭백작은 프랑스에서 헨리 6세의 왕비인 마가릿를 만나 화해하고 헨리 6세의 복귀를 전제로 랭커스터파와 손을 잡게 된다. 왕비와 자녀간에 정략결혼을 통해 혼인동맹을 맺고 동맹을 강화하였다. 1470년 9월, 잉글랜드 북부에서 벌어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가 런던을 비우자 워릭백작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한다. 랭커스터파를 규합한후 에드워드 4세와 대적하기 위해 북진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백작과의 전투를 위해 남하중에 야영지에서 몬터규 백작이 배신을 하고 야영지를 급습하러 달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게 된다.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은 에드워드 4세는 전투 한번 못 치루고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손쉽게 승리를 거둔 워릭 백작은 런던에 입성하여 헨리 6세를 복위시키고 충성을 맹세한후에 정국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권토중래(捲土重來)
1471년 3월,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세력을 회복한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의 도움으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다. 워릭백작이 이끄는 랭커스터파가 잉글랜드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사태를 수습하려고 발 빠른게 움직인 것이였다. 같은해 4월, 런던 인근 바넛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가 대승을 거두며 워릭백작을 제거하였다. 5월이 되자 왕비 마가릿이 프랑스에서 돌아와 웨일즈에 있는 랭커스터파를 규합하려 시도하였다. 투크스베리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왕비 마가릿이 이끄는 군대는 전멸당했으며 헨리 6세의 아들이자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자인 왕자도 죽임을 당하였다. 
 
런던으로 개선한 에드워드 4세는 헨리 6세를 런던탑에 감금하고 얼마후에 살해한다. 왕위에 복귀한후 뛰어난 지략과 결단력, 군주다운 강인함으로 재임 기간 중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상업과 대외무역을 성장시켜 왕실 재정을 굳건히 확립하였다. 그러나 처가인 우드빌 가문 및 소수의 가문에만 권력을 집중시켜 잠재적인 불만세력을 키우기도 했다. 그 결과 사후에 여러 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다.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네덜란드(저지대 국가)를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국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는 에드워드 4세와 처남매제 사이였다.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거릿과 샤를은 1468년 혼인을 하였는데 정략결혼을 통해 당시 에드워드 4세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백년전쟁을 재개하려 하였다. 또한 부르고뉴 공작은 적대적 관계에 있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부르고뉴는 루이 11세의 왕권강화 정책에 반대했고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 하고 있었다. 루이 11세는 워릭 백작과 랭커스터 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영국판 계유정난(癸酉靖難).....왕실내분
1483년 4월, 에드워드 4세가 40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자 13살의 장남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선왕의 동생인 리처드 3세가 섭정으로 선정되었지만 야욕을 들어낸다. 리처드 3세는 지지세력들과 동조하여 무력으로 우드빌파를 제거하고 의회를 장악한 뒤에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고 만다. 이른바 영국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것이다. 국왕에 오른 리처드 3세는 자신의 약한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직무수행에 전념하며 선정을 펴려고 노력 한다. 

 

랭커스터파의 반격(헨리 튜터의 등장)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로 인해 리처드 3세는 귀족과 젠트리의 지지를 받을수 없었다. 그래서 3년이라는 재위 기간동안 끊임없이 반란과 내부 배신이 이어졌다. 일부의 귀족들은 리처드 3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워릭백작의 반란과 리처드 3세의 왕위찬탈등 요크파의 자중지란이 일어나자 랭커스터파에게는 호기회가 되었다. 연이은 요크파의 내분으로 요크파 세력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숨죽이고 지켜보고있던 랭커스터파 귀족들의 드디어 반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랭커스터 가계의 왕위계승자이며 브리타뉴(프랑스)에 망명해 살고 있는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터에게 지지를 보내었다. 
 
헨리 튜터는 14살 되던해인 1471년 5월에 삼촌인 펨브룩 백작(재스퍼 튜터)에 의해 브리타뉴 공작령(프랑스)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때는 요크왕조 에드워드 4세의 즉위시절로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 핸리 6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가 살해된 직후이다.(헨리 튜터의 부친인 에드먼드와 삼촌인 재스퍼는 헨리 5세의 왕비였던 캐서린이 헨리 5세 사후에 오웬 튜터와 재혼하여 태어난 자식들이므로 종친은 아니다. 그들이 귀족작위를 받은 것은 헨리 6세 시절이며 모친 캐서린의 간청으로 마음약한 헨리 6세가 백작 작위를 수여 했댜.)
 
이런 분위기를 타고 1485년 8월, 헨리 튜터는 리처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바 왕권의 정통성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선포하였다. 브리타뉴(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이끌로 잉글랜드에 상륙한후 랭커스터파 귀족들의 지지와 협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보스워스 평야에서 국왕 리처드 3세 군대와 대치하던중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헨리 튜터가 대승을 거두었고 리처드 3세는 전사하고 만다. 이로써 30년간 이어져온 장미전쟁이 종료되었고 헨리는 튜터 왕조의 첫번째 군왕이 되었다.
 
 

     장미전쟁의 주요 전투

 

장미전쟁 종료(헨리 7세의 튜터 왕조)
백년전쟁 직후 무능한 군주로 인해 왕권이 허약해지자 국정이 불안정해졌다. 이 틈을 타고 귀족들이 득세하여 명문 세도가인 요크가문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년 동안 권력투쟁이 지속되었다. 초반에는 요크파가 랭커스터파를 물리치고 승세를 잡아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왕권과 국정이 체 안정되기도 전에 왕실내분과 요크파 귀족내부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요크파 귀족들의 세력이 약해진다. 그러자 몰락의 길을 걷던 랭커스터 가문의 반격이 시작되고 망명중인 헨리 튜터가 랭커스터파의 지지를 얻어 요크파를 격파하고 장미전쟁을 종식시켰다. 

 

 

헨리 7세는 지지기반이 약한 점을 만회하고 더 이상 권력투쟁으로 인해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요크家의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와 결혼을 하였다. 부족한 자신의 정통성을 보강하려는 것이다. 헨리 7세는 모계혈통을 따라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1467년에 부친(에드먼드 튜터)이 사망했고 이후 어머니(마거릿 뷰포트)는 그를 두고 재혼을 했기에 사생아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기 그는 랭커스터(플래테저넷)의 혈통을 간신히 이어 받았다. 
 
랭터스터 가문의 시조인 '곤트의 존'과 그의 첩(情婦)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 즉 서자가문(뷰포트家)을 통해서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물론 뷰포트 가문이 과거에 의회를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아 왕족으로 대우를 받았고 헨리 6세 시절에는 서미싯 공작 에드먼드 뷰포트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총신으로 활약한바가 있다. 사생아이며 서자가문의 혈통을, 그것도 모계혈통으로 이어 받은 그가 당시로서는 가장 적자에 가까운 왕실 핏줄이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종친들과 귀족이 장미전쟁중에 사망하였다는 증거로 볼수 있다.
 
헨리 7세의 즉위후에도 여러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이를 진압하고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강대국이였던 에스파냐의 공주(캐서린)를 자신의 아들(헨리 8세)과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국정을 안정화 시켰다. 장미전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볼때 약 7할에 해당하는 귀족들이 사망을 하였다. 귀족의 세력이 약해지자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튜터왕조내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았으며 대영제국으로 번영하는데 기초를 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