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爭史

마틴신 2018. 1. 30. 01:15

1625년 영국해군이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를 기습공격하였으나 작전에 실패하며 큰 손실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의 군수보급창이 있는 카디스 항을 기습공격함으로 스페인 해군의 전력손실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찰스 1세(1600-25-49)의 측근인 버킹엄 공작의 기획하에 감행되었으며 영국과 네덜란드의 군선 100 여척과 1만명이 동원된 대규모 작전이였다. 지휘관인 로버트 세실의 무능으로 인해 7천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무려 25만 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하였다.(영국해군 일년예산의 1/2) 카디스 항 기습공격은 리자베스 1세(재위1558-1603)때인 1587년, 드레이크가 대담하게 감행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전례가 있었다. 38년전에 성공했던 작전을 모방한 시도였으나 실패로 인하여 왕실 재정은 악화되었고 국왕 찰스 1세의 정치적 입지 또한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의회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내전(청교도혁명)으로 한발자국 다가서게 되었다.





카디스 공격의 명분은 카톨릭 국가의 중심축인 스페인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신구교간 종교전쟁인 30년전쟁이 재개되자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를 돕는 동시에 강대국인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스페인은 대표적인 카톨릭 수호국으로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는 독일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였지만 이로인해 신교측인 팔츠와 보헤미야가 전쟁(1618-1620)에서 패배하도록 한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스페인은 1621년 이래 네덜란드와 전쟁중이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국이 스페인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분산시킴으로써 재개된 30년전쟁에서 독일지역의 카톨릭 국가지원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런 명분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팔츠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는 매형이지만 이미 팔츠지역이 제국군에 점령당하였고 선제후는 폐위당한후 네덜란드로 망명을 한 상황이였다. 더욱이 지난번 독일에서 전쟁이 벌어졌을때(1618-1620) 팔츠로 부터 지원요청이 있었기에 명분도 충분했으며 영국 의회와 국민여론등에 힘입은바 있었으나 참전하지 않았었다.(부왕 제임스 1세 시절) 또한 찰스 1세가 왕세자 시절인 23살때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을 국내여론악화등의 이유로 거부한적은 있었으나 즉위후 카톨릭 대국인 프랑스 왕녀와 결혼하며 종교적인 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왔었기 때문이다.(왕비는 앙리 4세의 늦둥이 공주)  전쟁 명분이 약한만큼 영국의회의 재정지원은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카디스 공격의 실질적인 이유는 왕권강화에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왕가는 여전히 영국 내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다. 부왕때 부터 이어져 내려온 총신 버킹엄 공작의 연이은 실정으로 여론이 악화되며 더욱 정치적 입지는 약해져갔다. 무능한 몇몇 귀족들에 의한 소수측근정치가 폐해를 불러왔으나 찰스 1세는 사리판단이 부족했기에 악순환은 되풀이 되고 있었다. 실추된 여론과 정책실패를 일거에 만회하고 자신을 향한 불만의 칼끝을 외부로 돌리려고만 했던 것이다.


찰스 1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심약하였다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수줍음이 많은 데다 어투까지 느릿느릿하고 투박했다. 판단력이 부족하여 의타심이 강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 이런 자신의 단점을 늘 의식하고 있었기에 기회가 있을때마다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 강인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귀족들에게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런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보니 어리석은 판단속에 무리수를 쓴 것이다. 명분도 약하고 실익도 없으며 이미 전세가 기운 전쟁에 뛰어들 이유는 없는 법이다.


화약이 전쟁에 등장하면서 부터 유럽각국은 과학기술을 앞세워 전쟁무기개발에 열을 올렸다. 대포와 머스킷총의 사거리와 파괴력 증강등 성능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각국의 전술과 전략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요새건설,축성술도 진화하였다. 이런 변화에 따라 스페인의 카디스 항은 드레이크의 기습(1587)이후 강력한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대륙의 30년전쟁(1618-1648)을 통하여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베테랑 군인들이 스페인에는 많은 상황이였다. 이에 반해 영국군은 꽤 오랜기간 제대로된 전쟁 경험이 없었다. 시대적 변화와 전쟁양상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처없이 38년전만 생각하고 진행한 작전은 여러모로 부실했다. 여전히 유럽의 강대국에 지위에 있고 전쟁으로 달련된 스페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는것은 그 결과가 불보듯 뻔한것이였다.


카디스 기습실패 이후에도 실정은 계속 이어졌으며 의회와의 갈등에 골은 깊어만 갔다. 갈등의 근본원인중에 하나는 찰스 1세가 가지고 있는 왕권신수사상에 있었다. 왕의 통치권은 신이 부여한 불가침의 절대 권위라고 그는 확신했다. 신앙이 두터웠던 찰스 1세는 부친보다 더 완강하게 이 왕권신수사상을 신봉했다. 찰스 1세는 왕권을 견제하는 의회의 존재를 원칙상 부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의회 중에서도 보수적인 상원은 그나마 상대할 수 있지만, 개혁적이고 논쟁적인 청교도들이 포진한 하원은 왕권에 도전하고 트집이나 일삼는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여겼다. 점차 극단적인 평행선을 그어가던 의회와 국왕의 관계는 마침내 1642년 깨어지면서 영국은 내전상황으로 돌입하고 말았다. 





30년 전쟁 (1618-1648)

30년전쟁은 독일이 전쟁터가 되어 신구교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체코)의 신교도를 탄압하자 이에 보헤미아 신교도 귀족들이 반발하며 1618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대체로 4기(期)로 구분되며, 전반 2기는 종교적 성격을 띠었으나후반 2기는 정치적으로 변질되었다. 최종적인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와 신교측 연합이 승리하여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독일은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황제권이 약화되었다.(800만명 사망)


전쟁의 결과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1648년에 체결되면서 독일은 분열되었으며 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하였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칼뱅파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종교선택의 자유가 영주(領主)에게 주어졌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종교선택의 자유는 개인의 권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이 유럽사에서 가장 큰 변화중 하나라고 할수 있겠다.(중세 졸업)


전쟁 1기때 보헤미아 귀족들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한후 황제에 맞섰으나 스페인의 도움을 받은 황제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보헤미아와 팔츠는 황제군에 점령당했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였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다. 1625년에 스웨덴이 신구교간 분쟁에 개입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자 영국에 찰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카디스 습격(1625)과 라로셀 원정(1628)을 감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의회와 갈등이 심화되었고 왕실재정이 바닥나자 찰스 1세는 필요한 재정지원을 받기위해 의회가 제출한 권리청원에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



 No

    전쟁 구분

  기    간

   대  결   구  도

  전쟁 승패

   비      고

  1

 보헤미아-팔츠 전쟁

 1618-1620

 팔츠+보헤미아   vs 스페인+황제군

 황제군이 승리

 

  2

 덴마크 전쟁

 1625-1629

 덴마크+독일북부 vs 황제군

 황제군이 승리

 

  3

 스웨덴 전쟁

 1630-1635

 스웨덴            vs 황제군

 황제군이 패배

 

  4

 프랑스-스웨덴 전쟁

 1635-1648

 스웨덴+프랑스   vs 스페인+황제군

 황제군이 패배

 




버킹엄 공작 (1592~1628)
영국 역사상 대표적인 간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려나간 찰스 1세(재위1625~49)의 정치를 망친 첫번째 장본인으로 꼽힌다. 초대 버킹엄 공작인 조지 빌리어스는 소수측근 정치를 하던 제임스 1세(재위1603-25)의 최측근으로 22세 때부터 출세가 시작되었다. 국왕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공작에 오르는 벼락출세를 하였고 이후 권력을 독식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대중의 지탄을 받아왔지만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에 이르기까지 권세를 이어갔다. 찰스가 왕세자 신분으로 23살이 되던해인 1623년에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 왕녀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한적이 있다. 


스페인과의 관계를 개선 하고자 추진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잉글랜드의 여론은 냉담했고 왕세자 찰스도 거부하여 체면만 구긴 채 아무 실속 없이 백지화 되었다. 찰스 1세는 즉위후 가톨릭 대국 프랑스 앙리 4세(재위1589-1610)의 딸, 앙리에타 마리와 혼인했다. 국내 여론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된 두 차례의 혼인 협상은 모두 버킹엄 공작인 조지 빌리어스가 주도했다. 왕세자 시절 초기에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긴밀해졌다. 제임스 1세(재위1603-25)가 말년에 병을 얻으며 국정운영에 소홀하게 되자 부왕을 대신하여 이 두사람이 국사의 대부분을 처리했던 것이다.


카디스 습격(1625) 실패의 책임을 물어 1626년에 의회가 탄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찰스 1세(재위1625-49)가 의회를 해산하며 측근인 그를 보호하였으며 이때부터 찰스 1세와 의회의 불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28년 버킹엄 공작은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지원하기 위한 라로셀 원정을 실시했으나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선왕 시절 최고 실세였던 버킹엄 공작의 무리한 외교 정책들은 찰스 1세까지 이어졌으며 하나같이 실패의 연속이였다. 국민불안과 여론이 악화되던중 1628년 8월 23일 자택에서 암살 당하고 만다. 응접실에서 회랑(回廊)으로 나오던중 육군중위 팰턴이 휘두른 칼에 찔린 것이다. 그가 죽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드레이크의 카디스 습격 (1587)

1588년 7월, 칼레 해전에서 강대국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약소국인 잉글랜드에 참패 당하며 체면을 심하게 구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잉글랜드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중에 하나가 한해전인 1587년에 잉글랜드가 감행한 카디스 기습공격의 성공이였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의 명령을 받은 드레이크(생몰 1540-96)가 1587년 4월19일에 대담하게도 한낮에 스페인 해군의 보급창이 있는 카디스 항(港)을 기습공격하여 스페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것이다. 드레이크는 이 작전으로 스페인 함선 37척을 부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바가 있다.

    

펠리페 2세(재위1556-98)가 이끄는 스페인은 당대 최강대국이였다. 남미등 해외 식민지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금과 은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전쟁(1494-1559)과 레판토 해전(1571)에 대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런 스페인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서유럽 끝자락에 위치한 가난한 삼류국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는 1534년에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단을 섬기는 국가가 되었는데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당시에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네덜란드 독립전쟁 1568-1609),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넌서치 조약(1585)을 맺으며 경제와 군사적으로 네덜란드를 돕고 있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건방진 잉글랜드를 가만히 둘수 없었던 펠리페 2세(재위1556-98)는 공개적으로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군인들이 사용할 전쟁물자와 보급품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드레이크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스페인은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잉글랜드 정복전쟁을 한해뒤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드레이크의 기습에서 발생한 가장 큰 손실중에 하나는 항해중에 필요한 식재료와 식수를 담아 운송할 나무통 용기(用器)인 배럴(barrel)의 파괴였다. 배럴과 배럴을 만들기 위해 건조중인 나무들이 대거 파괴되었는데 배럴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에 기름을 지속적으로 칠해가면서 약 1년간 건조해야 한다.

    

플라스틱 용기등 현대와 같이 좋은 용기(用器)나 저장시설이 없었던 당대에는 장기 항해를 위해 반드시 나무용기인 배럴이 필요했다. 그런데 영국을 얕잡아본 펠리페 2세는 지나치게 서둘렀다. 이듬해 1588년에 출전을 하며 충분히 건조되지 못한 배럴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물과 식료품을 담은 배럴의 나무가 썩으면서 물과 식재료가 부패하였다. 스페인 병사들은 상한 음식과 물로 인하여 심한 배탈,설사에 시달렸고 상당한 전력손실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칼레해전에서 패배할수 밖에 없였다. 패전의 근본원인중 하나는 군수보급의 실패였고 이는 드레이크의 카디스 습격으로 발생한 차질 때문이였다.







 




[자료 출처와 참조] 

영국왕가...................네이버 지식백과

이야기 영국사............청아출판사

역사의 원전...............바다출판사

영국내전의 기원(7).....네이버 역사카페 부흥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마로니에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