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國史

마틴신 2017. 5. 3. 15:40

백년전쟁(1377-1453)

백년전쟁은 1337년에서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두 왕조가 5대에 걸쳐 116년간 벌인 전쟁이다. 잉글랜드가 프랑스내에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2세(1154-89)때부터 지속된 영토갈등이 후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양국간에 본격적인 전쟁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프랑스 샤를 4세(1322-28)때 카페왕조가 단절되자 에드워드 3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지만 무시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77년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명분은 왕위계승권 주장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플랑드르 점령과 프랑스내에 잉글랜드 영지를 확장하고자 하는 야망에 있었다. 플랑드르는 10세기경 부터 모직산업이 번창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발전하며 매우 부유한 지역이였다. 이런 플랑드르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영토이나 양모의 최대 공급처인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양국간에 갈등이 시작되자 잉글랜드가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양모공급을 중단하였다. 이는 프랑스 국왕 필립 6세가 잉글랜드 영지인 가스코뉴 몰수조치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땅에 보유한 영지에 대하여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제후였다. 양국간 군신의 관계속에 나름대로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 2세(1154-89)와 왕비 엘레아노르(1154-1204) 시대에는 앙주와, 노르망,  브리타뉴 그리고 프랑스의 서남부에 아주 비옥하고 넓은 땅인 아키텐을 소유하게 되었다. 헨리 2세가 상속과 정략결혼을 통한 영지 확장이였는데 그 규모가 프랑스내에 프랑스 보다 더 많은 영토를 잉글랜드가 가지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 국왕에게 매우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카페왕조 필립 2세(재위1180-1223)가 간교한 술책을 부려 헨리 2세와 그 아들들을 이간질 시켜서 반목하게 하고 수차례 반란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내란에 여러번 교묘하게 개입하여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영지를 조금씩 빼앗아갔다. 결국 헨리 2세의 아들인 존왕의 치세 말에는 가스코뉴을 제외한 나머지 넓은 지역을 프랑스에게 모두 빼앗겨 버린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묵은 감정이 잉글랜드 왕실에 쌓여 왔으며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에드워드 3세 시대(재위 1327-77)에 이르러 헨리 2세때의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찾아 온것이다.


1214년에 부빈전투가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패배하였다. 당시 존왕은 전투후 체결한 휴전협정에서 필립 2세가 무력으로 장악한 앙주,노르망,브리타뉴에 대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주권을 인정한바가 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더 이상 잉글랜드가 이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수 없게 되었으며 회복 할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져 버렸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무력으로 이 지역을 탈환하려해도 과거에 맺은 협정의 내용을 뛰어넘을 만한 충분한 전쟁명분이 그 동안 없었다. 그런데 카페왕조가 샤를 4세에 의해 단절되며, 차기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에 있어서 만큼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국왕에 즉위한 필립 6세보다 앞서고 있었다. 이를 구실 삼으면 무력 침공까지 가능해진것이다. 전쟁에는 그에 따르는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귀족들을 설득하고 의회의 협조를 얻을수 있으며 주변국가들의 호응을 얻어 상대국에게 동조하거나 협조하는 것을 막을수 있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립 4세의 딸 이사벨이다. 즉 에드워드 3세는 필립 4세의 외손자이다. 따라서 왕위 계승 서열상으로 볼때 현 프랑스 국왕인 숙부 필립 6세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살리카법을 들먹거리며 직계남손만 왕위를 계승할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에드워드 3세의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런 조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전개되는 상황상 어쩔수 없이 한발 물러설뿐이다. '왕위 계승권'이라는 좋은 카드를 쉽게 버릴 그런 바보는 아니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주장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에드워드 3세도 예상하고 있었다. 신하의 국가에 수장이였던 자를 주군으로 모실수는 없는 일이였다. 어떠한 구실을 내세워서라도 잉글랜드인의 즉위를 막는것은 당연한 것이였다. 다만 후계없이 국왕이 사망한 경우에 누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법률이나 관행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오랫동안 거론되지도 않던 케케묵은 살리카법을 핑계로 삼아 왕위계승권이 없다고 하는것은 에드워드 3세에게 현 국왕의 '정통성 결여'라는 아주 좋은 시비거리를 제공한것일 뿐이였다. 에초부터 프랑스 국왕에 즉위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욕심은 있지만 가능성이 낮고 힘든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플랑드르의 귀족과 상인들은 과도한 세금등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잉글랜드에 매우 호의적이여서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기를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전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또 있었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1세의 유업을 이어받아 스코틀랜드의 정복을 시도했으나 프랑스가 배후에서 스코틀랜드를 지원함으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1295년에 동맹을 맺었으며, 1334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에 패배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하는등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 필립 6세(재위1328-50)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브리튼 내부의 분쟁에 프랑스가 자꾸만 딴지를 걸고 있던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대륙에 남은 마지막 잉글랜드 영지인 가스코뉴를 흡수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싶어했다. 이를 통해 양국간의 영토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가스코뉴 지역의 포도주 생산에 의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프랑스가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일 때면 언제나 그 시도를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를 지원하여 갈등속에 잉글랜드의 힘을 빼고 기회와 시기를 저울질하며 잉글랜드의 국력을 점검해보았던 것이다. 에드워드 3세도 이런 프랑스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반항을 꺾기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는 무능했던 선왕 에드워드 2세의 20년간 실정이 있었고 아울러 수년간의 흉작과 홍수 때문이였다. 1315년에서 1321년까지의 흉년과 1326년의 홍수로 많은 농경지가 유실되고 백성의 살림은 피폐해져 있었으며, 당연히 귀족의 수입도 줄어들어 불만이 팽배하였다. 그래서 반란과 내전, 반역 음모 등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전쟁을 통하여 국왕에게 겨누는 귀족들의 칼끝과 국민적 관심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전쟁의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는 프랑스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과거 헨리 2세와 존왕 시대의 쌓인 감정도 있으며 왕위계승 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안정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며, 가능하다면 프랑스 왕위까지 손에 넣게 된다면 누이좋고 매부 좋고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격이 된다. 내적갈등을 외적갈등으로 풀어나가자는 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1214년 부빈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고 있는 프랑스로서는 잉글랜드 정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약 1천 6백만명 정도 였고 잉글랜드는 4백만명정도 였으므로 기본적인 국력에서도 양국은 비교가 안될정도였기 때문이였다. 프랑스 국왕이 동원할수 있는 국력자체가 잉글랜드를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종국에 기본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한 지구력이 강했던 프랑스가 전세를 뒤업고 백년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원인중에 하나였다.




본격적인 무력충돌은 1340년 슬로이스 해전으로 부터 시작된다.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대승을 거두며 프랑스 해군은 궤멸수준에 패배하여 잉글랜드가 도버해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의 분전으로 크레시 전투(1346)에서 대승하고 칼레까지 탈환하나 유럽에 흑사병이 번지면서 이후 8년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의 1/3 이상이 죽었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도 극심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1350년 필립 6세가 죽고 장 2세가 즉위하여 전란과 역병으로 어수선한 국정을 바로 잡고 군제를 재정비하여 재개될 전쟁에 대비하여 노력하였으나 루이 10세의 손자이면서 나바라 왕인 샤를 2세에 의해 내란에 준하는 도전으로 국정 혼란만 지속되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1356년에 벌어진 푸에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 흑태자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국왕 장 2세가 생포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장 2세는 런던으로 압송되었고 프랑스는 도팽 샤를(훗날 샤를 5세)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1358년 프랑스에 자크리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발생한다. 프랑스 영토가 전장터가 되면서 영국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기근,무거워진 세금,강제 노역,흑사병등으로 농촌경제가 혼란에 빠지는데 푸아티에의 패전 후(1356), 유랑민,도적집단이 된 용병대,패잔병등에 의한 약탈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농민반란이 발생하였는데 순식간에 북프랑스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반란은 2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신속히 진압이 되었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 패배와 더불어 프랑스 왕가를 매우 심한 궁지에 몰렸고 도팽 샤를(후날 샤를 5세)이 잉글랜드에 화의를 제의했다. 1360년 양국은 브레티나 화약을 체결하였고 잉글랜드는 칼레,아키텐,앙주를 할양받아 옛날 헨리 2세(재위 1154-89) 시대와 같은 대부분의 영지를 회복했으며 거액의 몸값을 받은후 장 2세를 풀어주었다.



1364년에 장 2세가 죽고 등극한 샤를 5세(1338-64-80)는 내정의 정비와 재정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국정혼란을 일으킨 나바라 왕 샤를 2세의 세력을 격퇴하여 본거지인 나바라 왕국으로 퇴각시켰다. 그리고 전란의 후유증중에 하나인 용병과 패잔병 출신의 도적때들도 소탕하며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나서 1368년에 가스코뉴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잉글랜드에 반항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9년만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에 에드워드 3세의 삼남 '곤트의 존'이 프랑스를 침공하지만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브레티나 화약으로 잉글랜드가 차지했던 대부분의 영토를 도로 빼앗기게 된다. 또한 프랑스는 해군을 재건하였으며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통해 1372년, 라로셀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에게 협공을 가했다. 

이 해전으로 잉글랜드 해군이 패배하였고 슬로이스 해전(1340) 이후 가지고 있었던 제해권은 다시 프랑스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 군대를 보내고 끊임없이 대륙과 무역을 해야 했던 잉글랜드에게 이것은 심각한 사태였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제의로 1375년에 양국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376년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다음해 에드워드 3세가 죽자 10살의 리처드 2세가 즉위하게 된다. 프랑스에도 1380년 병약했던 샤를 5세가 16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사망하였고 12살의 샤를 6세가 왕이 됨으로 양국에 모두 미성년왕이 즉위하자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고 말았다. 잉글랜드는 삼촌 '곤트의 존'이 섭정을 하고 프랑스도 역시 삼촌 '대담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해서 일명 '삼촌들의 통치'시대가 되었다.

휴전상황은 이후 수십 여년간 지속되는데 잉글랜드에서는 리처드 2세가 전쟁으로 악화된 경제를 되살리고자 노력하며 와트 타일어의 난(1381)을 진압하고 왕권강화에 전력하다가 실정을 거듭하게 된다. 이에 헨리 4세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정통성이 결여됨을 문제삼는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를 진압하며 내치안정에 치중하다보니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할 여유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샤를 6세가 자주 발작을 일으키며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하자 귀족들간에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서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407년 아르마냐크파의 오를레앙 공작이 암살당하여 내전으로 번지면서 상황이 좀 더 심각해졌다. 



1413년 즉위한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이런 프랑스의 혼란한 상황을 기회로 여겨 1415년에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같은해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기세를 몰아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공격하여 장악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심각해진 프랑스에서는 샤를 왕세자가 이끌고 있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가 1419년에 평화조약을 맺기로 하고 열린 회담장에서 회담에 참석한 반대파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를(1371-1419) 암살함으로써 재앙이 시작되고 말았다. 새 부르고뉴 공작이 된 선량공 필립 3세(1396-1467)는 샤를 왕세자를 배척하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리와 프랑스 영토의 상당부분이 잉글랜드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 상황이 다급해진 프랑스 왕실에서 1420년에 잉글랜드와 트루아 조약을 맺고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잉글랜드에 넘기게 된다.



그러나 왕세자 샤를과 아르마냐크파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자 전쟁은 계속되었다. 잉글랜드가 맹공을 퍼부었고 샤를 왕세자의 군대는 연패했다. 드디어 잉글랜드군이 전략 요충지이자 샤를 왕세자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샤를 왕세자는 풍전등화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하는데, 1429년 갑자기 17살의 잔타르크가 출현하여 단기간에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버린다. 이후 잔다르크의 대활약으로 샤를 왕세자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며 정통성을 인정받는 적법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1403-22-61)로 등극하게 된다.  이 대관식으로 인해 1420년에 부왕 샤를 6세와 헨리 5세간에 체결했던 트루아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완전히 승세를 잡은 프랑스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와 1435년 아라스 조약을 맺고 내전을 끝냈으며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정식으로 파기한다. 동맹을 잃은 잉글랜드는 연전연패하다가 칼레를 제외한 모든 영지를 잃고 대륙에서 퇴각할수 밖에 없었고, 1453년에 백년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문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이다.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에 걸쳐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싸웠던 장대한 전쟁이다. 개전초기에 잉글랜드가 연승하며 승리를 쟁취한것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정복전쟁을 통하여 전투 경험이 있고 잘 훈련된 군인들이 많았으며 주로 용병보다는 요먼과 농민출신으로 구성된 전문 직업군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중에 자질이 뛰어난 자들을 지휘관인 장교로 뽑아 훈련하였고 선대의 전투경험들이 후대로 전수되어 전술과 전략이 점차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때 부터 양성한 장궁보병의 전술이 프랑스의 봉건기사들의 기마병보다 우세하였으며 대포를 사용했다는 것도 꼽을수 있다. 그 당시 대포는 성능이 떨어져서 실제적인 큰 파괴력은 없었으나 우렁찬 소리로 인해 프랑스군의 전의상실을 유도했다. 프랑스는 1214년 부빈전투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잉글랜드의 장궁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것이 큰 패인으로 작용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간에 장미 전쟁(1455-85)이 전이 벌어진다. 30년에 걸친 권력투쟁은 귀족세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내전을 종식시키며 튜터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통하여 서서히 중세 봉건시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때부터 실시된 모직물 산업 장려정책이 계속 이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백년전쟁중에 플랑드로의 장인들이 전쟁의 혼란스러움을 피해 잉글랜드 요크셔 지방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그래서 플랑드르(Flandre)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는 인클로저 운동도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약화되면서 왕권이 강해졌으며 샤를 7세때 상비군이 설립되어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이 추진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에서 공히 왕정이 강화되고 중앙집권 체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백년전쟁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는 서양 봉건제도가 시작된 발원지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 하겠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이 부분은 화약 무기의 등장도 일조를 하였다), 농노 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의 양상은 각기 사뭇 달랐다. 잉글랜드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존재한 의회제도 덕분에 귀족 과 왕의 대립 구도에서 의회와 왕의 대립 구도의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 반면, 프랑스는 전쟁 와중에 강력해진 상비군 덕분에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도 잉글랜드의 의회처럼 삼부회가 있었으나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감에 따라서 서서히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