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爭史

마틴신 2018. 1. 25. 11:00
코냑 동맹 전쟁의 발발 (1526-1530)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에 재위 초반의 유럽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서로 먼저 손에 넣으려고 두 나라가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평화와 정국 안정을 지키기 위해 두 강대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프랑스를 대패시킨 이후 카를 5세의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이런 카를 5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교황과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뒤 복수를 갈망하게 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주축이 되어 베네치아,피란체 그리고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 합세하여 코냑 동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교황이 직접 프랑스와 결탁하여 결성한 코냑동맹군이 롬바르디아의 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이탈리아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격노하였다. 제국군의 지휘관인 샤를(구 부르봉 공작)에게 밀라노를 탈환한후 전례가 없던 교황령 침공을 명했다. 샤를 3세는 밀라노를 점령한후 밀라노에서 스포르차家를 몰아낸후 로마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코냑동맹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 군은 전쟁에 소극적이였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게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도시국가들도 본래부터 제국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교황 글레멘스 7세 역시 황제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교황령, 그것도 성도(聖都) 로마까지 들이닥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제국군이 로마에 나타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닭고 크게 당황하였다.
   
당시 피란체의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일찍이 '군주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단련된 정규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대부분 각자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이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통념상 마키아벨리의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 유지라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교황령에도 정규군은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 근위대와 용병 그리고 급조한 시민군으로 제국군에 대항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교황령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로마 대약탈 (1527년 5월 6일)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교황령 수도인 로마를 공격하여 탈환한다. 그런데 전투중에 지휘관 샤를(생몰1490-1527)이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러자 제국군인들은 그동안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기에 전리품마저 부족한 상태에서 가뜩이나 용병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불만이 가득하였는데 지휘관마저 잃어버리게 되자 흥분하여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살인,파괴,강간을 자행하고 말았다. 지휘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로마 시내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하였다. 통제력을 상실한 제국군들은 강도로 돌변하였다. 
    
로마는 초토화되며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르네상스 시절 로마의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으며 도시로서의 로마 성립 이후 사상 최악의 피해가 발생했다. 포로가된 교황군 병사들에 대한 잔혹한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고 성당과 수도원은 물론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이 대거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과 친분이 있었던 추기경들도 폭도로 돌변한 병사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액의 금전을 어쩔 수 없이 갖다 바쳐야 했다. 수녀를 포함하여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강간당한후 살해되었고 성벽에 못박히는 등 그 참혹함은 그야말로 아비규한(阿鼻叫喚)의 지옥에 가까운 참극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로마는 개박살, 아작난것이다.
     
역사상 로마가 몇 번 침공을 당하기는 했어도 기독교 군대에 의해 침공을 당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제국군의 상당수는 루터교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기고 있어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약탈에 몰두했다. 루터교인들은 교세가 확장되기 전까지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판정받아 개종하지 않으면 갖은 수치와 고문을 받다가 화형당하기도 했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에도 얀 후스같은 인물이 생명 보장 약속을 어기고 끔찍하게 처형당하는등 로마 카톨릭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로마 대약탈 사건은 참혹하고 막나가던 종교재판의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마 약탈의 역사]

 No

  발생 년도

  사건 내용   &   침략 민족

     비   고

 1

 BC  390년

  갈리아인(켈트족)들의 약탈


 2

 AD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


 3

 AD  455년

  게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의 약탈


 4

 AD  546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약탈


 5

 AD 1084년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약탈


 6

 AD 1527년

  카를 5세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군의 약탈


 7

 AD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 해체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성
로마가 함락된 이번 전투에서 스위스 근위대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제국군이 로마에 쳐들어오자 교황청에 고용된 각 나라의 용병들은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 만큼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중에 500명 중 189명만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들 역시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겨우 42명만이 남게된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충성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오히려 교황에게 피신할것을 당부한후 베드로 대성당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대와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 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1534)는 산탄젤로 성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충성을 다한 이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청 근위대에 기용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매년 5월 6일 되면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은 충성서약을 하는데 이는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던 교황은 수개월간 사실상 유폐된 상태로 지내다가 간신히 교황청에 돌아오게 되었다.

산탄젤로 성은 AD13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묘지로 건축하였다. 5세기에 군사 요새로 개조되었으며, 이후 교황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더 탄탄한 방어 설비가 보강되었다. 1277년 교황 니콜라오 3세가 교황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국과 요새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 통로와 성벽을 짓게 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 통로를 이용한바가 있다. 전임 교황들의 선견지명이 있었던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캉브레 협상 (1529년)
로마 대약탈 이후 제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가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자 프랑수아 1세는 더 이상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다. 카를 5세와 화해를 원했고 1529년 7월부터 캉브레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협상은 주로 프랑수아의 어머니 루이즈와 카를의 고모인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부인들의 평화'라고 알려지게 된다. 협상의 최종적 조건은 3년전 마드리드 조약이 크게 반영이 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는 아르투아, 플랑드르, 투르네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며, 그의 아들들을 풀어주기전 몸값으로 2백만 황금 에퀴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캉브레 조약이 8월 5일에 체결되었으며, 프랑스는 전쟁에서 퇴장하였고, 이후 진행된 제국군과 이탈리아 도시국가간에 전쟁은 제국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며 전쟁이 종료되었다.




교황의 입지 변화
로마 대약탈은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으로 이 사건이후 교황들은 강력한 황제인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떠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코냑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이빨 빠진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황의 영향력은 정확히 교황령 안으로 축소되었고, 마틴루터에 의한 종교분열(1517)의 문제해결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에 의해 주도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고 말았다.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압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1077년)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였다. 
      
또한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면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분리, 독립하여 성공회를 만드는 종교개혁등 많은 역사적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클레멘스 7세는 어찌나 트라우마가 심했는지 예술가 미켈란젤로에게 명해 시스티나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한다. 1528년, 카를 5세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많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1530년 2월에 카를 5세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서의 대관식에 왕관을 씌워주게 되었다. 이후에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칠수 밖에 없었다.



황제 카를 5세의 속마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500-1519-1558)는 로마 약탈 소식을 접하고 무척 당황하며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카톨릭 교도이기도 한 자신에게 돌아올 종교적,도덕적,정치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제스처로 보이며 적어도 로마 약탈을 유도하였거나 방조하였던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침공에 루터파 교도들로 구성된 용병들을 동원한것은 그들이 카톨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을 이용하여 그간 있었던 카톨릭 교황청이 루터파 교도들에게 행한 잔인한 탄압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부여하였던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환으로 용병들의 급료지급을 일부로 중단하거나 부족하게 지급하여서 불만이 생기도록 한것 같다. 제국군에게 어느정도 자율성을 부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군대와 도시를 잃은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교황과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는것은 카톨릭 교도들의 반발을 불러올것이고 명분에서 밀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매번 껄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교황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고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한번 쯤은 혼쭐을 내주고 기를 팍 꺽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카를 5세가 비록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 할지라도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23-1534)에 대한 감정은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곱지 못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때 교황 클레멘스 7세(당시 줄리오 추기경)는 카를 5세가 아닌 프랑수와 1세(1494-1515-1547)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또한 클레멘스 1세가 교황이 오른후에는 지속적으로 친프랑스 정책을 고수하여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곤했다. 카를 5세는 황제로 선출된후에 대관식을 치루지 못한 상황이라 불만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4차 이탈리아 전쟁(1521-26)에 승리하여 패전국인 프랑스와 맺은 마드리드 조약(1526)을 당사자인 프랑수와 1세가 이행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를 5세는 분개했지만 종교개혁(1517)으로 어수선한 독일내정을 수습해야 했으며 헝가리 점령후 서진하는 오스만 트루크를 저지해야 했기에 유야무야 넘어갈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교황이라는 자들은 권위를 내세워 내정간섭과 유럽의 정치사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한 따끔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계속 매를 벌고 있던차인데 황이 주도하여 동맹을 결성하고 황제인 자신에게 대적하였던 것이다. 과거에도 카노사의 굴욕(1077)같은 예에서 보듯이 교황과 세속 군주들간에는 힘겨루기가 있어 왔던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찍소리 못하게 확실히 서열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설령 교황이 사망한다해도 크게 신경쓸일은 못된다. 교황이란 존재는 이미 유럽의 귀족과 왕들 사이에서는 종이 호랑임에 자명할 정도로 권위를 상실한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추기경들중에 친황제파에 속하는 자로 다시 선출하면 그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