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爭史

마틴신 2018. 1. 25. 11:30
불운의 책사 마키아벨리 (1469-1527)

이탈리아 대전쟁은 군사적인 측면 외에도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끝장낸 전쟁이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집필된 배경으로 의미가 크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통일과 번영을 꿈꾸며 새로운 정치사상을 모색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영향으로 라틴어,고대 그리스-로마의 인문학을 심취했으며 피렌체 대학에서 공부했다. 나이가 서른도 안된 1498년에 제2장관직을 맡아 약 14년 동안 피렌체의 고위공직자로 활동하며 내무, 병무, 외교 등의 일을 두루 경험했다. 그러나 1512년 스페인군의 침공으로 메디치가문이 재집권하며 해임된후 투옥되었고 재산을 몰수 당한후 시골 작은 농장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을 집필하였다.

    

하나의 정부와 하나의 체제를 갖춘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는 중세를 거의 졸업한 통일왕국의 위력에 이탈리아가 맥을 못 추는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 그런 염원이 더욱 커졌다. 그는 군주론을 통하여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들이 행복해질수 있다고 했다. 또한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군주란 때로는 인간성,도덕,신앙심을 잠시 잊고 상황에 따라서는 배신도 하며 더 큰 도덕을 위해 작은 부도덕을 행하는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필요할때는 주저없이 사악해져라. 그렇치 않으면 국민이 위험에 빠질수 있다. 자기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힘을 갖춘 교묘한 지혜가 필요하다. 군주는 악덕에 의하지 않으면 지위를 보존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악덕의 오명을 쓸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군사 면에서는 시민군을 편성해야 하며, 결코, 용병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도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로를 조망하고, 정치의 냉혹한 원리를 추구했으므로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체사레 보르자(1475-1507)가 그가 생각하는 군주의 모습에 가까운 모델로 알려져 있다.




카를 5세의 조기 은퇴
제 5차 이탈리아 전쟁인 코냑동맹 전쟁(1526-1530)이후에도 3차례나 더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6차전(1536-1538)부터는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신성로마제국-스페인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 특징이라 할수 있다. 7차전(1542-1546)이 종료된후에 프랑수와 1세(재위1515-47)가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앙리 2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카를 5세의 세력을 꺽어 누르려 했던 부친의 유지를 계승한 앙리 2세(1547-1559)가 선전포고를 하며 8차전을 주도하였다. 
   
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이 진행중이던 1556년 카를 5세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자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서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의 대부분과 아메리카 대륙등 세상의 절반을 점령하였고 이런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카를 5세였지만 역사적 흐름을 되돌릴 만한 힘은 갖고 있지 못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발견하고 크게 삶의 회의와 체념에 빠지고 말았다. 
   
카톨릭 보편제국 건설이라는 오랜 그의 꿈이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신구교간 갈등이 지속되다가 드디어 기독교가 분열되어 물거품이 되어 버린것이였다. 스페인과 해외 식민지의 지배권은 아들 펠리페 2세(재위1556-98)에게 양위하고 황제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 물려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기 위해 스페인에 한적한 시골 마을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긴후 마지막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8차전에서도 프랑스는 승전하지 못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주도권이 스페인에게 있음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유럽을 깜놀시킨 프랑스산 대포
1차 이탈리아 전쟁(1494-1495)을 통해 대포가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재위1483-98)는 이탈리아에 포병대를 이끌고와 견고한 성벽을 부수며 굉장한 파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의 후반기 부터 샤를 7세(재위1422-61)의 주도하에 대포개발과 화약개량에 많은 투자를 진행하였다. 백년전쟁 초반기에 프랑스가 연전연패를 거듭한 주요 원인중 하나가 잉글랜드의 장궁(長弓) 때문이였다. 장궁의 사거리는 약 200m 였고 분당 발사속도 15발이상으로 프랑스 석궁(제노바 용병)의 분당 2발을 압도하였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보여준 잉글랜드 장궁의 파괴력은 매우 뛰어나 프랑스 기사들의 두꺼운 갑옷을 종잇장 뚫듯 관통해 버렸다. 이런 파상공세로 인해 대부분의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하였으며 전투가 아니라 학살 당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유럽최강이라고 자랑하던 프랑스 육군이 무기력증에 빠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타개책을 찾아낸 이는 독서광이기도 했던 샤를 7세이다. 그가 군사관련 고전연구를 통하여 내린 결론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노력만이 잉글랜드군을 물리칠수 있다는 것이였다. 
    
샤를 7세(재위1422-1461)의 선택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개발이였다. 그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끌어모아 대포와 화약 개량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였다. 개량된 대포는 1450년 몬티니 전투에서부터 그 위용을 들어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궁수 4500명중에 3774명이 단한발의 화살도 날리지 못한체 프랑스군이 퍼부은 철제포탄 세례를 맞아 전사했다. 과학이 탄생시킨 개량 대포는 잉글랜드군을 연전연패시켰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프랑스를 구하며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해주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 함락전에서 대포의 유용함을 실감한 오스만 투르크는 대포의 대형화에 주력했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는 소형화를 추진했으며 파괴력과 사거리는 화약개량을 통해서 개선해나갔다. 또한 바퀴를 달아 기동성을 꾀했고 단순히 공성용이 아닌 야전에서도 대포를 사용하였다. 샤를 8세(1483-98)는 36대의 대포를 이탈리아로 끌고와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나폴리에 몬테산조반니 요새의 성벽을 여덟시간만에 박살 내버렸다. 불과 2년전만해도 7년간의 공성전을 버텨냄으로 당대 유럽최고의 건축구조물로 평가받았으나 새로운 과학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23킬로그램에 달하는 철제탄환은 성벽을 산산조각내었으며 농성군은 돌더미에 깔려 전사했다. 사거리가 약 135m 였던 점이 부족하기는 했으나 이탈리아 반도를 공포에 도가니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했다. 



대책수립에 고심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1494년 봄에 샤를 8세가 전장 2.4m 짜리 주철대포로 이탈리아를 놀라게 하자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축성술에 변화가 생겼다. 무조건 높게만 쌓아올리던 과거와 달리 조금 낮게 쌓는 대신에 두껍게 쌓았고 성벽 안쪽에 진흙벽을 추가적으로 두껍게 쌓아 외부충격을 흡수하도록 했다. 대포의 파괴력이 이런 형태의 성벽을 부수기에는 아직 약했기 때문에 새로운 축성법은 아주 효과적인 대비책에 속했다. 프랑스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동안에 막대한 투자를 통하여 최첨단 기술복합체인 대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대포가 가지는 위력을 진흙이 간단히 눌러버린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노력이 진행되었는데 당대에 내노라는 르네상스 과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피란체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등이 인공장애물이나 새로운 요새설계, 대포에 상응하는 신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과학자인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밀라노를 위해 새로운 무기개발에 전력하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구상들을 많이 했으나 과학과 기술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했기에 실현하기 어려운것들도 많았다. 
   
밀라노를 떠나 베네치아로 옮겨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포를 주조할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1516년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 말년을 파리에서 보냈는데 이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적극적인 구애작전 때문이였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로 변모하게 된것은 프랑수아 1세가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할수 있다. 이탈리아 전쟁중에 피란체를 방문하여 그곳에 르네상스 예술품들을 보고 반하여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대전쟁이 종결된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전쟁은 인류사에 있어서 불치의 천형인 것 같다.



총의 출현과 전술의 변화
총 역시 스페인 군대에 의해 코냑동맹전쟁(1526-1530)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개발한 기적같은 신무기 대포에 스페인은 경악했는데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스페인은 남미 식민지 개척으로 쌓아올린 부를 바탕으로 급하게 유럽 최고의 과학기술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20 여년간의 투자 끝에 손대포라고 볼수 있는 '머스킷총'을 개발하였다. 머스킷총은 사거리가 약 270m로 프랑스 대포의 사거리를 앞질렀다. 
   
머스킷총의 파괴력은 두꺼운 철제갑옷을 뚫어버리며 프랑스 기병을 무력화 시켰고 우월한 사거리로 인해 프랑스 포병에게도 치명적이였다. 전장에서 머스킷총이 사용된 초기에는 원인을 알수없는 가운데 기병과 포병들이 픽픽 쓰러져 가자 프랑스군은 매우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우월한 사거리 때문에 스페인이 개발한 머스킷총은 프랑스산 대포의 위협을 극복하는 최신에 무기로 등극하게 되었다. 

중세의 전쟁이란 기술적인 면에서 볼때 공격보다는 수비가 우세한 입장이였다. 그러나 화약의 출현은 이러한 관계를 뒤바뀌게 하였다. 총과 대포라는 무기를 통해서 화약이 전쟁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전술에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으로 두꺼운 철제 갑옷을 점차 착용하지 않게 되었고 경보병의 기동성이 중시되었다.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군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총과 대포의 성능이 크게 향상된 훗날에는 축성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자료 참고와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역사카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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