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爭史

마틴신 2018. 1. 27. 23:03
예상외에 전쟁 피해자 헨리 8세
코냑동맹전쟁(1526-1530)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의외에 인물은 잉글랜드 튜터왕조의 헨리 8세(재위1509-47)이다. 1527년 첫번째 왕비와 이혼을 하려고 교황청에 결혼 무효선언을 요청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을 당하였다. 이와 비슷한 경우에 교황들은 대개 왕의 손을 들어주고 은혜를 베풀어 왔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던 이유는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재위1519-56)의 이모였고 카를 5세가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카를 5세에 대항하며 교황 자신이 주도하여 일으킨 금번 코냑동맹전쟁(1526-1530)에서 참패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코가 석자였다.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헨리 8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캐서린과 이혼한후 두번째 왕비인 앤블린과 혼인을 과감하게추진하였다. 교황은 즉각 헨리 8세를 파문하였으나 헨리 8세는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발표하여 국교회를 만들고 영국 교회를 교황청과 분리시키는 종교개혁을 감행하며 이에 맞짱을 뜨게 된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당대 최강국인 신성로마제국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등 외교적인 고립을 자초하는 자충수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을 할수 없는 사건으로 보인다. (2번째 왕비가 된 앤불린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건지 아니면 이 무슨 똥배짱인지...이혼진행의 미진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충복이였던 토마스 울지의 목을 날리는 토사구팽까지...)


잉글랜드산 주철대포
이탈리아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을 지켜본 헨리 8세(재위1509-47)도 대포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가난한 잉글랜드가 부강해지려면 해상교역에 치중하여 해양강국이 되어야 했다. 대항해시대에 네덜란드,포르투칼,스페인과의 경쟁속에 대서양에서의 우위권을 확보하려면 뛰어난 성능에 군함용 대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속에 과감하게 투자를 하였다. 당시에 부유한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으로 대포를 만들었는데 청동은 철보다 가격이 4배나 비쌌다.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지방에서 구리와 주석이 많이 채굴되었지만 제련후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는 기술이 필요했기에 청동의 가격이 비쌀수 밖에 없었다. 가난한 잉글랜드 왕실로서는 비싼 청동대포 제작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소형 주철대포 개발에 촛점을 맞추었다. 
    
주철대포의 제작은 많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포신이 폭발하고 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육군보다는 해군력이 주력이였던 잉글랜드는 군함용 소형 주철대포가 반드시 필요했다. 헨리 8세(재위 1509-47)는 주철대포 제작 기술개발과 화약개량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재원조달은 1534년 수장령을 통한 종교개혁때 몰수한 교회 재산으로 충당하였다. 오랜기간 동안 투자를 한 결과 안정된 성능의 주철대포개발에 성공하게 되었고 16세기말 유럽 대포시장의 70%를 잉글랜드산 주철대포가 점유하였다. 



프레베자 해전과 레판토해전
6차 이탈리아 전쟁(1536-1538)은 교황 바오로 3세의 중재 노력으로 1538년 6월 니스조약이 체결됨으로 끝나게 된다. 종전후 스페인은 교황령, 제노바, 베네치아등이 참여한 신성 동맹이 결성하여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내 세력팽창을 저지하려했다. 두 세력은 1538년 9월28일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프레베자 항구 근해에서 충돌하게 되는데 이 프레베자 해전에서 122척의 오스만 투르크 함대가 200 여척으로 구성된 신성동맹 연합 함대를 무찌르게 된다. 오스만이 승리함으로 동지중해에서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 뒤 이런 지중해 해상권의 우위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북부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가까이는 이탈리아에서 멀리는 대서양 입구까지 세력을 떨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유럽이 레판토 해전(1571)으로 오스만 해군을 격퇴할 때까지 약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터키, 시리아, 이집트(1517)를 차례로 침공하여 지중해 동안을 모두 차지하였다. 1538년에 프레베자 해전마저 승리함으로 지중해의 제해권마저 거머쥔것이다. 이로써 국제교역에 있어서 유럽을 따돌리고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듯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509년에 이집트와 인도 연합군이 포르투갈과 벌린 디우해전에서 패배함으로 인도양에서의 해상권이 유럽에 넘어가버렸다. 맥빠지는 일이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가 직접 나섰다. 1538년과 1547년 대규모 함대를 디우에 보내서 포위전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포르투갈이 차지하게 되는데 이후 100년 넘게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깡패로 굴림하게 된다. 

디우해전(1509)과 이후에 포르투갈의 승리는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서양이 동양을 누르고 급속도로 아시아를 식민화하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다른 서양 국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도전의식을 고취시켜서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는 포르투갈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활짝 열려서 유럽인들에게는 축복인지 모르겠으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식민 제국주의에 시달리게 되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1571년 16세기 최대규모 해전이라고 불리우는 레판토 해전이 벌어진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후 서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지중해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세력을 팽창하다가 유럽과 충돌하게 된것이다. 스페인,베네치아,교황청의 신성동맹함대와 오스만 투르크 함대가 격돌했는데 신성동맹함대가 완승을 거두게 된다. 이로써 스페인은 이탈리아 대전쟁과 레판토 해전의 승전국으로서 지중해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거머주게 되었으며 1581년 포르투칼을 합병하여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지리상의 발견(15-17세기) 이후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인해 더욱 번영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대전쟁과 레판토 해전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에 강대국간의 대규모 패권쟁탈전은 지중해를 벗어나 더 큰 이익을 차지할수 있는 대서양과 인도양등에서 벌어지게 된다.



칼레해전에서 침몰한 스페인 무적함대
이탈리아 대전쟁(1494-1559)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스페인(에스파냐)이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레판토 해전(1571)에서 대승을 거두어 지중해의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며 1581년에는 포르투칼 마저 합병함으로 당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며 기세등등하게 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56-1598)에게도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였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인 네덜란드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넌서치 조약(1585)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군사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는 강대국인 스페인에 대한 잉글랜드의 외교적 견제정책이며 스페인이 한자동맹과의 조약을 통해 단행한 금수조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또한 스페인 상선들이 남미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실고오다가 잉글랜드의 해적 드레이크등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것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가 수수방관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독려하였다.(사실은 50 :50으로 동업함) 

펠리페 2세가 이에 대해 항의를 하며 드레이크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가 이를 무시하고 도리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당대 강대국이였던 스페인 국왕으로서 매우 모욕적인 일이였다. 더불어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다가 보기 좋게 퇴자를 맞으며 자존심을 심하게 구긴 구원(久怨)도 있었다.(에고..이 찌질한 인간아...) 국민적인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스페인과 잉글랜드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고 펠리페 2세는 공개적으로 전쟁준비를 진행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원을 억제하고, 자국 상선이 약탈 당하는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전쟁은 불가피 했다. 드디어 1588년 스페인에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본토 상륙을 목표로 잉글랜드 함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칼레해전에서 스페인은 대패하고 말았다. 당대의 강대국 스페인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와 같이 보병을 이용한 등선육박전을 기본 전략으로 삼고 해상포격전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 당시에 함선용 청동대포는 무겁기만했지 사거리가 100m 내외였기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군함과 사거리에서 앞선 주철대포를 이용한 포격전으로 스페인 함대를 괴롭피며 치명타를 입히기도 혔다. 이런 잉글랜드의 전략이 승전에 이르게 된 원인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후 해상전에서 포격전의 비중이 높아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칼레해전의 승리로 인해 잉글랜드는 대서양에서의 제해권을 얻었고 당대 최강국이였던 스페인을 상대로 거두어 들인 승리였기에 해양진출에 대한 국민적인 자신감이 상승하였으며 국가의 위상도 높아졌다.    




17세기초 급부상한 네덜란드
칼레해전(1588)에서 패배이후 스페인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으며 네덜란드는 1568년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한 80년간의 독립전쟁 여정에서 어부지리(漁夫之利)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1609년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12년간의 휴전협정을 맺게 됨으로서 실질적으로 독립을 한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후 해상무역에 집중하여 많은 부를 쌓았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유럽의 모든 선박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선박을 갖고 있었으며, 선박 보유수 2위 국인 영국보다도 선박의 수가 3배에 달했다. 약 40년간 전성기를 맞이한 네덜란드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독일에서의 30년전쟁(1618-1648)이 종결되면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1648년에 국제적으로 완전히 독립국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시기에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는 두번에 걸친 혁명으로 국왕을 참수시키는등 국정이 안정되지 못하였기에 네덜란드가 해상교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내정이 안정되자 해양교역의 주도권을 놓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수차례 해상전쟁을 치루게 된다. 최종적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하였으며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번영을 뒤로하고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잉글랜드는 해양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여전히 시끄러웠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벌어진 8차례에 이탈리아 대전쟁이후에도 이민족의 지배와 간섭을 받으며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19세기 초까지도 스페인,프랑스,오스트리아등 신흥 열강들의 각축장이였고 많은 도시국가들은 이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시민혁명(1789년) 과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이탈리아인들 사이에는 통일된 국가의 형성이라는 민족주의 의식이 싹텄다. 비록 마치니가 일으킨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후 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통일 운동이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인 카보우르는 산업을 장려하였으며 군대를 개편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의 북부와 중부를 통합하였다. 그러던중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지역인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한 가리발디가 자신의 정복지를 사르데냐 국왕인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이후 약 1400년이 흐른 1861년에 되어서야 비로소 외세가 아닌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최초로 이탈리아 반도가 하나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였으며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군을 베네치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고 1871년에는 로마 교황령마저도 통합하게 되었다.

 




[자료 참고와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역사카페 부흥,  

 

영국왕가

이야기 영국사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먼나라 이웃나라 1권 네덜란드 편,   

먼나라 이웃나라 6권 이탈리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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