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史

마틴신 2019. 10. 22. 23:11
[ 개 요 ]
로마 약탈은 코냑동맹전쟁(1526-30)중인 1527년 5월 6일에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강간,살인,파괴,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거에 있었던 그 어떤 로마약탈(사코 디 로마)사건보다 처참하고 컸으며 로마는 폐허로 변했고 도시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금번 약탈로 인해 부상 또는 국외로 도피한 자가 약 3만 3,000명이며 사망자는 총 1만 2,000명 정도가 발생했다. 
   
이는 대학살 수준으로 거리에 시체가 방치되어 부패하며 악취가 진동하였고 질병도 창궐하였다. 제국의 군인들중 독일 루터파 출신 용병들이 벌인 만행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폭력적이였다. 그 참상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혹자는 '지옥도 로마에 비하면 아름다웠다'라고 표현하였다. 여자는 어린아이부터 수녀들까지 모조히 강간한후 죽여버렸다. 과거의 약탈은 교회시설과 성직자에 대한 존중이 있었으나 금번 약탈중에는 그런것을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고위 성직자일수록 조롱과 모욕의 대상되었다.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그곳에서 7개월간 자진하여 셀프유폐생활을 하였다. 폭도로 돌변한 황제군은 약 9개월간 로마를 점령하다가 이듬해인 1528년 2월초가 되어서야 퇴각하였다. 그동안 도시는 무법천지로 변했으며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이후 교황은 황제 카를 5세(생몰 1500-1558)가 헛기침만 하여도 부들부들 떨정도로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 사건을 통해 코냑동맹군(프랑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교황령 등)과 신성로마 제국군간에 벌어진 코냑 동맹전쟁(1526-1530)에서 제국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음이 드러났다. 결국 코냑동맹전쟁은 1530년에 동맹군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여 황제군의 승리속에 종료되었다. 교황령 수도 로마에 대한 공격은 황제의 은밀한 명령으로 수행되었으며 교황이 동맹결성과 전쟁을 주도하여 황제에게 정면으로 대항함에 따라 전쟁의 적대국가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평소 황제 카를 5세는 교황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누적되어 있었다. 과거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선출시 당시 추기경이였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가 황제로 선출되는것을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523년에 있었던 콘클라베(교황선출회의)에서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교황에 선출 되도록 큰 도움을 준적이 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교황에 선출된후부터 황제를 적대하며 친프랑스적인 정책, 편파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파피아 전투(1525))에서 생포되었던 프랑수아 1세가 마드리드 조약(1526)에 합의한후 석방되었으나 강압에 의해 서명한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조약이행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수아 1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를 5세는 이에 분개했지만 루터의 종교분열(1517)로 어수선한 독일을 수습해야 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럽침공(1526년)으로 부터 오스트리아를 지켜야만 했기에 유야무야(有耶無耶) 넘어갈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를 침공은 프랑스가 전례없는 기독교-이슬람 동맹을 맺은 결과물로 유럽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위태로워지자 이에 맞추어 코냑동맹전쟁을 일으킨것은 두곳에 전선을 형성하여 카를 5세를 곤란케 만들기위한 교황의 계략으로 분노할수 밖에 없었다.(오스만은 1526년 4월에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8월에 헝가리를 침공했고 이에 맞추어 코냑동맹군은 북이탈리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마치 '적의 적'은 동지라는 점을 이용하여 이교도인 이슬람과 교황이 호흡을 맞춘것과 같다 할수 있다.)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 잉글랜드로 튀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그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다. 왕비 캐서린과 이혼(혼인무효선언)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1527년 12월) 보통의 경우에는 교황들이 국왕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였으나 이번 만큼은 그럴수 없었다. 그 이유는 헨리 8세의 왕비인 캐서린이 바로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황제 카를 5세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교황를 갈아치울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금번 로마약탈을 통해 그 위력을 과시한바 있다. 교황은 자신의 코가 석자인터라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황제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교황은 허락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허락하지 못한것이였다.
 
 
[ 목 차 ]
1. 배경

  1)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
  2) 도시 로마의 상징성
  3) 40대 젊은 교황의 등장
  4) 코냑 동맹 결성
  5) 코냑동맹전쟁의 시작
  6) 남진하는 제국군

  7) 로마 수비군의 상황 
  8) 마키아벨리의 충언
2. 로마 대약탈
  1) 무너지는 성도 로마
  2)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성
  3) 본격적인 약탈
3. 영향
  1 )교황의 입지 변화 
  2) 황제 카를 5세의 입장과 변명
 
4.그밖에 일들 
5.출처



[ 배 경 ]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이후 왕권이 강화되며 점차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 국정이 안정화 되면서 국가역량 결집이 가능하게 되었고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국력의 원천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이자 중심국가로 자라잡게 되었다. 이런 프랑스를 긴장하게 만든것은 스페인의 급부상이다. 1492년 레콩키스타(영토회복운동)을 완성하며 신흥 강대국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시칠리아도 통치하고 있었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도 선도적 국가였다. 설상가상으로 1519년에 스페인과 독일-오스트리아를 호령하는 젊은 황제 카를 5세가 등장하며 유럽의 국가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카를 5세의 출현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주변국가들의 견제와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무력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세기말에 포르투갈의 노력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으나 아직 초기시대라 새로운 항로를 통한 무역이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한 상황이였다. 따라서 여전히 지중해는 국제무역에 있어서 매력적인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유럽 강대국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해야 했다. 이러한 흐름은 1494년부터 1559년까지 65년간 8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대전쟁이라는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도시 로마의 상징성
도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문명과 정신이 깃든곳이였다. 유럽각국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지도국가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했다. 또한 유럽이 카톨릭화 되면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가 카톨릭 문화와 정신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이 카톨릭의 수호자이자 대륙의 지도자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교황의 인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는 16세기 유럽 각국의 패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반도는 십여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외세침략에 적절히 대응을 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40대 젊은 교황의 등장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에 재위 초반의 유럽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내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두나라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걸린 다툼으로 비추어지기도 한 이 싸움은 16세기 전반기에 젊은 황제 카를 5세(생몰 1500-1558)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생몰 1494-1547) 간에 주로 벌어졌다.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자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평화와 정국 안정을 지키기 위해 두 강대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나칠정도로 오락가락하는 교황의 행보로 인해 교황령이나 로마의 지방귀족들과 추기경들의 반발이 심했고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면도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지지에 힘입어 즉위하였다. 이 때문에 카를 5세는 전임교황 하드리아노 6세때 체결한 반-프랑스 방위동맹의 갱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면서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카를 5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프랑스, 베네치아을 포함한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1525년 2월,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히자 교황은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마드리드 조약후 생포되었던 프랑수아 1세가 자유의 몸이 되자 다시 황제 카를 5세를 멀리하며 프랑스,밀라노등과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추진하였다.
 
코냑동맹의 결성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제국군이 대승하며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이로인해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코냑동맹으로 명명된 이 동맹에는 베네치아,밀라노,피란체,프랑스,교황령등 이탈리아에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참여하였다. 
 
교황이 동맹결성을 주도하였으나 최종계약은 1526년 5월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스포르차 가문)에 의해 체결되었다. 동맹군 총사령관은 우르비노 공작이 맡았다. 카를 5세가 1521년에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탈환한직후 프란체스코 2세를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인 공작으로 임명하며 스포르차 가문의 복귀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밀라노를 점령하고 있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코냑동맹에 합류하였다. 프랑스가 동맹에 참가한 이유는 지난 1525년에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한것에 대한 복수 차원이였다. 프랑스 단독으로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꺽을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코냑동맹전쟁의 시작
교황이 직접 프랑스와 결탁하여 결성한 코냑동맹군이 롬바르디아의 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이탈리아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격노하였다. 특히 카를 5세가 복귀를 도와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의 배신에 분노했다. 제국군의 지휘관인 샤를(구 부르봉 공작)에게 밀라노를 탈환한후 전례가 없던 로마 침공을 명했다. 샤를 드 부르봉은 밀라노를 점령하여 스포르차 가문을 몰아낸후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코냑동맹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프랑스 군은 지난 파비아 전투(1525년)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전쟁에 소극적이였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게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샤를은 부르봉 공작이였으나 1523년에 프랑스 국왕에게 작위와 영지를 박탈당한후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카를 5세 밑에서 군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남진하는 제국군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나머지 도시국가들도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제국군의 남하는 큰 군사적 저항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다만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내려 제국군을 지치게 했고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용병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용병료 지급이 늦춰지는 이유는 고의성이 있어보이지만 행군의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용병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경우에 점령지에 대한 약탈을 허용내지 묵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게 통상적이였다. 스스로 돈벌이를 하라는 뜻이다. 
 부유한 도시의 약탈은 용병들의 로망인터라 이들은 부유한 도시 로마를 약탈할 생각에 한껏 들떠 있기도 했다. 로마 약탈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던 터라 소문을 접한 이탈리아 도적때들도 대열에 합류한 상태였다. 독일의 루터파 출신 용병들은 타락한 악의 소굴에 대한 응징이라는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 있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의에 사도라 생각했다.
 
로마 수비군의 상황
교황 글레멘스 7세는 황제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카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성도(聖都) 로마를 침공할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제국군이 점차 로마에 가까이 다가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닭고 크게 당황하였다. 다급해진 교황은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시의회를 열고 3일정도만 버텨주면 동맹군이 도착할거라고 설득하며 싸울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용병과 시민군 5,500명 정도가 급조되었고 제국군에 대항하여 농성전을 벌이기로 결정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충언
당시 피란체의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일찍이 '군주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단련된 정규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대부분 각자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이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통념상 마키아벨리의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 유지라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교황령에도 정규군은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 근위대와 용병 그리고 급조한 시민군으로 제국군에 대항하였다. 잘 훈련된 정규군이 5,000명 정도였다면 충분히 대적할만 하다. 튼튼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기초로하여 농성전을 벌이면 수비에 유리함등으로 볼때 약 20,000 여명의 제국군을 충분히 감당할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용병과 급조된 시민군으로는 결과가 뻔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교황령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 로마 대약탈 ]
무너지는 성도 로마
1527년 5월 6일, 신성 로마 제국 군대는 잔니콜로와 바티칸 언덕 쪽에 있는 성벽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무너진 성벽을 통해 제국군이 앞다투어 물밀듯이 쳐들어갔고 도시 로마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그런데 전투중에 지휘관 샤를 드 부르봉(생몰1490-1527)이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급료체불로 불만이 가득했었는데 지휘관 샤를마저 전사하자 용병들은 분노하였고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사한 샤를을 대신하여 필리베르 드 샬롱이 지휘를 이어받았지만 샤를의 죽음에 흥분한 병사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지휘체계는 무너지며 제국군인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살육,파괴,방화,강간을 자행하였다. 제국군인들은 강도로 돌변하여서 로마시내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지휘관인 필리베르가 병사들에게 약탈중지를 명했지만 이를 따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성
제국군대가 로마시내로 쏟다져 들어오자 교황청에 고용된 용병들과 시민군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 만큼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교황이 베드로 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500명중 겨우 42명만이 살아 남았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충성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였으며 오히려 교황에게 피신할것을 당부한후 베드로 성당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과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 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1534)는 베드로 성당에서 900m 떨어진 산탄젤로 성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목숨을 받쳐 충성을 다한 이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청 근위대에 기용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매년 5월 6일 되면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은 충성서약을 하는데 이는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금번 약탈 직후 수년간은 독일 용병출신들로 근위대가 구성되었다. 이는 근위대가 아니라 교황을 감시하는 역활을 하였고 이는 카를 5세의 조치에 따른 것이였다.)
 
본격적인 약탈
포로가 된 교황군 병사 1,000명에 대한 잔혹한 방식으로 공개 처형되었으며 성당과 수도원은 물론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이 대거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신성로마 제국과 친분이 있는 추기경들도 폭도로 돌변한 병사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액의 금전을 바쳐야 했다. 수녀를 포함하여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강간당한후 살해되었다. 기둥에 못박힌후 죽임을 당하는 이가 부지기수였고 그 참혹함은 아비규한(阿鼻叫喚)의 지옥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로마는 개박살, 아작난것이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는 물건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뜯겨나갔고 빼앗기며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는 초토화되며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르네상스 시절의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도시로서의 로마 성립 이후 사상 최악의 피해가 발생했다. 
     
제국군의 상당수는 독일 루터교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그 어떠한 일말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약탈에 몰두했다. 그동안 루터교도들은 이단으로 취급되며 강제개종을 강요받았고 갖은 수치와 고문을 받다가 화형당하기도 했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에도 얀 후스등을 고문하고 처형당하는등 부패한 로마 카톨릭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로마 대약탈 사건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막나가던 교황청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마 약탈의 역사]

 No

  발생 년도

  사건 내용   &   침략 민족

     비   고

 1

 BC  390년

  갈리아인(켈트족)들의 약탈

 

 2

 AD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

 

 3

 AD  455년

  게 이세 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의 약탈

 

 4

 AD  546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약탈

 

 5

 AD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약탈

 


5월 8일경, 클레멘스 7세와 적대 관계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추종자들과 농민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과거 1526년 교황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로마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 콜론나 추기경은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저택에서 수많은 로마 시민을 보살폈다. 한편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계속 칩거하며 동맹군이 나타나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6월 1일이 되어서야 동맹군 총사령관 우르비노 공작(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과 살루초의 미켈레 안토니오가 로마 북부 몬테로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던 이들은 광폭한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르비노 공작 프렌체스코 마리아 1세는 동맹군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코냑동맹전쟁(1526-30) 내내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다. 메디치 가문과의 악연 때문이였다. 이번 전쟁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 주도하여 벌어진 전쟁이다보니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1517년에 메디치 가문 출신에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21)와 갈등끝에 우르비노 전쟁을 치룬후 우르비노 공작위를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 레오 10세는 자신의 출신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2세(레오 10세의 조카)에게 우르비노 공작 자리를 넘겨버렸다. 물론 1522년에 다시 공작위를 되찾기는 했으나 다시 메디치 가문 출신에 교황이 즉위하자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쟁초반기 이미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제국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동맹국이였던 베네치아와 프랑스가 전쟁에 소극적이였으며 교황은 일방적으로 동맹 탈퇴와 재가입을 반복하여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교황의 항복과 로마의 피해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에 파르마와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양도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 대가로 400,000 두카트의 몸값을 지불하라는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행한 것은 후자뿐이었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가 리미니로 돌아갈 즈음 베네치아는 체르비아와 라벤나를 획득하기 위해 그의 상황을 이용하였다.

클레멘스 7세는 포로의 신분으로 약 7개월 동안 산탄젤로 성 안에 감금당한 채 지냈다. 1527년 12월 초순경 제국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한후에 몰래 산탄젤로 성을 탈출하였고, 오르비에토로를 거쳐 비테르보로 피신하였다. 교황은 1528년 10월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미 인구는 급감하고 시내 곳곳은 황량해진 상태였다. 1527년에 있었던 인구조사에서 로마에는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약 5만 5,000명이 거주하였는데 이번 약탈로 인한 사상자와 해외로 도피한 사람은 총 4만 5,000명정도 였다고 한다.(사망자 약 1만 2,000명)

제국군은 로마를 9개월간 점령하면서 로마 주변 지역을 약탈하다가 1528년 2월 중순경이 되어서야 철수하였다. 제국군에 고용된 용병들은 로마를 점령한 동안에 지휘관들에게 항명하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전히 용병료가 제때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군 지휘관들도 어찌할수 없었다. 용병들은 베드로 성당을 마굿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겨울이 되자 문과 문틀을 비롯해 나무로 된것은 모조리 뜯어내서 땔깜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로마시내의 거리에는 시신이 방치되어 나뒹글었고 부패하며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 영 향 ]
교황의 입지 변화
로마 대약탈은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으로 이 사건이후 교황들은 강력한 황제인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떠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코냑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이빨 빠진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황의 영향력은 정확히 교황령 안으로 축소되었고, 마틴루터에 의한 종교분열(1517)의 문제해결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에 의해 주도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고 말았다.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압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1077년)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였다. 
      
또한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면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분리, 독립하여 성공회를 만드는 종교개혁등 많은 역사적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클레멘스 7세는 어찌나 트라우마가 심했는지 예술가 미켈란젤로에게 명해 시스티나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한다. 1528년, 카를 5세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많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1530년 2월에 카를 5세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서의 대관식에 왕관을 씌워주게 되었다. 이후에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칠수 밖에 없었다.
 
황제 카를 5세의 입장과 변명
카를 5세(1519-1558)는 로마 약탈 소식을 접하고 무척 당황하며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카톨릭 교도이기도 한 자신에게 돌아올 종교적,도덕적,정치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제스처로 보이며 적어도 로마 약탈을 유도하였거나 방조하였던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침공에 루터파 교도들로 구성된 용병들을 동원한것은 그들이 카톨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을 이용한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교황과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는것은 카톨릭 교도들의 반발을 불러올것이고 명분에서 밀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매번 껄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교황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고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한번 쯤은 혼쭐을 내주고 기를 팍 꺽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평소에도 교황이라는 자들은 권위를 내세워 내정간섭과 유럽의 정치사에 지나치게 시시콜콜 간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한 따끔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계속 매를 벌고 있던차인데 황이 주도하여 동맹을 결성하고 황제인 자신에게 대적하였던 것이다. 과거에도 카노사의 굴욕(1077)같은 예에서 보듯이 교황과 세속 군주들간에는 힘겨루기가 있어 왔던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찍소리 못하게 확실히 서열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설령 교황이 사망한다해도 크게 신경쓸일은 못된다. 교황이란 존재는 이미 유럽의 귀족과 왕들 사이에서는 그 권위를 상실한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추기경들중에 친황제파에 속하는 자로 다시 선출하면 그만이였다.
 
 
 
 
[ 그밖에 일들 ]
재현될뻔한 로마약탈(1557년)
1555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카라바 추기경이 223대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 4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교황 바오로 4세는 선출당시 79세의 고령이었으며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재위기간중 유대인 탄압,금서목록 지정등 많은 문제속에 '16세기 최악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도내 스페인 세력을 축출하고 교황권의 부활을 꿈꾸었다. 당시는 제8차 이탈리아 전쟁(1551-59)중이였는데 1557년에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손을 잡고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스페인 펠리페 2세가 나폴리 왕국의 국왕에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여 스페인의 반발을 샀다. 밀라노와 나폴리 총독이였던 알바공은 즉각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교황은 휴전요청을 하며 프랑스군이 나폴리로 이동하는 시간을 버는 꼼수를 부렸으나 이를 간파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교황은 즉각적으로 완전 항복을 선언했다. 알바공이 이끄는 군대는 1557년 아무런 저항없이 로마로 입성하였고 교황은 9월 14일 항복에 서명하며 교황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다행스러운것은 로마에 대한 약탈은 재현되지 않았다. 1527년 로마약탈이후 30년, 한 세대가 흐른후 망각의 동물답게 대세에 도전했다가 톡톡히 망신살이 뻗쳤다. 교황의 연이은 실책에 로마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