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단상

우정(牛亭) 2019. 7. 28. 18:36

대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메일을 보내주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연도 반갑지만 이제 모든 건강이 회복되시어 일상이 궤도에 오르신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

 

천자봉 쉼터라는 카페 주인장 장한우(해병출신)님이 동료 몇 분과 격전지 월남에 

다녀온 후(227-37?) 그 카페에 짜빈동 이야기가 여러 번 올랐습니다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 분들 중에 포병7중대 소속 통신병 권용학님이 있어서 포병에 대한 막중한 역할을 

이야기하였겠지만, 전투종료 직후에 현지에 다녀온 경험으로만 이야기 하니 동료 선

후배들이 이해나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권 수병은 당시 중대본부 통신병이었고 

실제 상황에서 무선 통신의 중요임무를 수행하였으니 짜빈동 대첩에서 큰 몫을 하였지요


또 저와 보병9중대와 포병7중대에서 함께 밥을 먹었으니 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권 수병이 평소 낙천적인 성격에다 활동적이어서 자신의 임무와 역할(役割)을 매우 잘

수행하였던 아주 멋진 분위기 메이커 해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장님, 당시 이갑석 대대장님의 그 지략이나 포병운용 전술을 병과가

다른 분들이라 잘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말 대한민국해병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 절명의 대전투에서 대장님이 발휘하신 초능력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여단 상황실에서 무전기로 들어본 작전 관계자 몇 몇 분이나 조금 알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 하면 전투 후 사상자가 널려 있는 위치 등으로 전투분석을 한

전문가가 아니면 포병의 역할을 간과(看過)하기 쉽거든요.

 

육박전이라는 대 혼전 속에서 전체 전투상황파악이 거의 힘들었는데, 그때의 상황에

11중대 장병들이 적의 활동을 포병관측장교인 저에게 알려 주기가 어려웠습니다.

 

분대, 소대, 중대지휘소간의 연락이 어쩌다 한두 명의 연락병이나, 화기소대장의 분투로

겨우 유지되던 순간, 순간에 누가 제게 제대로 된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나마, 혼자서 무전기와 권총만 지니고, 오직 혼자의 힘으로

교통호를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적의 박격포 탄막을 헤치고 수차례에 걸쳐서 교통호로 기어 다니던 그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도 포대로 전파를 날려야만 하는 절규의 순간, 순간..... 그 순간들이 4시간

연속이었습니다.

 

조명탄이 꺼지면 우군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고, 미 해병대 앵글리코(항공함포연락팀)에게

항공요청을 해도 아주 높은 고도에서 비행기는 조명탄 1 회만 투하하고는 꼬리를 감추고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적의 로켓포가 날아오면 발사 지점을 파악하러 OP(관측소) 서북기슭으로 포복해가고,

"떴다 OP"신호와 함께, 포탄이 발사되면 낙탄 지점 파악하러 예광탄이 날아오는 데도

고개를 들어 보아야 하였습니다


중대 지휘소에서 1소대로, 또 산 정상의 op, 중대지휘소로 관측을 위한 기동을 

계속하여야 했습니다. 희미한 안개비가 내리는 교통호로 기동을 하는 동안 적 포탄은 

계속 폭발하여 그 파편 조각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 들고 그리고는 그 파편이 만든 바위조각

, 모래가 얼굴과 목덜미로 파고 들었습니다.

 

수십 차례나 교통호 바로 1-2m가까이에 떨어지는 로켓포와 박격포탄 파열음에 귀가 멍하여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그때 마다 잠시, 잠시 무전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교신도 

못하였습니다. 1소대로 가는 정상부근의 교통호는 바위투성이어서 깊이가 20센티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가랑비와 안개가 가득한 칠흑의 여건에서, 또 손발이 떨려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7~8미터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갈 때는 차라리 지옥 중에도 모진 아수라가 이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포와 고독의 극악상태였습니다.

 

그 때 제게 유일하게 들려오던 침착하고, 강한 믿음을 갖게 하던 무전기 핸드섿의 목소리 주인공이 

바로 대대장님이 이었습니다.

 

"전 대대 포문이 귀관의 명령에 따른다. 우릴 믿고 대담하라 ! “

 

대대장님은 절대로 작전지시만 하지 않으셨지요. 반드시 격려의 말과 침착하라는 충고를

겸하셨습니다. 만일 대대장님이 무전기를 직접 잡지 않으셨다면 제가 그런 초인적 용기와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을 까요?

 

아니, 사실은 짜빈동 대첩 3개월 전 661120일 날 그 유명한 푸옥록 고지 전투에서도 

저는 이미 대대장님과는 실전에서 멋지게 호흡을 잘 맞추었었지요?

 

, 그 작전시간이나 일기조건 등이 3개월 전과 아주 유사하였기 때문에 짜빈동 대첩 때에는

 더욱 전투 적응을 잘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푸옥록 고지 전투에서는 제가 전방에서 포탄 유도를 하다가도 적과 정면으로 대면하여 

직접 M2칼빈 소총사격으로 대응사격도하였고, 수류탄도 던지고, 근접한 베트콩에게 권총도 

쏘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짜빈동에서는 적과 직접 몸을 맞대며 접촉도하지 않았고 거의 총을 쏘지

않았으니 더 침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대장님 또 한 번 가정해봅니다. 제가 전투 초기에 전사하였거나, 아니면 전투 종료

한 시간 전인 7시경에라도 전사하였다면, 그래서 최전방의 포병관측이 없었다면

그리도 완벽한 전투승리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대대장님과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습니다제 전투의지에

힘을 불어넣어주신 대대장님이 제게는 지금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후견인이요

절대자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직접 저의 사격 요구에 정확히 포를 발사해주신 7중대장 최웅섭 대위님과

전포대장 및 전 중대원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와 찬사를 올립니다. 그 분들 뿐만

아니라 전 대대가 총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하였으니 포병대대 전체의 위대한 승전이었습니다.

 

해병포병은 파리의 잔등을 관측하고 사격요구를 해도 사판에 삔(pin)을 꽂기만 하면

명중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시던 분들이 아닙니까?

 

신속히, 정확하게, 화력을 집중한다.” 라는 마음다짐으로 혼연일치가 되었던

전 포병대대 장병들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당시 대대장님께 상세 보고는 안 하였지만 월남 빈선 군수 ""대위와 미군 고문관

David 중령이 거드름을 피우기에 코를 납작하게 해준 일도 있습니다. 느닷없이

서너 차례나 미군과 포 사격 게임을 하자는 겁니다.

 

저는 당시 PR사격(정밀제원기록사격)을 해야 하므로 겸해서 할 욕심에 흔쾌히 받아주었지요

3번 맥주 내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David에게 목표를 선정하라고 하였습니다. 군청에서

바라보이는 야산과 그 앞의 논에 있는 바위가 목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아마 사전에 그 미군은 미리 계획한 듯한 눈치가 보였지만, 자신 있게 OK하였던 겁니다.

그러데 저는 전방 관측장교(Foward Obserber)이고, David는 미 하사관에게 지시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과는 3일 연속 완승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저녁 식사시간이었는데도 명령 후 1분도 안 되어 해병포병은 효력사로 목표물

완전 제압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군은 30분이 넘어서야 첫 탄이 날아오니 비교가 되겠어요? 그 후로 월남 빈선

군수는 청룡부대를 더 신임하였고, 게다가 예쁜 군수 부인이 우리에게 감사를 표시한다며

군수 집에서 멋진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 게임에 이긴 후에 군청에 파견된 헌병대원과 육군 MIG요원, 월남 부 군수 2명도

초대하여 신나는 파티를 하였습니다.

 

당시 포로들의 진술에 따르면 베트콩이 제일 무서워한 대상이 바로 해병포병이었음

널리 알려졌잖습니까?

 

제가 대대장님보다 대장님이라 부르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우수한 부대를

만드신 업적에 대한 저의 당연한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대장님, 다정하신 사모님과 함께 늘 건강하시고, 멋지고, 즐거운 인생을 향유하소서 !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되너미 고개에서, 이 아침문안 올립니다.

김 세 창 올림

 

PS: 4월 중에는 구성리로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