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단상

우정(牛亭) 2020. 1. 4. 09:18

짜빈동 전투를 돌아본다.(1)

(11중대 3소대장 이수현 소위의 회고)


짜빈동 전투(1967.2.14. 23:20~2.15. 08:30)는 주월 청룡부대 제3대대 11중대가 진지

(꽝응아이성 선띤군 토남면 도이짠)를 야간기습 공격한 적 2,400 명을 5 시간의 혈투

끝에 격퇴하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 세계 군사(軍史)에 남을 대첩이다.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채명신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짜빈동 전투는 해병대의 영예일 뿐 아니라 국군의 영예이며, 세계 군사(軍史)에 찬연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청룡여단이 초기 전투에서 적을 깔보다가 입은 수모를 깨끗이

씻었을 뿐 아니라, 베트콩과 월맹군이 한국 해병대에게 함부로 대들지 못하게 됨으로써

청룡은 귀신 잡는 해병으로 더욱 명성을 세계에 떨치게 됐다.“

 

짜빈동 전투 시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 정규군이었다. 당시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적은 월맹 정규군 제2사단 소속의 제1연대 본부(430 )와 예하 60대대(500 ), 70대대

(500 ), 80대대(430 ), 90대대(400 ) 4 개 대대였다. 2사단 1연대는 별칭이

강철연대였을 정도로 월맹이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직접 공격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공격이 성공했을 때 전과확대와 차단작전을 위해 월맹 제2사단 21연대 소속 2,100 명과

베트콩 지방 제40대대(혹은 베트콩 38대대와 48대대)도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월맹 정규군 2 개 연대와 베트콩 1 개 대대가 동원된 공격 작전을 11중대가 완벽하게

방어해냈을 뿐 아니라 공격군을 완전히 궤멸시킨 것이다.  적은 11중대를 쓸어버린 뒤

포병대대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짜빈동 전투 48 주년(2015.02,15) 특집호를 낸 210일자 해병대 전우신문 특별대담에

나온 손상국씨(167. 당시 3소대 2분대 선임조장. 짜빈동 전우회 사무국장)모든

실탄이 소진됐습니다. 적들과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총을 쏠 수도 없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육박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죽느냐 죽이느냐

하는 긴박한 선택만이 남은 것입니다. 나는 평소 연마했던 태권도로 적들을 격파할 수

있었고 평소 훈련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결국 우리 3소대 대원들은 전원이

전사 또는 부상하여 한 명도 성한 대원이 없었습니다. 숨 막히는 최후의 순간을 넘기고

살아남은 것입니다.“고 말했다.

 

짜빈동 전투에서 우리 대원 15 명이 전사하고 33 명이 부상했다. 반면 적은 포로 2 ,

확인사살 243 , 추정사살 60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체코제 화염방사기 3 , 대전차

유탄발사기 5 , 기관총 2 , M15 소총 11 , M56 자동소총 17 , TNT 100 ,

각종 실탄 6,000 발 등이 노획됐다. 이 전공으로 10 명의 장교를 제외한 11중대 병사

284 명 전원은 196731일 일 계급 특진했다. 또한 11중대는 미국으로부터 1968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수현 소위의 3소대는 전투 당시 해발 30 미터 중대진지 서북 쪽 적의 주 공격로에

위치해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따라서 5 시간 동안 계속된 전투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말할 수 있는 입장이다. 짜빈동 전투는 보병전투가 아니라 포병전투였다.”

이것이 이 수현 소위가 한 마디로 내린 짜빈동 전투의 정의(定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