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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2010. 3. 14. 21:16

치박시의 임치구와 경계선이 맞닿은 도시가 청주시이다.

이름도 생소하고 규모도 별로 크지 않은 도시지만, 박물관은 대도시의 이름난 박물관 못지않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다.

치박시의 기차역은 아마도 시내 중심에서 외곽으로 이전한 듯 보였다. 역 내부에 편의 시설은 전혀 없이 의자만 몇개 놓여있고,

건물도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건너편의 시외버스 터미널과 함께 옮긴지 얼마되지 않은 듯 싶었다.

시내버스 노선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류장 표시도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썰렁하기 그지없는 기차역이었다.

중국의 기차역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고 정신을 쏙~ 빼놓는 곳인데도~~

 

 

청주역에서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주변에 공장만  있고 사람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10여분을 달려서야 구시가지로 들어가는데...이제서야 사람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청주시 청사 앞은 중국의 어느 도시들과 다르게 가로수와 아름다운 가로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청사 앞의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닌 검은 색 돌로 바닥을 깔아 놓았다.

찻길과 인도에는 몇사람의 청소부가 계속 길을 쓸고 오물을 줍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좀 생소한 모습이다.

도시는 중국의 어떤 도시와 달리 너무 깨끗한 도시였다.

약 20분 정도를 달려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택시비 23원.

박물관은 모두 3개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은 2층, 3층으로 그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입장료 무료.

정면과 좌우의 건물들이 전부 전시관이다.

 

시골 도시의 박물관이라 그런가? 전시 방법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내부도 추워서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 전시물들은 북경의 역사박물관이나 상해박물관, 서안의 섬서박물관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전시물로 꽉 찬 박물관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서는 청주박물관을 부를 때 "작지만 큰 박물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래 사진은 역시 산동성 고유의 토기라 부르는 흑도(黑陶)이다. 따로 유약을 바르지 않았는데 겉이 마치 유약을 바른듯 빤짝거려 마치 금속으로 만든 그릇처럼 보인다.

 

특히 청주박물관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이정기 장군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처음에는 당나라 국적으로 벼슬에 나아가 지금의 청주에서 군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되었다.그 후 군사에 오르고 조정으로부터 평로치정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칙사의 벼슬과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755년 안녹산이 난이 일어나 당나라 정부가 분열되자  이정기는 당시 요동 군대의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것을 이용하여 이들을 규합하고,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761년 이정기는 군사 2만으로  산동성으로 진출하여 1산동성에 주둔한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당시 이정기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그해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겨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던 중 낙양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778년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국호를 제(齊)로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4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다시 그 아들 이사고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부국강병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으나, 이사고도 38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가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당나라 헌종이 신라와 손을 잡고 다시 나당연합군을 편성, 이사도를 공격하여 결국 81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아래 사진은 바로 이정기장군의 초상이다.

 

나는 가끔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원류가 중국 북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초기 불상 모습은 흡사 중국 수나라 혹은 당나라 때의 불상모습을 그대로 본뜬 듯한 모습을 자주 보게되어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조그만 불감 속의 불상도 흡사 그 분위기가 경주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처님인 감실부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돈황벽화에서 고구려 벽화와 구도랑 내용이 꼭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으니까...너무 독자적인 것을 내세우기 보다는 문화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연구를 해 봄이 어떤지?? 

반월형 석도...중국의 반월형 석도는 칼날이 직선 부분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반월형 석도는 칼날이 둥근 부분에 있는 것치 차이라면 차이다.

 청동 도끼...얼굴 형상이 흡사 귀면상처럼 보인다.

 녹유향로...청자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이다.

 

청주박물관이 자랑하는 전시물이다. 바로 박물관과 이웃한 청주용흥사(龍興寺)에서 발굴된 일괄 유물들이다. 십수년 전에 북경역사박물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용흥사 발굴 특별전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 이후 잊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그 불상들을 보게되어 정말 감회가 남달랐다.

아쉬운 것은 당시 보았던 불상중 많은 불상이 전시되지 않았는데, 수장고에 들어가 보존 중인지, 아니면 순회전시 중인지...아무 설명도 없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소조상에 채색하고, 금박을 입혀 만든 불상들이다. 역시 우리나라 초기불상과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는듯하다...불상의 시대는 대부분 동위(東魏)

 

 

 특히 이런 보살상의 법의, 영락, 승각기 등을 주목하 ㄹ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사 전공이 아니라 뭐라고 꼬집어 말 할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