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잠용(潛蓉) 2020. 10. 23. 07:1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68년 만에 돌아온 단원의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

"사마천·소동파도 낙방할 난장판"
경향신문ㅣ2020.09.22 06:00 수정 : 2020.09.24 09:48

 

▲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전성기인 30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공원춘효도’.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풍자하는 풍속화이다. 1953년 미해군이 가져갔던 작품이며, 미국 개인소장가가 갖고 있던 것을 이번에 서울옥션이 구입환수해서 경매에 내놓았다. 표암 강세황의 제발이 눈에 띈다. 봄날 새벽(춘효·春曉)의 과거장(공원·貢院) 풍경이라는 글이다. /서울옥션 제공


단원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인데,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다. 일산(혹은 우산)이 마당을 뒤덮었고, 일산마다 5명에서 6~7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뭔가를 작당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이는 행담(行擔·책가방)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그림 윗부분의 표암 강세황(1713~1791) 글이 흥미롭다.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貢院春曉), 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萬蟻戰감)….”

 

표암의 글 때문에 단원의 그림에는 ‘공원춘효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공원(貢院)’은 과거시험장이고, ‘춘효(春曉)’는 ‘봄날 새벽’이다. 그러니까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공원)’을 그린 그림이라는 소리인데, ‘만마리의 개미가 싸움을 벌인다’(萬蟻戰감)고 풍자했다. 이 무슨 말인가. 만마리의 개미가 싸움을 벌이는 이 ‘난장판’ 같은 단원의 그림이 ‘과거시험장’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둘다 맞는 얘기다.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을 바로 ‘난장판’이라 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봄날 새벽의 과거장’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양반가 자제의 과거시험을 위해 6명이 역할분담한 모습을 그렸다.

▲ 수험생(거자·①) 옆에서 ‘문장 전문’인 거벽(②)이 글을 지어 불러주면 ‘글씨 전문’인 사수(③)가 신속하게 답안지를 작성한다. 정작 응시생은 하는 일이 없다. 그 옆에는 파라솔 같은 우산(일산)과 말뚝, 쇠몽둥이, 평상, 짚자리, 책가방 등을 들고 밀고 들어온 선접(④)과 수종(⑤), 노유(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성균관대박물관 제공

 

■ 단원 풍속도의 전격 귀환작전

한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단원의 이 ‘공원춘효’가 68년 만에 돌아와 지난 22일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다. 그 결과 단원의 고향인 안산시에 4억9천만원에 낙찰됐다. 이 그림의 구입 환수 일화가 흥미롭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미군 해군(유진 쿤)이 가져갔다가 2005년 패트릭 패터슨이라는 골동품상의 수중에 넘어간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과 관련해서 미 해군의 손에 들어갈 무렵 당시 부산에 피란 중이던 국립박물관의 김원룡 학예사(훗날 서울대 교수)가 써준 영문 감정서(확인서)가 눈길을 끈다. 당시 31살이던 김원룡 학예사는 “이 그림은 단원의 30세 이전 그림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 조선시대 후기 한 지역에서 열린 19세기 과거시험장 풍경이다. 옹기종기 모여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타락한 과거시험장의 모습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아무튼 패터슨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이 그림을 처음 본 이는 미술사학자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였다. 패터슨 측으로부터 “감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정 교수는 2007년 2월 미국 프레즈노로 건너가 이 그림을 보았고, 그해 4월 국립국악원이 발행하는 <국악누리>에 잠깐 소개했다. 이후 이 그림은 ‘조선의 과거시험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않고 인용된 자료가 됐다. 그러던 지난해(2019년) 정병모 교수의 강연을 들은 서진호 사랑의종신기부운동본부 대표가 “저 그림을 가져오자”고 제안했다. 서대표는 단원의 고향인 안산시와 함께 ‘공원춘효도’의 구입 환수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국 현지에서 작품을 최종 확인할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기록된 1800년 3월21~22일의 특별과거.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했다. 이릍간 치른 시험에 문과에만 무려 21만명이 응시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8월 말 소장자인 패터슨의 부인에게서 “남편이 암 판정을 받아서 위독하다”면서 “매매절차를 서두르자”는 긴급기별이 왔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안산시로서는 작품을 실견할 수 없었던데다 행정처리가 복잡했기 때문에 신속한 귀환작업은 불가능했다. 결국 서울옥션이 나서 단 일주일 만에 절차를 마무리지었고, 지난 15일 환수됐다. 그야말로 유물 전격 수송 작전이었다고 한다.


■ 새벽의 과거시험장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그림을 보고, 구입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병모 교수를 통해 이 그림을 뜯어보자. 크기는 세로 71.5cm 가로 37.5cm이며,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정교수는 “이 그림은 과거장에 가득 찬 우산들이 장관을 이뤘고, 사이사이 힐끗 보이는 수험생의 긴장된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평했다. 정교수는 “과거장의 모습을 서양화식의 대기원근법으로 성대하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면서 “단원의 풍속화 전성기인 30대 작품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은 선(線)이 아니라 공기층이나 빛의 변화로 거리감을 표현하는 원근법을 가리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완성한 기법이다.

 

▲ <평생도> 중 ‘소과응시’.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보는 것 같은 입시비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기법은 그렇다치고, 이런 과거시험장이 있었다는 말인가. 강세황의 글을 더 읽어보자. “어떤 이는 붓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이는 책을 펴서 살펴보며,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을 이루며 이야기하며,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졸고있는데…등촉은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바로 그랬다. 당대의 과거시험장은 단원의 그림과 표암의 글처럼 난장판, 바로 그 자체였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1762~1836)에 언급한 과거시험장의 한심한 작태를 소개해보자.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巨擘), 글씨에 능한 자를 사수(寫手), 자리와 우산 같은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 수종 중 천한 자를 노유(奴儒), 노유 중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른다.”(<경세유표>) 무슨 말인가?.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 1명에 최소 5명이 붙어 역할분담을 하여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인 1조의 ‘입시비리단’이다. 각자는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우선 과거장에 먼저 들어가야 유리했다. 왜냐. 지금처럼 수험번호에 따라 지정좌석에 앉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과거 때 시험문제를 내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 조선시대 시험답안지인 시권. 조선 후기엔 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면서 채점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먼저 써서 제출해야 유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과거시험장에 웬 우산행렬이?

이때 필요한 자들이 바로 ‘선접’과 ‘수종’, ‘노유’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장인 창경궁(춘당대) 밖에서 등불을 밝히며 밤새워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를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우산(일산)을 펴고는 ‘내 자리요!’하고 맡아놓았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고양이 귀같은 검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써서 수험생으로 위장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어깨에 대나무창을 메고, 손에 쇠몽둥이와 짚자리, 평상(平床)을 들고 있다. 노한 눈깔이 겉으로 불거지고 주먹을 어지럽게 옆으로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면서 현제판(懸題板) 밑으로 달려들고 있으니….”(정약용의 <경세유표>) 19세기 한양거리를 노래한 ‘한양가’는 새벽에 문을 열자 쏟아져 들어오는 인파를 두고 “마치 줄불을 펼친 듯 새벽별이 흐른듯 전투를 벌일 기세”라고 표현했다. 초정 박제가(1750~1805) 역시 ‘과거난장판’이 된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북학의>)

 

▲ 1813·1818·1824·1825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제출된 응시자의 시험 답안지. 4건을 하나의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허튼 소리가 아니다. 1686년(숙종 12년) 4월3일 숙종이 명륜당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들은 전국의 선비들이 먼저 들어오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숙종실록>은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관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단원의 ‘공원춘효도’를 보라. 초롱불을 켠 새벽인데 시험장에는 자리를 맡아놓은 우산이 덮여있다. 파라솔 같은 우산(일산)과 말뚝, 쇠몽둥이, 평상, 짚자리, 책가방 등을 들고 밀고 들어온 선접(④)과 수종(⑤), 노유(⑥) 등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몸싸움을 해서 좋은 자리를 확보했다고 치자. 답안은 어찌 작성하는가?

 

자리를 잡은 응시자(거자·①) 곁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문장 전문’인 거벽(②)과 ‘글씨 전문’인 사수(③)를 주목하라. 문장이 뛰어난 ‘거벽’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안의 내용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역할이다. 또 ‘사수’는 글씨를 빨리, 잘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거벽’이 지금의 책가방 격인 행담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들을 꺼내 바람처럼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 그렇다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거자·①)는 무엇을 했을까. 그림에서 보다시피 아무 것도 안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아직 고무래 丁(정)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답안지)를 제출한다.”(<경세유표>)

결국 다산의 말처럼 돈이 있고,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제는 고무래 丁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거벽’과 ‘사수’, ‘수종’, ‘노유’, ‘선접’ 같은 ‘입시비리 조직’의 도움으로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성균관대 박물관의 <37회 2018 Homo Examicus-시험형 인간 특별전 도록>, 2018에서)

 

▲ 학봉 김성일의 <학봉속집>에 나오는 퇴계 이황의 일화. 퇴계도 과거에서 3번이나 낙방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퇴계는 “24세 때 연이어 세 차례나 낙방하였어도 낙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시험의 나라’, 조선

과거시험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됐을까? 따지고보면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국가시험만 4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 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번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였던 셈이다.

 

▲ 동계 정온(1569~1641)의 선조인 정준이 고려 우왕때 과거에 장원 급제한 뒤 받은 합격자 명부인 ‘고려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과거장 안팎을 노끈으로 연결한 이유

그랬으니 합격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른바 입시부정이 심심치않게 일어났다. 기상천외한 사건이 1705년(숙종 31년) 2월18일 터졌다. 성균관 인근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는 잡아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이 노끈은 명륜당 뒤 산쪽에서 성균관 담장 밑을 통과해서 과거시험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대나무 통을 묻고 그 속에 노끈을 연결한 것이다. 그 날짜 <숙종실록>은 “이것은 과거장에 들어간 유생이 노끈을 이용해서 외부인이 작성한 답안을 받았다는 얘기”라고 단정했다. 뒤 이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는데, 이와 같은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확인했고 범인색출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거나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직적인 입시비리 때문에 이미 치른 과거 자체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1699년(숙종 25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이다. 기묘과옥은 1699년 실시된 과거에서 34명이 합격했지만 과거 자체를 취소한 사건이다. 즉 과거 시험의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중에 등록관과 봉미관 등이 있었다.

 

등록관은 과거 때 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의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실무관이고, 봉미관은 응시자들의 답안지 서명란에 봉인을 붙이거나 떼는 일을 담당한 관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청탁을 받고 다른 응시자의 봉투를 붙였거나, 답안을 베껴 제출할 때 고쳐 써주거나 해서 부정합격시킨 사례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나왔다. 결국 관련자 수십명이 절도에 유배되고, 시험자체가 무효처리됐다.

 

▲ 정병모 교수가 소장가인 패터슨의 집에서 단원 김홍도의 ‘봄날 새벽 과거장’ 그림을 친견하고 있다. /정병모 교수 제공

 

13년 뒤에도 일어난 임진과옥은 더 지독했다. 시험관이 친구의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3건이나 알려주는가 하면, 답안지에 앵(鶯)자를 암호로 쓰게 했다. 실제로 일부 답안에서 ‘천앵출유(遷鶯出幽)’와 ‘곡앵(谷鶯)’ 등의 ‘앵’자가 들어있었다(<숙종실록> 1712년 12월 2일). 뿐만 아니라 시험기간이 지난 뒤 답지를 제출하도록 해서 부정 합격시킨 것도 적발됐다. 특히 시험관이 시험 전에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던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고 관련자 중 3명은 끝내 처형당했다.


■ 이틀간 21만명이 응시한 문과 시험

응시자가 조선 후기 들어갈수록 기하급수로 늘면서 과거장은 더욱 난장판으로 변해갔다. 특히 정기시험(식년시) 외에 부정기로 치르는 특별시험의 경우 과열양상이 두드러졌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1800년(정조 24년) 3월21일과 22일 일어났다. 21일에는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인 경과(慶試·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치르는 과거) 초시가, 22일에는 춘당대에서 인일제(人日製·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다.

 

그런데 이 이틀간 실시된 특별시험에 응시한 유생이 자그만치 21만5417명이나 됐다.

“21일의 경과(초시)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 자는 모두 3만8614명이었다. 다음날의 인일제 응시자는 모두 10만3579명이었고, 시권을 바친 자는 3만2884명이었다…”(<정조실록> <홍재전서>) 이틀간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최종 합격증을 받은 응시생은 단 12명에 불과했다. 경쟁률이 자그만치 1만8000 대 1이었던 것이다.

 

▲ 단원의 작품에는 1950년대 국립박물관 김원룡 학예사가 써준 확인서가 첨부됐다. 당시 김원룡 학예사는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30세 이전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 조선의 과거에서는 떨어진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든다. 과거시험 준비가 다 된 응시자가 그렇게 많았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만큼 공부를 한 학생들이 많다는 얘기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1789년(정조 13년) 3월27일 지평 박사기(1734~?)의 상소문이 과거의 폐단을 낱낱이 고발한다. 즉 “요즘(1789년 현재) 향시(도에서 실시하던 진사·생원시의 예비시험)에 제출되는 답안지만 해도 4000~5000장에 이른다”는 것이다.

 

“응시자 수준이 옛날보다 나아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초고를 베껴 제 글로 만들어 바칩니다. 심지어 대과에서는 한 사람이 지은 글을 수십명이 써먹습니다.”

또 응시자가 수만~십수만명에 이르는데 옥석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 박사기는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이나 한유(768~824)가 와도 답안을 일찍 제출하지 않으면 떨어질 것”이라 했다. 박제가는 “한유 같은 문장가가 시험을 주관한다 해도 소동파(1037~1101)의 글을 번개처럼 던져버릴 것”이라고 개탄했다.

 

“수만명이나 되는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한다. 그 때문에 지친 시험관은 붓을 잡기에도 신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답안지를 내던져버린다.”(<북학의>)

1797년(정조 21년) 대사간 성정진(1738~?)은 “얼마전 생원·진사시가 펼쳐진 2곳에서 뽑힌 글은 거의 다 최초 300장 안에서 나왔다”고 비판했다. 시험관이 일찍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자의 것만 채점하고 나머지는 버렸다는 것이다.(<정조실록>)

 

이와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가 여러 차례 마련됐다. 1763년(영조 39년) 과거장에서 답안지를 일찍 바치는 폐단을 고치려고 시험관의 명이 있기 까지는 답안지를 내지 못하도록 했고, 일부러 나중에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뽑기도 했다. 1818년(순조 18년) 5월18일에는 과거 시험 시간을 3시간으로 한정하되 마감 전에 제출하는 시권은 채점관이 손으로 받지 않았다. 응시자가 직접 대(臺) 위에 던져서 쌓이게 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기하급수로 불어난 과거응시자를 통제할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하기야 객관식도 아닌 주관식 문제를 푼 답안지 수만장을 어떻게 제대로 채점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박제가는 “과거가 도리어 제비뽑기 놀이의 재수보다도 못한 형편”이라고 비판했다. 박제가는 “남의 손을 빌려 글씨를 쓰고 글을 대작하며, 능력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시험을 치르는 폐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한탄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문과 21만명이 응시한 1880년의 이틀간 과거 시험에 답안지를 낸 이는 7만여명에 불과했다. 33% 정도의 회수율이다. 나머지 67%는 답안지를 내지 않았다면 무엇을 뜻하는가. 답안지 내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태반이 허수였다는 얘기다. 그들은 바로 수험생으로 위장한 ‘거벽’과 ‘사수’, ‘수종’ ‘노유’ ‘선접’ 같은 ‘부정시험단’이었을 것이다.

 

▲ 정조의 책문에 낸 다산 정약용의 답안지. 유독 점수가 짰던 정조는 다산의 이 시험지에 ‘차상(次上)’의 성적을 내렸다. 원래 ‘차상’이라는 점수는 낙제권이지만 정조의 기준으로는 ‘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영호 교수 소장

 

■ 공자님도 통과해야 했을 문

68년 만에 구입환수되는 단원 김홍도의 ‘봄날 새벽의 과거장’ 그림은 바로 18~19세기 부정과 비리가 판쳤던, 그래서 난장판이라 했던 과거시험장의 적나라한 풍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거제도는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958년(고려 광종 9년) 시작되어 936년 동안 미우나고우나 인재등용의 산실이 되었던 과거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새삼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 등의 한탄이 귓전을 때린다. “천거없이 오로지 과거시험만으로 인재를 뽑음으로써 1000가지 병통과 100가지 폐단이 일어난다”(다산)느니, “모든 길을 막아놓고 문을 하나(과거)만 만들어놓으면 공자님이라 해도 그 문을 거쳐야 할 것”(초정)이라느니 하는 한탄이다.

 

어느덧 ‘난장판’으로 전락하고만 과거제의 폐단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든다. 다산과 초정의 말처럼 천거와 같은 다른 문을 더 만들었다면 모든 폐단이 일소되고 인재들이 차고 넘쳤을까? 그 또한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모든 제도와 법령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지, 제도가 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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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정병모, ‘새벽 과거시험장의 풍경’, <국악누리> 84집, 국립국악원, 2007년 4월호

□ 강명관,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년

□ 성균관대박물관, <37회 2018 Homo Examicus-시험형 인간 특별전 도록>, 2018

□ 장재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시험문화의 고찰’, <한국사상과 문화> 39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0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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