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장춘 2012. 11. 2. 02:00

 

 

 

이 글은 일생동안 방송사 연구를 한

 유병은 선생님이 쓴 글입니다. 유병은 선생님은

1943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방송업무를 수행하면서 방송

사료를 수집하고 방송사 연구를 해 오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최초로

방송국을 새운 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라 직접 얘기를 들으면서 상황을

 정리 할 수가 있어서 실감 있는 방송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의

자료는 귀중한 방송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접하기가 어려운

글이라 이곳에 올렸습니다. 다음 회에 평양방송국 편도 올려드릴 예

정이고 또 제가 쓴 관련 얘기도 링크해서 한곳에서 부산,

평양방송국 얘기를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최초의 지방방송국 부산 JBAK가 건설 되던 때 1935년 9월 21일 (HLKB)

 

 

 

 

지방에는 전혀 방송국이 없었고 서울에만

단 하나의 방송국으로 8년 7개월을 지켜왔다. 한마디로

 암흑기의 방송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방송협회 이사장과

박영효 부총재 및 한덕봉 기술자로 구성된 부산방송국을 만들기 위한 현지

 조사단이 부산에 파견돼 돼 경상남도 지사 및 부산 부윤(府尹-현 부산광역시장)을

방문하고 협조를 구하여 부산 시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높은 지대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 부산 시절에는 방송국은 높은 곳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부산역전에서 40계단을 올라가서 또다시 가파른 길을 많이 올라가는

 부산부 대청동 1정목 7번지에 위치한 대지 542평과 안테나를 건립 할 임야 1,538평을

 사용키로 하는 결정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힌덕봉의 말을 들어본바 방송국

재정이 어렵다는 방송 당국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적극적인 협조를 했으며

오히려 부산에 방송국이 생긴다는 획기적인 일에 대한 대 환영

이었다고 한다. 특히 부산은 부산방송의 양청지역이라

방송국 신설은 시급한 과제였다고 한다.

 

 

 

 

벽돌집 단층 총건평 115평의 청사와

사택을 건축하고 14평짜리 스튜디오 한 개를

마련했다.  방송출력은 250W였다. 그런데 철탑을 세울

임야가 경사가 심하고 암반이라 난공사였다. 한국에서는

암반경사지에 철탑을 세운 경험자가 없어 일본에서 기술자를

대려다가 완공 했다는 게 부산방송국 건설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며

 건설공사에도 동참했던 김정현의 설명이었다. 심한 경사지라 위

철탑의 높이는 35M, 아래 철탑은 41M이었다고 하니 가까운

거리에서 철탑의 높이가 6M나 차이가 있었다. 얼마나

급경사였는지를 짐작 할 수가 있다.

 

 

 

 

총공사비는 16만원이나 소요됐다고 한다.

 또 한국방송사상 첫 번째 방송국이 부산방송국에는

서울에서도 구비하지 못했던 단독 전요우신소를 처음으로

개설하게 됐다. 역시 대지(임야)는 현지 관공서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베풀었으며 부산방송국에 액 5.6Km떨어진 부산부 대연동

산 54번지에 소재하는 해발 150M나 되는 높은 산속에

“동래 수신소”라는 이름으로 건설했다.

 

수신소 17평과 기술원 합숙소 및 사택

27평이었다. 동래 수신소에서 단파수신기로

외국방송을 잡음 없는 양호한 상태로 수신하여 그곳에서

약 1Km떨어진 위치에 있던 체신국 소관인 서면 전화중계소를

 경유해서 성능이 우수한 일.만(日本과 滿洲)통신용 케이블 선으로

경성방송국으로 보내온 것이다. 동래 수신소는 부산방송국 개국

2개월 전인 1935년 7월 1일에 개소되고 경성방송국에 직속된

 기구로 발족돼 서울에서 직접 운영하였다. 1939년

4월 1일자로 부산방송국에 이양되었다.

 

 

 

 

한편 부산방송국에서는 부산부 영정 1정목

28번지 번화가에 라디오 상담소를 개설하고 청취자에

대한 봉사활동을 했는데 방송협회의 직할인 甲種상담소로

라디오 염가판매와 부속품 염가 보급 등으로 대단한 인기였다.

부산방송국의 콜 사인은 조선 내에서 합법적으로 사용을 개시한

방송국으로 “JBAK”가 됐다. 그 후 1947년 10월 1일 실시된 “HL" 한국

고유의 콜사인으로 바뀔 때 ”HLKB"로 변경됐다. 부산방송국이 개국

하면서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셩중앙방송국”으로 변경되었다.

한때 부산 지방방송국이라고 지방을 넣어서 방송 할 때도

있었다. 이는 관방(官放)시대의 유산물이기도 하다.

 

방송시설은 일본 도쿄 전기회사제 102D

형으로 진공관 VU-205C를 출력관으로 사용했다.

방송출력의 변천사를 보면 부산방송국은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개국당시 250W출력이 미 군정 아래이며 과도정부시절인

1947년 7월 1일에는 500W로 증강됐다. 이 500W출력으로 6.25사변

중앙방송국의 역할을 했다. 또 1.4후퇴로 정부가 부산에 천도 해 있던

중인 1951년 9월 12일에는 1Kw로 출력증강을 했다. 6.25 10주년을 기해

1960년 6월 22일에는 방송출력을 일약 5Kw로 증강한 후 또 1967년

 11월 5일 10Kw로 1971년 2월 9일에는 지방방송국으로서는

최고 출력인 50Kw로 증강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부산방송국 개국당시 전국의 라디오 등록대수는

 총 52,859대였는데 그 중 14,537대가 한국인 소유이고

외국인의 소유가 358대여서 결국 과반수가 훨씬 넘는 라디오의

소유는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에는 총 6,483대의

 라디오 중 외국인의 소유가 14대이고 조선인의 소유가 850대이며

나머지 5,619대의 라디오가 모두 일본인의 소유물로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부산에 일본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1935년말통계)

 

한편 유서 깊은 부산방송국에는

일제말엽에 만주대학 출신(8.15해방당시

업무과장. 직원들끼리 선출한 소위 민선국장)서종호가

 방송국 업무. 기술 양과 직원을 규합하고 독립운동가와 손잡아

 “구국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일망타진 당하였다. 헌병대로

 넘겨져 즉결처분 직전에 8.25해방으로 풀려나오면서 경찰서장

이하 고등계 형사들에게 일장 훈시를 했다는 빼 놓을 수

없는 기록이 있어 간단한 기록을 남긴다.

  

부산방송국 개국 때는 서울에서 박충근

 아나운서(권투 중계방송을 최초로 시도함)와 한진동

엔지니어(아마츄어 무선 통신사이며 박정희 대통령장인

육종관과 강이 단파사건을 주도해 유죄 판결됨) 은 부산으로

전근 시켰는데 부산방송국이 안정된 후 박충근 아나운서는

그곳에서 사임하고 방송계를 떠났다. 한진동은 경성

중앙방송국으로 돌아왔다가 8.15해방후 외무부에

통신과를 신설할 때 자리를 옮겨

커다란 공을 남겼다

 

 

다음 영문문자를 클릭하셔서

부산방송국 얘기를 더 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KBS 부산 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085

 

KBS 부산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http://blog.daum.net/jc21th/17780086

 

최초의 지방방송국 부산 JBAK가 건설 되던 때 1935년 9월 21일 (HLKB)

http://blog.daum.net/jc21th/17781478

KBS 부산방송총국과 부산사우회 창립 17주년의 추억, 2007

http://blog.daum.net/jc21th/1778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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