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군사진

김광한 2017. 10. 11. 08:07

 

여순사건 당시 광주로 내려와 작전 회의 중인 모습. 담배를 문 사람이 송호성(당시 준장)이다. 송호성의 옆에 있는 젊은 장교는 바로 박정희 소령이다.

 

송호성 생애

좌도 좋고 우도 좋고 김일성과 인민군도 좋았던 대한민국 초대 육군 총사령관이자 국가 반역자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1946년에 귀국하여 한국광복군 출신으론 드물게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12월 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6월 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형편없었다. 송호성의 등용은 정치인들이 군내 파벌 안배 및 광복군 출신(중국군파)을 끌어안으려고 기용한 면이 강했다. 실제로 4.3 사건 초기에 삽질을 많이 하기도 했다. 애초에 이 사람은 제주도에 주둔한 9연대를 그냥 맘에 안드는 장교 처박는 귀양지 취급했다. 자기 비위에 어긋나면 그냥 제주도 행이었다고. 9연대장 이치업, 부관 심흥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가 그랬다. 가장 압권은 부연대장(47년 9월 부연대장으로 부임하여 12월 연대장으로 진급하고 48년 5월 해임되었다.) 김익렬로, 명동거리를 걷다가 송호성 부인에게 경례 안했다고 제주도로 쫒겨왔다.

불시에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를 방문해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미달된다며 키가 작거나 마르거나 관상이 안좋아 보이는 생도 20여명을 즉석에서 퇴교시키는 일본군도 안할짓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숨에 고위직에 올라 2년이나 사령관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통위부장이었던 유동열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이었다.

북한과 대치중인 상황에서, 좌도 좋고 우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사관학교에 좌익계열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어줬다. 대표적으로 생도대장이던 오일균, 교관이던 조병건이 그렇다. 일본군파(세부적으론 일본육사파)인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남로당 군사부 요원인 동시에 육사에서 포섭공작을 벌였다. 여순사건 전후의 주요 인물들이 바로 이 사람들의 제자들이다. 관동군 오장이었던 문상길, 일본군 항공대 소위였던 김지회가 대표적이다. 즉, 군대에 공산주의의 판을 깔아준 것.

때문에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의 상관이었던 이범석은 그가 무능한데다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실례로 송호성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7년 12월, 육사생도 분열식 중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송호성의 별칭)는 단을 내리라!" 며 연단에서 내려가게 할 정도였으니... 사관학교 교장을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말 그대로 개쪽을 준 것이다. 여기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데다 오랜 중국생활로 대륙의 기상을 한껏 뿜어 에티켓까지 엉망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미군과도 사이가 안좋았다.

미군정 시기에는 국방부에 해당하던 통위부의 차장(국방차관급)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이 창설되자 거기로 옮겼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김홍일·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만주군파야 장군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쳐도, 독립운동가가 정부수반인 만큼 소수인 중국군파를 미군정 시절부터 밀어줘서 준장 진급은 일본군파보다 더 안배를 해줬다. 하지만 2개월 뒤, 송호성을 제외한 저 네명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즉 송호성이 빠지는 바람에 중국군파와 일본군파 모두 2:2로 안배가 된 것.

 

1948년 8월 15일부터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는데, 당시는 육군참모총장이 생기기 전이라 총사령관이 육군에서 최선임 군인이었다. 즉 사실상의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육군 홈페이지 등에선 이를 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역

김구가 암살당하면서 김구계열로 분류된 그의 정치적 입지도 좁아졌다. 군에서도 능력이나 정치력에서 일본군파(정확히는 장교출신인 육사파와 학병파)에 밀리고, 나이가 60대니 평균 연평이 가장 낮은 만주군파에게도 밀렸다. 이승만은 그를 예비군의 전신인 호국군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가 1949년에 5사단이 생기자 사단장으로 보임하였다. 사실 정치적 이유로 처음부터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 2년이나 있었던지라 군을 제대로 정비하려면 어떻게하든 좌천이었다.

총사령관까지 지낸 인물이 사단장을 지내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초기의 한국군은 연대부터 시작했고 확장해서 여단, 사단으로 커져가는 식이었다. 당시엔 군단은 있지도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에는 맡은 사람이 다시 맡는 일도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직책상 하급자인 군사령관으로 이동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다시 예비군 부대인 청년방위대의 고문단장이 되었는데 보름 후에 전쟁이 터지자 같은 김구계열이던 전 헌병사령관 장흥이 피난을 권했으나 가봐야 실권에선 밀렸다는 생각에 고의로 남았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피난을 권하는 장흥에게 채병덕도, 이범석도 모두 자신을 버렸다며 자네나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북한군에게 투항했다. 북한측 조선인민보에 따르면 1950년 7월 4일 송호성이 방송을 통하여 “나는 인민군대가 인민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군대라는 것과 인민정권은 조선인민을 위한 정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면서 국군병사들과 군관, 삼천만 동포들에게 인민군과 빨치산으로 넘어와 자기를 본받아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쑤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고 부르짖었다. 1953년 인민군해방전사여단장,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내다가 김일성으로부터 반혁명분자로 규정되고 1958년부터 평안남도 양덕에서 수감에 되어 1년 뒤인 1959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에 국군 최초 장성이자 초대 육군 사령관까지 지낸 사람이 실권 안준다고 적국에 투항해 대남방송을 하고 투항한 국군포로들로 이뤄진 부대의 부대장을 하는 적극적인 이적행위를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은 아예 호적을 파버렸다.
그가 북한에 붙어 이적행위를 한 탓에 그의 아들인 송무성(宋武城, 1937-, 사진 안의 노인)은 기독교인 화교의 양자로 들어가 생활을 했고 대만에 가서 살았다. 그리고 대만의 정보기관인 국안국(國安局)에 한국어가 유창한 자원으로 들어갔다. 송호성의 아내이자 송무성의 어머니인 양천내(楊千乃)는 부산에서 머물렀고 1961년에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송무성은 귀국하려고 당시 주대만 대사였던 김홍일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으나 대만의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된 터라 방한은 허가되지 않았다.

여순반란 당시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등병 처럼 진압군 전체의 최선봉에 섰다. 앞서 반란군이 튀어버린 순천을 무혈 점령하자, 여수 역시 마찬가지일 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지도도 안보고, 선두에는 장갑차를 줄줄이 내세우고 사령관이 선두 장갑차에 올라탄 채 그냥 어택 땅 하고 진격했다. 그러다 여수 북방 약 8킬로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놀라 장갑차에서 굴러떨어져 고막이 터지는 추태를 보이고, 사령관이 부상당한 부대는 순천까지 후퇴한다. 뒤도 안돌아 보고 순천까지 백리 가량을 도망치는 바람에 여수와 순천사이에 큰 공백지가 생겨 반란군 주력이 이 곳을 이용하여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망신스러운 전투인지 공간사에서는 “미평리에서 반란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 송호성 사령관이 부상하고 진압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순천으로 철수”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앞서 여순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작전회의를 연 국방장관 이범석은 지도를 가리키며 적이 지리산으로 도망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단단히 포위하라고 일러뒀는데 보기좋게 국방장관 지시사항을 한 큐에 날려버렸다. 덕분에 사령관 자리에서 짤렸다.

4.3 사건 당시 9연대 부연대장이었으며,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해 보려 했으며 길 가다 송호성 부인에게 경례안했다고 제주도로 유배를 나갔던 김익렬은 제민일보에 4.3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김익렬은 송호성에 대해 독립운동가나 장군다운 풍모는 있었으나 중요한 군사지식이나 인격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관계로 형편없었다고 술회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 60대 노인이었지만 후보생 2기로 들어가서 아들, 손자뻘들과 함께 굴렀다. 그런데 규정을 따르지 않고 관물대를 정리하지 않는 등 내무생활이 개판이었다. 당시 생도대장이던 이치업 중위의 불시검열에 번번히 걸려, 벌점으로 병기고에 있는 99식 소총의 기름을 닦는 등 여러가지 굴욕을 겪었다. 어느날 같은 중국군 출신의 통위부장 유동열이 불러 통위부에 가더니, 중령 계급장과 함께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전 생도를 소강당에 집합시킨 후 단상에 오르자 첫 마디로 "이치업 중위는 제주도 9연대로 발령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일화.

약간의 변호(?)를 곁들이면 이치업은 당시 사관생도들에게 매우 악명이 높았다. 일본군 악폐습을 매우 철저히 공부한 탓에 생도들은 모두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인 젊은 생도들은 60대에 함께 구르는 송호성을 딱하게 여겨 관물대를 대신 정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송호성이 중령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 중위 계급장을 단 이치업을 쳐발라 버리니 매우 고소해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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