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의 비극

    도야지꿀 2010. 5. 21. 09:42

    [회고] 메이데이와 광주, 그 사적인 기억


    2010.5.18.화요일

    남가좌동 

     

     

    1.

     

    내게는 이미 세상에 없는 형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전태일. 다른 한 사람은 김의기다. 태일이 형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그의 자취를 뒤이은 무수히 많은 이들의 이름을 감히 욕되게 할지 모르니까.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가슴을 짓누르는 양심의 거리낌을 무릅쓰고서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불러보고자 한다. 그 이름을. 김의기, 의기 형. 나의 선배.

     

     

     

     

     

    2.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게 5월은 참혹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고대의 주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록이 우거진 길을 걷노라면, 삼삼오오 모여앉은 행락객을 지나치노라면, 어느새 욕지기가 튀어나오곤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주검 위에 덮인 푸른 수의 같았고 청명한 날들이 계속될수록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북적이는 지하철역을 나와 학교 정문까지 거슬러 오르는 길은 그저 어지러웠다. 스티비 원더의 <이즌쉬러블리>조차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도서관 옆에는 작은 벤치들이 모여있었다. 조그만 연못도 있었고 잔디밭도 있었고 곳곳에 등나무가 자라나 그늘을 만들었더랬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있었고 조곤조곤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새내기 시절, 우리는 늘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그곳에서 만났다. 밥을 먹기 위해. 수업을 듣기 위해. 술을 마시러 가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다른 이유를 들어 떠났고 그곳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우리를 배웅했다. 그곳은 아마도, 우리가 학교 안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 중 하나였을 게다.

     

    선배들은 그곳을 '의기촌'이라 불렀다. 아닌게 아니라, 그 의기촌의 한 구석에는 누군가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고, 그 주인의 이름이 김의기라고 했다. 추모비에는 '동포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격문과 함께 무표정한 청년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선배님, 동포는 지금 술 마시러 갑니다. 우리가 그 문장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의기가, 무슨 구호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는 것 정도의 깨우침이었다.

     

    군에 다녀와 학교에 복학했을 때, 삼성 부회장 출신이라는 총장이 진행한 '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의기촌'은 말끔하게 다듬어져 '000 동산'이 되었다. 민족, 민주, 민중의 광장이라던 잔디밭 '삼민광장'은 갈아엎어졌고, 그 자리엔 커피빈과 파파이스가 들어섰다. 먼저 고인이 된 선배들의 추모 식수가 모두 어디로 옮겨졌는지 말해주는 이는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어딘가로 떠날 수 없었다. 모험같은 일상은 사라지고 지근거리는 권태와 패배감만 남았다. 누구도 우리를 배웅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5월이 되었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5월만 되면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음습함의 정체. 그것은 김의기, 당신이었다.

     

    1980년 5월 30일. 종로 5가 기독교 방송국 6층에서 한 청년이 뿌린 유인물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광주진실을 담은 유인물 속에서 청년은 준열히 꾸짖었다. 동포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곧 그를 저지하기 위해 계엄군이 투입되었고, 그는 계엄군의 장갑차 위로 투신한다. 그가 김의기다.

     

    나는 의기 형으로부터 광주를 배웠다. 그로부터 전해듣게 된 광주는 교과서 속 무미건조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찔러죽이는 광경이었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쏘아죽이는 지옥도였다. 그 지옥도가 자랑스러운 내 조국이라 했고 그 속의 고통은 고스란히 내 이웃들이 살아낸 삶이라 했다. 그 아찔한 경험은 문장으로 나열되어 있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당신이, 내가, 그 지옥을 직접 겪고 난 뒤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의기 형은 몸을 던져 그것을 기억하는 쪽을 택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략)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만 스물한살의 푸르고 푸른 나이. 푸르고 푸른 기억. 그는 몸을 던져 광주를 기억하고자 했다. 찬 아스팔트에 머리를 깨어 흘린 피로 역사를 새기고자 했다.

     

     


    3.


    전날 마신 술로 숙취가 그렁그렁 들러붙은채 깨어났던 며칠 전. 애써 구역질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을 끓이던 나는 오늘이 120번째 메이데이였고, 그것도 이미 거의 다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5월이구나. 시간 참 빠르다. 그래, 시간 참 빠르다. 헤이마켓의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의 쟁취를 위해 모였던 것이 벌써 1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2005년의 어느 날이었던가. 문과대에서 주재한 메이데이 세미나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켄 로치의 <빵과 장미>를 보았다. 우리는 헤이마켓과 노동운동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바로 그 전 주에 엠비씨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목도한 이전 시대의 노동환경에 대해 치를 떨며 <빵과 장미> 속 평화로운 노조운동에 공감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더랬다. 돌이키건대, 그것은 전 세대의 기억을 통해 새로 차오르기 시작한 우리의 기억이었다.

     

    1886년 5월 1일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맞서 미국 전역에서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한다. 이를 저지하던 경찰의 강경진압은 계속되고, 결국 5월 3일 시카고의 한 공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네 명이 피살당하게 된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헤이마켓에서 열린 집회 도중 누군가 던진 폭탄에 의해 경찰관 한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로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을 지목하여 검거하게 되고, 전 세계적인 석방사면운동에도 불구하고 1887년 11월 11일, 앨버트 파슨스를 비롯한 네 명의 아니키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살인 교사 혐의로 처형된다. 

     

     

    헤이마켓 아나키스트들의 처형 장면을 묘사그림


     

    역사의 지층은 어떤 식으로든 현재에 모습을 드러낸다. 억울하게, 그러나 의연하게 죽어간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메이데이와 근로기준법,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와 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남겼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지층을 밟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의 육신은 한 줌 흙이 되어 단 한 시간의 '노동시간'도 허여받을 수 없지만, 그들은 그 이후 120여년 동안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주재해 오지 않았던가.


    5월은 메이데이로 시작해서 김의기로 끝난다. 발 딛는 곳마다 너는 지금 무엇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아우성이다. 어디를 보아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오직 비루한 기억만 되새기고 있을 뿐이니까.


    문득 가방을 둘러메고 밖으로 나섰다. 어디든 가자. 일단 터미널로 가서 마음 가는 곳으로 떠나자. 마음이 '가는 곳'인지 애초 마음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의기 형을 만나러 가자.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오자. 그토록 오래 나를 괴롭혔던 의기 형. 의기라는 이름. 무언가 받아오자. 무언가 끝내건 시작하건, 무언가를 하고 오자.


    광주행 티켓을 끊었다. 버스에 오르자 이미 어둠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십 명의 어둠을, 검은 실루엣들을 싣고 달린 버스는 세 시간 만에 광주에 도착했다. 삼 만원 짜리 여관에 짐을 풀고, 소주를 안주도 없이 삼킨 뒤에야 나는 잠들 수 있었다.

     

     


    4.


    광주에는 518번 버스가 있다. 전남도청을 경유해 5.18 민주묘지에 이르는 지선 버스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묘지. 5.18 민주묘지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광주시민들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해준다.

     

    518번 버스를 타면 될 걸요.

     

     

     

     

    518번 버스를 타고 광천터미널에서 삼십 분쯤 가니 창 밖으로 옛 전남도청이 보인다. 5월 광주의 모습을 담은 저 유명한 사진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지러이 세워진 버스, 무장한 시민들, 불타는 화염병 같은 것들이 기억 속에서 명멸힌다. 시간처럼 무심한 듯 처연하게 지나버리는 것이 또 있을까. 그 옛날의 골조만 남아 그날의 전남도청이 지금 이 건물임을 증거한다.

     

     

    옛 전남도청 건물

     

     

    버스는 그렇게 삼십 분을 더 가서 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사람이 없어 고요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묘역 입구에 이르니 두어 명이 모여 기타를 치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고 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햇살이 눈부시다.

     

    입구인 <민주의 문>을 지나 향을 피우고 참배한 뒤에 묘역을 바라보니 의기 형을 어떻게 찾을지 까마득하다. 무덤이 즐비하다. 저 흙더미가 모두 '열사'들의 무덤이란다.

     

    결국 끝에서부터 하나하나 훑어내리기로 했다. 무명열사의 묘. 김승길의 묘. 행방불명자의 묘. 또 다른 누구의 묘. 누군가의 어머니의 묘. 누군가의 아들의 묘. 누군가의 딸의 묘.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 누군가의 할머니, 여고생, 중학생, 저 모든 누군가의 '무엇'들이 민주의 '열사'란 이름을 달고 누워있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늘 그러는 것처럼 끄윽끄윽 눈물 흘리지도 않았다. 무섭도록 내리쬐는 햇볕이 뜨거웠고, 빨리 의기 형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저 즐비한 비석이 모두 누군가의 삶이 남긴 최후의 흔적이라는 것이 그다지 절박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었고, 어떤 현실 경험도 가지지 않은 어린애였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헤맨 뒤에야 겨우 의기 형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에서 250킬로미터를 달려온 끝에, 내가 그의 이름을 안 지 7년 만에 갖게 된 독대였다.

     

     

     

    5.


    고작 삼십 분 동안의 독대를 통해 어떤 진실한 감정의 고양을 느꼈다고 쓰는 것은 거짓일 터다. 내게는 그 같은 감상에 젖을만한 인생의 경험도, 대단한 삶의 고비도 없었으니까. 80년 5월에 나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역사의 부표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지루하고 평화로운 이십대의 삶을 기다리며 목숨을 던졌다. 의기 형이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기억한다. 역사가 무엇을 남기고자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남겨야만 하는지 나는 기억한다.

     

    기억은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망각은 자기 합리화의 기술이다. 나는 학살을 기억한다. 나는 권력의 원초적인 야만성을 기억한다. 어떤 권력도 어떤 민주주의도 권력의 폭력적 본성을 온전히 감추지 못했다. 어떤 합리적인 기득권도 역사의 격랑 앞에서 민중의 편에 서지 않았다. 518번 버스가 지나온 거리가 핏빛으로 물든 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광주 시민들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 때 국가는 그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그 흔한 민중가요도 아닌, <진짜 사나이>와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머금고 시신을 옮기던 그들을 '사상적으로 무장한' 공산주의 전사라고 했다. 그리고 화염방사기로 태워죽였다.

     

    헤이마켓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의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거리에 섰을 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 자본과 권력에 대항한 위험한 외줄타기였고, 경찰의 발포가 필요한 행위였으며,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범법행위였다. 120년 전 헤이마켓에도, 30년 전 광주에도, 그리고 지금도 법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권력과 제도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위험한 것'을 이야기해왔다. 120년 전에는 아나키스트들이, 30년 전에는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일개 대학생인 김의기가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권력과 민중은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위험한 부분에서 부딪쳐 왔다. 그리고 민중은 오로지 그 균열을 통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 나아감을 기억한다. 그 전진을 위해 쓰러진 모든 이들을 기억한다, 기억하려고 한다. 광주는 결코 학살로만 기억될 수 없다. 광주는 마땅히 저항과 항쟁의 이름으로도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게 김의기는 무너져가는 자신을 부여잡고자 만든 기억의 닻이다. 어딜 향하든 언제가 됐든 다시 돌아와야 하는 삶의 모항이다. 남겨진 역사의 지층을 끊임없이 발굴해 내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새기는 것은 앞으로 살아남을 자들을 위한 오늘의 윤리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남길 것인가.


     

     

    6.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무덤 앞에 일가족이 서있다. 막내 장가보냈습니다, 라고 담담히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의기 형에게 무어라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뒤져 소주 한 병을 꺼내 무덤 주위에 조금씩 뿌리고, 드시기 좋게 묘비 앞에 놓았다. 안경 닦는 수건을 꺼내 비석 옆 영정을 몇번 닦았다. 어떤 슬픔도 노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자를 눌러썼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기억도 절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말하고야 말았다.

     

    의기 형, 당신이 나의 윤리입니다. 당신이 나의 도덕입니다.

     

    감히, 그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다시 돌아온 오월의 어느 날. 참혹하게 눈부셨던 그 어느 날의, 기억.

     


     


     


     

     

     

    딴지기억부직속괜한소리팀장 남가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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