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9대 대통령 안희정

    도야지꿀 2011. 6. 14. 17:06

    문재인의 운명] Ⅲ. 참여정부 비화



    ■ 내게 민정수석을 맡긴 이유

    권력에 취하면 소신도 잊어버리기 십상인 것이 사람이다. 민정수석실 업무내용 때문에 법조출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검찰을 장악할래야 할 수 없는 비검찰 출신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하고자 한 것이 대통령 생각이었다. 더 나아가 나 같은 사람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함으로써, 검찰을 장악할 의사가 없다는 대통령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고영구 국정원장도 마찬가지다. 한참 선배 인권변호사이자 성품이 깐깐한 고영구 변호사를 국정원장에 임명함으로써, 청와대는 물론 대통령 자신까지도 법에 어긋나는 지시나 부탁을 하지 않도록 방어망을 쳐 버린 것이다.

    대통령은 국정원의 탈정치․탈권력 의지가 강한 나머지 거의 강박감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청와대 내부에서 일부 사람들이 나를 국정원장으로 추천하고 대통령께 직접 건의까지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충성심이나 애정이 강한 사람이 국정원 조직을 이용해 대통령을 도우려는 욕심을 혹시라도 갖게 되면, 그게 바로 망하는 길이라는 판단이었다.

    국정원장이나 국내 파트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을 임명할 때도 임명장 수여 후 환담하는 자리에서 “뭔가 대통령을 위해 공을 세우려는 생각을 절대하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 첫 조각 뒷얘기

    최대 파격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었다. 당시 판사를 거쳐 민변 부회장을 하고 있던 강금실 변호사를 추천한 건 나였다. 내 추천은 그녀를 법무부 장관으로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여성 장관을 발탁해 온 방식대로 환경부 장관이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인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묻더니, 그렇다면 법무부 장관으로 하자고 했다. 내가 깜짝 놀랐다. 너무 부담이 컸다.

    환경부나 보건복지부 쪽을 먼저 맡겨 본 다음에, 법무부 쪽을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다. 당선인은 생각이 달랐다. 여성 몫으로 환경부, 보건복지부, 여성부 또는 교육부를 벗어나지 못했던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왔던 자리에까지 여성들을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는 게 당선인의 뜻이었다.

    대통령의 여성관은 진취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씬 더 능력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당선인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환경부 장관을 했던 김명자씨를 건설교통부 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여성의 적극적 발탁 의미와 함께 환경마인드에 입각한 건설행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새만금사업과 경인운하 등이 큰 사회적 갈등요인이어서, 건설과 환경의 조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 고건총리 내정자와의 협의과정에서 불발로 끝났다.

    여성의 본격적 발탁이라는 당선인 의지는 참여정부 출범 후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 최초 및 복수의 여성대법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순으로 이어졌다.

    내각에서 파격적 발탁이 많다보니, 국무총리 인사는 선택폭이 좁아졌다. 당선인은 조각의 파격성 자체에 대한 염려는 없었지만, 그로 인한 언론이나 한나라당으로부터의 공격을 염려했다. 그 때문에 총리는 일종의 안전판 역할을 해 줄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김원기 전 의원 등이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당선인은 의외로 고건 전 총리를 선택했다. 물론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참여정부 정체성과 너무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참모들 사이에 많았다. 그러나 당선인은 선택의 문제라고 말했다. 만약 총리를 그런 방향으로 하지 않으려면, 조각의 파격성을 완화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고 총리 내정자는 당선인이 구상하는 인사의 파격성을 크게 염려했다. 당선인의 뜻을 설명해서 동의를 받는 대신 일부 국무위원 임명에 고 총리 내정자의 추천을 반영했다.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국무조정실장도 그의 추천을 받아들였다. 내가 보기엔 정체성이 모호한 분이 그 과정에서 참여정부 첫 내각의 각료가 된 사례도 일부 있었다.

    ■ 검찰과의 관계

    우리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려면, 검사들이 정치적 줄 세우기에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신분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검찰총장의 임기보장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에도 이전 정부에서 임용된 김각영 검찰총장을 교체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김각영 총장이 내게 대통령의 의중을 물어온 일도 있었다. 전혀 그런 뜻이 없으니 임기를 지키시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당시 검찰 고위급 간부들은 단단히 오해를 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새 정부가 과거 식의 인사로 자신들을 모두 밀어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통령과 우리는 검찰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즉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이 목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검찰 스스로 정권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는 ‘문화의 문제’로 봤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직간접으로 당신의 그런 의지를 전달했다. 민정수석실도 검찰에 주요 사건의 지시 내지는 조율을 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철저하게 견지했다. 대선자금 수사로 대통령 측근들에게까지 수사의 칼날이 와도 검찰이 원칙과 소신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모두 허용했다. 우리 쪽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검찰수사의 독립성과 중립을 보장해 줬다. 그렇게 마련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앞으로 검찰 스스로 잘 지켜나가길 원했다.

    검찰을 장악하려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 대연정 제안의 출발

    대연정 제안은 대통령도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시작된 일이었다. 당시 국정현안에 관한 당-정-청 간의 상시적 협의를 위해 매주 금요일 저녁 총리공관에서 총리 주재로 당정청 핵심인사 8인의 만찬모임이 있었다. 2005년 6월 말 모임 때 느닷없이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개혁을 전제로 한 대연정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토론도 없이 대통령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통령은 ‘당장 하겠다는 거 아니니까 생각을 해 보시라’며 자리를 떴다. 대통령이 떠나자 다들 큰일 날 이야기라고 했다. 이해찬 총리가 참석자 모두에게 이 이야기가 새나가면 안되니까 없었던 것으로 하고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느 신문에 그 이야기가 특종으로 보도됐다. 당에서 오신 분이 발설한 것으로 추측됐다.

    대통령은 구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만 뗀 정도였다. 나중에 대통령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열린우리당의 과반수가 무너져 다시 여소야대로 된 데다, 한나라당이 윤광웅 당시 국방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는 등의 정치상황을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냥 있었으면 대통령은 십중팔구 스스로 생각을 매듭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참모들과 논의하고 적절한 정치상황을 쟀을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다못해 생각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해도, 훨씬 더 내용을 가다듬고 더 정리된 형태로 더 적절한 시기에 구상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불거져 나오는 바람에 대통령은 진정성부터 의심을 받았다. 정당의 반응과 여론도 정상적 논의가 불가능하게 흘러가 버렸다. 설령 연정제안 부분은 무시되더라도, 적어도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만큼은 메시지로 살아남아야 그 제안의 보람이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 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 사법파동과 사법개혁

    2003년 8월, 대법관 파동이 있었다. 대법관 추천 문제로 청와대와 대법원이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 법조계 안팎에선 대법관-헌법재판관 구성에서 인권, 여성, 소수자 보호 등 사회다양성이 보장되도록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다.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도 연공서열이 아닌, 개혁과 변화의 지향을 담은 다양성의 정신이 인사에 반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법원장이 신임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 위해 인선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대통령의 뜻을 대법원측에 전달했다. 인권, 여성, 소수자보호 등 어느 쪽이든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제청해 주길 바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법원에선 다른 쪽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의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그만 전통적으로 해오던 연공서열 방식으로 후보를 제청했다.

    재야 법조계는 말할 것도 없고 소장 판사들도 문제제기를 했다. 개혁성으로 신망을 받고 있던 서울중앙지법의 박시환 부장판사는 사표를 제출했다. 일부 소장 판사들은 대법관 제청절차에 반발해 인터넷 연판장을 돌리는 등 집단적 의사표시에 나섰다.

    현실적으로 대법원장이 제청을 철회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양성 정신이 반영되지 않은 대법관 제청을 대통령이 그냥 수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통령이 만일 제청을 거부하면 법원은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아 극심한 진통을 겪게 될 것이었다.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윤관 전 대법원장이 중재에 나서, 법원과 의논한 해결방안을 내게 제시해 왔다. ‘대통령이 마뜩치 않더라도 이번 대법관 제청을 받아주시면 첫째, 대법원이 앞장서서 청와대와 함께 사법개혁을 추진하겠다. 둘째, 대법원장에게 추천권이 있는 다음번 헌법재판관 후보추천부터 시작해 다음 대법관 제청을 다양성의 기준으로 하겠다. 그리고 전국 판사회의를 소집해 의견수렴과 함께 차기 헌법재판관 인사와 대법관 인사를 다양성의 기준으로 할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 하겠다’는 것이었다. 법원 쪽 의지를 확인하고 그 방안을 수용했다.

    ■ 반기문 총장이 나오기까지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반 총장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 노력을 했던 건 아니다. 당초엔 홍석현 주미대사가 그 자리를 꿈꿨다. 차기 사무총장은 아시아 몫이라는 공감대가 있을 때여서 본인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안기부 X파일’ 도청테이프 사건이 생겨 돌연 낙마했다. 그 바람에 반기문 장관이 후보가 됐다. 반 총장으로선 어찌 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다. 참여정부는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을 다 했다. 대통령은 모든 순방외교에서 그의 지지를 부탁했다. 총리의 해외방문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을 주요국에 특사로 보내, 지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임박해서는 다른 국가원수들에게 전화도 많이 했다.

    그런 노력들이 효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고위급 외교전이 아니었다. 범정부적인 외교노력은 마지막 단계에 꽃을 따는 과정에 불과했다. 반 총장의 당선이 가능했던 건, 당시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균형외교 정책 때문이다.

    대통령은 반 총장 선출소식을 듣고 아주 반가워했다. 축하전화로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당신이 그렇게 공을 들여 빛을 본 일이라 생색을 낼 법한데도 청와대나 부처에 그리 못하도록 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기울인 그간의 노력이나 비사(秘史)도, 정부가 생색을 내거나 자축하는 일정도 절제토록 지시했다.

    심지어 KBS가 나라의 경사라며 마련한 <열린음악회>조차도 정부는 함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그가 국제지도자로서 소신껏 일을 하도록, 편하게 놔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생색을 내면 낼수록 그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깊고 세심한 마음 씀씀이였다.



    ■ 남북 정상회담 성사 과정

    대통령은 과거처럼 물밑에서 비선을 내세워 추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또한 성과가 담보되지 않는, 만남 자체를 성과로 삼는 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확고했다.

    정상회담 이전에 안희정씨와 문성근씨도 각기 대북접촉을 하긴 했다. 하지만 안희정씨는 북측에서 먼저 제안이 와, 한번 의논해 볼만한 사안인지 확인해 보러 갔던 것이다. 2006년 가을께였다. 안희정씨 판단에 따르면 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국정원에 알려주고는 그걸로 끝냈다.

    문성근씨도 그에 훨씬 앞서 2003년 가을쯤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북한을 다녀왔다.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임하는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런 접촉이 분위기 조성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2006년 11월, 김만복 원장이 국정원장에 취임하면서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2007년 5월18일, 백종천 안보실장이 앞으로 2~3개월 준비해서 8월15일 전후에 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 안보실장, 국정원장이 구체적으로 진전시켜보라고 지시했다. 그 뒤 매주 목요일 3인이 만났다. ‘안골모임’이라고 불렀다. 7월말 북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아프간 인질 사건 해결을 관장해야 했고, 김만복 원장이 북한에 가게 됐다. 북한을 다녀온 김 원장이 정상회담 추진에 합의를 하고 왔다. 중간에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회담 준비사항 협의차 서울에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가 제기했던 주요 의제에 대해 갖고 온 내용이 거의 없었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실망을 표시했다. 대통령은 우리 쪽에서 주장하는 여러 내용을 북한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북한판 버전으로 만들어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다행히 북측이 이를 많이 수용해서 회담의 알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여러 분야에서 우리가 추진하고자 했던 의제들이 대부분 (10·4) 합의문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욕심을 냈던 것이 거의 들어가 있었다. 딱 하나 빠진 게 있다면 정상회담 정례화였다. 우리가 욕심을 부린 것이었지만 아쉬웠다.

    남북관계에 임하는 다음 정부의 자세가 우리보다 못할 것을 예상하면, 그렇게까지 해 둬야 남북관계의 후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대통령께 말씀드리고 백 실장과 김만복 원장에게도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아쉬웠다. 그들이 돌아온 후 왜 안됐냐고 물어봤다. 우리는 제안을 했는데, 북에서 난색을 표했다고 했다. 북에서는 정상회담 정례화라고 하면 남북이 교대로 방문하는 것을 상정하는데, 아직 김정일 위원장이 남쪽을 방문할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영남 위원장이 대신 방문하면 남에서는 사실상 정상회담이 아니라고 비난할 테고. 어쨌든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에는 자신이 서울을 방문할 차례라는 식으로 압박받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더 아쉬운 것은 국회비준이다. 정상회담이 잘 끝났지만 임기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음 정부로 넘어가기 전에 회담 성과를 공고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남북정상 간의 합의는 법적으로 따지면 국가 간 조약의 성격이다. 10․4공동선언은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에 해당했다. 그래서 나는 정상회담 합의에 대해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받아두는 게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때엔 유엔 총회에서도 지지결의를 할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면 한나라당도 감히 정략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웠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가 끝내 안 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후속 합의가 진행돼, 재정부담의 규모 같은 것이 정해지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실기(失期)하고 말았다. 결국 정권이 바뀌면서 정상 간의 소중한 합의가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 차별화의 정치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가 외관상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차기 대선전망은 어두워 보이니,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부터 대통령-참여정부와 대립각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참여정부나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자기 입지를 다져보려는 속셈이었다. 대통령은 분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대통령과 같이 열린우리당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핵심의 사람들이 더 심하게 했다. 대통령으로선 인간적으로 굉장히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상처가 더 깊었다. 특히 대통령이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정동영 전 대표의 행보는 그 분을 너무 아프게 했다.

    열린우리당이 분당(分黨)위기로 치닫고 있을 때 대통령과 정동영 전 의장의 중요한 회동이 있었다. 정 전 의장이 나에게 부탁해 이뤄진 자리였다. 그때 정 전 의장 태도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정 전 의장 쪽 의원들이 선도탈당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대통령을 만나자고 했으면, 뭔가 파국을 피할 방안을 가지고 와 대통령에게 이해도 구하고 협조도 요청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어도 두 분 사이에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상황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하는 내용의 내화가 이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탈당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계속 “당적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 말은 탈당을 하겠다는 말이었고, 결국은 탈당을 통보하기 위해 만난 모양새가 돼 버렸다. 그것으로 둘의 대화는 막혀버렸고, 만남은 유쾌하지 않게 끝났다. 배석한 나는 그 중요한 시기에 두 분의 대화가 그렇게 소득 없이 끝나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초반에 두 분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엔 나도 끼어들어 대화가 원활하도록 애썼는데, 탈당 이야기로 넘어간 후로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열린우리당이 깨질 위기 때문에 속상해 하고 노심초사하는 대통령에게 탈당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도대체 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끝난 후 회동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그가 언론에 회동사실을 밝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지원을 건의했다는 일부 대화내용까지 털어놓았다. 그것으로 두 분의 만남은 뒤끝까지 좋지 않게 끝났다.

    그 날 대통령은 그로부터 “절대 탈당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말을 꼭 듣고자 한 건 아니었다. 창당 주역답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적어도 내가 앞장서서 당을 깨지는 않겠다” 또는 “내가 먼저 탈당하지는 않겠다”는 정도로만 대답했어도 두 분의 대화는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그의 대답을 듣고, 곧 탈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탈당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가량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서둘러서 대통령과의 관계를 파탄시켰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 진영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계기가 그렇게 안타깝게 흘러갔다.

    ■ 미국 쇠고기 수입의 진실

    이명박 정부에서 한미쇠고기협상 수석대표를 했고 지금은 외교부차관을 하고 있는 민동석씨는 <대한민국 공직자로 산다는 것>이란 책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3월29일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국제기준에 따라 한국이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그 약속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니다.

    노 대통령이 부시대통령에게 약속한 것은 OIE(국제수역사무국)기준 그대로 또는 OIE의 기준에 따라 무조건 수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존중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개방’할 의향을 ‘원칙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OIE 기준 그대로가 아니라, 그 기준에 더해서 미국의 사료금지조치의 이행상황이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 정도, 우리 국내법상의 수입위생조건의 기준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개방 폭과 시기를 결정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OIE 기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 먼저 개방 폭을 넓힐 수가 없기 때문에, 일본․대만․홍콩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개방 폭 확대시기 및 확대정도와 시기를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한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덕수 총리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 개방파 관료들은 끊임없이 참여정부 임기 내에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개방 폭을 확대해 보려고 추진했다. 물론 청와대 내 정무분야 참모들은 반대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 두 번에 걸쳐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때 노 대통령에게 한미 FTA비준을 위해 도와줄 것과 미 쇠고기 문제를 임기 중에 해결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이명박 당선인에게 △지금 국내에서 FTA에 대해서는 찬성여론이 70%인데 비해 쇠고기에 대해서는 반대여론이 70%라는 점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합리적인 수준과 주변국가와의 균형을 조건으로 달아 놓았다는 점 △우리가 제안한 수준으로도 그 약속을 다 지킨 것인데, 미국이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안 풀리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쇠고기를 먼저 풀면 우리 국회의 FTA비준에 엄청난 장애물이 돼버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FTA비준을 먼저 하고 △쇠고기 협상은 뒤로 미루는 게 바람직하며 △또한 쇠고기 협상은 미국 측의 FTA 비준 통과와 맞교환하는 식의 협상전략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명박 당선인도 그 자리에서는 그와 같은 노 대통령의 말에 공감을 표한 바 있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있었던 쇠고기 파동은 이미 참여정부 말부터 개방파 관료들이 추진하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진에 앞장섰던 한덕수 전 총리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오랫동안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노 대통령은 대단히 신중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 참여정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이명박 정부와 당국자들 발언이 연이어 터져 나와 속으로는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현직 대통령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촛불에서 나온 ‘대통령 퇴진’ 구호나 요구가 사리에 맞지 않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촛불 문화제 이후 청와대로 몰려가려는 움직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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