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9대 대통령 안희정

    도야지꿀 2011. 6. 14. 17:07

    [문재인의 운명] Ⅳ. 개인 스토리



    ■ 가난한 어린 시절

    학교 마치고 돌아온 후나 휴일에 연탄 리어카를 끌거나 연탄을 손에 들고 배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나는 검댕을 묻히는 연탄배달 일이 늘 창피했다. 오히려 어린 동생은 묵묵히 잘도 도왔지만 나는 툴툴거려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번은 리어카에 연탄을 잔뜩 싣고 내가 앞에서 끌고 어머니가 뒤에서 잡아주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힘이 달린 어머니가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내가 무게를 감당 못해 길가에 처박힌 적이 있다. 연탄이 좀 깨어졌을 뿐 다치지는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크게 상심하셨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다.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집에 자전거가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학교 앞에 자전거 대여점이 있어서 학교 마친 후 빌려 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도 돈이 없어서 해 볼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좋아했던 팽이치기, 자치기, 연날리기 같은 것도 놀이도구를 사지 못해 집에서 만들어 써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무렵에 부엌칼로 자치기용 자를 깎다가 실수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내려쳐서 손톱의 거의 3분의 1 가량이 잘려나갈 정도로 크게 다친 일이 있다. 엄청나게 아프기도 하고 피가 많이 나서 무서웠지만, 집에 사람이 없어서 혼자 헝겊을 감고 처치를 했다.

    그 후 아물 때까지 ‘아까징끼’라고 불렸던 머큐로크럼을 바르며 버텼다. 견딜 만해서 끝내 어른들께 말씀드리지 않고 숨겼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병원에 가서 몇 바늘은 꿰맸어야 했을 것이다.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가난이 내게 준 더 좋은 선물도 있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겪는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가난 속에서 키우면서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게 가르쳤다.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 가치관들이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 구속, 그리고 어머니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가족 면회를 시켜주지 않을 때였다. 응당 그러려니 했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집에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가능한 한 늦게 알게 되기를 바랐다.

    경찰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로 이송되는 날 오랜만에 유치장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호송차에 올라탔다. 100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이 둘러쳐진 호송차였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이 궁금했다. 차 뒤편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호송차가 떠나면서, 어머니는 금방 멀어졌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호송차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급히 올라오신 모양이다. 면회를 안 시켜주니 헛걸음을 하다가, 그 날 검찰로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혹시 볼 수 있을까 하여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호송차에 올라타는 내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오신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차에 올라타느라 어머니와 눈도 맞추지 못했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혼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다만 고통스러운 건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무리해서 대학까지 보내준 것이었는데, 내가 그 기대를 저버렸다는 괴로움이었다. 어머니가 호송차 뒤를 따라 달려오던 장면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가끔씩 면회 오는 어머니를 뵙는데 영 미안하고 괴로웠다.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필 네가 왜 그 일을 해야 했느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 공수특전사 시절

    특전사령부 예하 1공수 특전여단 3대대에 배치됐다. 자대로 바로 가지 않고 4주간의 공수훈련과 6주간의 특수전 훈련, 2주간의 여단 전입훈련을 다 거친 다음에야 자대로 배속됐다. 관등성명부터 외게 했는데 ‘여단장 준장 전두환’ ‘대대장 중령 장세동’이었다. 장세동 대대장은 내가 후반기 훈련을 마치고 돌아간 사이에 바뀌어 함께 근무해 보지 못했다. 얘기만 들었는데, 군인으로서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 5공화국 당시 장세동씨 후임으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했던 안현태씨가 바로 옆 대대 대대장이었다.

    특수전 훈련 때 폭파 주특기를 부여받았다. 나는 공수병이자 폭파병이 되었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그는 나중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맞아 참군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전두환 여단장은 그 쿠데타를 이끌고 성공해 대통령까지 됐다. 관등성명을 외웠던 두 직속상관의 운명이 그렇게 극적으로 엇갈렸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개근상 말고는 상을 받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정학을 당하기도 하고 대학에서는 급기야 제적되고 구속됐다. 그런데 군대에 가보니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었다. 사격, 수류탄 던지기, 전투수영 등 생전 처음 하는 일을 내가 잘하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자대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여단 본부에서 나를 빼가려 하고 대대에서는 붙잡아 두려는 줄당기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다들 나보고 군대 체질, 공수부대 체질이라며 말뚝 박으라고 농담을 했다.

    1공수여단은 육군본부 직할이고 서울의 위수부대였다. 모든 장병에게 폭동진압봉을 기본 장비로 지급했다. 총에 착검까지 한 상태로 대열이 앞으로 전진하면서 구령에 맞춰 일제히 ‘찔러 총’ 동작을 하는 폭동진압 훈련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그래도 내가 복무할 동안은 훈련만 했을 뿐 실제로 폭동진압에 출동한 일은 없었다. 제대 후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근무하던 1공수여단 3대대가 부산에 투입됐다. 내 조수였던 후임병도 그때 부산에 왔다. 광주항쟁 때는 다른 공수여단이 진압군으로 투입됐다. 폭동진압은 아니지만 12·12 군사 쿠데타 때는 정병주 사령관에게 항명하고 반란군 주력부대로 투입되기도 했다. 군복무를 좀 더 늦게 했다면 나도 역사를 거스르고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역할에 동원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아내는 같은 대학교 음대생이었고, 나보다 2년 후배였다. 해마다 5월 초 ‘법의 날’에 맞춰 열리던 ‘법(法)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비상학생총회 후 교문 앞까지 행진했다가 내가 페퍼포그를 맞아 실신했을 때, 한참 후 누군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아내였다. 시위행렬에 있다가 앞장선 내가 걱정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구치소로 아내가 면회를 왔다. 뜻밖의 일이었다.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돼 와 봤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면회시간 내내, 접은 신문을 품에 품고 있었다. 나에게 보여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대회인지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스포츠면 톱기사였다. 고교야구가 인기절정이던 시절이다. 야구를 대표 스포츠로 여기던 학교 출신이어서, 나는 그 때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아내가 파트너를 했던 ‘법 축전’때 학년대항 야구시합에서 내가 우리 학년 주장을 맡아 우승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내가 기뻐할 뉴스를 가져온 것이다. 세상에 내가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특전사 근무 때에도 아내가 몇 번 면회를 왔다. 1공수여단에 배치된 후 처음 온 면회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 군대 면회는 무조건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해 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의 면회라도 통닭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먹을 건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안개꽃만 한 아름 들고 왔다. 아무리 오빠가 없어도 그렇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였다. 면회소에서 아무 것도 팔지 않을 때이니, 꽃을 가운데 놓고 얘기만 나누다 돌아왔다. 나도 우스웠지만 음식 대신 꽃을 들고 내무반으로 돌아온 걸 본 동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 대한민국 군대에 이등병 면회 가면서 음식 대신 꽃을 들고 온 사람은 아내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꽃을 여러 내무반에 나누어 꽂아줬더니 다들 좋아했다. 안개꽃이라 오래갔다. 공수부대 내무반에 꽃이 꽂힌 것도 유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할 땐 또 공부하는 곳으로 면회를 다녔다. 아내는 나와의 연애사(史)는 면회의 역사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경희대에 간 건 오로지 아내를 만나기 위함이었나보다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 유치장에서 받아본 사시 합격증

    구속된 지 이십 삼,사일쯤 됐을까, 뜻밖의 낭보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무렵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내는 합격자 발표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결과를 알아봤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처지였으니, 더 간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후 학교 학생처장, 법대 동창회장 같은 분들이 면회 와서 축하해줬다. 경찰은 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 보낼 수는 없으니 대신 그 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축하할 수 있게 해줬다. 그 분들이 소주와 안주를 가져와서 유치장 안에서 축하주까지 마실 수 있도록 해줬다. 경찰허가 하에 외부인사가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서 수감자와 함께 축하주를 마신 일은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석방이 됐다. 군사재판에 이미 회부됐다면 석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합격도 취소되거나 3차 시험 불합격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미결상태였기 때문에 석방의 여지가 생겼다.

    ■ 연수원 차석이 인권변호사 된 과정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어서, 수료식에서 법무부 장관상을 받았다.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많지 않던 때여서, 연수원을 마치면 희망자 전원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다.

    그래서 판사에 임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시위주도 때문에 구속된 전력이 있긴 했다. 그것은 유신반대 시위였고, 시대가 바뀌어 이미 유신은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유신반대 시위전력이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결격 사유가 돼, 임용이 안 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판에 판사 임용이 안 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뒤늦게 변호사 개업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연수원 마친 사람이 전원 판검사 임용되던 시기여서, 바로 변호사 개업한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성적도 괜찮았던 탓에 금세 소문이 돌았다. 지금처럼 로펌이 많은 시절이 아니었는데도, <김&장>을 비롯해 괜찮은 로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보수도 파격적이고 승용차도 제공해 준다고 했다. 3년 정도 근무하면 미국 로스쿨로 유학도 보내준다고 했다. 잠시 솔깃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변호사 상(像)과 너무 달랐다. 대학시절 운동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렸던 법률가 상은, 꼭 인권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건 좀 아닌 듯했다. 그 때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국제변호사나 기업전문 변호사. 뭔가 고급스러워 보여서 오히려 내키지 않았다.

    ■ 노 변호사를 만나게 된 인연

    나와 노 변호사를 연결시켜 준 건, 내 사법고시 동기이자 후임 민정수석을 하기도 한 박정규였다. 그 과정과 인연이 묘하다.

    박정규는 사시에 늦게 합격했다. 우리 동기들 가운데 나이가 몇 번째로 많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수원 마치면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작 그였다. 옛날 김해 장유암에서 노 변호사와 고시공부를 함께 했던 인연이 있었다. 먼저 고시에 붙어 판사를 마치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변호사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터였다. 노 변호사는 연수원 마치고 합류할 박정규를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 방과 책상까지 모두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려오기로 한 박정규가 검사로 임용된 것이다. 노 변호사가 준비했던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허사가 됐다. 그러니 박정규는 노 변호사에게 미안해 하다가 마침 내가 변호사를 하게 되자 자기 대신 나를 소개한 된 것이다. 한번 만나보라고 해 노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는 그 때까지 노 변호사를 전혀 몰랐다. 생판 초면이었다.

    노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 본 노 변호사는 젊었다.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그런 면에서 금방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그런 면에서 금방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 같은 게 있었다.

    판사 임용이 안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함께 분노해 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꿈을 얘기했다. 인권변호사로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깨끗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했다. 나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되면 그걸 계기로,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다. 서울의 로펌에서 받았던 솔깃한 제안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끌렸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내 변호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와의 운명적 만남이 평생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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