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

    도야지꿀 2011. 6. 28. 23:50

    6.29 항쟁의 기억
    (딴지일보 / kuru / 2011-06-29)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시 서울대학 언어학과 3학년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박종철은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는 공안 형사들의 잔혹한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끝에 사망합니다. 다음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공식 발표합니다.

    당시 부검의 소견 중에 사체주변에 물이 흥건했다는 지적에는 저녁식사를 시켜 주었지만 박종철군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밥맛이 없다”라고 말하며 “콩나물 국물만 마셔서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 정호용. 그는 광주 민주화 의거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때리느냐?”라면서 고문의혹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점점 드러나는 정황증거 등으로 조한경 등 공안형사 두 명이 박종철을 물고문 했고 그로 인해 사망했다는 수사결과를 내놓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그리고 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 도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사건은 조작, 축소, 은폐되었다. 대공 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로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 사건을 단 두 명이 고문한 것으로 꾸미고 모든 걸 뒤집어썼던 두 명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다.”라고 폭로해 세상을 분노하게 합니다.

    그보다 한해 전, 1986년 7월 2일. 부천시내에서 시위하던 학생, 시민들이 시위진압경찰에 체포됩니다. 그 체포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여대생 권인숙 씨는 다른 이의 주민증을 변조, 학력을 낮춰 위장취업한 혐의로 부천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취조받던 중 문귀동 경장에서 성고문을 당합니다.

    권인숙 씨는 경찰의 야만적 범죄를 고발했고 세상은 경악합니다. 들끓는 분노 여론에 검찰은 명예를 걸고 엄정 수사에 착수했으나, 7월 16일 인천 지방 검찰청 특수부장 김수장 검사는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화”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두 사건은 6.2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5공 전두환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거와 야만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고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군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합니다.

    6월 10일, 송파구 잠실체육관에서 7,378명의 대의원에 의해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립니다. 투표는 7분 만에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임성훈의 사회로 흥겨운 단합대회가 열립니다. 조영남 조용필 정수라가 반라의 치어리더와 함께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 무쵸”를 부르고 당시 최고의 개그맨 배추머리 김병조는 “민정당(민주 정의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통일 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이다”라고 말해 청중들은 폭소를 터트립니다.

    12시 30분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에 의해 투표결과가 발표되고, 천장의 대형바구니가 터지면서 오색꽃가루와 테이프가 뿌려지는 가운데 전두환이 노태우의 손을 번쩍 들어주던 그 시각. 전국 24개 지역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가두시위가 벌어집니다.

    이날 오전부터 을지로, 퇴계로, 종로, 시청 앞에서 경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던 학생과 시민들은 무차별 최루탄 발사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밀려 들어가게 됩니다. 당연히 사전에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명동성당에 밀려 들어간 것이기에 그들의 행색은 엉망이었습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려 맨발인 사람, 종일 굶은 사람, 최루가스를 온몸에 뒤집어쓴 사람, 안경이 깨져 앞을 제대로 못 보는 사람, 경찰 진압봉 및 방패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 명동성당 일대는 경찰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었고, 학생과 시민들은 장기 농성 투쟁에 들어갑니다.

    그때 지칠 대로 지친 시위대를 감격게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명동성당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던 계성여고 여학생들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나 둘 자신들의 도시락을 모아 담 넘어 시위대 오빠 언니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모아지는 엄청난 도시락들. “우리가 차마 어떻게 도시락 하나로 밤늦게까지 입시공부 해야 하는 여고생들의 도시락까지 뺏어 먹는단 말이냐?”라면서 농성 시위대는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계성여고생들은 그 외에도 담 너머로 여대생 언니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생리대를 모아 전달합니다. 경찰도 처음에는 설마 여고생들에 의해 물품이 전달되리라고 생각지 못해 방치하다가, 뒤늦게 그것까지 모두 차단합니다.

    이후 명동성당 주변 사무실 직원, 상가 자영업자, 남대문시장 상인, 지나던 시민 등의 물품과 성금지원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점심시간 넥타이부대들이 시위대의 구호에 주먹을 흔들며 동참, 민심이 심각하게 이반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실 강제진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폭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그리고 성당의 시위대를 진압하려면 우리를 먼저 밟고 가라는 사제단의 단호한 대응…. 강제진압은 전두환이 자신의 치적으로 남기고 싶어하던 88올림픽 개최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공판모습. 한겨레신문 자료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김경회 인천 지검장은 말기암을 선고받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회고록 <나 이제 자유인 되어>에서 성고문사건은 자신의 검사생활 중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 사건이 정반대로 뒤집히게 되었는지 밝힙니다.

    처음 검찰의 명예를 걸고 비장한 각오로 사건의 전모를 파헤쳤던 검찰은 장세동 안기부장이 주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성고문의 “성” 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던 날, 문화공보부는 다음과 같은 보도 지침을 내려 보냅니다.

    1.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2.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3.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4.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5.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 모욕행위로 할 것
    6. 발표 외의 독자적인 취재보도내용 불가
    7.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관계 성명 등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성고문 의혹을 부인하는 강민창 치한본부장 치안본부장.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검찰의 발표는 예정시각이었던 4시를 넘어 6시 반으로 미뤄졌습니다. 각 언론사에는 검사장이 직접 발표한다고 예고되었으나 정작 발표는 특수부장 김수장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김수장 검사의 수사결과 발표화면 밑에 김경회 검사장이라는 자막이 뜹니다.

    김경회는 평생 김수장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고 고백합니다. 성고문사건 수사를 했던 어느 검사는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던 검사장실에 들어와 대성통곡하면서 울었고, 회의를 끝내고 인천지검장 김경회 검사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소리없이 울었다고 고백합니다.

    발표 다음날, 검찰총장은 서울과 인천의 일부 검사들이 어제의 발표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공안기관에 감지되고 있으니 부하들 입단속을 시키라고 지시합니다.

    김경회 검사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지금 이 마당에 검사장이 입단속이나 시킬 형편인가? 수챗구멍에 목을 묻고 죽지 못해 살고있는 처지가 아닌가? 아무리 보안을 당부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막는 격이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작 파렴치범인 문귀동에게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지자 장관이 간부들에게 나눠주라고 격려금 이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수사결과를 발표했던 김수장 부장검사는 훗날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권인숙 씨를 만난다면 우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최선을 다했지만 왜곡을 막아내지 못하고 이런 결과를 가져와서 미안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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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이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하자 조영래 변호인 등 166명의 변호사들은 불복하여 즉각 재정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이철환)는 “권인숙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라고 재정신청을 기각합니다.

    재판부는 “피의자 문귀동은 직무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되었고 비등한 여론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이 정당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사법부 역시 성고문 은폐에 가담한 겁니다.

    이 기막힌 판결에 조영래 변호사는 호소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겁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상속권을 팔아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86년 12월 1일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인천 지법 형사 2부 재판장 윤규환)는 “비록 목적이 근로자 권익보호를 위한 심정에서 위장취업했다고 하나 남의 주민증을 훔쳐 사진을 갈아붙이고 인적사항을 도용 이력서를 작성한 행위는 방법에 있어 지나치다”라며 권인숙에게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합니다. 정작 성고문까지 한 문귀동은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권인숙양은 공문서위조로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 민가협 회원 이중주 씨는 재판장이 권인숙 씨의 진술을 중간에 막는 것을 보고 분노해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라고 항의하다 끌려나가면서,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칩니다.

    “이 더러운 군사 독재의 시녀들아!”

    그리고 법정모독으로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1986년 7월 17일자 조선일보 11면

    6월항쟁. 그 피의 대가로 다소나마 군부독재의 폭정이 사라지고 민주화의 숨통이 트인 89년 6월. 사건발생 3년여 만에 대법원은 문귀동 경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조영래 변호사.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경장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는 안타깝게도 1990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즉 민변의 탄생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와 조영래 변호사. 한겨레신문 자료.

    ▲ 고문출장 다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장 반달곰 이근안. 그리고 성고문의 달인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

    흔히들 말하길,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전하지 못한 분야가 두 가지 있다. 바로 국산영화와 정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말들을 쉽게 했습니다. 영화가 관의 통제를 심하게 받던 시절, 그 유치한 수준 때문에 관객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국산영화가 이제는 비중 있는 국제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대한민국 정치…. 과거 어느 외국 언론에서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걸 보느니 차라리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걸 기다리는 게 낫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는, 최소한 선거 때마다 고무신이 산을 이루고 막걸리가 강을 이루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적어도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했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지난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검찰은 스스로의 명예를 걸고 부천 성고문사건 수사의 칼을 뽑았고, 수사결과를 정권의 압력으로 뒤집어 발표해야 했던 그 참담함과 수치심에 방문을 걸어잠그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X파일과 스폰서로 빛나는 저들은 득의만만하게 그야말로 환하게 웃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발전하지 못한 분야는 영화와 정치가 아닙니다. 단 한 곳만이 발전이 아닌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어느 검사 출신 국회의원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당시 담당 검사였던 자신이 정권의 엄청난 압력을 물리치고 소신껏 진실을 밝혀낸 것이고, 그래서 당시 정권의 눈 밖에 나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후 곶감 꼬치에서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릴 때마다 책을 내서, 신문에서, 공중파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안 검사의 일기>를 재출간하면서 국회에서 출판기념회를 했고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은 축사를 통해 “5공 말 6월 민주화 항쟁은 우리 안상수 대표의 양심적인 정의감이 이뤄낸 일…. 민주화 투쟁의 영웅은 안상수 검사”라고 치하합니다.

    그 검사출신 국회의원은 책의 인세를 박종철 기념사업회에 기증하겠다고 발표하지만, 박종철 기념사업회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명을 발표합니다.

    “안상수 대표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분노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이용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사건의 축소 은폐에 가담한 과거를 고백하고 유족과 국민 앞에 사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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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1월 15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수사지휘하고 안 검사에게 조사를 지시했던 당시 최환 공안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인들은 원래 저렇게 ‘구라’가 심하냐? 안상수가 뭐 했다고, 부실수사가 귀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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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하다 숨진 이유는 학교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박종철 열사가 목숨으로 지켜주었던 선배 박종운은 2004년 4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박종철 열사를 숨지게 한 민정당의 후신 한나라당에 입당, 국회의원 후보로 표를 달라고 합니다.


    박종철 열사의 49재. 그 준비위원 중에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장소는 부산의 중심사찰 대각사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대각사 주변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최루탄을 마구 발사해 시민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습니다.

    최루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앉아서 버티던 김광일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를 경찰이 강제연행하는 모습(국제신문 자료)

    직계 가족만이 겨우 참가한 49재. 잘 키운 자식을 아무 죄없이 처참하게 잃은 가족은 가슴이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제를 치릅니다.

    “천년 세월을 이어온 종소리는
    진리를 전하는 굉음으로 천지를 뒤흔들지만
    무지한 중생들은 듣지 못한다”

    어머니와 누나는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절규합니다.

    “종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거라…!”


    종철이는 노무현이다.
    종철이는 이 땅의 권력 앞에 숨죽이고 엎드려 살아온 민초들이다.
    종철이는 바로 당신이다.

     

    kuru


    출처 : http://www.ddanzi.com/news/681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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