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상 최동원

    도야지꿀 2011. 9. 21. 09:15

    "盧가 '바보'라면 최동원은 '위대한 바보'다!"

    [정희준의 '어퍼컷'] 최동원, 불꽃으로 타오르다

    기사입력 2011-09-20 오전 8:12:37

    지난 주 지인과 저녁을 하는데 그가 뜬금없이 "바빠 죽겠는데 사직(동)에 다녀왔다"고 한다. 속으로 '거긴 왜?' 하며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순간 곧 알아차렸다. 사직야구장이었다. 고 최동원 선수의 분향소에 다녀온 것이다.

    "야구 좋아해요?" 하고 물었다. 아니란다. 그런데 거길 왜 갔을까. 그가 설명을 덧붙인다. 롯데 자이언츠가 1988년 최동원을 삼성 라이온즈로 쫓아낸 이후 롯데와는 인연을 끊었단다. 그 이전까진 학교가 야구장과 가까워서 야구장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단다. 최동원 보러. 40대 여성이다.

    사실 부산에서 '야구 좋아하냐'는 말처럼 멍청한 질문은 없다. 부산은 야구에 미친 도시다. 문제는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하냐 아니냐는 것인데 롯데 야구는 그렇게 싫어해도 자이언츠 야구는 또 다들 본다. (헷갈리시죠?)

    지난 주 최동원이 세상을 뜨자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나도 그를 추억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당연한 다짐을 하며 이리저리 기사와 자료들을 훑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더듬다 보니 곧 그 시절로 빠져들었다. 글은 쓰지도 못하고 기사만 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시절의 조각들을 붙여 나간다. 그 시절이 내 앞에 펼쳐진다. 그의 경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자이언츠의 시작, 최동원

    ▲ 고 최동원 선수. ⓒ연합뉴스
    얼마 전 올 한해 프로야구 관중이 6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다수의 야구 전문가들은 그 600만 명의 절반은 롯데 팬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프로야구 역사에서 그렇게 별다른 기록도 없고 워낙 구두쇠 구단이라 프로를 꿈꾸는 야구 선수조차 드래프트에서 피하고 싶어 하는 롯데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팬을 긁어보았을까. 롯데 자이언츠의 인기엔 도대체 무엇이 섞여 있는가.

    지금 롯데가 만끽하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의 (황당할 정도로) 독보적 인기와 전국적인 인기는 상당 부분 1980년대에 빚지고 있다. 그 주역은 당연히 최동원이다. 지금 롯데 팬의 절반은 최동원이 불러낸 팬이라면 과장일까. 그리고 앞의 지인의 예에서 보듯 부산 사람의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불가사의한 애증 관계는 바로 최동원이라는 인물에게서 출발한다. 롯데는 최동원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3년 전의 로이스터 열풍!? 다 필요 없다. 롯데의 모든 것은 최동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경이적인 완투 능력,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대담함, 고등학교 시절부터 쌓아온 놀라운 기록들이 등장하며 그를 '무쇠팔,' '불세출의 스타'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었다. 그를 '스타'라고 이름 붙이기엔 어딘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반항아였다. 사실 바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야기하며 1984년을 말한다. 자이언츠가 첫 우승을 했을 때다. 다들 삼성이 우승할 거라고 했다. 삼성은 껄끄러운 OB베어스를 피하기 위해 시즌 막판 약체인 롯데와의 경기에서 '져주기'를 불사하며 코리안 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간택(?) 했다. 승부 조작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기사 제목을 "야구냐 야바위냐"로 뽑기도 했다.

    당시 최동원은 그 스스로 삼성은 열 번 싸우면 아홉 번 지고 한 번 이길 상대였다고 토로했다. 삼성 역시 롯데를 얕봤고 최동원을 만만히 봤다. 그러나 그는 1984년 27승을 거둔 최다승 투수였고 특히 후반기에만 18승을 거둬 롯데를 혼자 힘으로 코리안 시리즈에 밀어올린 장본인이었다. 결국 최동원은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으로 혼자 4승을 거머쥐며 롯데에 기어코 우승을 안긴다.

    많은 이들이 그와 선동열을 비교한다. 사실 비교 불가다. 최동원이 선동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기에 그들은 아마추어에서는 서로를 상대할 수 없었다. 프로에 와서야 세 번 맞대결을 했는데 각각 1승 1무 1패를 기록했고 마지막 대결은 1987년 15회까지 가는 연장 사투 끝 2대2 무승부였다. 한국 프로야구사의 전설로 기억될 맞대결이었다. 선동열이 232개를 던졌고 최동원이 209개를 던져 양 선수가 한 경기에서 441개를 던진 것이다.

    프로에서의 기록상으로 그는 선동열에 뒤진다. 그는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를 기록했다. 통산 방어율은 2.46이고 탈삼진은 1019개였다. 선동열의 통산 146승 132세이브 탈삼진 1698 그리고 방어율 1.20에는 확실히 뒤진다. 사실 그는 기록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꾸 최동원과 선동열을 비교할까. 게다가 최동원이 선동열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주장을 할까.

    이길 때까지 던진다

    보통 산악인들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한다. 최동원은 마운드가 있어 올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1975년 경남고 2년 시절 고교 야구 최강팀인 경북고등학교를 상대로 완투하며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서 이튿날 선린상업고등학교를 맞아 8회까지 노히트 행진을 펼쳐 17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이듬해 청룡기 승자결승 군산상업고등학교 전에서 탈삼진 20개의 기록으로 완투승을 거두고는 이틀 뒤 최종 결승에서 다시 군산상고를 맞아 2안타 12탈삼진으로 5대0 완봉승을 거둔다.

    연세대학교 시절의 최동원은 23연승으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진가는 괴력의 연투 능력 그리고 팀을 우승시키는 결정력에 있었다. 1978년 대통령기전국대학야구대회 동아대학교와의 준결승에서 동아대 투수 임호균과 피말리는 투수전을 벌이는데 연장 14회 0-0인 상태에서 해가 저버렸다. 일몰 일시 정지 경기가 돼서 이튿날 경기가 이어졌는데 그는 또다시 등판해 던졌다. 연장 18회 터진 김봉연의 결승 홈런으로 1-0 승. 그는 이길 때까지 던졌다.

    결승전은 바로 몇 시간 뒤. 이틀간의 혈전을 치르고 올라온 연세대를 기다리던 상대는 성균관대학교. 성대를 상대해 마운드에 오른 선발투수는 다시 최동원. 연세대는 접전 끝에 성균관대를 3-2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최동원은 이틀에 걸쳐 27이닝 동안 92명을 상대로 투구수 375개 12안타 33탈삼진 2실점이라는 믿을 수 없는 투구를 보여준다.

    대학 졸업 후 입단한 실업팀 롯데에서도 그의 능력은 이어진다. 데뷔하자마자 전기 리그에서 아마추어 롯데는 13승 2패로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때 최동원의 기록은 13승 1패였다. 거의 모든 경기에 등판해 거의 모두 이긴 것이다. 결국 신인으로서 그는 17승을 거두며 최우수신인, 최다승투수 뿐 아니라 최우수선수상까지 거머쥔다. 1주일에 6번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혼자 던졌고 그가 팀을 우승시켰다. 다승 2위 그룹 투수들의 이닝 수에 거의 두 배였다.

    그는 던지는 걸 자신의 팔자로 알고 던졌다. 그냥 던졌다. 사실 그의 프로 선수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음에도 80번이나 완투했다. 통산 완투 1위는 윤학길의 선발 231경기 중 100회였는데 최동원은 고작(?) 선발 124경기에서 80회 완투했다. 최동원보다 선수 생활이 훨씬 길었던 선동열도 완투는 68회 밖에 하지 않았다.

    우승을 거머쥐었던 1984년에도 페넌트레이스 100경기 중 51경기에 출장해 27승을 거뒀다. 동료 투수 중 힘을 보태 줄 10승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코리안 시리즈에서 5번 출장해 4승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무려 40이닝을 혼자 던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한 경기'를 위해서라면 선동열을 택하지만 '한 시즌'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최동원을 택할 거라고 하는 것이다.

    롯데에 버림받고 삼성에서 방출되고…

    보통 사람들이 세상사는 맛도 알고 요령도 터득할 서른 즈음, 그는 정반대로 갔다. 바보처럼 말이다. 당시 운동선수에겐 개념도 없던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추진한 것이다.

    그는 당시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1988년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600만 원에 불과했다. 2군 선수들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부자였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변의 선수들, 사고나 은퇴로 인해 가족의 생계까지 어려워지는 프로 야구 선수들의 현실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시작한 게 바로 상조회였다. 야구 선수들끼리 서로 돕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단들은 이를 노동조합 결성으로 여기고 주동자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아주 비열하고도 가혹한 보복이었다. 구단들은 선수들의 아내들을 협박했고 선수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롯데는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등학교를 나오고 자이언츠의 간판이었던 최동원을 삼성으로, 삼성은 대구상고 출신의 에이스 김시진을 자이언츠로 쫓아내 버린다.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내버리고 이들을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특히 삼성으로 쫓겨난 최동원의 고난은 심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배타적 지역인 대구의 팀인데다가 노조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삼성이었기에 그는 삼성에서 왕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충격적인 트레이드 이후 뜻 없는 곳에서 선수 생활을 해야 했던 최동원은 과거와 같은 투수가 아니었다. 그는 전혀 최동원답지 않은 볼품없는 2년을 대구에서 보낸 후 그의 불꽃 튀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 훗날 선동열이 수석코치와 감독을 하며 부와 영예를 누리던 삼성에서 최동원은 방출된 것이다. 최동원에겐 은퇴식도 없었다.

    이후 최동원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사실 1988년 선수협 파동 당시 롯데는 선수회에 관여했던 다른 선수들에게 선수회에서 손 떼겠다는 각서를 일일이 받으면서도 최동원에게는 그런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최동원은 트레이드 대상에 올리거나 방출해 미아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계산을 이미 해놓고 있었다는 뜻이다.

    은퇴 후에도 롯데는 최동원을 외면했다. 다른 팀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반항아 이미지의 그를 불러줄 구단은 없었다. 지금 프로 야구에서 감독, 코치를 하는 이들은 모두 선수로 뛰던 시절 감독님과 구단의 말을 잘 듣던 이들이다. 구단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바른 말 하는 선수는 절대로 코치가 되지 못한다.

    진짜 바보 되다

    최동원은 1991년 초대 광역의원 선거에서 부산 서구 지역구에 출마했다. 그런데 김영삼이 이끄는 민자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아니, 그냥 민주당도 아니고 꼬마 민주당이었다.

    그는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부산일보> 파업 현장에 유니폼입고 가 격려금 100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모임에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김영삼이 주도했던 3당 합당을 이를 3당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심판하기 위해 출마했다고 한다.

    경남고 선배인 김영삼이 이끄는 민자당의 제안도 있었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뜬 그는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민주당을 택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그가 당돌하게 선택한 지역구는 바로 김영삼의 텃밭인 서구였다. 서구는 김영삼이 1960년 제5대 총선부터 1988년 제13대 총선까지 7번 당선된 '김영삼의 땅'이었다. (11,12대는 김영삼의 왼팔이라 불리는 서석재가 1등 당선됐다.) 김영삼의 땅에서 김영삼의 3당 야합을 심판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낙선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이 '바보'면 야구인 최동원은 '위대한 바보'다.

    지난 주 롯데는 최동원의 현역 시절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롯데는 1988년 그를 쫓아내면서 사실상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를 코치로 데려오라는 팬들의 열망을 무시해오던 롯데였다. 그러나 이제 눈을 감은, 안전한(?) 최동원은 받아들이려나 보다.

    최동원 대 선동열

    나는 몰랐었다. 이번에 알았다. '롯데 맨'으로 알려진 최동원의 롯데 생활은 고작 6년이었다는 것을. 롯데에서 쫓겨난 후 충격과 방황과 따돌림 속에 보낸 삼성에서의 2년을 제외하면 프로에서 최동원이 역투한 것은 고작 6년이었다.

    그리고 선수협 문제로 시끄럽던 1988년을 제외하고 최동원은 1983년 데뷔부터 5년 연속 매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선동열은 해태에서 11년, 일본에서 4년, 총 15년이나 프로 선수 생활을 했지만 200이닝 이상 던진 시즌은 고작 2시즌이었다.

    선동열은 자신의 몸 관리와 기록 관리에 철저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투혼의 야구였다. 최동원은 선동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그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선동열은 프로에서 꽃을 피웠다. 당시 대학의 투수들을 평가해보면 장래성은 윤학길이었고 스타성은 박노준이었으며 선수들 간에는 이강철이 최고라고 했다. 물론 선동열이 이들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과 한 묶음이었는데 결국 프로에서 만개한 선수가 선동열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대학 생활을 한 최동원에겐 적수가 없었다. 아니, 고교, 대학, 실업을 거쳐 프로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최고였다. 다만 프로에서의 선수 생활이 너무 짧았다. 선동열이 프로에서 꽃을 피웠다면 최동원은 프로에서 불꽃을 태우고 스스로를 불살랐다.

    그래서 한국 프로 야구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단연 선동열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오직 최동원이다.

    고교 때부터 프로까지 유난히 혹사를 당했던 최동원의 죽기 전 말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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