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상 최동원

    도야지꿀 2011. 9. 23. 00:12

    [인물탐구] 한국 야구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 비스토리
    “중정 개입으로 연세대 진학”
    [1010호] 2011년 09월 21일 (수) 14:55:40 박동희 webmaster@ilyo.co.kr

    #축구선수 최동원

       
    ▲ 최동원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이 2009년 7월 4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SK 대 롯데 경기에서 시구를 한 뒤 고향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미 메이저리그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은퇴식에서 “외로웠다”라고 말했다. 현역 시절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루스는 “화려함의 이면엔 암흑 같은 외로움이 존재했다”고 털어놨다.

    일본 프로야구의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는 반대였다. 그는 은퇴식에서 자신의 현역 시절을 “눈부시게 화려했던 날”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 역시 늘 외로움을 느꼈다. 승리의 압박과 대기록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가네다는 “외로웠기 때문에 더 화려해지려 노력했다”며 “외로움이 없었다면 400승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대투수 최동원은 어땠을까. 그는 화려했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로웠기에 더 화려했던 이였다.

    최동원은 원래 축구선수였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까지 축구부의 라이트 풀백으로 뛰었다. 그러다 라디오를 통해 일본 프로야구 중계를 듣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전근 간 학교에 마침 야구부가 있자, 최동원은 부모를 졸라 그 학교로 전학을 간다. 순전히 야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키가 작았던 최동원을 보고 구덕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구선수로 대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하지만, 최동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감독이 제지하기 전까지 그는 운동장 수십 바퀴를 돌고 또 돌았다. 최동원의 지구력과 끈기를 높이 산 감독은 결국 야구부 입회를 허락한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최동원은 야구공을 처음 잡은 날부터 투수를 맡았고, 야구부에서 가장 위력적인 공을 던졌다. 최동원의 진가가 알려진 건 부산 토성중학교 3학년 때다. 그는 중학야구 예선전에서 9회 말 2아웃까지 퍼펙트 경기를 펼쳤다. 아깝게 퍼펙트 경기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고교 투수를 능가하는 속구 구속과 정확한 제구로 부산지역 야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부산 경남고에 진학한 이후론 그야말로 전국구 스타가 됐다. 2학년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이틀 후 열린 선린상고 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 기록을 이어갔다. 17이닝 노히트노런 기록은 한국 야구사에 유일무이한 대기록으로 남아있다.

    최동원이 화제가 된 건 기록과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최동원은 경남고에 입학하자마자 당시로선 생소한 ‘어깨 보험’을 들었다. 어깨나 팔꿈치 혹은 손목 장애 시 50만 원을 보험금으로 받기로 하고, 달마다 3410원을 보험료로 냈다. 주변에선 이를 두고 ‘극성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는 “(최)동원이가 자신의 몸 관리에 관심을 두도록 하려는 교육적 의미에서 보험에 든 것”이라며 “앞으로 운동선수들이 신체 보험에 드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근래 프로야구 선수 가운데 98%가 보험에 가입한 상태니, 최 씨의 예상은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었다.

    #연세대 입학한 까닭

    총알보다 빠른 강속구로 고교야구를 평정한 최동원을 놓고 전국 대학들이 영입 경쟁을 벌였다. 최동원에 대한 비판과 곱지 않은 시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애초 최동원은 고려대를 가고 싶어했다. 경남고 선배들이 죄다 고려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연세대에 입학했다.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원래 고려대에 입학하기로 학교 측과 이야기가 다 됐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정보부(중정)가 개입해 ‘연세대로 입학할 것’을 종용했다. 알고 보니 중정 고위 관료가 연세대 출신이었다. 고려대 체육담당 관계자가 종전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그때 잠자코 연세대에 갔으면 됐지만 오기가 생겼다. ‘고려대에 못 갈 바엔 차라리 부산 동아대에 가자’고 마음먹었다. 한데, 동아대 측에서 ‘우리도 최 선수를 영입하고 싶지만, 중정에서 최동원을 입학시키면 알아서 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며 ‘미안하게 됐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연세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원이 최초로 털어놓은 연세대 입학 비사는 그랬다.

    최동원을 거머쥔 연세대는 장학금으로 500만 원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장학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다 370만 원만 지급했다. 최동원 측에서 약속한 장학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연세대는 “최동원이 자기만 생각한다”며 그를 이기적인 선수로 몰아갔다. 평생 최동원을 따라다닌 ‘이기적인 선수’라는 악평은 바로 이때부터 나온 것이었다.

    #롯데와의 관계

    결국 학교 측과 화해한 최동원은 태극마크를 달고 성인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즈음 그에게 엄청난 제안이 들어온다. 미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입단 제안을 한 것이다.

    최동원은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토론토 스카우트팀은 “저 정도 속구 구속과 제구라면 당장 빅리그에서 통할 것”이라며 최동원에게 연봉 61만 달러를 제시했다.

    당시 61만 달러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야구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최동원이 실업 롯데와의 입단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메이저리그 진출 건을 의도적으로 알리고, 실제보다 부풀렸다는 게 이유였다.

       
    ▲ ❶1983년 5월 18일 잠실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첫 야간 경기에서 최동원이 공을 던지고 있다. ❷1989년 삼성으로 이적한 최동원. ❸2006년 한화 코치 시절.
    그렇다면 과연 토론토는 정말 최동원에게 61만 달러를 제시했을까. 전 MBC 청룡(LG의 전신) 포수였던 박철영 SK 스카우트는 1990년대 초반 미국에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토론토 스카우트를 만났다. 토론토 스카우트는 “최동원은 절대 한국을 떠나 미국 혹은 일본의 프로팀과 계약할 수 없다”며 “만약 그런 조짐이 보이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최동원의 연세대 2년 후배인 박 스카우트는 “최동원이 토론토에 입단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다른 국외구단과 계약할 수 없느냐”고 따졌다. 토론토 스카우트는 “지금도 사무실에 최동원이 61만 달러에 계약한 입단서가 보관돼 있다”며 “그는 여전히 우리 팀 선수”라고 주장했다. 박 스카우트는 “토론토가 31년 전의 입단 계약서를 지금도 보관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실 최동원의 실업 롯데행을 두고 지탄받아야 할 쪽은 롯데였다. 1981년 2월 28일 롯데는 최동원과 입단에 합의하며 총 5000만 원을 계약금으로 주기로 했다. 2100만 원은 현금으로, 2900만 원은 6개월짜리 약속어음으로 줬다. 선수 계약금을 약속어음으로 준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최동원은 롯데의 어음을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실업 롯데는 끝내 2900만 원의 약속어음을 결제해주지 않았다. 1982년 세계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1983년 프로 롯데에 입단할 때 최동원이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최동원과 롯데의 불신 관계가 시작됐는지 모른다.

    1983년 입단 첫 해 9승16패에 그친 최동원은 이듬해 연봉이 8.3%나 깎이는 수모를 당한다. 그러나 동계훈련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0구씩 투구훈련을 한 덕에 1984년 27승이란 대기록을 작성한다. 여기다 삼성과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팀 우승을 이끈다. 그러나 이때의 혹사로 최동원의 성적은 꾸준히 떨어졌다. 1985년 2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거둔 이후 1988년엔 단, 7승을 따내는 데 그쳤다.

    최동원과 롯데의 결별 기운은 1988년 연봉 협상부터 싹텄다. 지루한 연봉협상에서 최동원은 모 구단 고위관계자와 감정싸움을 벌였다. 이 관계자는 급기야 최동원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단호했다. “선수가 정당한 절차를 밟아 급격한 연봉 삭감을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반성문을 써야 한다면 이게 무슨 프로일 수 있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롯데는 구단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최동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최동원이 선수들의 결사체인 ‘프로야구선수회’ 결성을 주도하자 롯데는 마침내 칼을 빼든다. 1988년 11월 23일 결국 롯데는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한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채 부산 사직구장에서 화려하게 은퇴하는 걸 꿈꿨던 최동원에게 트레이드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주변의 만류로 삼성에서 1년간 뛰었지만, 1990년 다시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화 지도자 생활

    은퇴 당시 최동원의 나이는 32세였다. 너무 이른 퇴장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친정팀 롯데를 비롯해 어느 구단에서도 그를 지도자로 영입하지 않았다.

    현역 시절 그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독불장군’, ‘구단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 그의 지도자 취업을 막았다.

    결국, 최동원은 야구해설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오락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드러내며 야구전도사를 자처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심한 사투리로 인해 야구해설가로 정착하지 못했다. 야구팬들 역시 당대 최고 투수 최동원이 오락프로그램에서 희화화되는 것이 마뜩하지 않았다. 최동원은 방송가를 떠나 이번엔 정치에 도전한다. 1988년 부산일보 파업 때 롯데 유니폼을 입고 파업현장에 찾아가 격려금 100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던 최동원은 “야구선수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선 의원 한 명쯤은 나와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1991년 초대 광역의원 선거에서 부산 서구 지역구에 출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적이 문제였다. 당시 그는 민주당 간판을 걸고 선거에 나왔다. 대외적인 출마 이유는 “경남고 선배 김영삼의 3당 야합을 심판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낙선.

    이후 10년 동안 최동원은 철저히 야인으로 살았다.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교체되며 그 역시 해고당한다. 최동원은 2005년 김인식 감독의 추천으로 다시 한화 투수코치로 부임한다. 2007년엔 한화 2군 감독을 맡았다. 이 기간에 그는 류현진이라는 거물 신인 투수를 조련했다. 2008년 한화 2군 감독을 그만둔 이후에는 2009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재직하며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최동원이 처음으로 몸에 이상을 느낀 건 2007년이었다. 속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대장암 진단을 내렸다. 바로 수술대에 올랐고, 경과는 좋았다. 하지만 2009년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기나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고기를 많이 먹지 마라”

    평소 술·담배를 멀리하며 몸 관리에 철저했던 최동원의 암 투병소식은 많은 야구인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암은 몸 관리에 철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작고하기 전 최동원은 기자에게 “고기를 많이 먹지 마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체구를 단단하게 만들려고 매일같이 고기를 먹었다. 프로에서도 매일 고기 반찬을 먹었다. 하지만 그게 독이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당부였다. 하지만 최동원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암을 탓하지 않았다. “고기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최동원도 없었다. 인생이란 초원에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순 없지 않은가.”

    화려했으나 누구보다 고독했던 에이스 최동원은 이제 인생의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전국의 그라운드에선 제2의 최동원을 꿈꾸는 야구소년들이 자라고 있다. 그가 하늘에서 슬퍼하지 않을 이유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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