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평전--김택근의 인물열전

    도야지꿀 2011. 10. 11. 12:58

    5·16은 '구국의 결단'? "박정희는 '어둠의 세력'!"

    [김대중 평전 '새벽'·7] 4월 혁명과 5월 쿠데타 사이

    기사입력 2011-09-22 오전 11:04:03

    4월 혁명과 5월 쿠데타 사이

    정·부통령을 뽑는 3월 15일은 나라가 온통 불법·무법 천지였다. 사전 투표와 무더기 표 투입으로 자유당 표가 유권자보다 많은 지역이 속출했다. 경찰과 반공 청년단이 투표소를 포위했고, 야당 참관인은 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러자 마산 시민들이 일어났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그날 밤 4월 혁명의 꽃, 김주열이 죽었다.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은 터지지 않고 눈 속에 박혔다. 경찰은 주검이 너무 참혹하자 사체에 돌을 달아 수장시켰다. 그러나 김주열은 무거운 돌을 치우고 바닷물 위로 떠올랐다.

    김대중은 민주당 선전부 차장이었다. 민주당은 4월 6일 부정 선거 규탄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김대중에게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끄는 역할이 주어졌다. 경찰은 무력 진압을 일찌감치 천명했다. 그 때 남녘에서 올라오는 소식들은 피에 젖어 있었다. 시위는 갈수록 치열했고, 경찰은 사정없이 발포했다. 유혈 충돌이 잦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두 아들이 절을 했다. 그날따라 어머니도 집 앞까지 따라나섰다. 부디 조심하라는 애원이었다. 김대중은 하늘을 봤다.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했다. 아내는 없고 자식은 어리고 어머니는 늙었다. 독재 정권의 칼날은 시퍼렇고 자신은 무능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집안을 거둘 것인가.'

    김대중은 반정부 집회에 처음 참여했다. 김대중은 무명이었다. 만일 유혈 충돌 사태가 빚어지면 가장 위험했다. 그럼에도 맨 앞에서 시위를 부추겨야 했으니 두렵고 떨렸다.

    서울시청 앞에서 부정 선거 규탄 집회를 열고 마침내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김대중은 확성기를 목에 걸었다. 시위대는 금세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길 양편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수만 명이었다. 그런데 그날 경찰은 웬일인지 강경 진압을 하지 않았다. 을지로를 돌아 종로 탑골공원에 이르렀을 때 시위 열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김대중은 외쳤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그러다 구호가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

    김대중은 어느 순간 시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아침의 두려움은 한낮의 햇살에 증발했다. 그날 민심의 실체를 알았다. 생애 처음으로 거대한 군중의 힘을 느꼈다.

    기어이 4·19 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피의 화요일이었다. 김대중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명서를 작성했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나이 85세였다.

    4·19 혁명은 김대중에게 많은 생각을 심어 주었다. 민심의 무서움을 깨닫는 동시에 민심을 얻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비록 독재자였지만 신속한 하야 결정은 대인다웠다. 내가 김대중도서관 집무실에서 물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긍정적인 역할이나 독재 정치에 대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김대중은 한참 생각을 가다듬더니 말문을 열었다. 말 속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독립 투사인 이승만 박사가 일본 앞잡이들을 요직에 앉히고 그들의 아첨을 받아들인 것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는 친일파를 대거 중용한 것입니다. 애국자들을 탄압했던 경찰이 그대로 있고, 국민을 선동했던 지식인들이 여전히 요직에 앉아 권력을 행사했어요. 그러니 세상이 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을 맞았어도 새 나라가 아니었어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에게 군대를 맡겼으니 무슨 변화가 오겠습니까. 친일파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능멸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어요. 해방 공간에서의 비극은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이승만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한국 전쟁 중에도 민심을 속이고 독재를 획책했던 점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국부가 될 수 있었던 길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내각 책임제 실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새 헌법에 따라 제5대 민의원과 제1대 참의원 선거를 1960년 7월 29일 실시하기로 했다. 김대중은 다시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민주당은 국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깃발만 들어도 당선될 정도였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선거법이 바뀌어 부재자 투표 제도가 도입되었다. 인제 군내 군인들 표가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게 됐다. 개혁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표가 전국으로 빠져나갔다. 외지인 김대중은 다시 토박이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1000표 차이었다. 김대중은 졌지만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민의원과 참의원 모두를 장악한 민주당은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면을 선출했다.

    총리 장면은 김대중을 대변인으로 전격 발탁했다. 현역 의원이 아니었기에 파격이었다. 당 안팎의 반발에도 장면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김대중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열심히 일했다. 당시 민주당은 내부 분열이 심각했다. 신파, 구파로 나뉘어 집안싸움을 하더니 구파가 집단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했다. 야당으로 돌아서 버렸다. 거기에 소장파로 구성된 신풍회가 각료 배분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다. 거리에선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독재 정권에 억눌렸던 욕구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장면 내각은 흔들렸다. 대변인 김대중은 이런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어야 했다. 그런 혼돈의 와중에도 장면은 김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사명은 총리가 다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평화적으로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평화적 정권 교체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장면은 온건한 민주주의자였다. 선량하기 그지 없었다. 김대중은 그 곁을 지키는 열정의 대변인이었다. 여당 대변인이기에 최신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 입장을 설명했다. "총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김대중 한 사람뿐"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집권당 대변인을 맡으면서 어떻게 정책이 생산되어 유통되는 것인가를, 권력은 어디에 고여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김대중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안들을 정리하면서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을 길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당(신민당), 혁신계, 무소속 그룹의 대변인들과 싸웠다. 늘 3대1의 설전이었지만 김대중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싸움이 기다려졌다.

    1961년 봄이 되자 장면 내각에도 훈풍이 불었다. 정치권이 안정을 찾아가고 시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장면 내각과 여당은 의욕적인 국토 종합 개발 계획을 세웠다. 또 경제 개발 계획도 수립했다. 이것은 훗날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그대로 베껴서 마치 자신들이 만든 것인 양 발표했다.

    김대중에게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인제 민의원 당선자가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되어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김대중은 그해 5월 인제군 보궐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선되었다. 네 번의 낙선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장면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빨리 보고 싶으니 얼른 서울로 오라고 재촉했다.

    김대중은 밤늦도록 당선 인사를 다닌 후 잠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잠을 깨웠다. 그리고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알렸다. 5월 16일 아침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심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당시에는 쿠데타란 용어 자체가 낯설었던 시절이었다. 군인이면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으니, 그들이 정권을 찬탈할 줄은 꿈에도 생각 안했다.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인들의 투정쯤으로 생각했다.

    인제를 출발하여 양평쯤에 이르니 대규모 병력이 서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이었다. 서울 시가지는 이미 삼엄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국회 의사당은 완전 봉쇄되었고, 김대중은 의원 선서도 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총리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프레시안(손문상)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쿠데타군이 한강교를 건넜다. 쿠데타군은 중앙청과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접수했다. 쿠데타 머리는 박정희 육군 소장이었다. 거사 이유는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총리는 시청 옆 반도호텔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쿠데타군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몸을 피해버렸다. 장면은 숙소 건너편 미국 대사관에 숨으려 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할 수없이 혜화동 성당 뒤편에 있는 카멜수녀원에 숨어들었다. 수녀들은 깊숙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묵상과 기도로 55시간을 보냈다. 그 55시간 동안에 제2공화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총리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면, 또 신속하게 유엔군이나 미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더라면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병력 3600명이 참여한, 어쩌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쿠데타는 진압됐을 것이다. 미국은 쿠데타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백방으로 총리 장면을 찾았던 것이다.

    쿠데타 발발 사흘째인 5월 18일 총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료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추인했다. 그날 오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그 뒤를 군인들이 뒤따랐다. 어깨에 '혁명군'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제2공화국은 사라졌다.

    쿠데타 세력은 장면 정권이 무능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궐기했다고 선전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훗날 간행된 <한국 군사 혁명 재판사> 등을 보면 1960년 9월 10일 이미 쿠데타를 모의했다.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에서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등이 군사 정권의 밑그림을 그렸다. 민주당 정권이 내각 구성을 마친 것은 8월 23일이었다. 민주당 출범 18일 만에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이다.

    앞으로 부패하고 무능할 것을 미리 알고 거사를 준비한 꼴이니 말이 되지 않았다. 민주 정권 출범을 온 국민이 축하하고 있을 때 어둠의 세력들이 정부 전복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그냥 지나칠 김대중이 아니었다. 훗날 정치를 재개하고 이를 낱낱이 파헤쳤다.

    5·16은 명확한 이념이나 개혁의 설계도를 지참하고 진행된 거사가 아니었다. 무력을 동원한 권력 탈취에 불과했다. 혁명 공약만 봐도 급조된 명분에 불과했다. 군부는 정치 패권을 장악한 특권 집단이 되었고, 이후 정치 군인들이 득세했다. 김대중은 이때를 회상하며 "우리 민주주의 역사가 30년은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김택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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