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

    도야지꿀 2012. 9. 18. 22:24


    오늘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3주기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독재 정권과 문민정부 등을 거쳐 탄생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그와 박정희와의 관계를 보면 대한민국 현대 정치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악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박정희와 김대중,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우리나라 정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악연의 시작 5.16 군사 쿠데타'

    김대중의 정치 시작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나상근 후보의 중복추천으로 등록무효가 됩니다. 당시에 후보등록을 하려면 추천이 필요한데 김대중이 추천만 받아오면 자유당이 중복추천을 해버려 결국 무효로 선거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960년 제5대 총선에서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게 패했지만, 공민권 박탈로 보궐선거가 치러졌고, 결국 세 번 만에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 5.16 군사쿠데타 호외 조선일보와 박정희


    1961년 5월14일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은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5월16일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김대중과 박정희의 악연에서 재밌는 점은 박정희는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아주 쉽게 쟁취했지만, 김대중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인 국회의원에 되기 위해 무려 7년을 노력하며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를 이겨내고 힘겹게 노력해서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정치를 위한 시작의 차이는 이 두 사람의 인연이 악연으로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박정희는 어떻게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나?'

    박정희가 김대중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을 손꼽자면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입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권 유지를 독재자가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민정 불참을 선언한 박정희 의장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민정불참을 선언합니다. 당시 눈물을 흘리며 "혁명정부가 기도했던 세대교체 등의 정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자인한다"고 했던 박정희의 말을 순진한 국민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과 말은 다 거짓이었고, 결국 박정희는 민정 불참을 약속한 지 6개월 만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면서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공화당의 박정희는 (4백 70만 2천 6백 42표/총투표수의 42.61%),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4백 54만 6천 6백 14표/총투표수의 42.19%)를 한국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로 겨우 이기고 6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 삼선개헌안 통과를 보도한 신문

    원래 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제로 정해놨습니다. 6대 대통령으로 재선된 박정희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삼선 개헌을 준비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을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야당 의원을 피해,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에 국회 3별관에서 무려 1,2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삼선개헌으로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 박정희는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을 꺾은 김대중과 대결을 펼칩니다.

    '종신 총통제 VS 이번이 마지막'

    김대중과 박정희의 7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일들이 몇 가지 발생합니다. 당시 재야,학생,언론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격렬히 저항했으며, 학계,법조계,언론계,종교계,문학계 등 각계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이런 움직임과 함께 김대중의 명연설은 청중을 사로잡았고, 그의 유세장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 유세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은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맞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라는 읍소 작전으로 맞섰습니다. 박정희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구걸 유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1일 2회 유세 연설의 강행군은 전국에서 김대중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김대중의 인기에 겁이 난 박정희는 다른 전략을 구상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의 등장입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국회의장 이효상)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공화당,중앙정보부 요원들)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경상도 지역 공무원들에게 퍼진 말)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치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조선일보)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표 이긴다. "(중앙일보)


    박정희 쪽에서는 "신라대통령론"과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허위전단을 뿌리기도 했는데, 이런 지역감정 이외에 엄청난 선거 자금이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은 600억원을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700억원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1971년 대한민국 예산이 5242억원이었으니 박정희가 얼마나 많은 돈을 7대 대통령 선거에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또한 부정투표 시비도 있었는데, 당시 서울에서만 7천4백여표의 유효표가 무효처리되는 사태도 발생해,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는 돈과 공작 정치가 함께 이루어진 선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북(92만표),경남(58만표)에서 얻은 표로 당선됐습니다. 경북과 경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김대중이 박정희보다 무려 56만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을 사용한 박정희의 전략은 맞아 들었지만, 대한민국 정치는 얼마나 후퇴했는지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와 김대중의 '박정희 총통제 발언' 선거법 관련 기사

    박정희는 김대중의 총통제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대통령선거법으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972년 박정희는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앞세워,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합니다.

    결국, 김대중의 '박정희 종신 총통제' 발언은 사실이었고,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도 세습 정권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왜 이루어졌나?'

    우리는 흔히 김대중과 박정희를 말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말합니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을 왕래하였고,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비상계엄령이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미국으로 간 김대중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조직해 해외에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반대하며 반정부 투쟁을 벌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와 인터뷰 장면

    박정희 정권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이 해외에서 망명정부를 세워 박정희 유신체제를 전복시킬까 두려워 그를 일본에서 납치해버립니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최소한 "묵시적으로 승인했고" 납치 사건 전모에 "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우리 대통령 (박정희)께서 당신이 난처하지 않게 배려하실 것이니 앞으로 '김대중 사건'은 완전히 잊어 주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자신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인물이었고, 자신이 계획한 영구 집권을 국민에게 까발린 고자질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박정희 입장에서는 그가 있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청와대에 있을 수 없기에, 그를 어떻게 하든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1971년 4월18일자 조선일보 대선 유세 관련 기사

    1971년 4월18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대선 유세 중에 박정희는 임진왜란 때의 한일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켜 '몸이 마르고 키가 작으나 눈이 호랑이 눈 같아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말한 대목에서 '지금의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라고 청중을 웃겼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누구입니까? 임진왜란으로 조선인 사망자는 대략 1백만 명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경작지의 66%가 파괴되고, 경복궁은 물론이고 역대 실록 사고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김대중은 6대 국회의원 중 가장 국회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던 인물이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본회의장에 출석하지 않던 의원들도 회의장에 들어 올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이런 김대중을 정치권에서 쫓아내기 위해, 여당 후보 20명이 낙선을 해도 좋으니 김대중만은 떨어뜨리라고 지시하고, 대통령이 선거지원 연설을 할 수 없다는 법을 무시한채 직접 목포로 내려가 "3선 개헌은 절대 안한다. 3선 개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3선 개헌한다는 주장은 순전히 정치적인 모략이다." 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며, 사형과 망명,납치를 겪은 한 명의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았다고 주장하며 총칼과 불법으로 정권을 유지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인지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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