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論

최영철 2012. 2. 15. 12:28

새로움의 진정한 의미

                     - 최영철 시 <나무>

 

                                       장석주

 

 

 

 

… 최영철이 선보인 세 편의 작품은 하나같이 반복의 수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리드미컬한 운율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최영철은 이러한 운율감을 새롭게 형성해 나아가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의 매듭을 유연하게 이어가는 시인으로, 작품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와 <나무>에서 특히 그러한 특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라는 제목은 매우 상징적이다. 시인이 언어를 다루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유독 시적일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것들을 실제보다 축소시키거나 과장시킴으로써 시적 상황을 낯설게 만드는 데 있는 바, 최영철의 작품은 후자의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 실례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일년 삼백육십오 일의 자연적인 시간 관념을 무시하고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짤막한 순간을 주관적이요, 문학적인 시간으로 전환시켜 급속도로 변화하는 인생 혹은 삶의 여러 가지 양태를 그려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변화무쌍한 것이 인생이고 자연임을 관념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절감하는 최영철은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을 숨길 수가 없게 되고 그러한 심정을 형상화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나무>라는 작품이 그러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 이외의 뜬구름도

뜬구름만큼의 행복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곤

그래도 나무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제자리걸음의

뜬구름 뿐이다 뜬구름처럼 가냘픈

행복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 따위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흘러가거나 지겨울 뿐인 행복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믿기 위해서는

나무라도 몇 그루 서 있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둥실 떠 있는 내일일지라도

---<나무>에서

 

 

나무와 뜬구름에 대한 화자의 심경이 행갈이가 될 때마다 뒤바뀌지만 이것은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내적 풍경에 다름 아니다. 나무나 뜬구름에 대한 불신→나무나 뜬구름에 대한 또다른 믿음→나무나 뜬구름을 상징하는 행복에 대한 불신→나무나 뜬구름이라도 믿고자 하는 소망으로 시의 전개가 숨가쁘게 이루어지면서 시인은 행복에 대한 믿음과 불신, 그리고 기대를 한꺼번에 오버랩시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언어를 이어가는 시적 기교가 예사롭지 않은 작품으로 흥미있는 독서를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작품 <지금도 지금도>는 알레고리 수법을 동원한 까닭에 교훈적일뿐 아니라 진부한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만남, 화합, 결속 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돌고 있는 레미콘 속의 시멘트와 등 돌린 인간들을 대비시킨 것은 관념적인 시조시인들이 절개를 강조하기 위하여 곧게 뻗은 대나무와 인간들의 변절행위를 대비시키는 관습적인 수법과 그리 멀지 않다. 대상을 해방된 상상력으로 자유롭게 투시하지 않고 계산된 의도 혹은 인위적 논리를 가지고 바라다보았을 때 그 대상은 시인의 의도와 논리에 구속되고 마는 것이다.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걸었던 기대 내지는 호기심이 항상 백 퍼센트 만족스럽게 충족되는 경우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기대하 호기심이 어느 정도나마 충족되었을 때, 더욱이나 그들에게서 발전의 빛이 확실하게 비추어 올 것을 조금이나마 확신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상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애정이 담긴 채찍의 언어를 조심스럽게 전달할 뿐이다.  (현실시각2 /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