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論

최영철 2017. 9. 15. 11:42

인공의 세계와 맞서 싸우는 야성의 상상력


                                               오홍진

  

1.

최영철은 인공과 자연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를 쓰고 있다. 그에게 인공의 세계는 도시 문명에서 비롯된 소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칸칸칸에서 시인은 칸막이가 쳐진 1인용 사회의 비극을 노래한다. “아무하고도 몸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저마다 1인용 노래방에서 우울한 저 핏빛 조명과 블루스를 추고 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노래 부르고 혼자서 춤을 춘다. 1인용 노래방에서는 언제나 반짝이며 도착한 낯선 환호와 브라보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그것이 떼를 지어 몰려온 공허를 막을 수는 없다. 1인용 노래방은 자본이 만든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1인용 향유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칸칸칸으로 나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본이 무한대로 공급하는 향유를 만끽(?)하며 칸막이로 상징되는 1인용 사회와 기꺼이 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인전철이나 무인모텔등에 나타나듯, 시인은 1인용 사회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표현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하여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간접화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산업시대보다 더한 인간소외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공지능의 현장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사라진다. 인공지능이 문을 열면 전철을 타야 하고, 문을 닫으면 전철에서 내리지 말아야 한다. 옆방에 누가 있는지 관심이 없는 무인 호텔의 상황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네 삶과 정확히 닮아 있다. 윗방과 아랫방,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 방음만 잘 되어 있다면, 그리하여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1인용 사회에드리워진 이기적 삶의 극치를 우니는 무인無人이라는 말이 붙은 숱한 인공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이런 인공물의 맞은편에 자연을 내세우고 있다. 햇살의 내력에 드러나는 대로, 자연은 햇살이 내 온몸을 간질이고 있다라는 감각으로 인간과 인연을 맺는다. 인공물과 인간은 직접적인 감각으로 시인을 자극한다. “천부적 바람둥이의 무한대 농담으로 비유되는 햇살의 내력은 인공의 시대에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새삼 강조하고 있다. 햇살의 감각은 햇살 한 줌 시키신 분에도 나타나는 바, “아하, 모두 나눠주고도 여전히 쨍쨍한 대지의 젖꼭지로 대변되는 햇살의 생명성을 통해 시인은 인공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시적 힘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순한 것들은 돌돌 말려 죽어간다

죽을 때가 가까우면 순하게 돌돌 말린다

고개 숙이는 것 조아리는 것 무릎 꿇는 것

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렸다

저 건너 건너 밭고랑

호미를 놓친 노인 돌돌 말렸다

오래전부터 돌돌 말려가고 있었다

돌돌 말린 등으로

수레가 구르듯 세 고랑을 맸다

날 때부터 구부러져 있었던 호미를 들고

호미처럼 구부러지며

고랑 끝까지 왔다

고랑에 돌돌 말려

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

돌돌 저 먼데서부터 몸을 말며

여기까지 왔다

--돌돌전문

  

돌돌 말린 것들에서 시인은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연 속 생명들의 몸은 돌돌 말린다. 몸에서 물이 빠지는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시인은 돌돌 말려 죽어가는 존재들의 삶에서 역설적으로 변함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발견한다. 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리는 것은 새로운 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돌돌 말린 잎은 썩어 나무의 거름이 될 테니, 자연에서는 죽음이 곧 삶이 되는 역설이 일상처럼 벌어진다고 볼 수 있다. 돌돌 말린 등으로 밭고랑을 매는 노인 또한 이러한 자연의 순환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해서 자연과 무어 그리 다를 게 있겠는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삶=죽음의 역설적 언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시인은 고랑에 돌돌 말려/ 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라고 쓰고 있다. 노인이 몸을 돌돌 말고 일하는 사이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노인 곁으로 모여드는 상황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연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건 자연의 흐름을 따른다는 말가 같다. 자연의 흐름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계가 시간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면, 자연 속 인간의 모습은 정확히 시간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몸을 돌돌 말아가며 밭고랑을 매는 노인의 모습은 이렇게 보면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달빛의 이력에서 이러한 오래된 미래의 시학은 사력을 다해 제 생명을 지키는 태풍에 쓰러진 개잎갈나무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개잎갈나무는 한 달째 시름시름 앓고 있다. 시인은 힘들어 하는 나무의 눈이라도 감겨주려고 나무에게 다가갔다가 뜻밖에 끊어진 뿌리에서 잔뿌리들이 돋아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상부의 몸통이 모든 책임을/ 뿌리에 떠넘겼다라고 시인은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나무가 여전히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허공에 내몰린 잔뿌리들이 허우적대며 흙을 부른다. “마 나, 막혀,”라는 시구에 표현된 대로 잔뿌리들은 필사적으로 제 생을 버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힘겹게 제 생을 견디는 나무 주둥이 몇/ 흙 품을 파고들며 씹다 만 달 한쪽 게워내는 장면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달이 무럭무럭 자라 보름달이 되자 개잎갈나무는 그제야 눈을 감는다. 시인은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한 저 나무의 생명력으로부터 저토록 환한 달빛의 이미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셈이다.

달빛은 나무를 비추고 나무는 죽어 달이 되는 순환의 세계는 나무들의 단식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집주인이 나무들이 빽빽한 마당이 있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다녀간 그날부터 밤낮없이 나무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니 아예 침묵을 고수한다. 웃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고 건들건들 흔들리지도 않고 시들기만 한다. 이상한 건 말라비틀어져 몸을 꼬면서도 잎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나무가 이렇게 안간힘으로 제 집을 지키고 있으니 사람이라고 별 도리가 있겠는가.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다. 나무는 단식으로, 침묵으로 제 집을 지킨 것이다.

시인은 봄 복수라는 시에서 단식을 끝낸 나무들이 벌이는 복수의 화신化身 화신花信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공의 세계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나무들의 복수는 다만 이렇게 따스한 꽃바람으로 갚는 것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1인용 칸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본다면, 나무가 행하는 복수는 말 그대로 신나는 일이다. 복수의 화신들이 이 세상에 꽃들을 터뜨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복수인가. 최영철 시인은 이렇게 인간 세상에 복수하는나무의 마음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자연의 반대편에 인공을 세운 인간에 비한다면, 나무와 꽃은 여전히 저토록 환한 달빛을 양분 삼아 온갖 복수의 화신들을 뱉어내고 있다. 풀수염이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자연의 그런 복수는 지금 시인의 코 밑 턱수염에서도 풀이 되어 쑥쑥 자라는 상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게 풀인지 어느 게 수염인지 모를 정글이 되어간다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자연의 복수는 우리 몸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시와사상, 2017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