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論

최영철 2019. 2. 10. 15:59

자연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공존의 장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최영철 시인은 최근 열두 번째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를 펴낸 바 있다. 1986년 등단 이후 쉬지 않고, 성실하게 만들어낸 문학적 좌표가 이번 시집 속에 촘촘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많은 시집을 상재했으니 시인의 시세계 또한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 시집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전과 달리 매우 다변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회를 향한 비판적 혹은 계몽적 발언이 있는가 하면, 죽음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 역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실존적 고민 또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담론의 확산은 시의 경계가 넓어지는 일이니 환영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고, 시인의 시력(詩歷)이 그만큼 깊어진 것이니 당연한 순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음역이 점점 확산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뀌지 않는, 이 시인만이 포지하는 득의의 영역은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경계라든가 장벽에 대한 철저한 거부감 의식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일찍이 경계를 넘어 간극을 좁히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을 경험한 바 있긴 하지만, 이 시인이 추가하는 장벽이란 그런 역사철학적인 담론의 세계와는 무관한 경우이다.

최근 발표한 시집이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제목이야말로 이 시인이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담론의 세계를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 특정 존재는 ‘말라가서’ 소멸되어야 하고, 또 고정된 자리를 벗어나 ‘날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고정점이 아니라 또 다른 정립을 위한 ‘흩어짐’ 또한 새로운 탄생을 위해선 필요한 절차이다.

이렇듯 새로운 지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경계가 굳건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니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거쳐 새로운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변모를 위해서는 ‘말라가야’ 하고, ‘날아가야’ 하며, 결국에는 ‘흩어져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새로운 질서란 이런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까닭이다.

이번에 발표된 최영철의 신작시들은 시인이 기왕에 추구한 시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과 인간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생의 리듬을 통해서 자연의 섭리라는 사유를 매우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면들에 착목하게 되면, 이번에 발표된 시들은 다시 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 과거로의 회귀라든가 퇴행과 같은 부정적 담론으로 그의 시들을 묶어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그만큼 시인이 기왕에 추구해왔던 주제가 가치 있었던 것이고, 아직 그것이 달성되지 않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 한다.

최영철은 자연이라는 질서, 그리고 그것을 받드는 생리적 리듬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한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시각적, 물리적 현실에 그치지 않고, 내성의 문제에까지 확대시킨다. 다음의 시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몇 줄 적어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내 주위로 파리들이 몰려든다 금방 시작한 문장 주위에 둘러 앉아 너나없이 여기저기 짚고 뒤엎으며 훈수가 이어진다 이따위 걸 왜 쓰느냐고 버럭 호통을 치다가 이래도 모르겠냐고 귀 가까이 와서 일장 훈계다 여기저기 걷어차보다가 왜앵왜앵 행간에 달라붙어 잔소리 늘어놓다가 이래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야단이다 참견은 자유지만 제대로 된 소리 하나 만들지 못하고 훈수나 두는 놈들, 제 풀에 지쳐 또 다른 참견을 찾아 맹렬하게 오가다 금방 꼬꾸라질 목숨들, 너의 전생은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훈수로 날품 팔다가 그 죄로 오늘 여기 나의 빈곤을 만방에 알려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 더 이상 파리할 수 없는 경지까지 나를 몰아붙이고야 말, 저리 쉴 새 없이 외고 다녀도 수수만년 안에 끝나지 않을 너와 나의 부끄러운 고행

「파리들」 전문

 

이 작품은 시쓰기와 관련시키면 시론시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되고, 내성과 결부시키면 자아의 훈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시인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매우 일상화된 일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파리들」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시인의 세계관 혹은 문학관을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상의 현실에서 이타적 대상을 통해 자의식을 읽어내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이 작품 또한 이 범주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라든가 윤리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자의식이 이 시인이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연의 질서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파리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생물에 불과하지만 인간과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쫓아 무작정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인간의 체취에 이끌려 육박해 들어온다. 아니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인간과 파리의 해묵은, 그렇지만 귀찮은 피드백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파리의 그러한 기계적 행동을 통해서 경구를 이해하고 이끌어내며, 또한 이를 내성화한다. 물론 이 피드백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자명하다. 결론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종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가깝다고 하겠다. “수수만년 안에 끝나지 않을 너와 나의 부끄러운 고행”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에게 글쓰기는 결론 없는 과정이다. 그 무한한 도정이 있기에 시인은 지금도 글쓰기의 주제에 대해 사유하고, 또 그 고민의 결과를 어떻게 담론화할 것인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실상 이러한 과정은, 의도적 장치에 의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무언가 끊임없이 추동하는 힘이 있기에 이 사색의 과정은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 그 힘이란 역동적이어야 하고 항구적이면 더욱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시인이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자연의 생리적 리듬도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엊그제 몇 녀석

빠꼼 문 열고 쫑알대더니

어젯밤 찬비가 두드려 깨운

남창 틈새

우르르 삐죽삐죽

얼굴 내밀었네

그 뒤 저만치

달려 나올 용기 없어

날름 혀 내밀어보다

바람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새싹 몇 하늘하늘

「봄봄」 전문

 

최영철 시의 핵심은 자연의 섭리와 분리하기 어렵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주제는 시인들이 즐겨 사용할 만큼 지극히 일상화된 것들이다. 인간의 삶이 미정형의 상태에 놓이다 보니 자연의 규칙적인 질서야말로 현재의 불확실성을 벌충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인의 경우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삶이나 혹은 세속의 그것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다. 자연의 섭리를 노래한 시인의 작품들에서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용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봄의 질서, 이른바 항구성의 감각이다. 만물이 약동하는 것이 봄의 생동감이기에 이 계절은 매우 요란스럽게 다가온다. 어떤 시인은 그러한 봄의 물리적인 모습을 전쟁이나 시끄러운 아우성으로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최영철이 응시한 봄은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차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요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야단스럽게 온다고 해서 이를 전쟁터로만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봄의 생리적 국면을 고려해보면, 시인이 묘사한 봄의 고요한 모습이 피상적인 단면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자연은 고요하고 정밀한데,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연의 생동감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묘사하는 자연의 내포에서 인간적 요소들은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런 국면들이 어쩌면 이 시인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영역일 것인데, 한국 근대 시사에서 자연이 어떻게 인유되어 왔는가를 이해한다면, 이것이 결코 성급한 진단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적 국면이 보다 인간적이게끔 인유되고 상징화되었던 것이 근대시의 자연관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가령, 자연과 인간의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노래한 소월의 자연은 철저하게 인간적 관점에서 구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현대적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정지용의 경우도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분열된 인식을 완결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 정지용의 자연 세계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적 질서의 아름다운 구현을 위해 자연의 이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에 나타난 자연은 인간의 체취가 배제된 곳에서 만들어진다. 가령, 「봄봄」의 주체는 이름 모를 잡초이거나 꽃이다. 생명의 전령인 봄의 기운을 받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풀의 자립성을 담아내고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연의 섭리가 자연의 내부에서 약동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체취가 거세된 채 오직 자연 그 자체의 생리를 통해서 이법이라는 형이상학적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땅의 위급함을 알고 웅성웅성 하늘 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구름들이 한꺼번에 돌격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제 큰 몸으로 아래 것들을 다치게 할까봐 흐린 장막을 펼쳐놓고 사흘 낮밤 제 몸을 잘게 나누고 부순 뒤 그것도 모자라 또 사흘 낮밤 가장 물렁한 물이 되기를 기다려 지금 저렇게 앞 다투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타닥타닥 하늘과 땅이 이마를 부딪치며

자꾸만 얼싸안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비 비 비」 전문

 

인용시는 「봄봄」의 경우보다 자연의 생리적 리듬이 한층 구체화된 작품이다. 이를 배가시켜주는 시적 장치가 이른바 음성 상징들이다. 가령 “웅성웅성”이나 “타닥타닥” 등이 그러한데, 이를 통해서 인용시는 자연이 갖고 있는 리듬 의식을 더욱 배가시킨다. 그것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심포니가 “얼싸안는 소리”이다.

시인이 자연을 포회하는 방식은 세밀하고 치열하다. 그러한 열정 속에서 서정의 밀도는 더욱 섬세하고 강하게 독자의 정서에 각인된다. 자연의 조화라든가 이치에 대해 누구나 말해왔고, 또 현재도 말하고 있지만, 이 시인만큼 그러한 리듬이 독자의 정서에 깊이 각인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정서의 진폭을 울려주는 장치가 음성상징이었거니와 이를 한층 승화시켜주는 것이 하늘과 땅의 조화 감각이다. 물론 자연의 리듬이 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이법이나 질서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긴 하지만, 시인이 응시하는 눈은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산된다. 그것이 곧 하늘과 지상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조화 감각의 발견이다. 그의 시에서 땅과 하늘은 지상의 갈증을 해소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매개들이고, 또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자연의 순환성이다. 그런데 시인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지상의 그것만으로 혹은 천상의 그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거대한 두 공간이 마주쳐야만 비로소 하나의 질서, 새로운 조화관계를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그 어떤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인유화한 시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 가운데 하나인 협소한 시세계를 이 시인은 훌쩍 뛰어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시의 소재들은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있으며, 그가 응시하는 시선 또한 광대무변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시들은 시공을 넘나드는 넓은 시야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의 음역들은 대단히 깊고 장대하다.

 

여긴 천지사방 곳곳에서 모여든

햇살 두령들의 총회장이다

동에서도 오고 남에서도 오고

체력단련 끝내고 모여든 반짝 고수들

우렁우렁 뙤약볕 안면이 훤하다

구름 꼬임에 넘어가 일사천리 달아났던 놈들

해를 등지고 어둠을 틈타

응달에 숨어 허튼 짓 게으름 피우다

북으로 서로 유배 갔던 놈들

일광 바다가 쫒아가 데리고 왔다

해 볼 낯 없다며 수그린 저 빈 수평선

日光이 종종걸음 달려나가 반기고 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이 따스한 햇살이 모두 용서했다며

움츠린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일광」 전문

 

자연을 포회하는 시인의 넓은 시야는 인용시에도 동일하게 묘사된다. 이 시의 중심 소재는 ‘햇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늘에서 투사되는 단순한 빛이라는 물리적 국면을 뛰어넘는다. 인용시의 표현대로 햇살은 동에서도 오고 남에서도 온다. 뿐만 아니라 체력단련의 과정을 거쳐서도 오고 구름을 뚫고 내려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동서남북의 모든 방위를 뚫고 현현하기도 하고 하늘에서도 발사되는 등 입체적인 것으로 구현된다.

사물에 대한 시선의 확장은 공간의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시의 의미 역시 넓혀준다. 최영철의 시편들이 자연을 노래하되 협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에서 발견되는 시의 한계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자연의 생리적 리듬이 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최영철의 시이기에 그의 작품 속에서 도덕이나 윤리, 혹은 계몽과 같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굳이 그에 대한 이해를 얻고자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시도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그의 시들은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와 그 지극한 공존의 세계만을 집요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틀 속에 그의 시세계를 가두는 것은 어딘지 허전한 일이고, 또 이 시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맥락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이라는 거대 주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인간의 질서를 함의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시의 독법일까.

최영철의 시들은 시의 영역이 협소하지 않다고 했다.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좁은 공간이 아니라 넓은 시공간이었는데, 이는 단지 소재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인은 자연을 이야기하되 그러한 생리나 리듬이 세속으로 쉽게 침투해 들어오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시들은 어떤 교훈이나 계몽 혹은 윤리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특징들이야말로 이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의 시들은 자연이라는 감옥 속에 마냥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작품 「일광」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런 혐의는 더욱 굳어지게 되는데, 이를 표명하는 대표적인 담론이 ‘움츠린 등’이 아닐까 한다. 이 담론은 자연의 물리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음역을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좀 더 넓히게 되면, 계몽적 관념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를 이렇게 확산시키면 최영철의 시들은 분명 사회적 영역으로 편입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어떻든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운 생리적 리듬을 통해서 그것이 주는 교훈을 은근히 이야기할 뿐, 의도적으로 이를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은자처럼 뒤에서 이를 조용히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의 시들이 조용하고 편안하고 정밀한 것은 이런 고요의 미덕이 그 배음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와정신 2018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