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최영철 2020. 5. 19. 22:21


【道斷時論】-


인생은 마라톤이라 했다.
다른 생각은 접고 결승점을 향해 힘껏 달리기만 하면 되는 단거리가 아니라 긴 과정을 완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도 있고 예기지 않은 상황이나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추어 그때그때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경쟁자들을 의식하며 목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리기만 하면 되는 단거리 경주와는 달리 마라톤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과의 싸움이다. 수시로 자기 내부를 엄습할 여러 유혹들과도 싸워야 한다. 스스스로를 격려하며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경제 부흥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 성장한 우리 세대는 주로 단거리 체질이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설정해둔 목표치는 언제나 높았고 성실하고 뛰어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에 못 미치거나 그로부터 도태되었다.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도 열등인간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느린 천성에다 십대 중반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쳐 매사에 굼떴다. 걸음이 빠른 친구들은 저만큼 먼저 가버려 나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목표치는 항상 높았고 거기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혼자 걷기를 즐긴다.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언제 어디까지 갔다 올 것인지 정할 필요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어 좋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을 혼자 대면할 수 있다. 자유롭게 교차하는 생각들을 방해받지 않고 이어갈 수도 있다.
내 경험으로 인생은 다행히 단거리 경주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나는 벌써 도태되거나 기권했을 것이다. 단거리 경주는 순위를 정하기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한 사람의 운명을 부여하고 그가 가진 기량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좋은 방식이 아니다. 일사불란한 진행과 소정의 결과물을 얻는 데는 적절할지 몰라도 모두 같이 바람직한 결과에 가닿기는 힘들다.
달리기는 도달해야 할 한 지점만을 바라보지만 걷기는 전방과 측면과 후방을 두루 살핀다. 달리기는 달려 나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위급할 때 멈추기가 힘들지만 걷기는 언제든 멈출 수 있다. 금방 지나온 길에 미련이 남거나 놓친 것이 있을 때 걸음을 되돌릴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리기로는 곧게 뚫린 길, 확실한 지름길밖에 갈 수 없지만 걷기로는 구부러진 낯선 길목으로도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달리기로는 잘못 접어든 길임을 깨달았다 해도 달려온 관성이 그 길을 한동안 계속 가게 하지만 걸어서 가는 길은 미련 없이 새 길을 찾아가게 한다. 달리기는 혼자 앞서려는 욕망이지만 걷기는 여러 사람과의 교감이며 동행이다. 뒤쳐진 것들을 위해 멈추고 양보하고 기다린다. 시종일관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얼마쯤 왔나 뒤를 돌아보게 한다. 갈 길이 얼마 남았나 앞을 가늠해 보게도 한다. 함께 가는 사람의 보폭에 제 걸음을 맞추기도 한다.
걸어가는 길은 양보와 기다림과 동행의 방식이다. 달리기는 이제 곧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것이지만 걷기는 언제라도 멈추거나 방향을 바꿀 준비를 하는 행동이다. 걷기는 수시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뒤쳐진 것은 없는지 살피는 행동이지만 뛰기는 뒤쫓아 오는 것들을 계속 물리치고 내버리며 가야 하는 길이다.

최영철(시인)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