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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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스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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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더 알기/헤롯 안티파스는 누구?

2009. 8. 23.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스의 결혼

 

헤로디아스. 폴 드랄로세(Paul Delaroche) 작품. 살로메와 함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그릇에 담아 들고 있다.

 

안티파스(헤롯 안티파스)는 첫 번째 부인인 파사엘리스(Phasaelis)와 이혼하고 이복형인 헤롯(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느가 낳은 아들)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스와 결혼하였다. (마리암느의 아들 헤롯을 안티파스의 이복형이라고 했지만 나이가 안티파스보다 많은지 적은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헤로디아스를 동생의 부인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니 유념하시기 바란다.) 안티파스의 부인인 파사엘리스는 사해 동쪽 지역인 나바테아(Nabatea)를 다스리는 아레타스(Aretas)왕의 딸이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스의 결혼을 강력히 비난하자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체포하여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라는 곳의 감옥에 가두었고 나중에는 목을 베는 처형을 하였다. 그로부터 3년후, 예수 그리스도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 총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의 앞에 섰을 때 빌라도는 예수의 죄가 없음을 알고 예수를 안티파스에게 보냈다. 그러자 안티파스는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어 판결을 받도록 했다.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중요한 정치범은 총독이 재판을 맡아야 마땅하다는 제스추어였다. 물론 빌라도는 아무래도 께름직하여 손을 씻고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노라'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장본인으로 낙인이 찍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크리스챤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반면, 안티파스는 약게 처신하여 비난의 대상에서 교묘히 빠져나갔다. 안티파스는 평소에도 약아빠졌기 때문에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부르며 비난한바 있다. 참고로 누가복음 14: 31-33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31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라고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쫒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살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여우는 바로 헤롯 안티파스인 것이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헤롯 안티파스에 의한 고난이었다.

                     

안티파스는 가만히 있는 부인 파사엘리스와 이혼하고 남들이 보기에도 민망스럽게 이복형의 부인과 결혼함으로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그보다도 헤로디아스와의 결혼으로 인하여 파사엘리스의 친정인 나바테아와 전쟁을 치루지 않을수 없게 되어 더욱 곤란을 겪었다. 나바테아의 전투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안티파스는 친분이 있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시리아 총독인 비텔리우스에게 안티파스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비텔리우스는 '무슨 남의 집안 일에 까지 로마군이 나서서 안티파스를 도와주어야 하는가?'라면서 께름직해 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이므로 어쩔수 없이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다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비텔리우스는 잘 되었다 싶어서 지원군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안티파스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주후 39년 안티파스는 조카 아그리파(Agrippa)로부터 새로운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Caligula)에게 반역을 꾸몄다는 모함을 받아 현재의 프랑스 리옹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후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른다. 이처럼 안티파스는 비참한 운명을 겪었다.

 

세례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들고 있는 세기의 요부 살로메. 루카스 크라나하(Lucas Cranach)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