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음악의 도시 비엔나와 오페라 이야기

유대땅의 3분의 1을 상속 받은 안티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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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더 알기/헤롯 안티파스는 누구?

2009. 8. 23.

헤롯대왕의 상속

 

안티파스는 가만히 있는 부인 파사엘리스와 이혼하고 남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게 이복 형의 부인과 결혼함으로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그보다도 헤로디아스와의 결혼으로 인하여 파사엘리스의 친정인 나바테아와 전쟁을 치루지 않을수 없게 되어 더욱 곤란을 겪었다. 나바테아의 전투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안티파스는 친분이 있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시리아 총독인 비텔리우스에게 안티파스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비텔리우스는 지원군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안티파스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주후 39년 안티파스는 조카 아그리파(Agrippa)로부터 새로운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Caligula)에게 반역을 꾸몄다는 모함을 받아 현재의 프랑스 리옹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후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른다. 이제 안티파스의 일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헤롯대왕의 모습. 티소트 작품

 

헤롯대왕은 나이 들어 쇠약해지자 후계자를 선정하게 되었다. 안티파스는 처음부터 후계자의 대상에 들지 못했다. 헤롯대왕은 두 번째 부인 마리암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암느는 하스모네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딸이었다. 헤롯대왕에게는 첫 번째 부인인 도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티파터(Antipater)도 있었다. 그러나 안티파터는 헤롯대왕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일찍이 처형을 당하였고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 마저도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과 아버지 헤롯대왕에 대한 모반으로 처형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게하여 안티파스는 친형인 아켈라우스와 함께 당당히 헤롯대왕의 후계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주후 4년에 헤롯대왕은 중병을 앓았다. 병석에서 겨우 일어난 헤롯대왕은 후계자 문제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말타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인 아켈라우스에게 사해 서부의 유대 땅, 사해 남부의 이두메아(Idumea), 사해 북부의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하고 둘째 아들인 안티파스는 갈릴리 호수 지역의 갈릴리와 페레아(베레아)만을 다스리도록 하며 여기에 추가로 다섯째 부인의 아들인 필립으로 하여금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현재의 골란 고원), 바타나에아(시리아 남부), 트라토니티스(Trachonitis), 아우라니티스(Auranitis)를 다스리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 옥타비아누스 로마 황제

 

이렇듯 헤롯대왕이 다스리던 땅은 결국 3분되었다. 그중에서 안티파스가 상속받은 땅이 가장 작았다. 유대 땅은 로마의 속령이었기 때문에 헤롯대왕의 3등분 계획은 로마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헤롯대왕의 세아들(아켈라우스, 안티파스, 필립)은 로마로 향하였다. 안티파스는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황제의 앞에서 자기가 유대 땅을 모두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두 사람은 아버지 헤롯대왕의 뜻대로 유대 땅을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아구스도 황제는 헤롯대왕의 뜻에 따라 유대 땅을 셋으로 나누어 각각 통치토록 허락하였다. 아버지 헤롯은 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큰아들 아켈라우스는 에스나크(Ethnarch: 지방태수)라는 타이틀에 만족해야 했으며 안티파스와 필립은 테트라크(Tetrach: 작은 지방의 태수)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 땅에 돌아온 안티파스는 분봉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티베리우스 황제                                                  카리굴라 황제

 

2년후인 주후 6년, 아구스도 황제는 아켈라우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제대로 통치를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구스도 황제는 아켈라우스를 작은 지방만을 다스리도록 교체하고 안티파스에게 보다 많은 영토를 허락하였다. 안티파스는 아구스도 황제로부터 갈릴리와 페레아를 42년동안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그렇게 되자 안티파스를 반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티파스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안티파스가 로마로 간 사이에 히스기야(Hezekiah)의 아들 유다가 이끄는 반도들이 갈릴리의 세포리스(Sepphoris: Tzippori 또는 Dioceserea)에 건설된 헤롯궁을 습격하여 재물과 무기를 약탈해 갔다. 반도들은 실상 헤롯 안티파스를 증오하여 소요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소식을 들은 시리아의 로마 총독인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ctilius Varus)는 유태인들이 로마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세포리스를 공격하고 반도들을 거의 모두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세포리스는 폐허가 되었고 세포리스의 시민들은 노예로 잡혀갔다. 안티파스로서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한편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남쪽의 페레아 지방도 편안하지가 못했다. 페레아는 나바테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나바테아에서도 유태인과 로마인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페레아와 나바테아가 겨우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나바테아의 왕의 딸인 파사엘리스가 안티파스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잘 아는 대로 안티파스가 이복 형의 아내인 헤로디아스와 눈이 맞아 결혼하기 위해 나바테아의 공주인 파사엘리스와 강제로 이혼하자 상황은 악화되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세포리스. 갈릴리의 장식품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헤롯 안티파스가 건설했다. 언덕위에 야외극장 등이 보인다.

헤롯 안티파스가 건설한 티베리아스 항구의 현재. 당시 무역의 중심지로서 대단히 번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