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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피난 시기의 애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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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좀 더 알기/성가족의 애굽 피난

2015. 7. 21.

애굽 피난 시기의 애굽

The Flight into Egypt - The Holy Family Flee to Egypt - Fuite en Egypte

 

카이로의 성 세르기우스 교회.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갔을 때 쉬던 곳에 세운 교회라고 한다(마태 2: 1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마리아가 목수 요셉과 정혼을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입장에서 성령으로 잉태한 이야기, 요셉이 호적을 정리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갈때 만삭의 마리아를 그냥 두고 갈수가 없어서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 이야기, 베들레헴에서 묵을 처소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마구간에 묵어야 했던 이야기,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은 이야기, 들에서 한 밤중에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경배하러 온 이야기, 저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유태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이야기, 헤롯이 아기 예수를 두려워해서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은 모두 살해한 이야기, 그리고 헤롯의 칼날을 피해서 천사의 지시대로 요셉이 성모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이집트)으로 피난의 길을 떠난 이야기 등등은 언제 들어도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성가족의 애굽 피난 이야기는 어찌된 셈인지 성경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애굽의 어디에 가서 살았는지, 얼마동안 살았는지, 무얼하고 살았는지, 언제 유대땅으로 돌아왔는지 등등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제 여러 자료들을 조사하여 이에 대한 궁금증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한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그건 그저 신앙적으로 믿고 더 이상 궁금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가족의 애굽 피난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3정부터 18절까지 나오는 것이 그나마 상세하다. 중요한 기록이므로 재음미하는 의미에서 소개코자 한다.

 

13 그들이(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아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은 성가족이 애굽에서 지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온 얘기도 기록하고 있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레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이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우선 주의 사자, 즉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롯이 참으로 악하게 행동하려하니 어서 피하라고 전할 때에 요셉와 성모와 아기 예수는 어디에 있었는지가 분명치 않다. 주의 사자는 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후에 요셉에게 현몽했다고 되어 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했다고 되어 있다. 그때에도 성모와 요셉과 아기 예수가 머물 곳이 없어서 여관집의 마굿간에서 지내고 있었는지 또는 베들레헴의 어느 곳에 살고 있는 요셉의 친척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 아무튼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어서 피난을 가라고 말한 것은 베들레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에 그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 계속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었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한밤 중인 것도 개의치 않고 깨어나서 성모와 아기 예수를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요셉은 마치 애굽의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던듯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요셉은 애굽에 도착해서 과연 어디에 정착을 했을까? 카이로인가? 고센 지방인가? 멤피스인가?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이 조금만 부지런해서 요셉 일행이 어디에 정착했고 그로부터 무슨 일을 하며 생활을 했는지 한마디만 적어 놓았어도 궁금증은 없을터인데 이게 무슨 요령인지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다.

 

요셉을 비롯한 성가족이 애굽에서 얼마 동안 지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없다. 아마 몇 년은 지냈을 것 같다. 그 몇 년 동안 한번도 소식이 없었던 주의 사자가 이번에도 불현듯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롯이 죽었으니 이제는 안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요셉은 꿈에서 깨어나자 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성경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고 기록된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유대땅이면 유대땅이고 팔레스타인이면 팔레스타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으니 그것도 무슨 해명이 필요한 구절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인즉 예수를 죽리려고 했던 헤롯의 아들 아켈레오가 왕이 되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두려워서 자기 않았고 대신 나사렛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그곳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요셉이 가족들을 데리고 굳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5km 떨어진 곳에 있다.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사렛까지 가려면 최소한 4-5일은 걸린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돌아와서 나사렛에 정착하였는가? 베들레헴에 정착하면 안되었는가? 베들레헴은 요셉의 고향이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베들레헴이 고향이다. 그래서 호적도 베들레헴에 가서 했다. 그러면 그냥 베들레헴에 살면 되었지 굳이 예루살렘의 한참 북쪽에 있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으로 가서 정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요셉이 나사렛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없다. 나사렛은 성가족과 어떤 인연이 있는 곳일까?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레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설명할수 있는 부분이므로 크게 궁금하지는 않다. 그보다고 성가족이 왜 하필이면 애굽으로 피난을 갔는지에 대하여는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갔을 당시의 에굽과 유대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성가족은 기원전 5년 또는 4년에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당시에 애굽은 유대의 이웃나라 중에서도 형제처럼 지내는 나라였다. 애굽에는 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기원전 31년 저 유명한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안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맹군을 물리친 이후에 애굽은 로마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애굽을 통치한 그리스 계통의 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고 마크 안토니우스는 그런 클레오파트라의 새로운 애인이었다. 애굽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함락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런데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나서 6개월 쯤 지났을 때 멸망한 유대의 왕자인 이슈마엘(Ishmael)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나부코) 왕이 임명한 유대 총독 게델리아(Gedeliah)를 미즈파(Mizpah)에서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즈파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때 이슈마엘과 함께 선지자 예레미나도 애굽으로 갔다. 이때 이슈마엘을 따라 애굽으로 간 유대인들은 나일 삼각주에 있는 믹돌(Migdol), 타파네스(Tahpanhes), 멤피스(Memphis) 등지에 흩어져 정착했다. 구약성경 예레미아 44장 1절을 보면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Migdol)과 다바네스(타파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아에게 임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그때 이슈마엘과 함께 애굽으로 온 유대인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으며 이들은 애굽의 여러 곳에 흩어져서 살았던 것을 알수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에 애굽을 정복하였다. 그로부터 애굽은 그리스 계통의 톨레미 왕조가 통치하였다. 애굽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강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톨레미 왕조가 애굽을 통치하자 로마제국 때보다도 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애굽의 유대인들은 심지어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여기고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애굽에 살고 있는 유대인 2세들에게는 히브리어가 생소해 지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특히 기원전 2세기 경에 애굽의 유대인들을 위해 70인역(Septuagint)의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이 나온 것은 유대와 그리스와의 유대관계를 말해 주는 사항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기원전 167년에 셀루시드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215BC-164BC)가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셀루시드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그리스 계통이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원래 이름은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Mithridates)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에 '폰토의 왕 미트라다테'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트라다테가 셀루시드 제국의 미트라다테스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그리스 계통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토오쿠스 에피파네스(미트라다테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하자 정복 당한 유대인들은 분노하여서 유명한 마카베우스(마카비) 장군의 주도아래 셀루시드 제국의 군대를 유대 땅에서 몰아낸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See, the conquering hero comes)라는 유명한 합창이 나오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마카베우스'는 이때의 일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셀루시드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는 예루살렘도 점령했지만 그 전에 애굽도 침공하여서 애굽의 상당부분을 점령하였다. 애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셀루시드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그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서 멤피스 부근에 유대성전을 새로 건축했다. 셀루시드가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 사항은 구약성경 다니엘 11: 31에 나온다. 기록하였으되,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이다.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라는 것은 바로 제우스(아폴로) 신상을 말한다. 애굽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버금하는 성전을 멤피스에 지은 것은 이사야 19:19 의 예언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록하였으되, '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이다. 애굽의 유대인들이 세운 멤피스 부근의 성전은 기원후 72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로마제국은 기원후 66-70년의 4년 동안 로마-유대 전쟁을 치루었으며 특히 기원후 73년에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마사다를 완전 함락하였다. 그 후부터 로마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그 어느때보다도 높이졌다. 그래서 애굽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는 애굽의 유대성전을 생각하고 말것도 없이 파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란에서 어찌하여 애굽의 유대성전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는가 하면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왔을 때에 멤피스의 이 성전은 이미 애굽의 유대인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애굽은 원래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다. 이시스 신전이 있고 오시리스 신전이 있다. 그런 애굽인데 비록 피난이지만 예수께서 애굽에 오시니 애굽의 모든 우상들이 파괴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구약성경 이사야 9: 1과 예레미아 43: 13에 이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 9:1의 말씀은 이러하니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이다. 또한 예레미아 43: 13의 기록은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라스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이다. 선지자 예레미아는 노년에 애굽 땅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느브갓네살 대왕에게 항거했던 이슈마엘을 따라 애굽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선지는 애굽의 우상숭배 제사장들에게 '성모와 아기 예수가 오시면 모든 우상이 파괴되리라'고 예언을 했던 것이다. 훗날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와서 살게 되자 일부 우상숭배를 하던 사원의 제사장들은 성모의 예수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성모와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서 사원에 간직했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라도 예레미아의 저주와 같은 예언에서 피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날 톨레미 왕이 사원에 와서 제사장들에게 '젊은 여인과 아기를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자 제사장들은 입을 모아서 예레미아 선지의 예언과 성가족의 애굽 방문에 대한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톨레미 왕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사야 선지와 예레미아 선지의 예언들이 성가족의 애굽 피난과 함께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는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어나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보면 믿어야 할지 믿지 않아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강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결론은 예수께서 비록 아기에 불과하지만 애굽 땅에 오시니 모든 우상과 이방 사원들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가족 일행은 유대 땅을 떠나 애굽의 헤르모폴리스(Hermopolis)에 도착했다고 한다. 헤르모폴리스는 오늘날의 카이로를 말한다. 성가족 일행이 헤르모폴리스의 어떤 우상 사원 앞에 오자 갑가지 모든 우상들이 부서지고 우상 사원이 무너졌다고 한다. 성 팔라디우스(St Palladius)라는 학자는 '조각으로 만든 모든 우상이 구세주가 오시니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되었다'라고 적었다. 또 이런 얘기도 있다. 시린(Sirin)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365개의 우상을 모신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때에도 1년이 365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성가족이 아기 예수와 함께 그 사원에 들어서자 모든 우상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애굽에 있는 모든 우상 사원들의 우상들도 마찬가지로 부서졌다는 것이다.

 

유대 땅을 떠난 성가족이 어떤 루트를 통해서 애굽에 도착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길인 '바다의 길'(Way of the Sea)을 통해서 가지는 않았고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슈르 사막의 길을 통해서 가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다. '바다의 길' 즉, '해안길'은 유대에서 애굽으로 가는 직선 코스로서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짐작컨데 1주일 정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해안길은 도처에 로마군의 초소가 있어서 검문을 받아야 하므로 잘못되었다가는 곤경을 겪을수 있다. 또 하나의 길은 슈르(Shur) 사막을 통하는 길이다. 힘들고 고단한 길이다. 하지만 검문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다닐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요셉은 성가족을 데리고 비록 힘들고 시간이 더 걸리지만 '슈르의 길'을 거쳐서 가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갈때에 어떤 루트를 통해서 갔느냐는 것은 성경에 기록이 없다. 하지만 애굽의 기독교인들(콥틱 크리스챤)은 성가족이 애굽으로 오면서 쉬었던 곳을 25곳이나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마치 가톨릭에서 말하는 14처와 같은 개념이다. 오늘날 그곳들은 콥틱 기독교인들의 성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순례한다.  나일 삼각주를 건너면 나오는 파르마(Farma)교회의 유적지와 와디 나트룬(Wadi Natrun)에 있었다는 네곳의 수도원 유적지는 성가족이 애굽으로 피난 오면서 쉬었던 장소들 중의 일부라고 한다.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나일 삼각주 근처의 니트리아사막(Wadi El Natrun)에 있는 콥틱 정교회 소속의 데이르 알 수리아니(Deir al-Suriani: 시리아 수도원)에는 6세기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프레스코가 있는데 성모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그림이다. 시리아 수도원이 있는 곳도 콥틱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25 처소의 하나일 것이다.

 

이집트의 '시리아 수도원'

 

카이로 구시가지에는 5세기경에 세원진 콥틱정교회의 성세르기우스(St Sergius)와 성바커스(St Bacchus)교회가 있다. 이 교회의 지하 납골당에도 성가족이 애굽 피난 중에 쉬어 갔었다는 장소가 표시되어 있다. 카이로 교외인 마디(Maadi)에는 돔 모양의 알 아다웨야(Al Adaweya)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나룻배가 건넌 교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 교회가 있는 장소도 성가족이 애굽에 피난 왔을 때 나일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felucca)를 탔던 장소였다는 얘기다. 고도 아슈트(Assyut)에서 나일 강을 따라 8km 정도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두룬카 산(Mt Durunkah)이 나온다. 이곳에 커다란 동굴이 하나 아직도 있는데 이 동굴은 성가족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일을 건너는 보트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곳이라고 한다. 두룬카 산에는 데이르 알 아드라(Deir al-Adrah 또는 Dayr Durunka)라고 하는 수녀원이 있다. '성모 수녀원'이다. 아직도 해마다 8월이면 이곳에서 성모축제가 열리며 그때에는 수많은 콥틱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축제에 참여한다. 8월 15일은 성모승천 축일이다. 두룬카 산의 성모 수녀원과 교회에는 간혹 성모의 모습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같은 기적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힘든 여정이지만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수녀원 부근에는 가톨릭 성모교회가 있어서 역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성가족이 애굽 피난의 마지막 여정으로 헤르모폴리스(카이로)에 왔을 때 성가족은 성문 앞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성가족은 너무나 고단하여서 이 나무의 그늘에 앉아 잠시 쉬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와서보니 나무는 매우 높게 자랐지만 마땅한 그늘이 없었다. 애굽 사람들은 이 나무를 페르세아(Persea)라고 부르며 마치 신처럼 숭배하였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이 나무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 나무에는 악령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성가족이 이 나무 가까이 오자 악령이 깃들어 있는 나무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했다. 아기 예수와 성모의 오심을 두려워해서였다. 나무는 큰 키를 굽혀서 성가족에게 엎드려 경배했다고 한다. 나무가 키를 굽히자 훌륭한 그늘이 생겼고 성가족은 그 그늘에서 잠시 쉬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나무의 그늘에서 기도를 하면 고치기 힘들었던 병도 깨끗이 나아짐을 받았다고 한다.

 

헤르모폴리스의 성문 앞 나무 그늘에서 피곤한 몸을 쉬었던 성가족은 이어 마타리아(Matarea: Matariya: Heliopolis) 마을로 들어갔다. 성가족은 마을 근처에서 무화과 나무 하나를 보았다. 요셉은 사정을 알아보려고 먼저 마을로 들어가고 성모와 아기 예수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오! 놀랍게도 무화과 나무가 허리를 굽혀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깊은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화과 나무 바로 옆에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셉은 무화과 나무(일설에는 단풍나무) 근처에 오두막집을 하나 마련해서 그곳에 성가족이 정착할수 있도록 했다. 기적의 샘물도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이 샘물은 온 애굽에서 유일하게 땅 속에서 솟아나온 살아 있는 샘물이라고 한다. 다른 샘물들은 모두 나일강에서부터 올라오는 물이라고 한다. 아무튼 살아 있는 샘물이 솟아나왔다는 것은 영생의 물을 비유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들이다. 이 샘물은 지금도 마리아샘물이라고 부른다.

 

성가족과 마타리아의 무화과 나무와 한쪽에 있는 샘물(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