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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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조사 과연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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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좀 더 알기/성가족의 애굽 피난

2015. 7. 23.

호적조사 과연 있었나?

로마제국의 유대 호적조사는 예수 탄생 12년 후에 시행

 

누가복음 2장 1-4절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베들레헴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록하였으되, [1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가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이다. 우선 가이사 아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수리아 총독이라는 구레뇨는 또 누구인가? 그리고 어째서 수리아 총독이 유대의 호적까지 관리한단 말인가? 그리고 과연 예수께서 태어나실 즈음에 전국에 호적을 하라는 일이 있었는가? 등등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하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케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제국의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황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가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지역에 명령을 내려서 호적을 하라고 하여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이 약혼자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누구인가? 로마 황제 케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27BC-14AD)를 말한다. 이것을 무슨 생각을 했던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적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였다.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줄리우스 케사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로마제국을 창설한 사람이며 초대 황제였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줄리어스 시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외삼촌이었다. 그런 줄리어스 시저가 정적들에 의해서 기원전 44년에 암살 당하였다. 어찌하여 죽을 4자 두개가 겹치는 44년에 죽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줄리어스 시저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조카인 옥타비우스를 자기의 양자 겸 후계자로 삼았다. 그로부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이름은 로마의 관례에 따라 가이우스 줄리어스 케사를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가 되었다. 나중에 학자들은 그런 긴 이름 대신에 간단히 옥타비아누스 또는 옥타비안이라고 불렀다.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 된 이후의 이런 저런 복잡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략하고 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옥타비안은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크 안토니)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동맹군을 물리쳤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여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수여하였다. 아우구스투스라는 단어는 현명한 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단 옥타비아누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받은 경우가 있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간단히 케사르 아우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태평성대를 누리기 시작했다. 케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애굽, 달마티아, 파노니아, 노리쿰, 라에티아 등을 속령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아프리카에서의 영토를 확대하였고 게르마니아 지역도 확대하였으며 히스파니아를 정복하였다. 또한 로마제국을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완충지대를 설치하였다. 이를 Client States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제국을 위한 완충지대이다. 그 완충지대의 하나가 유대였다. 케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완충지대를 여러개 만들어서 각 지역에 분봉왕을 임명하였다. 헤롯이 유대의 분봉왕이 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치적 중의 하나는 세제를 개혁한 것이다. 제국에 속하여 있는 모든 나라의 장정들은 호적을 하여 세금을 내도록 했고 아울러 병역을 담당토록 했다. 케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후 14년에 75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위였다가 양자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가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누가복음 3장 1절을 보면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의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디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의 디베료는 바로 티베리우스를 말한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디베료.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게사르 아우구스투스이다.

기원후 14년부터 37년까지 23년을 황제로 있었다. 가이사 아구스도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아니다. 아구스도의 사위였다가 양자가 되었고 황제가 되었다.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두살 아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인 헤롯 대왕(또는 헤롯 1세)이란 사람이 어느덧 4BC에 죽자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인 헤롯 아켈라우스(Herod Archelaus: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아켈라오: 23BC-18AD)가 로마제국이 임명하는 유대의 분봉왕이 되었다. 헤롯 아켈라우스는 첫번째 부인인 마리암네와 이혼하였는데 이는 세상 떠난 동생 알렉산더의 부인이었던 글라피라(Glaphyra)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글라피라는 남편 알렉산더가 죽자 이어서 마우레타니아의 왕인 주바와 재혼하였다. 아켈라우스는 동생의 부인이었던 글라피라가 재혼하여 남편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자기의 조강지처와는 이혼하고 글라피라와 재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켈라우스는 아버지 헤롯 대왕과 마찬가지로 잔혹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런 아켈라우스가 유대의 왕이 되는 것을 극력 반대하여서 저 멀리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아켈라우스는 위기감을 느껴서 즉시 로마로 가서 백성들이 자기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변명하고 황제의 호감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래서 분봉왕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결국은 얼마 못가서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켈라우스는 골(지금의 프랑스) 지방의 비엔느(Vienne: 현재의 리옹 남쪽 도시)로 추방되어 살았다. 그후 로마제국은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통합하여 유대아(Iudaea)라고 불렀다. [해롯 1세 또는 헤롯 대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주전 73/74년에 태어나서 주전 4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4년 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을 만난 일, 베들레헴의 학살 등 해롯과 관련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 또는 성경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남편이 살아 있으면서도 아켈라우스와 재혼한 글라피라에 대하여 별로 다른 할 일도 없으므로 아주 간단하게 조금 더 설명코자 한다. 글라피라는 카파토키아(현재의 터키 영토)에서 태어난 아나톨리아의 공주이다. 글라피라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결혼해서 유대신앙을 받아 들이고 유대인이 되었다. 그런데 헤롯 궁전에 들어와서 살게 된 글라피라는 꼴에 헤롯대왕의 부인들을 촌여인들이라고 하면서 업수이 여기기 시작했다. 자기는 왕족으로서 공주인데 헤롯의 부인이라는 여인들은 평범한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면 기껏해야 제사장의 딸이고 그런가하면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조롱하였던 것이다. 글라피라는 헤롯의 누이인 살로메를 조롱하였고 살로메의 딸인 베레니스를 조롱하였다. 베레니스의 딸이 나중에 헤롯 아켈라우와 재혼한 헤로디아스이다. 조롱을 당한 베레니스는 역시 보통이 아닌지라 글라피라와 시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불륜관계에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 소문을 들은 글라피라의 남편 알렉산더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결국 아버지 헤롯대왕과 철천지 원수처럼 지냈다. 그런 소문이 나돌자 그러지 않아도 글라피라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던 헤롯 궁에 있는 여인들은 글라피라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결국 헤롯 대왕은 아들 알렉산더와 며느리 글라피라가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 제거키로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아들 알렉산더를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처형했으며 며느리 글라피라는 고향인 카파토키아로 쫓아 보냈다. 남편이 없는 글라피라는 마우레타니아의 왕인 주부(Jubu)와 재혼하였다. 마우레타니아는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속한 땅이다.  헤롯이 BC 4년에 여리고(제리코)에서 죽자 글라피라는 유대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타고난 재주를 동원하여서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분봉왕이 된 헤롯 아켈라우스와 재혼하였다.

 

로마는 유대의 왕인 헤롯 아켈라우스를 왕좌에서 물러나게 한 후에 유대를 시리아(수리아)와 합병하였다. 당시에 로마가 임명한 시리아 총독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레뇨였고 구레뇨는 잠시나마 유대를 통치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것이 AD 6년이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퀴리니우스(Quirinius)를 구레뇨라고 번역했으니 아무튼 번역에는 도사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편, 기원후 6년 경에 로마는 유대와 시리아를 통합하였고 시리아의 총독인 구레뇨가 유대까지도 통치하도록 했다. 구레뇨는 로마의 지시에 따라 유대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호적케하여 세금도 새로 내도록 하고 병역도 새로 부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유대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소리가 크게 일어 났다. 당시 시리아는 유태교가 아닌 이방종교를 신봉했는데 어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시리아와 같은 나라에 들어갈수 있으먀 그들의 통치를 받을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함께 하였다. 유대의 반항을 주도한 인물이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la)였다. 가말라는 갈리리를 말한다. 사람들은 그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열심당원(Jewish Zealot)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5: 37에 있으나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기원전 6년 또는 5년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통상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를 기준으로 하여 서기의 기원전과 기원후를 계산하지만 학자들의 주장은 예수께서 서기 0년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원전 6-5년에 태어나셨다는 주장이었다. 시리아 총독 구레뇨가 호적을 시행한 것이 기원후 6년이므로 요셉이 호적을 하러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기록과 실제로 호적조사가 이루어진 것과는 12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로마의 호적조사는 예수께서 태어나신지 12년 정도 후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이를 미루어 보아 누가복음의 호적에 대한 기록은 아무래도 잘못 알고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가족의 애굽 피난. 오사와 태너. 1925년. 가만히 보면 나귀를 탄 마리아의 뒤에 누군가 또 한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