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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 전쟁-보헤미아 전쟁-후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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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후스 전쟁 총점검

2017. 9. 8.

후스 전쟁-보헤미아 전쟁-후스 혁명


유사이래 세계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인류는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전쟁이 있은 후에야 잠시 모습을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도 제목에 전쟁을 먼저 언급하고 그 후에 평화를 말했다. 중세 이후 합스부르크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얼룩진 역정(歷程)을 보여왔다. 합스부르크가 관련된 가장 큰 전쟁은  말할 나위도 없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30년 전쟁, 7년 전쟁 등등 과연 합스부르크는 전쟁을 위해 존재했던 것 같았다. 합스부르크와 관련된 전쟁들을 점검하는 중에 후스 전쟁을 뻬놓을 수는 없다.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이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한 후스파와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후스 전쟁! 과연 무엇인가? 왜 일어났는가?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한다. 사족이지만 후스 전쟁은 영어로 Hussite Wars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후시텐크리게(Die Hussitenkriege)라고 한다. 후스 전쟁은 보헤미아 전쟁(Bohemian Wars) 또는 후스 혁명(Hussite Revolution)이라고도 부른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얀 후스 기념상


후스 전쟁은 후스파 보헤미안들이 신성로마제국의 권위에 반기를 든 전쟁이다. 후스파 보헤미안들은 단순히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지배계급에,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도 반기를 들었다. 합스부르크는 후스 전쟁을 후스파 보헤미안들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비난하지만 후스파 보헤미안들로서는 공의로운 항쟁이었다.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헝가리 왕이며 로마왕(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호칭되기 이전의 호칭)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지기스문트가 1415년에 독일의 콘스탄체(콘스탄스)에서 가톨릭 공의회를 열고 보헤미아의 신학자이며 프라하대학교 총장인 얀 후스(Jan Huss)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무참하게 화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의 지나친 세속성을 반대 했었다. 로마 가톨릭은 부패했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 로마 가톨릭은 그런 얀 후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급기야는 이단으로 몰아서 정죄한 것이다. 얀 후스가 처형된지도 몇 년이 지났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 지지자들은 그 몇년 동안 은인자중하고 숨어서 지내다가 마침내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서 봉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헤미안들은 제국내의 난다하는 나라들로부터 너무나 심한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에 제국에 항거하고 싶어도 병력에 있어서나 재정에 있어서나 열등하기 때문에 그저 참고 지냈었다. 그러나 얀 후스를 처형한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는 참을수가 없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후스파 보헤미안들은 중무장한 마차를 이용하는 새로운 전술로서 제국군들을 패배시켰다. 전투가 시작되면 마차들은 하나의 요새처럼 네모 또는 둥근 진영을 꾸며서 적의 기병대가 도저히 뚫지 못하도록 방어하였고 기병대가 패배하면 마차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나와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한 전략을 봐겐부르크(Wagenburg) 전략이라고 불렀다. 마차 요새라는 뜻이다. 후스파들은 또한 전투에서 칼보다는 소총이나 권총을 사용하였다. 과거의 전통적인 전투와는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수류탄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무려 다섯 차례에 걸친 신성로마제국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다. 전쟁이 결정적으로 후스파에게 유리하게 된 것은 1434년 6월 26일에 리판(Lipan) 전투에서 후스파가 승리를 거둔 뒤였다. 후스파는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지기스문트와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마무리랬다. 그렇게 해서 5년에 걸친 후스 전쟁은 막을 내렸다.


후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얀 후스(1369-1415). 그는 마르틴 루터보다 거의 100년 전에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나저나 보헤미아 사람들은 후스 전쟁 말고도 독일어를 쓰는 독일-오스트리아 사람들과 자주 분쟁을 일으켰던 경력이 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보헤미아 왕국은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의 멤버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주로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산재하여 있던 나라들의 연맹이다. 그러다보니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멤버들과는 달랐다. 인종이 우선 달랐다. 게르만 민족이 아니라 슬라브 민족이 대부분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경우에는 독일인이 아니라 보헤미아인, 즉 체코인이었다. 민족이 다르므로 충돌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합스부르크가 보헤미아 왕국과 자주 분쟁을 일으켰던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보헤미아 왕국을 주도하고 있는 룩셈부르크(Luxembourg) 왕가와의 경쟁도 한 몫을 했다. 이 두 왕가는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바바리아의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가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세력이 큰 집단이었다. 이들 왕가들은 특히 왕위 계승문제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의 왕가들은 분사로, 또는 결혼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만일 어떤 왕가에서 후사가 없어서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를 놓고 고민하다보면 서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연고권을 주장하며 나설수가 있고 그 때문에 종종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자기의 왕가가 여러 나라의 군주를 맡고 있으면 제국내에서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결국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그의 보헤미아가 왕위 계승 문제 및 제국내에서의 위상제고를 두고 다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때에 1415년에 보헤미아의 정신적 지도자인 얀 후스를 로마 가톨릭이 화형에 처하였다. 그런데 그 처형은 실은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지그시문트 헝가리왕이 주도한 것이었다. 분노한 얀 후스의 추종자들은 봉기하였고 후스 전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던 것이며 그것은 국민주의적-종교적 분쟁의 결말이었다. 당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고 있었다. 결국 보헤미아의 왕인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후스파 백성들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후스파 보헤미안들은 독일을 몇 차례에 걸쳐서 패배시켰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과 같이 후스파는 내분으로 인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고 결국 온건 후스파는 강경파 후스파를 물리치고 제국에 우호적으로 복속하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했던 측들도 차츰 복속하게 되었다. 후스 전쟁은 1419년에 불을 지펴져서 1434년에 막을 내렸다.


후스파들이 사용한 도리께와 손대포(핸드 캐논). 못을 박은 듯한 쇠도리깨는 후스파 병사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이른바 국민무기였다. 손대포는 그림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작은 것도 있었다.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후스 전쟁의 오리진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자. 1402년에 사제이며 학자인 얀 후스는 가톨릭 교회와 로마 교황청이 말할수 없이 부패했다고 판단하여 추상과 같은 비난을 하였다. 이어서 그는 영국의 종교개혁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주장했던 종교개혁의 아이디어를 자기도 실천키로 결심했다. 보헤미아의 사람들은 얀 후스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뜨거운 설교였다. 그러나 얀 후스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심기를 건드려서 후스와 그 추종자들을 압박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미 존 위글리프를 이단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존 위클리프와 뜻을 같이 하는 얀 후스를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로마 교회와 뜻이 다른 서방 종파(Western Schism)가 또 다른 교황으로 세운 요한 23세(John XXIII)가 이른바 '십자군'을 구성하고 나폴리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를 징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로마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세운 교황을 '반교황'(Antipope)라고 한다. 라디슬라우스는 요한 23세의 라이발인 로마의 그레고리 12세 교황의 수호자였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느라고 그런지 요한 23세라는 사람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보헤미아에 면죄부(Indulgence) 제도를 도입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돈을 내는만큼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후스는 원래부터 로마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극도로 비난했는데 반교황이라는 사람이 교회를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면죄부를 통해서 돈을 긁어 모으는 행동을 하니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그러자 반교황 측에서도 후스를 곱게 볼리가 없어서 이단으로 몰아 붙일 태세였다. 결국 후스는 로마 교황으로부터도 이단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고 반교황으로부터도 이단으로 낙인 찍힐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백성들은 로마 교황과 반교황을 똑같이 비난하는 후스를 지지하였다. 로마교황이던지 반교황이던지 그자가 그자라는 생각에서였다.


존 위클리프(1330-1384)


여기서 잠시 '반교황'(Antipope: Antipapa)에 대하여 좀 더 설명을 붙이고자 한다. 베드로의 뒤를 이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교황은 바티칸의 로마 가톨릭 교황 한분인데 중세에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두명이 있을 때도 있었고 세명이 있을 때도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로마 교황은 법적으로 정당하게 선출된다. 그런데 법적인 하자를 문제 삼던지 또는 정통성에 이의를 내보여서 자기야말로 정당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3세기 때에 처음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런 혼란스런 경우는 15세기 중엽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주장하고 나선 교황들이 반교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교황을 지지하는 추기경들과 주교들과 군주들이 의외로 많이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반교황들이 가장 빈번했던 시기는 11세기와 12세기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간에 알륵이 있을 때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교황이 필요하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권위가 약세인 것을 틈타서 스스로 별도의 교황을 추천하고 추기경(또는 대주교)들로 하여금 선출하도록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는 별도의 독자적인 영지를 가지고 있는 추기경(또는 대주교)들과 주교들이 있었다. 그런 추기경(또는 대주교)들과 주교들은 형식적이나마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성베드로성당을 중심으로 한 바티칸 시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위원회는 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선제후 카운실이라고 불렀다. 8명은 보헤미아왕(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거리 왕), 라인 팔라틴 백작, 작소니 공작, 브룬스비크-뤼네부르크 공작, 그리고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들이었다. 교회를 대표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요 회의에 참석하는 대주교와 주교들, 종단 대표와 수도원장들은 수십명이었다. 예를 들면 잘츠부르크 대주교, 베장송 대주교, 독일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슈파이어 주교, 콘스탄스 주교, 레겐스부르크 주교 등등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러지 않아도 신앙의 지도자로서 바쁠터인데 교회를 대표하는 대주교와 주교 등등의 임명에 깊이 관여하였다. 로마 교황은 군주의 임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교황은 왕위 계승문제 또는 왕실의 결혼문제까지에도 참견하였다. 그러다보니 주교나 왕 등으로부터 소소한 불만이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주교나 왕들은 기본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휘하에 들어 있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문제로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는 분규와 알륵이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로마 교황도 제국 내에서 왕위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지원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생각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간의 다툼이 본격화 된 것은 1378년이다. 이때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서쪽에 있는 나라들은 로마에 대치하여서 스스로 '서방종단'(Western Schism)이라고 불렀다. 서방종단의 프랑스 추기경(카디날)들은 로마에서 우르반(Urban) 6세를 교황으로 선출한 것은 문제가 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새로운 교황으로서 클레망(Clement) 7세를 선출했다. 반교황이었다. 그후 서방종단의 반교황은 또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클레멘트 7세가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기 때문에 아비뇽 라인이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피사(Pisa) 라인이었다.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별도의 공의회가 모여서 알렉산더(Alexander) 5세를 제3의 교황으로 선출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세월은 흘렀는데 로마는 아무래도 이러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1415년에 독일 남부의 콘스탄체(콘스탄스)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그 때에 피사 라인이 선출한 반교황은 요한 23세였다. 반교황인 요한 23세는 참으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래 이름은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였다. 나폴리 왕국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되어 경력을 쌓았으나 뜻한바 있어서 군인을 그만두고 볼로냐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후 그는 로마 교황 보니파체 9세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392년이었다. 서방종단은 발다사레 코사가 로마 교황에게 봉사하기 전인 1378년에 공공연히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두명의 반교황이 있었다. 아비뇽 라인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지를 받았고 로마 교황은 이탈리아, 독일, 영국의 지지를 받았다.


피사대성당과 사탑


발다사레 코사는 처세에 밝아서 교황청에서 요직을 두루 맡다가 교황청 특사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는모르지만 아무튼 이 발다사레 코사라는 사람은 비록 사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교황청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아주 속물인 것은 물론 욕심이 많고 야망도 많으며 간교하고 도덕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며 파렴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아예 군대밥이나 먹을 것이지 어째서 신성한 교황청까지 들어와서 저 난리인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했다. 그 즈음에 야비한 발다사레 코사는 로마뇨 지방의 강도집단과 연계를 갖고 있었다. 발다사레 코사는 자기의 라이발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강도들을 시켜서 마차를 습격하거나 폭행을 저지르도록 했다. 그런 사실은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사람들은 점점 그를 두려워했고 그는 그럴수록 어깨에 힘을 더주며 돌아다녔다. 얼마후 발다사레 코사는 추기경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1408년에 사건이 생겼다. 추기경 중에서 일곱명이 그레고리 7세 교황이 새로운 추기경을 뽑을 때에 다른 추기경들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했다는 이유에서 교황에 대한 복종을 취소하였다. 이들 일곱명의 추기경들은 이미 아비뇽 라인의 반교황으로 선출괸 베데닉트 8세를 추종하는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발다사레 코사가 피사 공의회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피사 공의회의 목적은 로마 교황에 대치하는 반교황의 역할을 종식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이 주도한 피사 공의회는 현재의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 7세와 아비뇽 라인의 반교황인 그레고리 7세를 폐위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리고는 1409년에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더 5세를 선출했다. 당연히 로마의 그레고리 교황과 아비뇽의 베데닉트 교황은 피사에서의 이러한 결정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는 세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심문받는 얀 후스


그런데 사태가 묘하게 돌아가느라고 피사 공의회가 모처럼 선출한 교황 알렉산더 5세가 교황으로 뽑힌지 1년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는데 앞장 섰던 야심많은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요한 23세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랑스, 영국, 보헤미아,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일부 국가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피렌체, 베니스 등)이 요한 23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인정했다. 반면에 아비뇽의 베네딕트 8세를 교황으로 인정한 국가는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카스티유 왕국, 시실리, 스코틀랜드 등이었다. 또한 로마의 오리지널 교황인 그레고리 7세는 나폴리 왕국, 바바리아, 폴란드, 독일의 일부 국가들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교황 요한 23세를 공공연히 반대하는 사람은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였다. 라디슬라우스는 로마의 그레고리 7세를 보호하는 임무였다. 요한 23세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와 한판 승부를 펼치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에는 요한 23세의 군대가 승리하는 듯 했으나 결국은 라디슬라우스에게 패배하였고 1413년 5월에는 라디슬라우스가 로마까지 점령하였다. 요한 23세는 피렌체로 피난하였다. 요한 23세는 피렌체에서 로마왕이며 헝가리 왕인 지기스문트를 만났다. 지기스문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도 할수 있지만 당시의 관례상 바티칸에 와서 대관식을 갖지 않았으므로 그냥 로마 왕이라고 불렸다. 어쨋든 지기스문트는 '교회가 이게 무슨 꼴이냐. 챙피해서 못 살겠다'라면서 어서 속히 서방종단을 마무리하고 로마 교회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한 23세도 당연한 생각이라면서 찬성했다. 지기스문트는 1413년 10월에 독일의 콘스탄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장소가 이탈리아가 아니라 독일이기 때문에 주저했지만 워낙 지기스문트의 위세가 강해서 순응할수 밖에 없었다. 콘스탄스(콘스탄체)는 보덴호(Bodensee)가 있는 독일 남부의 도시이다. 지기스문트가 공의회를 소집하자 라이발 교황인 그레고리 7세는 공의회가 결정하는 바를 존중하겠다고 나섰다. 공의회는 1415년 5월에 요한 23세를 폐위시켰다. 로마의 그레고리 7세는 두 달 후인 7월에 자진 사퇴하였다. 공의회는 1417년에 아비뇽의 베네딕트 8세도 공식적으로 폐위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으로 마르틴 5세를 선출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런 난리도 아닌 사태로 결국은 16세기에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을 앞당기게 만들었으니 마르틴이란 교황과 마르틴 루터는 어쨋든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오늘날의 콘스탄스. 보덴제를 안고 있는 도시이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반교황에 대한 사태를 정리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보보헤미아의 얀 후스를 처형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를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규정코자했다. 로마 가톨릭의 사제가 이단으로 규정받으면 파문이 되고 또한 사형에 처해질수도 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얀 후스에게 해명할 기회를 줄테니 출석하라고 말했다. 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얀 후스에게 콘스탄스 공의회에 가면 십중팔구는 파면을 당하고 처형을 받을지도 모르니 제발 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얀 후스는 '죄가 있다면 하나님에게 죄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인데 무슨 걱정이냐. 오히려 참석치 않으면 그것도 떳떳치 못한 자세이다'라고 말하고 출석키로 했다. 콘스탄스 공의회를 소집한 지기스문트 헝가리왕 겸 로마왕은 얀 후스의 신변보호를 약속했다. 그러나 콘스탄스 공의회에 출석한 얀 후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형식적인 재판을 받은 후에 1415년 7월 6일에 오호라 통재라 화형에 처해졌다. 얀 후스의 가톨릭교회 개혁 의지에 동조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기사들과 귀족들은 즉시로 회합을 갖고 콘스탄스 공의회에 강력 항의키로 했다. 이들의 항의서한은 1415년 9월 2일에 콘스탄스 공의회에 전달되었다. 서한은 후스의 처형을 주도한 장본인이 지기스문트라고 지적하고 가장 신랄한 언어로 그와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였다. 지기스문트는 당장 노발대발했다. 지기스문트의 동생으로 보헤미아 왕인 벤체슬라우스도 덩달아서 대단히 분노했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기사들과 귀족들 앞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보헤미아에서 위글리프를 추종하는 자들과 후스를 추종하는 자들을 당장 모조리 잡아서 강물에 처넣이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주민들은 그 얘기를 듣고나서 너무나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얀 후스를 화형시키는 장면


보헤미아의 각처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을 교구에서 몰이냈다. 후스파들은 뭉쳐서 봉기하지고 다짐했다. 그런데 후스파들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두 부류로 갈라졌다. 시작은 예배의식의 차이로부터였다. 후스의 제자들은 후스가 콘스탄스 공의회에 출석키 위해 출타했을 때 프라하에서 강론을 하면서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회중은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함께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에서는 사제들만 포도주를 받아 마실수 있었고 일반 회중은 떡만 받아 먹었다. 후스도 그와 같은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 왔었다. 이들을 우트라퀴스트(Utraquist)라고 불렀다. 이는 라틴어에서 '두가지(떡과 포도주) 모두'라는 용어인 sub utraque specie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트라퀴스트는 칼릭스틴(Calistine)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라틴어의 calix 즉 술잔(성배)에서 가져온 말이다. 성만찬에서 누구나 가톨릭 신자이면 떡 뿐만 아니라 성배에 담아 있는 포도주도 받아 마실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말이다. 우트라퀴스트는 후스파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한다.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고 분쟁을 미루는 자세의 사람들이다. 반면에 극단적인 후스파들도 있다. 이들을 타보르파(Taborite)라고 불렀다. 원래 타보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변화산의 이름이다. 갈리리 건너편에 있으며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어 변화하셨기 때문에 변화산이라고 불리는 산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보헤미아에 있는 어느 사간지방에 모여 그곳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그곳을 타보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가 변화한 것처럼 모두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밖에도 오르판(Orphan)이라는 그룹도 있다. 자기들의 지도자인 얀 치츠카(Jan Zizka)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자기들은 이제 고앙화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치츠카 장군이 사제와 함께 프라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보헤미아 왕인 벤체슬라우스는 명색이 보헤미아 왕인데 보헤미아에서 거의 온 동리 사람들이 후스를 지지하고 로마 가톨릭을 반대하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벤체슬라우스의 형으로서 헝가리 왕 겸 로마왕인 지기스문트가 벤체슬라우스를 부추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프라하에 있던 많은 후스파들은 벤체슬라우스가 꼴보기도 싫었고 또한 당장 준비된 것도 없는데 전쟁이 벌어지면 곤란할 것 같아서 프라하를 떠났다. 그러나 그냥 프라하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보헤미아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세규합을 시작했다. 이들은 나중에 타보르 마을이 생기게 되는 지역에서 보헤미아 전역의 후스파 대표들을 모아 회합을 가졌다. 회의는 지기스문트를 격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므로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한편, 프라하에서는 대부분의 후스파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그래도 얼마큼의 후스 추종자들은 남아 있었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 남아 있던 후스파들은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항의하면서 신시청 건물로 행진하였다. 그때 시청으로부터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돌맹이가 날아왔다. 흥분한 후스파들은 돌을 집어서 시청으로 던졌고  내친 김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시청을 점거하였다. 이들은 청사에 남아 있던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을 붙잡아서 무조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졌다. 벤체슬라우스의 신하들이기 때문에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창밖으로 던져진 사람들 중에서 몇명은 죽었고 몇명은 큰 부상을 입었다. 이를 첫번째 '프라하의 창문 던지기'(Defenestration of Prague)라고 부른다. 두번째는 저 유명한 30년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1618년의 '창문 던지기'였다. 후스파가 시청을 점거하고 프라하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을 창문으로 내던졌다는 소식을 들은 벤체슬라우스 왕은 너무 놀래서 시름시름 앓다가 한달 반 후인 8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벤체슬라우스 왕이 자연사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후스파 때문에 속이 상하고 겁이 나서 죽은 것으로 믿었다.


프라하의 창문 던지기. 후스파들은 프라하 신시청에 들어가서 시장과 시의회 의원 몇명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몇 사람은 떨어져서 죽었다.


벤체슬라우스 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프라하는 물론이고 보헤미아의 전지역에서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다. 보헤미아의 각 도시에서는 주로 독일인들인 가톨릭 교도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독일인들은 거의 모두 루터교 신자들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지 않은 때여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독일인 가톨릭 신자들은 로마 교황을 받들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국에 왕이 없으면 안되자 벤체스라우스의 미망인인 바바리아 출신의 소피아 왕비가 스스로 보헤미아 왕국의 섭정이 되어 나라를 통치했다. 소피아는 프라하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후스파 반군들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프라하 상황을 좀 더 설명하자면, 벤체슬라우스 왕이 죽고 난 후에 프라하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후스파의 가톨릭 공격이야 그렇다고 치고 일반 서민들도 그동안의 억압을 분풀이라도 하듯 약탈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서 프라하의 많은 건물들이 파손되었고 어떤 건물은 아예 화재로 무너지기까지 했다. 양측, 즉 소피아 섭정 측과 후스 측은 용하게도 11월 13일에 휴전에 합의하였다. 귀족들 중재에 앞장 섰었다. 귀족들은 후스파의 봉기에 동정적이면서도 섭정을 지지했다. 귀족들은 후스파에게 사태의 장본인인 지기스문트 왕과의 중재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파괴된 비세라트 성을 복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후스파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 얀 치츠카는 소피아 섭정과 후스파와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치츠카 장군은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프라하를 떠나 보헤미아 남부지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어 치츠카 장군은 1420년 3월 수도메르(Sudomer)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후스파가 가톨릭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두드러진 승리였다. 치츠카 장군은 마땅히 본거지로 삼을만한 곳이 없어서 결국 보헤미아 남부에 새로운 정착지를 모색하고 그곳을 성경에 나오는 변화산의 이름을 따서 타보르라고 불렀다. 타보르를 본거지로 삼은 후스파들은 파보르파(Taborites)라고 불렀다. 타보르산에 거하는 백성들이라는 의미이다. 타보르파들은 예베의식에서 세례와 성만찬의 두가지 전례만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이 행하는 다른 전례들은 모두 거절하였다. 타보르파들의 생활은 자못 청교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운영도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진행하였다. 지도부는 네명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치츠카 장군이었다. 치츠카 장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엄격한 군사훈련을 시켰다.


오늘날의 체코공화국 타보르 중삼가. 15세기의 후스 전쟁에서 타보르파의 본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