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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Jan Hus)와 후스파(Hussites) 더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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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후스 전쟁 총점검

2017. 9. 11.

얀 후스(Jan Hus)와 후스파(Hussites), 그리고 보헤미아 왕국 더 알기


후스 전쟁의 사실상 주인공은 얀 후스(Jan Hus)는 어떤 인물인가? 그에게는 여러 호칭이 있다. 체코의 성직자, 철학자, 프라하의 카를대학교 신학대학장, 교회 개혁주의자, 후스파의 창시자,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중심인물, 개신교의 선구자 등등이다. 얀 후스는 1369년 쯤에 보헤미아 남부의 후시네츠(Husinec)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며 인구는 1천 5백명 정도이므로 시골 마을 중에서도 큰 규모였다. 후시네츠에는 얀 후스의 생가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마치 성지 순례를 하듯 찾아오고 있다. 그나저나 후스라는 이름도 후시네츠에서 따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후문이다. 후스는 어린 나이에 청운의 뜻을 품고 제국의 도시인 프라하로 떠났다.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상경했다. 당시에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HRE)에서 비엔나 다음의 대도시였다.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심부름도 하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숙식을 해결했다. 후스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무슨 수가 있어도 공부만큼은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후스는 어느덧 20대의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프라하대학교에 들어갔고 1393년, 그가 23세 때에 프라하대학교를 무난히 졸업했다. 이어 3년 후에는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리고 1400년에는 사제에 서품되었다. 후스가 30세 때였다. 후스는 프라하 시내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다. 교회를 찾아가서 설교를 했는지, 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설교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그의 설교는 힘이 있고 정의로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후스가 주로 강조한 것은 교회는 부패하였으므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후스는 1402년부터 1년 동안 프라하대학교의 신학대학장을 맡아 했다. 그만큼 학문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


남부 보헤미아 후시네츠 마을에 있는 얀 후스 생가


한편, 그 즈음에 그는 프라하에 새로 건축된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교회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배처였다. 그러나 후스의 설교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는 체코 민족을 위한 대변자였고 옹호자였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후스는 어려운 현실에 눈을 돌리는 성직자였다. 후스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교회 당국은 존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금지했지만 후스는 위클리프의 Trialogus(트리알로구스: 세 사람의 대화)를 체코어로 번역했고 번역한 책을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였다. 위클리프의 '트리알로구스'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창조, 선함과 악함, 그리스도의 강생, 구원과 성만찬 등에 대한 사항을 세사람의 대화로서 풀어나가는 내용의 책이다. 위클리프는 기독교 교리와 관련한 복잡한 이슈들을 사제나 평신도나 누구나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해설하였다. 그리고 신학에 있어서는 도덕신학을 강조하였다. 결론적으로 위클리프는 14세기 종교계의 올바르지 못한 현상을 트리알로구스를 통해서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주장에 동조하고 자기의 양심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어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다. 후스는 교회의 강론대에서 설교를 하면서 일반 성직자들과 주교들과 심지어는 교황권에 대한 비난도 서슴치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의 성직자들이란 사람들이 너무나 세속적이서 권력과 물질만 탐낸다는 얘기였다. 프라하 대주교인 츠비네크 차이츠(Zbynek Zajic)는 후스의 설교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스를 사제들의 중요한 모임에서 설교토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 후스가 처음 설교한 교회로서 그런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프라하에서 후스라는 사람이 교회를 비난하고 교황권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설교를 하고 돌아다니는데 위클리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의 교황은 속이 편치 못했다. 교황은 가만히 있기만 할수 없어서 우선 프라하의 대주교에게 위클리프의 주장이 무엇인지, 특히 성만찬에 대한 이론이 어떤 것인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프라하 대주교는 교황의 요구에 순응해서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르지 말것과 사제를 비난하지 말것을 모든 사제들에게 시달했다. 그러는데 1406년에 두명의 보헤미아 신학생들이 어디서 났는지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의 문장(紋章)이 찍혀 있는 문서를 프라하로 가져왔다. 문서에는 위클리프를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스는 이 문서의 내용을 강론대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낭독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08년에 교황 그레고리 12세는 차이츠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가 이단이라는 통보를 받았으며 아울러 벤체슬라우스 왕이 비국교도(non-conformists)에게 동정적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대주교는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데도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경고하였다. 비국교도라는 것은 개신교 기독교인을 말한다. 즉 국교인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벤체슬라우스 왕과 차이츠 대주교는 교황이 저렇게 경고까지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무슨 핍박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단은 위클리프의 글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당국에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명분은 내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후스도 그같은 지시에 순종했다. 위클리프의 글 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정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재판받는 위클리프


1408년에 프라하의 카렐대학교(Univerzita Karlova)도 로마 가톨릭 교황파와 서방종파(Western Schism)의 이른바 반교황파로 갈라졌다. 교황파는 로마의 그레고리 12세를 추종하였고 반교황파는 아비뇽에서 선출된 베네딕트 13세를 추종하였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만일 그레고리 12세를 추종하면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보헤미아의 모든 사제들에게 종단 분파 문제와 관련해서 엄격한 중립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대학도 이같은 조치를 따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이츠 대주교는 로마의 그레고리에게 충실했다. 카렐대학교에서는 후스가 리더로 되어 있는 보헤미아 국가파(nation)가 중립을 지키기로 서약했다. 후스와 기타 보헤미아 국가파의 리더들은 벤체슬라우스 왕에게 요청해서 카렐대학교의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이사회에서 국가파가 3표를 가지며 바바리아, 작손, 폴란드 국가파는 각각 1표씩만 행사하도록 칙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결과, 1409년만 해도 수천명의 박사학위, 석사학위, 일반 학생들이 프라하를 떠났다. 프라하에서의 학생 퇴거는 상대적으로 라이프치히에 대학교를 세우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렐대학교는 국제적인 대학교가 아니라 체코의 국내 대학이 되었다. 또한 빠져나간 학생들을 통해서 프라하에서는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세력이 성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유럽 여러 나라에 퍼트렸다. 프라하 대주교인 차이츠는 고립되었고 반면에 후스의 명성을 크게 높아졌다. 이와 함께 위클리프의 교리는 프라하에서 다시 인기를 끌었다.


 프라하의 카렐대학교


1409년에 피사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분파를 종식시키기로 하고 알렉산더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의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와 아비뇽의 반교황인 베네딕트는 피사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교황은 1418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반교황으로 선언되었다.) 그레고리도 싫고 베네딕트도 싫은 후스 일파와 벤체슬라우스 왕은 알렉산더 교황에게 충성하고 순종키로 마음을 돌렸다. 차이츠 대주교도 벤체슬라우스 왕의 압력을 받아서 할수 없이 그렇게 했다. 한편, 차이츠 대주교는 알렉산더 교황에게 프라하의 위클리프 추종세력이 신앙적인 혼돈을 야기한다면서 어떻게 조치를 취해 달라고 청원을 했다. 알렉산더 교황은 1409년 12월에 교서를 내려서 차이츠 대주교에게 프라하의 위클리프 추종세력을 조치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위클리프의 모든 서적들이 회수되었고 위클리프의 교리는 거부당했으며 자유 설교는 중지되었다. 이에 대하여 후스는 교황에게 소청을 넣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어서 위클리프 관련 서적들과 귀중한 문서들은 불태워졌고 후스와 추종자들은 알렉산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세상을 돌고 도는 모양이었다. 차이츠 대주교는 14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 교황과 벤체슬라우스 왕의 앞에서서 그들을 대변했던 차이츠 대주교의 죽음은 보헤미아의 종교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던져준 것이었다. 차이츠 대주교의 죽음 이후 몇가지 논란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그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핵심되는 쟁점은 면죄부(indulgence)에 대한 것이었다. 알렉산더 5세는 1410년에 세상을 떠났다. 요한 23세가 뒤를 이었다. 요한 23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교황으로 선출되었는지는 이미 설명한 것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요한 23세는 나중에 반교황으로 선언되었다.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라이발 교황인 그레고리 12세를 지지하고 있는 나폴리 왕 라디슬라우스를 징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요한 23세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였다.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죄사함을 받으려면 면죄부를 사라고 강요했다. 신도들은 어쩔수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쳐야 했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교회가 부패하였다는 증거이며 교회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얀 후스. 체코의 헤른후트Herrnhut) 아카이브스 소장 초상화.


후스는 당연히 면죄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어느 교황, 어느 주교라고 해도 교회의 이름으로 칼을 들어 원수를 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후스는 교황이라고 하면 오히려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하고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후스는 인간의 죄는 돈으로 사함을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로서 용서을 받을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에 후스의 추종자들이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사람들은 후스가 교회에 순종하지 않고 지나치게 반대만 한다고 내세웠다. 이어 당국은 평민 중에서 면죄부는 사기라고 주장한 사람 세명을 체포해서 참수형을 집행하였다. 훗날 후스파들은 이 세명을 후스파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들이라고 간주했다. 한편, 카렐대학교에서는 45개 항목이 수록된 선언문이 나돌았다. 교수들은 그것을 이단이라고 보았다. 구구절절이 교회와 사제들의 권위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언문(또는 자료)이 후스가 지도하여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돈 것이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신학교에서 이 선언문을 강의시간에 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후스를 비롯해서 대학교는 우선 이들 주장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성서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신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 문제로 인한 소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교황청 특사와 프라하 대주교인 알비크는 후스에게 교황의 칙서에 대한 반대를 포기해 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우스 왕은 두 당사자들을 화해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얀 후스의 화형. 1415년 콘스탄스


벤체슬라우스 왕은 1412년 초에 국가 원로들의 자문을 받아서 난국을 타개하는 지혜를 모으기 위한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1412년 2월 2일에 체스키 브로드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기로 준비되었다. 그러나 체스키 브로드에서는 아무런 회의도 열리지 않았다. 교회측이 종교회의에 후스가 참석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장소를 대주교궁으로 비밀리에 옮겼던 것이다. 아무튼 회의에서는 교회의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후스는 보헤미아가 신앙문제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 같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스의 이같은 주장은 보헤미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의 성직자 집단에 대하여 분노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한 때에 교황과 프라하 대주교가 후스를 비난하자 보헤미아의 각지에서는 폭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우스의 보헤미아 정부는 이번에는 후스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후스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세력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후스는 계속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프라하의 교회들은 제재를 받기 시작했다. 프라하에서는 교회에서의 미사가 금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보헤미아 개혁주의자들에게 하나하나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후스는 우유부단한 왕과 적대적인 교황과 비효과적인 의회를 더 이상 신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412년 10월에 후스는 하나의 특별한 행동을 하였다. 교회의 부당함에 대하여 교황청이나 일반 법원에 상소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최고의 법관이라고 인정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소문을 제출한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교회법을 무시하고 상소의 절차를 취한 것은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 조항을 뷔르템부르크 교회의 문에 붙인 것의 전초와 같은 것이었다. 후스는 그후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 머무르면서 위클리프의 저서에 바탕을 두고 자기의 생각을 담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해서 얘기하는 얀 후스


벤체슬라우스의 형으로 헝가리 왕이며 로마왕인 지기스문트는 벤체슬라우스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세 사실상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라고 할수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로마왕으로서 교회 내에서의 분쟁을 어서 속히 종식하고 싶었다. 로마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아직 대관식을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불렀던 호칭이었다. 지기스문트는 로마왕으로서 1414년 11월에 독일의 콘스탄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토록 했다. 후스도 모든 불화와 알륵과 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믿고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키로 했다. 지기스문트가 후스의 신변보호를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렇지만 참석하기 전에 유서를 써 놓았다. 후스는 1414년 11월 3일에 콘스탄스에 도착했다. 다음날 회의장소인 교호의 정문에는 미할 브로두 무엇이라고 하는 사람이 붙인 후스를 반대한다는 벽보가 붙었다. 말하자면 소송장이었다. 소송의 당사자가 되면 판결이 나기까지는 죄인이나 마찬가지여서 모든 행동을 근신해야 했다. 그러나 후스는 콘스탄스에 체류하면서 교회에 가서 설교도 하고 미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회법규의 위반이었다. 원래부터 후스를 이단이라고 하며 후스를 반대하는 측들은 후스가 도주의 우려가 있기 때뭔에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스는 도미니카 수도원의 지하감옥에 갇혔다. 지기스문트 왕은 후스가 갇히자 자기가 신변보호를 약속했는데 이게 뭐냐면서 크게 분노하였지만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지그시문트에게 몰려가서 후스는 이단이므로 이단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바람에 그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해서 모르는척 하기로 했다.


콘스탄스 공의회 장면


1414년 12월 4일에 교황 요한 23세는 세명의 주교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후스에 대한 예비 심문을 진행토록 했다. 예에 의해서 증인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후스에게는 변호해 줄 사람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 더구나 지기스문트 왕과의 친분 때문에 후스에게 그나마 동정적이었던 교황 요한 23세는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반교황이라는 비난과 함께 탄핵될 분위기에 있자 명예스럽지 못하게 폐위가 되지 않으려고 콘스탄스를 도망치듯 떠났다. 그래서 후스로서는 더욱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후스에 대한 첫 재판은 1415년 6월 5일에 열렸다. 후스는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거처였다. 재판에서는 후스가 썼던 글들 중에서 문제의 소지가 될 것들이 낭독되었고 여러 명의 증인들이 나와서 후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후스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말과 행동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반하는 것이라면 죄를 달게 받고 참회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후스는 위클리프를 존경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자기의 영혼이 언젠가는 위클리프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위클리프는 1384년에 세상을 떠났고 1415년 5월에는 콘스탄스 공의회가 그를 이단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물론 후스는 위클리프의 몇몇 주장에는 동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성만찬과 관련한 위클리프의 주장은 반대한다고 내세웠다. 지기스문트 왕은 후스에게 공의회의 자비를 구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후스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단을 보호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였다. 1415년 6월 8일에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39개나 되는 죄목이 낭독되었다. 그중에서 26개 죄목은 후스의 교회에 대한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후스는 다시한번 자기의 죄사항을 확신한다면 죄를 받겠다고 말했다. 그말은 재판의 판결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후스는 마지막으로 고해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후스는 죄를 짓지도 않은 사항에 대하여 참회를 하거나 자기가 그동안 했던 주장을 철회하는 일은 할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후스에 대한 유죄판결을 내리는 장면


후스에 대한 유죄판결은 1415년 7월 6일에 내려졌다.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회중이 모인 가운데 대성당에서였다. 우선 전례에 따라 미사가 거행된 후에 후스가 사람들에 의해 대성당으로 들어섰다. 로디 주교라는 사람이 이단을 근절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내용으로 강론하였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후스와 위클리프의 구절들을 읽은 후에 이어 재판과정이 보고되었다. 어떤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가 나와서 후스와 그의 글에 대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후스는 판결에 항의하면서 성경에 근거해서 죄를 지었는지의 여부를 말해 줄것을 요청했다. 후스는 무릅을 꿇고 원수들을 모두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부드럽고 침착한 음성이었다고 한다. 이어 강직(강직)하는 순서가 진행되었다. 후스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후스에게 다시한번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후스가 다시 거절하였다. 고위 성직자들은 후스에게 저주를 내리며 사제복을 벗도록 했고 십자가 목걸이와 반지등 모든 장식물들도 제거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사제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며 후스를 민간당국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단에게 씌우는 높은 모자를 쓰웠다. 모자에는 Haeresiarcha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단운동의 리더라는 뜻이다. 경비병들이 후스를 교회 밖에 마련된 화형장으로 데려갔다. 화형장 주변은 삼엄하게 경비되었다.


콘스탄스에서의 후스에 대한 화형장면. 왼쪽에 기둥과 함께 커다란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기둥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른다.


화형장에 도착한 후스는 무릅을 꿇고 손을 내밀어서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사형집행인이 후스의 옷을 벗기고 두 손을 뒤로한채 기둥에 묶었다. 목에도 쇠사슬로 묶어서 역시 기둥에 매었다. 그런 후에 장작더미를 후스의 목에 이르기까지 쌓았다. 멀리서는 후스의 얼굴만 간신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제국을 대표하는 사형집행관이 후스에게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은 건질수가 있다고 말했다. 후스는 거절하면서 '하나님은 내가 설교하지도 않은 사항에 대해서 기소를 받고 유죄판결을 받은데 대한 증인이십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말씀만을 글로 남겼고 가르쳤고 설교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에피소드로 남겨진 얘기지만, 사형집행인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는 것을 상당히 주저했다고 한다. 어떤 노파가 앞으로 나와서 한뭉치 불쏘시개로 쓸 나무들을 던졌다. 그러자 사형집행인은 용기를 얻어서 장작 더미에 불을 붙였다. 후스는 그 노파를 보자 '산타 심플리치타스'(Sancta Simplicitas)라고 소리쳤다. 이말은 '성스러운 죄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비유하여서 부르는 말이다. 물론 후스는 체코어로 그렇게 말했다. 체코어로는 스바타 프로스토토(Svata prostoto)이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후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스의 유분(遺粉)은 라인 강에 뿌려졌다.  


오늘날 후스가 화형당했던 자리에 놓여 있는 기념석


보헤미아에서 후스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후스가 저 멀리 독일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하였다. 보헤미아의 사람들이 로마 교황에게 불복종하는 운동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들의 저항은 결국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1420년 3월에 십자군을 소집하게 만들었다. 교황으로스는 자기의 권위를 떨칠수 있는 만병통치야깅었다. 교황 마르틴 5세는 한술 더 떠서 칙서를 발표하고 누구든지 후스 또는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개혁자들이면 죽여도 좋다고 선언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거의 모든 체코인들을 포함한 후스파들은 교황의 십자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결성하였다. 후스파 군대는 주로 얀 치츠카(Jan Zizka: 1360-1424)와 그후의 프로코프 1세(Prokkop the Great: 1380-1434)가 이끌었다. 후스파 군대는 교황의 십자군을 물리쳤고 이어 1434년에 이르기까지 세번에 걸친 추가 십자군도 격퇴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후스 전쟁이었다. 후스 전쟁은 1436년 우트라퀴스트 후스파와 바젤 공의회간에 타협이 이루어져서 막을 내렸다. 후스파 신도들은 원래의 소속인 가톨릭 교회로 복귀한다는 것이 중요 합의 사항이었다. 그러나 후스전쟁이 일어난지 거의 100년 후에 알아본 바는 체코 왕국의 국민들 중에서 거의 90%가 아직도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으며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극히 소수의 개신교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에 발판을 둔 합스부르크의 핍박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후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었었다. 후스의 가르침과 교리 등등이 어떤 것인지는 다른 자료들을 보는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생략코자 한다. 


5년에 걸친 후스 전쟁의 한 장면


얀 후스는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지대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후스의 가르침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더구나 마르틴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후스 전쟁은 바젤 협약을 통해서 보헤미아에 개혁주의 교회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1백년 후에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날수 있게 했다. 모라비아 교회(Unitas Fratrum)은 후스를 직접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후스파의 직계 후임자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얀 후스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결국 체코 문화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었다. 후스는 특히 중세 체코어의 개선에도 기여를 했다. 오늘날 얀 후스의 기념상은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우뚝 서 있다. 후스의 기념상은 체코의 여러 마을에도 있다. 뉴욕에는 브루클린에 얀 후스 모라비아 교회가 있다. 주소는 153 Ocean Avenue 이다. 맨하튼에는 East 74th Street에 얀 후스 장로교회와 얀 후스 극장이 있다. 얀 후스 장로교회와 얀 후스 극장은 같은 건물에 있지만 그렇다고 극장에서 종교적인 연극을 공연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롱아일랜드에는 보헤미아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의 유니온 공동묘지에 1893년에 뉴욕 지역의 체코 이민자들이 얀 후스의 기념상을 세웠다. 동방정교회는 후스의 신학이론이 초기 개신교의 발판을 놓았다고 하지만 실은 동방정교회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일부 정교회에서는 얀 후스를 순교자로 간주해서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기도 하다. 2015년에 체코 라디오는 '위대한 체코인'을 투표했는데 후스가 1위를 차지하였다. 모라비아 교회는 7월 6일, 후스가 화형을 당한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모라비아의 우니타스 프라트룸과 체코 형제단은 후스를 신앙의 선구자로 주장하고 있다. 체코공화국은 7월 6일을 얀 후스 데이로서 공휴일로 정했다. 미국의 루터복음주의교회는 성자 칼렌다에서 후스를 순교자로서 기념하고 있다.  


브루클린에 있는 얀 후스 모라비아 교회(모라비아 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