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음악의 도시 비엔나와 오페라 이야기

자살을 선택한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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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2017. 9. 16.

자살을 선택한 작곡가들의 면모

자살을 계획했거나 미수에 그쳤거나 실제로 자살한 작곡가들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이놈의 세상, 칵 죽어 버릴까보다'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절망하고 괴로워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경우이다.


○ 루이 가브리엘 귀예맹(Louis-Gabriel Guillemain: 1705-1770)은 18세기 프랑스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탈리아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파리의 궁정오케스트라 멤버로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또한 그는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주로 바이올린 작품들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국왕과 왕비의 앞에서 자주 연주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우선 술을 너무 좋아했다. 술고래였다. 또한 고가의 물건들을 사들이는 낭비벽이 있었다. 결국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1770년의 10월 1일, 그는 자기 집에서 무수히 칼에 찔려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나중에 검시관은 칼로 14번이 찔렸다고 보고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타살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칼로 자기 자신을 찔러서 갚지 못할 빚은 갚은 셈이었다.


루이 가브리엘 기예맹의 바이올린 아뮈스망 음반


○ 이보르 거니(Ivor Gurney: 1890-1937)는 영국의 시인 겸 작곡가로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 전선에서 부상을 당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 중에 적군이 살포한 가스를 흡입하여 신경계에 장애가 생겼고 또한 참호에서 빗발같이 쏟아지는 포탄으로 충격을 받는 정신적인 장애를 입었다. 제대후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을수 없어서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졸업후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아울러 정신적인 장애가 보여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택한 길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목을 매어 죽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서 목숨을 살렸지만 일반 병원에서 치료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런던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4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폐염악화였다.

 

이보르 거니


○ 프렌케 자코바(Prenke Jakova: 1917-1969)는 알바니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전후에 알바니아에서도 전통적인 구세대 음악가들과 전후의 신세대 음악가들 간에 갈등이 심했다. 더구나 알바니아에서는 민족간의 알륵과 갈등도 심했다. 자코바는 음악계에 있어서 세대간, 민족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재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오히려 비난을 받고 모략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화합을 이룩하지 못한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하였다. 52세의 중후한 나이에!


프렌케 자코바


○ 장 바티스트 크룸폴츠(Jean-Baptiste Krompholtz: 1747-1790)는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보헤미아 출신의 하피스트 겸 작곡가였다. 그의 하프 연주는 너무나 뛰어나서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제자로서 역시 하피스트인 안네 마리 슈트레클러와 결혼하였다. 42세 때까지 두 부부는 남들 보기에 다정한 커플이었다. 그러다가 안네 마리가 피아니스트인 얀 두세크라는 남자와 눈이 맞아 런던으로 야반도주했다. 그로 인하여 크룸폴츠는 크게 절망하여 결국 이듬해에 세이느강에 투신했다. 크룸폴츠는 43세의 한창 나이였다. 안네 마리는 그후 10년이 넘게 하피스트로서 활동했다. 함께 도망간 피아니스트와는 과연 깨가 쏟아졌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장 바티스트 크룸폴츠


○ 장 르브륀(Jean Lebrun: 1759-1809)은 프랑스의 혼 연주자 겸 작곡가였다. 아마 당대에 르브륀만큼 대단한 재능의 혼 연주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여러 편의 혼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런데 그는 성격이 유별나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괴로워했다. 소심했다. 결국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다. 당연히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향년 52세였다.


○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헝가리 출신의 비루투오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겸 지휘자 겸 임프레사리오였다. 리스트는 생애를 통해서 무한한 에너지로서 너무나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60대에 이르러서는 진이 빠졌는지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힘만 들고 속만 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당연히 피아노 연주도 잘 안되었고 작곡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보였다. 급기야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즈음에 그는 친구에게 '슬픔이 나의 영혼을 마치 수의처럼 감싸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자살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리스트는 자살이 죄악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말년의 리스트는 청년 시절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우울증에 걸려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 엘리자베트(씨씨) 황비, 루돌프 황태자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

  

○ 미셸 마느(Michel Magne: 1930-1984)는 프랑스의 작곡가로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아무래도 영화음악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영화음악의 귀재라고 불렀다. 그는 1962년에 파리 근교에 커다란 저택인 샤토 데루비유(Chateau d'Herouville)을 매입했다. 그는 샤토 안에 최신 설비의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서 샤토의 내부를 상당히 개조하였다. 그후 1984년에 사정이 있어서 샤토를 팔아야했다. 그런데 매매과정에서 녹음 스튜디오로 개조한 사항에 문제가 있었다. 계약이 끝난후 샤토를 살 사람은 변호사를 앞세워서 샤토를 종전대로 복구해 놓아야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나왔고 마느는 오히려 스튜디오 설치비용을 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 문제 때문에 법적으로 시끄러웠고 마느가 패배할 듯 하자 그는 마침내 자살로서 골치아픈 세상을 하직하였다. 재산이 뭐길래!


○ 마리아노 만치넬리(Mariano Mancinelli: 1842-1894)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겸 작곡가이다. 그는 성악곡, 살롱음악, 기악곡 등을 작곡했고 나중에는 오페라단을 설립해서 모처럼 브라질 공연을 가기로 했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의 오페라 공연은 대실패였다. 경제적으로 손실이 컸다. 그는 고민 끝에 총으로 자살했다.


○ 노엘 뉴턴 우드(Noel Newton-Wood: 1922-1953)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보다도 그는 게이였다. 파트너가 죽자 청산칼리를 먹고 자살했다. 그때 그는 31세였다. 동성연애가 뭐길래!


○ 메리 카 무어(Mary Carr-Moore: 1873-1957)는 미국의 성악가 겸 작곡가 겸 지휘자였다. 그는 성악곡과 피아노곡, 오페라 등을 남겼다. 남편은 의사였다. 그는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을 알고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어떤 날 밤 남편은 병원에서 응급수술 환자가 있어서 급히 병원으로 갔다. 집에 있던 메리는 자살을 하려고 신경흥분제인 스트리크닌(strychnine)을 과다복용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편, 남편인 무어 박사가 병원에 도착해보니 수술을 받을 환자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그래서 무어 박사는 할 일이 없어서 집으로 갔다. 집에 와서보니 아내가 약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해서 겨우 목숨만은 살려놓았다. 남편은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메리는 이혼하였고 얼마후인 1920년에 재혼하였는데 그 재혼도 얼마 가지 못해서 이혼으로 끝났다. 메리는 첫 남편에게서 낳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보살피며 살았다. 아들 존 웨슬리 무어는 미공군 군의관이었는데 2차 대전 중인 1944년에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했다. 메리는 84세까지 장수하기는 했다.


메리 카 무어


○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1854년, 그가 44세 때에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자살하려고 뒤셀도르프에서 라인강으로 투신하였다. 슈만이 정신질환을 보인 것은 매독으로 중추신경계가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슈만은 한번도 아니고 몇번이나 죽으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해서 차마 죽지 못했다. 그러다가 증세가 악화되어서 아마도 부지부식간에 라인강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마침 다리 밑을 지나가던 보트가 있어서 보트에 탔던 사람이 슈만을 구출해 주는 바람에 강물에 씻겨 내려가서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불상사는 면했다. 슈만은 곧바로 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2년 후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로베르트 슈만


○ 레최 세레스(Rezsö Seress: 1889-1968)는 헝가리의 작곡가 겸 작사가이다. 그는 1933년에 친구인 라츨로 야보르(Laszlo Javor)와 공동으로 두 소절의 짧은 노래인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작곡했다. 일요일만 되면 절망감과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을 갖는 어떤 젊은이의 심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자살을 부추킨다고 알려진 것은 어느 일요일에 어떤 젊은이가 자살을 했는데 그 옆에 이 노래의 악보가 있었을 뿐 아니라 축음기에는 이 노래를 취입한 음반이 넣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이 노래가 자살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정말로 자살과 관련된 사건이 생겼다. 작곡을 한 세레스의 여친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한 것이다. 세레스의 여친은 유서를 남겼는데 다른 말은 없고 '글루미 선데이'라고만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노래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몇년 동안 금지조치되었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것은 이 노래를 작곡한 세레스가 1968년에 8층 건물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일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이었다. 이 노래는 헝가리어로 Szomorú vasárnap 라고 하는데 이는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뜻보다는 슬픈 일요일일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글루미 선데이'이지만 세계적으로는 헝가리 자살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뢰체 세르세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는 대담하면서도 개인적 스타일의 작품 때문에 간혹 소련 당국으로부터 호감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 구의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나서 상당히 언짢아 했다. 당국은 쇼스타코비치에게 그런 작품을 내놓겠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말이 협박이지 실제로는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지만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쇼스타코비치는 절망 중에 1960년대에 자살을 심각히 생각했었다. 자살 충동이 피크를 이루었던 것은 그에게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강요가 있었을 때였다. 그는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 중에 급하게 작곡한 작품이 있다. 현악4중주 C 장조 작품번호 110이다. 이 작품의 어떤 부분은 네개의 음표가 반복되게 나오는 것이었다. 네 개의 음표는 그의 이름을 음역한 것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작품을 그의 자살 노트라고 비유해서 말했다. 한번은 진짜로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누군가가 수면제를 치워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살에 실패한 그는 오히려 더 작곡에 열중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가장 영광스러운 작품들을 남겨 주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emtana: 1824-1884)는 어릴 때에 아버지가 '음악은 무슨 음악이냐? 잔말 말고 장사나 배워라'라고 하며 음악가가 되려는 것을 막은 것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로서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그런 그였지만 60세가 지나서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갑자기 악화되었다. 의사들은 매독의 합병증이라고 설명했다. 스메타나는 모든 면에서 상실감을 갖게 되었다. 자살을 마음 먹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스메타나는 결국 슈만과 비슷하게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 아서 토마스(Arthur Thomas: 1690-1768)는 영국의 작곡가이다.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작곡했지만 뮤지컬 코미디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말년에 이르러서 도무지 작곡이 지지부진하자 절망한 나머지 런던의 웨스트 햄스티드 역에서 기차가 달려오는데 뛰어들어 죽었다.

 

○ 프란체스코 베라치니(Francesco Veracini: 1690-1768)는 이탈리아의 바이얼리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드레스덴에 있는 작소니 선제후의 궁정에서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봉사하였다. 베라치니는 당대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오만하고 허세를 부리며 남을 업수이 여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궁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한번은 몇명의 바이올린 솔리스트들에 대하여 초견 능력을 시범하는 일이 있었다. 베라치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게 되었다. 속이 상한 그는 죽을 작정을 하고 3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죽지는 않고 다리만 부러졌다. 그래서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내야 했다. 바이올린 연주를 못하게 되자 작곡에 전념하였지만 평소에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작품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결국 빈곤 속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베라치니


○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8)는 말년의 프란츠 리스트의 영향을 받아서 자살할 생각을 간직하면서 기회를 보았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자세한 얘기는 본 블로그의 바그너 편을 참고하시라. 

 

○ 피터 월로크(Peter Warlock: 1894-1930)는 영국의 작곡가이며 평론가였다. 성악곡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합창곡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항상 절망중에 있다가 어느날 집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하였다.


피터 월로크


○ 안소니 왓슨(Anthony Watson: 1933-1973)은 뉴질랜드의 작곡가이다. 현악4중주곡을 비롯해서 실내악 등을 작곡했다. 그런 그는 심각한 알콜중독이었다. 결국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자살했다.


○ 야로미르 봐인버거(Jaromir Weinberger: 1896-1967)는 체코의 작곡가이다. 오페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백파이프 부는 스반다'(Schwanda the Bagpiper: Švanda dudák)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체코를 점령한 나치는 체코의 음악활동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봐인버거는 나치를 혐오하여서 뉴욕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작곡을 계속하였으나 어쩐 일인지 체코에 있을 때에 비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봐인버그는 점차 우울증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가는 조울증까지 겹치게 되었다. 뉴욕에서 지내기 때문에 작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플로리다로 옮겼지만 마찬가지로 쌍극성 장애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하였다.

 

야로미르 봐인버거


○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의 경우는 볼프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마지막 생애를 보냈지만 정작 자살한 사람은 볼프와 불륜관계에 있었던 멜라니라는 여인이어서 소개코자 한다. 볼프는 슬로베니아 오리진의 오스트리아 작곡가로서 특히 예술가곡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볼프는 젊을 때에 걸린 매독으로 합병증이 생겨서 점점 정신적으로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다. 볼프가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보인 것은 1897년 2월 어떤 콘서트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서 아무것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기가 머지 않아 정신이상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렇게 되기 전에 하고 있던 작곡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하고 있던 것은 오페라 '마누엘 베네가스'(Manuel Venegas)였다. 결국 볼프는 이 오페라의 첫 여섯 페이지만 작곡하고 미완성으로 남겼다. 볼프는 1899년 이후로는 전혀 작곡을 하지 못했다. 비관으로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 다행히 슈만처럼 어떤 사람이 구해주어서 죽지는 않았다. 볼프는 스스로 비엔나정신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의 3년을 지내다가 1903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볼프가 입원하고서 세상을 떠날 때가지 멜라니가 자주 찾아와서 돌보아 주었다. 멜라니는 볼프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하인리히 쾨헤르트의 부인이었다. 그런 멜라니인데 볼프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다. 남편 쾨헤르트는 자기 부인이 볼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볼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실한 친구로서 볼프를 돌보아 주었다. 볼프가 세상을 떠난 후에 멜라니는 남편에 대한 가책으로 참을수 없어서 1906년에 자살했다. 볼프가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였다.


후고 볼프


미국의 작곡가로서 교향곡 River Run으로 1985년 퓰리처 음악상을 받은 스테픈 알버트(Stephen Albert: 1941-1992)는 매사수세츠주 케이프 카드(Cape Cod)에서 차량 3중 충돌사고로 사망했다. 혹자는 알버트가 일부러 차량사고를 내서 죽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파울 벤 하임(Paul Ben-Haim: 1897-1984)은 1933년 나치를 피해 독일을 탈출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전후인 1972년에 뮌헨에서 개최된 그를 위한 콘서트에 참석하로 연주회장으로 가는 도중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평생을 불구로 지냈다.


 

스테픈 알버트와 파울 벤 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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