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음악의 도시 비엔나와 오페라 이야기

해리엣과 파가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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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환상의 베를리오즈

2020. 5. 3.

해리엣과 파가니니


베를리오즈는 2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1832년 11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12월에 파리음악원에서 그의 작품만으로 연주회를 마련했다. 프로그램은 오페라 '비밀법정의 판사'(Les Francs-juges), '교향적 환상곡', 그리고 '삶에의 복귀'(Le Retour à la vie)였다. '교향적 환상곡'은 초연 이래 여러번 수정한 것이다. '삶에의 복귀'에는 당시 인기 배우였던 보카즈(Bocage)가 독백을 하였다. 베를리오즈는 그동안 소원했던 해리엣에게 콘서트에 참석해 달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해리엣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는 이날 파리음악원 연주회장에 참석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모습을 보고 놀래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그동안 베를리오즈가 이만큼 발전했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날 참석자 중에서 대표적인 음악가들만 소개하면, 프란츠 리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프레데릭 쇼팽이 있었고 작가로는 알렉산더 뒤마, 테오필 고티에르(Théophile Gautier), 하인리히 하이네, 빅토르 위고, 그리고 조르즈 상드(George Sand)가 있었다.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그래서 그해가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콘서트를 가져야 했다. 베를리오즈라는 이름은 이제 파리의 음악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리엣이 베를리오즈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베를리오즈와 마침내 결혼한 해리엣 스미슨


그런데 베를리오즈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돌아온 1832년에는 해리엣의 인기가 예전만 못해서 점점 수그러들던 때였다. 해리엣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줄어 들었던 것이다. 해리엣은 파리의 대극장 무대에는 서지 못하고 차츰 2류 극장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의 화려했던 경력을 생각해서인지 생활수준을 낮추지 못하다 보니 빚만 늘었다. 훗날 전기 작가들은 해리엣이 베를리오즈의 청혼을 그나마 받아 들인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베를리오즈의 사회적 명성이 높아진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재정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무튼 1832년에 해이엣은 마침내 베를리오즈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 들였다. 물론 양쪽 집안 모두 두 사람의 결혼을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1833년 10월 3일 파리의 영국대사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파리에서 살았으나 얼마후에는 몽마르트에서 살았다. 당시에 몽마르트는 아직도 파리 교외의 마을일 뿐이었다. 이듬해인 1834년 8월에 아기가 태어났다. 루이 클레망 토마(Louis-Clément Thomas)였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처음 행복했다. 하지만 처음 몇년 동안이었다. 결국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해리엣의 과거만 생각하고서 무대를 잊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리고 해리엣은 프랑스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으면서도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다. 프랑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경력에도 문제가 있었고 사회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니콜로 파가니니. 앙그레 그림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의 '교향적 환상곡'을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베를리오즈에게 자기가 연주할수 있는 적당한 곡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즈음에 파가니니는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비올라를 갖게 되어 이것으로 한번 기분좋게 연주해야 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에게 적합한 화려하고 찬란한 비르투오소 작품을 당장 쓰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대신에 비올라 오블리가토가 나오는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파가니니는 '이탈리아의 해롤드에서 비올라 솔로 파트를 보고 자기의 테크닉이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파트에서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연주를 꺼려 했다. 결국 '이탈리아의 해롤드'의 초연에서 비올라 오블리가토는 슈레티앙 우어한(Chrétien Urhan)이란 사람이 맡았다.


'해롤드 도련님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윌렴 터너 작. 1832년


베를리오즈는 1835년 말까지 프리 드 롬 수상자로서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한 금액의 생활비를 보조 받았다. 그러나 작곡으로 버는 돈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고정적이지 못했다. 베를리오즈는 파리의 신문들을 위해 기고를 해서 원고료를 받는 것으로 생활비의 일부를 충당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평론가로서, 음악 컬럼니스트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는 L'Europe littéraire(유럽문학), Le Rénovateur(혁신), Gazette musicale(음악 가제트), Journal des débats(논단) 등에 기고하였다. 아마 베를리오즈는 프랑스 작곡가로서는 평론가를 겸했던 첫번째 경우였다. 베를리오즈의 뒤를 이어 포레, 메사저, 뒤카스, 드빗시 등이 작곡가 겸 평론가로서 활동했다. 평론가로서의 잇점은 있다.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흑색 선전으로 공격할수 있으며 자기가 존경하는 누구를 뜨겁게 선전할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첫번째 경우 같으면 우선 음악가인체 하는 사람들, 콜로라투라 노래를 작곡하는 사람은 물론 노래 부르는 사람들, 바이올리니스트에 올라서지 못하는 비올리스트들, 무능한 대본가들, 그리고 바로크 대위법을 사용하는 음악들이다. 두번째 경우는 누구보다도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글로 표현할수 있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글룩과 베버도 대단히 존경했다. 몰론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도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베를리오즈의 기고는 주로 음악평론이었다. 그는 나중에 그런 글들을 취합하여 하나의 책자로 발간했다. 대표적인 것인 Evenings in the Orchestra(1854: 오케스트라의 이브닝)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논문도 상당히 썼다. 예를 들면 1844년에 발간된 Treatise on Instrumentation(기악법)이다. 베를리오즈는 처음에는 생활비나 충당하려고 평론을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재정문제와는 상관 없이 평론을 썼다.


지휘하는 베를리오즈. 캐리캐추어


베를이오즈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두번에 걸친 작곡의뢰를 받았다. 하나는 1837년에 파리의 앵발리드(Les Invalides)에서 초연된 레퀴엠으로 Grande messe des morts(전사자를 위한 대미사곡)이란 제목이 붙은 것이다. 두번째 작품은 1840년의 Grande symphonie(그랜드 교향곡)으로 funèbre et triomphale(장송곡과 승전가)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두 작품으로 많은 돈을 번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드높아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레퀴엠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그는 '만일 내 작품 모두를 없애라는 위협을 받았고 그 중에서 하나만 건질수 있다고 한다면 '전사자를 위한 대미사곡'만은 없애지 말아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베를리오즈는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서도 파리 오페라에 대하여는 유감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1830년대를 통해서 베를리오즈의 주목표는 파리 오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파리에서는 음악적으로 성공했다는 척도가 오페라 극장에 있었으며 콘서트 홀에 있지 않았다. 로베르트 슈만도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프랑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악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음악이 예술적으로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작품이 대중의 기호에 맞고 인기를 끄느냐가 문제라는 일침이었다. 베를리오즈의 경우에는 어떠했는가? 그는 1834년부터 1837년까지 무려 4년에 걸쳐 '벤베누토 첼리니'와 씨름하여 겨마침내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페라 제작에 몰입하지 못하고 대신에 평론가로서의 활동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또는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에 대한 연주회를 주선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벤베누토 첼리니'를  음악적으로 대단히 풍성하고 열정에 넘쳐 있는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리허설에서 성악가들은 노래부르기가 어렵다느니 하면서 협조적이지 않았다. 사실 '벤베누토 첼리니'는 기술적으로 더 이상 어려울수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대본도 미약했고 무대장치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이런 여러 요인들이 '벤베누토 첼리니'를 성공하지 못하게 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초연 이후 고작 네번의 재공연이 있었을 뿐이었다. 베를리오즈는 '벤베누토 첼리니'가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은 오페라 극장의 문이 그에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로부터 파리 오페라와 베를리오즈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초연 포스터, 1858년 9월 10일 파리 오페라에서였다. 당시에는 파리 오페라가 왕립음악아카데미의 플르티에 홀이었다.


오페라가 실패를 보았지만 그후 그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직잡 지휘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파가니니가 청중석에 있었다. 파가니니는 연주가 끝나자 직접 스테이지에 올라와서 베를리오즈의 앞에서 무릎을 꿀고 그의 손에 입맞춤을 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며칠후 베를리오즈는 2만 프랑이라는 거액이 적힌 수표 한장을 받았다. 파가니니가 존경의 뜻으로 보낸 것이었다.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의 선물로 자기의 빚은 물론 해리엣의 빚까지 갚을수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 평론 쓰는 것을 그만두고 작곡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이때에 그는 음성과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드라미탁 교향곡인 Roméo et Juliette(로미오와 줄리에트)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1839년 11월에 초연되어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 때의 청중 중에는 청년 바그너도 있었다. 바그너는 베를리오즈가 보여준 음악시의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그너는 훗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면서 베를리오즈의 테크닉을 인용하였다. 19세기가 막을 내릴 즈음에 그는 파리음악원의 부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그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음악원 도서관 부관장이란 것은 한직이어서 시간은 있었지만 보수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베를리오즈는 작곡할 시간도 있고 수입도 넉넉한 직장이 필요했다.


1845년의 베를리오즈. 오귀스트 프란츠호퍼 작


'장송과 승전 교향곡'(Symphonie funébre et triomphale)은 1830년 7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1840년 7월에 베를리오즈의 지휘로 야외공연되었다. 그 다음해에 오페라 코미크는 베를리오즈에게 베버의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를 오페라 코미크의 관례에 맞게 편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베를리오즈는 대화를 반주가 곁들인 레시타타브로 고쳤다. 또한 당시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발레가 필수이므로 베버의 '무도회의 초대'를 바탕으로 발레음악을 만들어 추가하였다. 같은 해에 베를리오즈는 친구인 테오필 고티에르(Thèophile Gautier)의 여섯 편 시에 의한 가곡을 완성했다. 피아노 반주로 된 연가곡인 Les Nuits d'été(여름 밤)이다. 그는 나중에 피이노 반주를 오케스트라 반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오페라 La Nonne sanglante(피에 젖은 수녀)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외진 스크리브의 대본이었다. 그러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1841년 11월, 그는 작곡은 잠시 미루어두고 그동안 그가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하여 책자로 내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REvue et gazette musicale 지에 게재했던 16개의 글을 한데 모아 출판했다. 오케스트레이션, 즉 관현악 기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책자는 1843년에 그의 명저인 Treatise on Instrumentation(기악법)의 바탕이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1840년대에 프랑스에서보다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생활비를 위해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지만 생각보다 넉넉한 돈을 손에 쥐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지휘를 하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리 콘서트에서는 기획사들이 그나마 너무 많이 챙겨가는 바람에 베를리오즈에게 돌아오는 액수는 적었던 것이다. 그는 1842년에 브뤼셀로부터 시작하여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여 지휘하기 시작했다. 1842년과 1843년에는 독일의 12개 도시에서 지휘를 했다. 프랑스보다도 오히려 독일에서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의 작품이 가히 혁명적이기도 했지만 그의 지휘 스타일이 크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베를리오즈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독일 순회 연주회를 가지면서 멘델스존과 슈만을 라이프치히에서 만났고 바그너를 드레스덴에서 만났으며 마이에르베르를 베를린에서 만나서 즐거운 친분을 새롭게 했다.


이때 쯤해서 베를리오즈와 해리엣의 결혼생활은 파탄의 길로 가고 있었다. 해리엣은 베를리오즈가 날로 명성을 더해가는데 반하여 자기의 이름은 점차 시들어가고 있는 것을 크게 속상해 했다. 그러한 때에 베를리오즈는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Marie Recio)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해리엣은 베를리오즈에 대한 집착이 의심으로 변했고 마침내 질투로 달려갔다. 이와 함께 해리엣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해리엣의 의심은 현실로 다가왔다. 1841년에 레치오는 베를리오즈의 공공연한 애인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레치오는 베를리오즈의 독일 순회연주에 동행하였다. 베를리오즈는 1843년 여름 쯤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곡에 전념하여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두 작품을 완성했다. 하나는 Le carnaval romain(로마의 사육제)이다.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의 음악을 상당 부분 재사용한 것이다. 또 하나는 Le corsaire(해적)이다. 바이런의 시를 참고로 삼은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La tour de Nice(니스의 탑)이었다. 그리고 1843년도 저무는 때에 마침내 베를리오즈와 해리엣은 별거에 들어갔다. 베를리오즈는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해리엣은 몽마르트의 원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베를리오즈는 레치오와 함께 파리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베를리오즈와 해리엣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루이는 루앙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베를리오즈의 두번째 부인이 된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


베를리오즈는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외국 순회연주로 명성을 드높혔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예술적 경지는 더욱 완숙해졌고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 연주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가정 문제는 비참해졌다. 한때 그는 아예 드레스덴에 정착해서 살 생각도 했다. 런던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파리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L Damnation de Faust(파우스트의 겁벌)이었다. 이 작품은 1846년 12월 파리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예상 외로 청중들이 적게 왔다. 연주회장은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평론은 이 작품이 말할수 없이 뛰어난 작품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높은 수준의 로맨틱 주제는 당시에 별로 환영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술에 대한 개념이 작곡자인 베를리오즈와 파리 대중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의 겁벌'의 실패로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듬해의 러시아 순회연주에서 상당한 사례를 받았기 때문에 빚을 갚을수 있었다. 이밖에도 그는 1840년대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공화국), 독일 등지에서 지휘를 했다. 그후에 그는 영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무려 다섯번이나 갔었다. 첫번째 방문 때에는 무려 7개월이나 영국에서 보냈다. 그에 대한 런던의 환영을 열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는 별로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임프레사리오인 지휘자 루이 앙투안 줄리앙이 관리를 잘못해서였다.


베를리오즈는 1948년 9월 중순에 영국에서 돌아왔다. 그 때에 해리엣은 몇번이나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런 후에 해리엣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간병인이 매달려 있어야 했다. 베를리오즈가 간병인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베를리오즈는 비록 별거상태에 있지만 파리에 있을 때에 몽마르트의 해리엣을 자주 방문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번도 찾아 갔었다.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해리엣은 불구의 몸으로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채 몇 년을 더 연명하다가 1854년에 숨을 거두었다.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의 겁벌'이 실패로 돌아간 후 거의 8년 동안 작곡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Te Deum(테 데움)을 비롯해서 몇개의 소곡들을 작곡했을 뿐이었다. '테 데움'은 1849년에 완성했지만 출판된 것은 훨씬 후인 1855년이었다. '파우스트의 겁벌'과 대서사시인 Les Troyens(트로이 사람들: 1856-1858) 사이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작품은 종교적 3부작인 L'Enfance du Christ(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이었다. 이 작품은 그가 1850년부터 작곡에 착수한 것이다.  


'파우스트의 겁벌'의 한 장면. 마르게리트와 파우스트. 글린드본


베를리오즈는 1851년에 런던에서 열리는 대박람회에 국제악기심사위원의 일원으로 초청을 받아 갔다. 이어 그는 1852년과 1853년에도 런던을 방문했다. 지휘를 하기 위해서였다. 런던의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다만, 코벤트 가든의 무대에 올린 '벤베누토 첼리니'는 단 1회의 공연을 끝으로 더 이상 막을 올리지 못했다. 이 오페라는 같은 해에 라이프치히에서도 공연되었다. 리스트가 주선한 공연이었다. 이 때에는 비교적 성공이었다. 아무튼 1840년대에 그는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지휘자로서 모습을 보였고 대체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854년 3월 3일에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해리엣이 세상을 떠났다. 해리엣은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베를리오즈는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완성했다. 그리고 마리 레치오와 마침내 결혼했다. 아들 루이가 못마땅해 했지만 베를리오즈는 이미 마리와 오랫동안 동거해 왔는데 결혼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여 이해를 얻었다. 이제 '트로이 사람들'이 등장할 차례이다. 1856년에 베를리오즈는 독일에서 순회연주를 했다. 이때 리스트와 그의 동반자인 캐롤린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Carolyne zu Sayn-Wittgenstein)이 베를리오즈에게 비르질의 2이니아드(Aeneid)를 바탕으로 삼아 오페라를 작곡해 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베를리오즈는 오래전부터 비르질의 대서사시에 매료했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대본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휘로 바쁘지 않을 때에는 Les Troyens(트로이 사람들)의 작곡에 전념했다. 1858년에 베를리오즈는 프랑스학사원(Institut de France)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던 자리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베를리오즈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걸작인 '트로이 사람들'을 완성했다. 그러나 너무나 대작이어서 선뜻 공연하겠다고 나서는 극장이 없었다. 베를리오즈는 무려 5년이나 무대를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해리엣 스미슨. 1854년 3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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