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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목적은, ‘구원’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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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인초펌글/신학얘기

2020. 6. 1.

(출처)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argo3357&logNo=221962083486&redirect= Dlog&widgetTypeCall=true&fbclid=IwAR15RMCDhzR7uMjiEAK4uhtljMhtKbdpAC1KYhCxD98pQSfpIuINEDodgpQ

 

‘창조’의 목적은, ‘구원’에 있지 않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은 기독교 신앙을 성경과 분리하여 이뤄지는 행위 공로의 종교로 변질시켜 놓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기독교를 계승하여 형성된 개신교회는, 행위 공로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다시 성경과 그에 근거하는 통상적인(ordinary) 믿음의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 매장시키려는 사단의 획책은 개신교 진영 안에 비 진리의 사상들을 퍼뜨림으로서 다시 성경의 진리가 함몰되도록 했는데, 대표적으로 ‘재세례주의’(Anababtism) 및 ‘정적주의’(Quietism)자들의 등장 가운데서 성경의 진리는 또 다시 쉽게 이해하거나 분간하기 어려운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로마가톨릭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 오류에 빠짐으로서 진리를 희석시켜 더욱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수행한 종교개혁 진영 내의 오류들을 정확히 견제하는 안목이 또한 요구된다.

☆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이 그림의 제목을 흔히 '천지창조'로 소개하지만, 사실 원래의 제목은 '아담의 창조'(Creazione di Adamo)다. 이는 천정에 그려진 창세기의 일련의 내용들을 그린 그림의 일부로서의 제목이다.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회의 신앙의 특성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따라 분류될 수가 있다. 즉, 오직 성경의 진리를 표준으로 하는 개신교 신앙과 성경 외에 로마가톨릭교회(성경 외의 전통들을 중심으로 하는)를 원천으로 하는 종교로서의 차이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톨릭 외에 재세례주의나 정적주의 등 종교개혁 진영 내의 오류들 가운데서 형성된 이단적인 분파들-재세례주의나 정적주의자들은 스스로 정통교회와의 분리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분명 분파들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과 구별되는 개신교회의 신앙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원리 외에도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사실 정적주의나 재세례주의의 사상들은 종교개혁시대 이전에, 이미 로마가톨릭의 미신적인 종교형태 가운데서부터 그 포자(spore)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가톨릭에 반대하는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급격히 싹을 틔우게 되었는데, 특히 ‘정적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말씀과 크게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형성된 가벼운 신비주의적 성향-그러나 그 폐해는 아직까지도 개신교 진영 안에 그 영향을 뿌리깊게 박고 있다-이었는데 반해, ‘재세례주의’는 성경말씀을 받되 주로 신약성경만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서 정적주의와 유사한 내적인 감흥을 추구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므로 재세례주의자들은 주로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아울러, 성령의 내적 조명을 인간중심으로 추구하는 특징을 보였다. ​

그러나 종교개혁을 올바르게 계승한 개신교 진영에서는 전체 성경의 원리에 따라 신‧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고 따르는 신앙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 성경 진리의 확실한 초점을 빗겨간 자들은 정적주의자들이나 재세례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직 성경의 원리와 함께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추구했던 개혁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차츰 미묘한 선에서 초점이 틀어지기 시작했으니, 아주 구별하기 어려운 주제인 ‘구속사’(redemptive history) 중심의 복음주의적 역사해석을 일관하는 ‘구속사학파’(History of God's Salvific Act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계몽주의 시대라고도 함축할 수 있는 18세기 이후, 19세기 들어서면서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에서 거의 완전하게 이탈해버렸는데, 그러한 이탈 가운데서 다시 신학의 건전성을 확립해보려는 시도로서 성경연구에 있어서 과학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을 도입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게 고조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비평학자들은 성경이 사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정리됐다. 즉, 성경에 기록된 ‘구속역사’(‘Heilsgeschichte’라고도 칭한다.)와 실제 현실의 역사(history)를 분리해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상당수의 개신교의 신앙 가운데서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구속(혹은 구원)사 중심의 신앙이 개신교 신앙의 핵심진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개신교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개혁신앙 혹은 정통주의 신앙의 핵심은 그것과는 분명한 심도의 차이를 지닌 것으로, 이미 17세기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 도출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그 입장이 정리되어 공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제8장에서야 비로소 언급되며, 제7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다뤄질 뿐 아니라 심지어 창조 자체도 제4장에서 다뤄지는 내용으로서 그 이전에 제3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다뤄지고, 심지어 그조차도 제2장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관한 고백 다음에야 다뤄져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확고히 정립된 개혁신앙의 틀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며, 그러한 원천적 근거가 바로 제1장에서 다루는 성경에 대한 신앙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틀이 의미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어 주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large)교리문답과 소(short)교리문답이다. ​

특히 소교리문답은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러한 질문과 답변은 한마디로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의 원리에 근거한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그러한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비로소 완성된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개혁의 원리 가운데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다. 따라서 오직 성경의 원리와 전체 성경의 원리 가운데서 파악되는 중요한 성경의 원리이자 요지가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의 취지로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넘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데에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속사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신학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은 분명 유효하고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이지만, 그것 자체로 최종적인 신앙의 지점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할(beyond) 신앙의 확보점이다. 바로 그러한 확보점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내용인 ‘예정’(predestination)에 거의 최종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신학 가운데서, 인간의 구원과 피조물들의 회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의 하나일지언정 결코 목적 자체가 아니다. ​

최근에 개신교 신학에 꽤 큰 파장을 일으킨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관한 대립각, 즉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에 반대하는 ‘유보(留保)적’, 혹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 칭의’의 개념도, 사실은 구원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성경해석과 설교로 인한 지나친 치우침 가운데서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성경의 요지로서의 신적 작정에 근거하는 ‘칭의’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신학과 신앙이 뿌리내린 상황이었다면, 그런 비판(유보적 혹은 종말론적 칭의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은 사실상 어필(appeal)하기 어려웠을 것(물론 더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이다. ​

결국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따른 바른 신앙의 내용은 인간의 구원에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들을 택하실 뿐 아니라 또 어떤 자들을 유기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의 작정 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확고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치는 그 이전까지의 정통신학의 맥락을 최대한 계승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새롭게 시작된 신학 분파로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큰 특징이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전까지의 신조들의 틀을 최대한 계승하며 확립하는 형식인 것이다. 반면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후의 신학의 흐름들에서는 정통주의에 대한 재해석 및 새로운 해석이 널리 시도되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에 따른 바른 신앙의 내용이 인간의 구원에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어떤 자들을 택하실 뿐 아니라 또 어떤 자들을 유기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의 작정 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구체적인 신앙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인간의 창조목적과 관련한 교리문답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영광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는 것이 영광돌림의 기본적인 바탕이다.

★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의 그림 ‘베드로의 순교’ ,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있는 이 그림은, 십자가에 거꾸로 메어 달리는 죽음을 택한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는 그림이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바로 달리기를 거부한 것에서 암시되듯,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의 무한한 깊이를 내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으로서는 십자가의 사역조차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창조의 목적을 인간의 구원에 집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되돌려 드릴 수가 있는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칼뱅의 제네바 교리문답이 명료하게 제시하는데, 칼뱅의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사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것들의 기원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과 관련한 개념들조차도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사실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지식들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로 ‘계시’(revelation)다. 그러므로 계시라는 말 자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원리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혹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그 어떤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계시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혹은 종교)과 반대되는 일반적이고도 자연적인 신앙(자연종교)의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의 추구와 탐구로서, 그런 것은 얼핏 계시를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계시에 역행한다. 반면에 참된 신앙과 종교는 그 모든 바탕과 출처를 철저히 하나님께 두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지식의 유일한 출처를 하나님께로 두는 가장 기본적인 계시의 원리를 전제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탐구하고 추구하는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근원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기에 그런 지식이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바로 그러한 전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보자면 인간이 추구하는 지식과 이해 자체도 일종의 계시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계시의 성격을 일컬어 ‘일반계시’(혹은 자연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롬 1:18-23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바로 그처럼 우리의 의지에서부터 기원하는 모든 지식의 방편들과 지식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

뿐만 아니라 로마서는 그러한 바탕 가운데서 ‘율법’과 ‘믿음’을 언급하는데, 율법의 준행과 믿음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서 유래하는 한에서는 모두 일반계시와 마찬가지 맥락에서의 한계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롬 3:28)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고 했으니, 의와 믿음의 원천 또한 “일한 것이 없이……의로 여기”(롬 4:6)시는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과 그 가운데 있는 창조의 목적, 즉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작정의 내용을 가감(adjust adjustment) 없이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기본이요 최고인 지식임을 알 수 있다. ​

물론 섭리를 포함한 모든 일들의 원인은, 단편적인 한 원인의 체계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작정 혹은 예정에 대하여 오해하는 많은 경우들처럼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안에서 필연의 줄로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들의 자원하는바 능동적이고도 고의적인 자발성이라는 것에 전혀 결속점이 없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2원인 가운데서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엮여져 있지만, 그러한 고정줄은 결코 제1원인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시작 뿐 아니라 성취와 완성에 이르는 모든 일들을 시간적 순서나 필연성에 상관이 없이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함께(동시에) 이미 하나님께로 돌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시간의 역사들 가운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확신하는 바로서의 굳건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지식 가운데서 우리들은 영광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떠나서 돌리는 모든 영광의 모사-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우리에게서 기원하는 모든 껍데기들-들은,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에 다름이 아니다. ​

신적 작정 가운데서의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을 아는 깊은 지식이 결여된 섣부른 실천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는커녕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우상으로 바꾸”(롬 3:23)는 종교적 폐역이며,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라고 한 사도 바울의 선포는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와 동일한 울림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로서는 그 모든 사실을 성경계시 가운데서 분명하게 깨닫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되돌리는 영광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약 1:5절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구하는 것)를 촉구하는 말씀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두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끝은, 우리들의 헌신이나 수고의 촉구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절)이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다. 그 앞에서 우리의 헌신이나 수고는 마땅히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눅 17:10)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