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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마신 2011. 11. 7. 04:46


목은문고 제15권  
 
 비명(비명)
 
고려국(고려국) 증(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삭방도만호겸병마사) 영록대부(영록대부) 판장작감사(판장작감사) 이공(이공)의 신도비명(신도비명) 병서(병서)
 

전주 이씨(전주이씨)는 대성(대성)이다. 신라(신라)의 아간(아간) 휘(휘) 광희(광희)가 사도(사도)인 삼중대광(삼중대광) 입전(입전)을 낳고, 사도가 긍휴(긍휴)를 낳고, 긍휴는 염순(염순)을 낳고, 염순은 승삭(승삭)을 낳고, 승삭은 충경(충경)을 낳고, 충경은 경영(경영)을 낳고, 경영은 충민(충민)을 낳고, 충민은 화(화)를 낳고, 화는 진유(진유)를 낳고, 진유는 궁진(궁진)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대장군) 용부(용부)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내시집주) 인(린)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시중) 문공(문공) 휘 극겸(극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장군) 양무(양무)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상장군) 이공 강제(이공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안사 목조(목조))를 낳았다.
안사는 성격이 호방하여 사방을 경영해 보려는 뜻을 지녔다. 일찍이 의주(의주 덕원(덕원)의 옛 이름)의 장관이 되어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인척(인척)과 관계된 일로 그만두고는 강릉부(강릉부) 삼척현(삼척현)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이는 그곳의 풍토(풍토)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중원(중원)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씨(몽고씨)에게 벼슬하여 남경(남경) 오천호소(오천호소)의 다루가치(달로화적)가 되었다. 다루가치가 천우위 장사(천우위장사) 이공(이공) 휘 공숙(공숙)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천호) 행리(행리 익조(익조))를 낳으니, 행리가 부친의 직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원 세조(원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하자 천하의 병선(병선)이 모두 해동(해동)으로 집결하였다. 이에 우리 충렬왕(충렬왕)이 중신(중신)을 보내어 큰 전함을 건조(건조)하게 하는 한편, 명장(명장)을 선발하여 정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일본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남경(남경)의 천호(천호)도 조정의 명을 받들고 와서는 충렬왕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두 번 세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경(경)은 본래 사족(사족) 출신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지금 경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천호(천호)가 등주(등주)의 호장(호장)인 최공(최공) 휘 기열(기열)의 딸에게 장가들어 증(증) 찬성사(찬성사) 춘(춘 도조(도조))을 낳았다. 찬성사가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우리나라의 조정에 들어오자, 충숙왕(충숙왕)이 은상(은상)을 더욱 풍성하게 내렸으니, 이는 그의 충성심을 북돋우기 위함이었다. 찬성사가 증 문하시중(문하시중) 박공(박공) 휘 광(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바로 공에게 고비(고비)가 된다.
공의 휘는 자춘(자춘 환조(환조))이요 자(자)도 자춘(자춘)이다. 7, 8세 무렵부터 벌써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더니, 점점 자라나면서는 말 타고 활 쏘기를 또 잘하였는데, 부친의 직책을 이어받자 사졸(사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부(귀부)하였다. 지정(지정) 을미년(1355, 공민왕4)에 선왕(선왕)을 알현하자, 선왕이 이르기를 “그대의 조부와 그대의 부친이 몸은 비록 국외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왕실에 두고 있었으므로, 나의 조고(조고)께서 실로 총애하며 가상하게 여기셨다. 이제 그대도 그대의 조고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 나 역시 그대를 완전하게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였다.
쌍성(쌍성 영흥(영흥)의 옛 이름)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서 관리들의 행정력이 그다지 철저하게 미치지 않았을뿐더러, 땅이 비옥하여 인구가 날로 번성하였으므로, 우리 동방의 남쪽 백성들 가운데 생활 터전이 없는 자들이 그곳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국가에서 이런 사실을 원(원)나라의 중서성(중서성)에 알리자, 성지(성지)를 받든 차관(차관)이 왔고, 요양성(요양성)에서도 차관이 왔다. 이에 선왕이 성(성 정동행중서성(정동행중서성))의 낭중(랑중) 이수산(이수산)을 급히 보내 그들과 만나서, 신구(신구)의 호적(호적)에 편입된 백성들을 분간(분간)하게 하였으니, 이를 일러 ‘삼성조감호계(삼성조감호계)’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이 타당성을 잃은 나머지 시간이 갈수록 그곳을 떠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그곳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는 몇 대에 걸친 충성심을 보상하여 상을 내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을 되찾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병신년(1356, 공민왕5) 봄에 공이 조정에 오자, 선왕이 영접하며 이르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하였다. 이때에 기씨(기씨 기철(기철)) 일당이 반란을 꾀한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왔는데, 쌍성의 관리 중에도 연루된 자가 나왔다. 이에 선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은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라도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명령한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한 뒤에, 재신(재신) 유인우(유인우)에게 명하여 쌍성에 가서 잔당(잔당)을 소탕하도록 하면서, 평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유시(유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인우가 쌍성의 경계에 도착한 뒤에도 머뭇거리기만 할 뿐 감히 전진하지 못하자, 상이 공에게 소부윤(소부윤)을 제수하고 중현대부(중현대부)의 품계를 내린 뒤에, 병마 판관(병마판관) 정신계(정신계)를 통해서 공에게 내응(내응)하도록 유지(유지)를 전하였다. 공이 왕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로 군사들에게 떠들지 못하도록 하무를 물리고 행군하여, 유인우의 군대와 합세한 뒤에 소생도경(소생도경)을 축출하니, 소생도경이 처자도 버려둔 채 밤에 도망을 쳤다. 이에 상이 명하기를 “쫓아낼 자를 쫓아냈으니, 이제 남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 백성이다. 서로들 해치지 말고 서로들 모질게 굴지 말라.” 하니,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하면서 음식물을 들고 나와 군사들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의 주현(주현)들도 모두 옛 이름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고주(고주), 요덕(요덕), 장평(장평), 원흥(원흥), 정주(정주), 함주(함주)가 바로 그것이다.
9월에 공의 품계를 태중대부(태중대부)로 올리고 사복경(사복경)으로 벼슬을 옮겨 주는 한편, 개경(개경)에 저택을 하사하여 그대로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천우위 상장군(천우위상장군)으로 승진하면서 통의대부(통의대부)와 정순대부(정순대부)로 가자(가자)되었다. 이해에 내가 간의대부(간의대부)가 되어 조정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주사(주사)를 칠한 듯 붉고 윤이 났으며 수염이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감히 자리를 건너가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공의 그 풍채만큼은 아직도 나의 마음과 눈 속에 남아 잊혀지지가 않는다.
경자년(1360, 공민왕9) 봄 3월에 영록대부(영록대부)로 판장작감사(판장작감사)를 맡고 있다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나갔는데, 그해 4월 갑술일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부음(부음)이 전해지자 현릉(현릉 공민왕)이 그지없이 애도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곡(조곡)하는 한편, 예법에 따라 부의(부의)를 전하게 하였다. 사대부들도 공의 죽음을 듣고는 모두 놀라면서 “동북면(동북면)에 이제는 인물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함주) 동쪽 귀주(귀주)의 언덕에 안장(안장)하였다.
부인 최씨(최씨)는 삼한국대부인(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증 문하시중(문하시중) 영흥부원군(영흥부원군) 휘 한기(한기)의 딸이다. 아들의 이름은 성계(성계)인데,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 삼중대광(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판삼사사겸판전농사사상호군) 완산부원군(완산부원군)이다. 딸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 용원부원군(용원부원군) 조공 인벽(조공인벽)에게 출가하였는데, 지금 정화택주(정화택주)로 봉해졌다. 측실(측실) 이씨(이씨)는 아들 원계(원계)를 낳았는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추충절의보리공신) 중대광(중대광) 완산군(완산군)이다. 김씨(김씨)는 아들 화(화)를 낳았는데, 지금 성근보조공신(성근보조공신) 봉익대부(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동지밀직사사상호군)이다.
판삼사공(판삼사공)의 전부인(전부인)은 밀직 부사(밀직부사)로 치사(치사)한 한공(한공) 휘 경(경)의 딸인데, 원신택주(원신택주)에 봉해졌다. 부인이 낳은 아들로, 방우(방우)는 전 예의 판서(례의판서)이고, 방과(방과)는 추충여절익위공신(추충려절익위공신) 봉익대부(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지밀직사사겸군부판서응양군상호군)이고, 방의(방의)는 중정대부(중정대부) 신호위 대호군(신호위대호군)이고, 방간(방간)은 전 군기 소윤(군기소윤)이고, 방원(방원)은 통직랑(통직랑) 예의정랑 지제교(례의정랑지제교)이고, 방연(방연)은 종사랑(종사랑) 성균 박사(성균박사)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후부인(후부인)은 판삼사사 강공(강공) 휘 윤성(윤성)의 딸인데, 부인이 낳은 아들로는 고공 좌랑(고공좌랑)인 방번(방번)과 군기 녹사(군기녹사)인 방석(방석)이 있으며, 딸은 대호군(대호군) 이제(이제)에게 출가하였다.
용원부원군(용원부원군)의 아들 경(경)은 진사(진사)이고, 후(후)는 액정 내알자(액정내알자)이고, 그 밖에 사(사), 부(부), 보(보), 백(백)은 모두 어리며, 장녀는 미혼(미혼)이고, 차녀는 내부 부령(내부부령) 임맹양(임맹양)에게 출가하였다. 완산군(완산군 원계(원계))은 두 번 장가들었다. 문씨(문씨) 소생의 아들로, 양우(양우)는 전 사복 정(사복정)이고, 천우(천우)는 전 호군(호군)이며, 딸은 전 중랑장(중랑장) 이인우(이인우)에게 출가하였다. 김씨(김씨) 소생의 아들로, 조(조)는 진사(진사)이고, 서(서)는 전 낭장(랑장)이며, 딸은 생원(생원) 노신(노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딸 둘은 모두 어리다. 동지(동지 화(화))는 두 번 장가들었다. 안씨(안씨) 소생의 아들 지숭(지숭)은 전 연경궁 부사(연경궁부사)이다. 노씨(노씨) 소생의 아들로, 숙(숙)은 진사이고, 징(징)은 별장(별장)이고, 다음 아들 셋은 모두 어리고, 딸 하나도 어리다.
판서(판서)는 찬성사(찬성사) 지공(지공) 휘 윤(윤)의 딸에게 장가들어 복근(복근)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대호군)은 간성 군수(간성군수) 최인두(최인두)의 딸에게 장가들어 석근(석근)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소윤)은 판도 판서(판도판서) 민공(민공) 휘 선(선)의 딸에게 장가들어 맹중(맹중)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정랑(정랑)은 판전교시사(판전교사사) 민공(민공) 휘 제(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밀직 제학(밀직제학)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판삼사공이 와서 추밀원 부사(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삼사공이 지문하부사(지문하부사)를 제수받던 날에, 내가 사공(사공)으로 있다가 정당문학(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이에 현릉(현릉 공민왕)이 근신(근신)에게 하문하기를 “문신인 색(색)과 무신인 성계(성계)가 같은 날에 문하성(문하성)으로 들어왔는데, 조정의 여론은 뭐라고 하던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긍(자긍)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조정의 반열에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고 하겠지만, 나와 공의 우정이 마치 물처럼 담박하기만 하고, 오래되어도 서로가 공경하는 풍도를 보고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감히 공의 부친을 나의 부친처럼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신도비(신도비)의 명(명)을 짓게 되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전주 이씨 족보를 살피건대 / 아고이씨보
신라의 대아간으로부터 비롯되어 / 신라대아간
부민한 이들이 관장을 한 그 뒤에도 / 부민기관장
후한 봉록의 고관들이 많이 나왔어라 / 무사다고관
오마의 수레 타고 삭방으로 나가서는 / 오마유삭방
위엄과 은혜 조화된 선정을 펼치다가 / 위혜내병창
풍토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나니 / 류거낙토풍
삼척 땅이 마치 고향과 같았어라 / 삼척여고향
뜻이 어디 있었던가 중원의 벼슬 / 지욕사중원
몸을 떨쳐 원나라로 망명했나니 / 정신귀대원
오천호소의 다루가치 명을 받고서 / 수명장천부
대대로 덕 베풀자 백성들이 사모했네 / 세덕민회은
공경하는 자세로 옛 임금을 섬기면서 / 온공사구군
얼마나 근실하게 문안 인사 드렸던가 / 조빙하근근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한 일 / 보본우반시
세상을 일깨우며 공을 또 세웠다오 / 경속잉수훈
우리 시중공이야 더 말할 게 있으리요 / 신아시중공
현릉께서 그 충성심 크게 상을 내렸는데 / 현릉대상충
하늘이 어찌 그렇게도 빨리 데려갔나 / 천호탈지극
인간의 운명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네 / 숙사인궁통
시중공을 계승하신 우리 판삼사는 / 유사판삼사
공과 명성 한 시대의 으뜸이시요 / 공명관일시
자손들도 모두가 귀하게 현달하였으니 / 자손진귀현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것을 또 알겠네 / 천도비무지
뿌리가 굳건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 본고지필무
근원이 심원하면 멀리 흘러내리는 법 / 원원류사장
비명 지은 졸렬한 솜씨 부끄럽긴 하오마는 / 명시괴아졸
밝게 빛나는 그 덕만은 천년토록 드리우리 / 천재수경광

전주 이씨(전주이씨)가 삭방(삭방)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의 분묘(분묘)에 대한 기록
 

홍무(홍무) 정묘년(1387, 우왕13) 겨울에 지금의 시중공(시중공 이성계(이성계))이 선고(선고)인 시중(시중) 만호공(만호공 이자춘(이자춘))의 신도비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이듬해 봄에 길일(길일)을 택해서 2월 을축일에 묘역에다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공이 또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족보 가운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선생이 모두 기록해 주셨다. 그런데 그 분묘가 허물어져서 평지가 되었으므로 어떻게 알아볼 길이 없으니, 어찌 슬픈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5대조 할아버지인 천호공(천호공)께서 삭방으로 거처를 옮기신 뒤로는 연대(연대)가 조금 가까운 관계로 분묘의 위치를 모두 알 수가 있다. 지금 만약 비석 뒤에다 이런 사실을 새겨 놓지 않는다면, 오늘날 내가 슬퍼하는 것처럼 우리 자손들이 슬퍼하게 되지나 않을까 또 걱정된다. 그러니 선생께서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한다.” 하였는데,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료를 살펴보건대, 천호공의 분묘는 알동창(알동창 알동은 경흥(경흥)의 옛 이름)에 있는데, 현재 개원로(개원로 요양(요양)의 관할 구역)에 속해 있다. 증조인 증(증) 찬성사(찬성사)의 분묘는 안변부(안변부)에 있는데, 지금 서곡(서곡)의 북쪽 언덕에 해당한다. 증조비(증조비) 최씨(최씨)의 분묘는 문주(문주 문천(문천)의 옛 이름) 초한리(초한리) 동쪽에 있다. 조부인 증 시중(시중)의 분묘는 함주(함주 함흥(함흥)의 옛 이름) 동쪽 운천동(운천동)에 있고, 조비(조비) 박씨(박씨)의 분묘는 함주 남쪽 송원(송원)의 동쪽에 있다. 고(고) 증 시중 만호공의 분묘는 함주 동쪽 귀주동(귀주동) 언덕에 있고, 비(비) 부인 최씨(최씨)의 분묘는 그 아래에 있다.
아, 시중공의 마음 씀씀이가 그야말로 주도면밀하면서도 심원하다고 하겠다. 위로는 조종(조종)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전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의 효심을 일깨워 줌으로써, 백성들의 덕이 날이 갈수록 더욱 두터워지게 하고 국가의 운세가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롭게 되도록 하는 일이 바로 공의 이 일에 달려 있다고도 할 것이니, 어찌 중하게 여겨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렇게 적는 바이다.

유원(유원) 봉의대부(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정동행중서성좌우사랑중) 고려국(고려국) 단성좌리공신(단성좌리공신) 삼중대광(삼중대광) 흥안부원군(흥안부원군)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시(시) 문충공(문충공) 초은(초은) 선생 이공(이공)의 묘지명(묘지명) 병서(병서)
 

원(원)나라가 일어난 지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진사과(진사과 회시(회시))에 급제해서 재상(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우리 고려(고려)의 경우는 회시(회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인원이 1인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회시에 급제하고 원나라의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한 끝에 대부(대부)의 지위에까지 이른 사람은, 오직 초은(초은) 선생과 우리 부자(부자)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위는 모두가 동성(동성 정동행중서성)의 낭중(랑중)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거가(거가)가 북쪽으로 파천(파천)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는 또 병에 걸려 6년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병이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에, 선생이 내 집에 들러서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 계시다가 떠났는데, 그 뒤로 몇 달이 지나서 그만 선생이 별세하였으므로, 내가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기고 있다.
선생의 장손(장손)인 밀직 대언(밀직대언) 존성(존성)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저의 조부님과 함께 문묵(문묵)을 쥐고 의논하신 기간이 누구보다도 가장 많으니, 저의 조부님을 아는 이로는 지금 세상에 공만한 분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저희 조부님의 묘지명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죽고 사는 것은 명(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선생보다 먼저 죽었거나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내가 곧바로 뒤따라서 죽었다면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나의 병이 지금 다행히도 조금 차도를 보이고 있는데, 선생의 묘지명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씨)요, 휘(휘)는 인복(인복)이요, 자(자)는 극례(극례)이니, 경산부(경산부) 사람이다.
증조 휘 장경(장경)은 공손하고 검소한 데다 위엄을 또 갖추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면서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벼슬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거조(거조)를 취할 때마다 서로들 돌아보면서 “우리 공이 들으시면 마음속으로 옳지 못하다고 하지나 않겠는가.” 하였고, 또 실제로 잘못된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이 반드시 글을 보내 절실하게 꾸짖어 주곤 하였다. 노년에 이르러 집에 있을 적에도 부(부)의 관원이 갈도(갈도)하며 행차하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의자에서 내려와 땅에 엎드렸다가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뒤에야 다시 제자리에 앉곤 했다 한다.
증조는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인 백년(백년)은 모관(모관)의 벼슬을 지냈다. 둘째 천년(천년)은 모관의 벼슬을 지냈는데, 요양성 참지정사(요양성참지정사)인 휘 승경(승경)을 낳았다. 손자가 귀하게 된 덕분에 증조 역시 모관에 추증되었다. 셋째 만년(만년)은 모관의 벼슬을 지냈다. 마지막 아들이 바로 조년(조년)인데, 이분이 선생의 조부로서 관직이 정당문학(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시호(시호)는 문열(문열)이다. 선생이 평소 한가로이 거할 적에는 말씀을 할 때마다 반드시 증대부(증대부)인 호장공(호장공)을 일컫곤 하였으며, 또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부께서는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셨고, 남의 위급한 처지를 보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천성적으로 급히 달려가서 구하셨으므로, 내가 종신토록 사모하면서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문열은 나이가 약관(약관)이 되기도 전에 풍채가 준수하고 기상이 늠름하였다. 그래서 초계(초계) 정윤의(정윤의)가 부사(부사)로 부임했을 적에 공을 한 번 보자마자 비범한 인재임을 알아채고는 자기의 딸을 공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로 명성이 날이 갈수록 중해졌다. 공이 충혜왕(충혜왕)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왕도 공을 어렵게 여겨서 꺼릴 정도였는데, 공이 들어올 때면 왕이 신발 소리만 듣고서도 “이모(이모)가 온다.” 하고는,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용모를 바르게 하고서 공을 기다리곤 하였다.
기묘년의 변란 때에 문열(문열)이 왕을 따라 경사(경사)에 가서는 이익재(이익재 이제현(이제현))에게 부탁하여 대신 글을 쓰게 한 뒤에 승상부(승상부)에 가서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승상(승상 백안(백안))이 실각하는 바람에 그 글을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이 일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여 몸을 옹송그리면서 “담(담)이 몸보다도 크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공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그 뒤 원(원)나라에서 풀려나 고려로 돌아와서 공신(공신)을 녹훈(녹훈)할 적에 공은 추밀(추밀)의 관작을 얻게 되어 있었으나, 왕이 이르기를 “이모가 늙기는 하였으나 그 뜻이 가상하다.” 하고는 정당문학(정당문학)을 제수하였다.
어느 날 왕이 동쪽의 송강(송강)에서 탄궁(탄궁)으로 참새 잡는 놀이를 벌이자, 공이 곧장 왕의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벌써 명이(명이)의 시절을 잊으셨습니까. 뭇 소인들과 어울려서 하찮은 놀이나 즐기신다면, 이는 종묘를 받드는 도리가 못 됩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그지없이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마음속으로는 대단히 성이 났으나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고서 부드러운 말로 치사(치사)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공이 집으로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왕의 나이가 지금 한창때라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제멋대로 행하고 있는데, 나는 이미 늙어서 도움을 줄 수도 없으니, 만약 떠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주 바른말을 아뢰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면, 그 책임이 돌아갈 데가 분명히 있다고 하겠지만, 지금 내가 왕의 미덕을 선양하지는 못한 채 그저 왕의 잘못만 불어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의 도리가 못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떠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이튿날 필마(필마)로 고향에 돌아가서 종신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의 부친은 휘가 포(포)이다. 순후한 장자(장자)의 인품을 지닌 분으로서 성재(성재)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어떤 일이든 예법(예법)에 맞게 행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장남은 바로 선생이고, 다음은 지금의 시중공(시중공)으로 이름이 인임(인임)이고, 다음 모(모)는 병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다음 모와 모는 모두 지위가 추밀(추밀)에 이르렀다.
선생이 천성적으로 우애(우애)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아우들도 선생을 매우 깍듯이 모셨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위걸(위걸)스러웠으며, 조금 커서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는 행동거지가 노성(노성)한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문열공(문열공)이 항상 공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자는 바로 너희들 백중(백중)이다.” 하였는데, 중(중)은 시중공을 가리킨다.
선생의 나이 19세 되던 태정(태정) 병인년(1326, 충숙왕13)에, 판서(판서) 신천(신천)이 감시(감시)를 주재하고, 길창군(길창군) 권공 준(권공준)과 밀직(밀직) 박공 원(박공원)이 지공거(지공거)를 맡았는데, 선생이 한 번 응시하여 잇따라 급제를 하고는 이듬해 3월에 복주 사록(복주사록)으로 조용(조용)되었다. 기사년(1329, 충숙왕16)에 교감 전교(교감전교)가 되고, 이듬해에 또 전의 직장(전의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은 문장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널리 상고하지 않으면 극치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붓을 잡고서 글을 지을 때면 다시 고치고 손질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득의(득의)의 작품을 얻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꺼내어 보여 주곤 하였다. 그 글을 보면 표현이 엄밀하고 뜻이 심오하여 한 시대에 우뚝 으뜸이 될 만하였으며, 일을 서술하고 경물(경물)을 읊으면서도 가끔씩 풍자하는 뜻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지원(지원)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에 역사와 문한(문한)을 담당하는 이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직장(이직장)의 문학은 고아(고아)하고 고풍(고풍)스럽다. 그러니 어찌 천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에게 예문 수찬(예문수찬)이 제수되었다. 기묘년에 춘추 공봉(춘추공봉)으로 승진하였다가 경진년에 첨의 주서(첨의주서)로 옮겼다. 지정(지정) 신사년(1341, 충혜왕 복위 2) 봄에 승봉랑(승봉랑)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감찰 규정(감찰규정)이 되었다. 5월에 좌정언 지제교(좌정언지제교)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통직랑(통직랑)의 품계로 오르면서 전의시승 지제교(전의사승지제교)를 맡았다. 가을에 정동(정동)의 향시(향시)에 제2명(명)으로 급제하고, 겨울에 기거 사인(기거사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오년에 경사(경사)로 가서 회시(회시)에 급제하여 장사랑(장사랑)의 품계를 받고 대령로 금주 판관(대녕로금주판관)에 임명되었다. 공이 연경(연경)에 있을 적에 본국(본국)에서 관직을 우헌납(우헌납)으로 옮겨 주었다. 계미년에 재차 기거랑(기거랑)과 기거주(기거주)로 옮겨졌다. 갑신년에 명릉(명릉 충목왕(충목왕))이 즉위하고 나서 유신(유신)을 불러 예우하며 이르기를 “이모(이모)가 중국 조정의 과거에 급제한 지 지금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등급을 뛰어올려 발탁하지 않는다면, 어찌 문교(문교)를 숭상하는 나의 뜻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전리 총랑(전리총랑)과 사복 정(사복정)과 좌사의대부(좌사의대부)로 세 번 거듭해서 관직을 옮겨 주었고, 그때마다 지제교(지제교)와 춘추관 편수관(춘추관편수관) 등의 관직(관직)을 모두 겸임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왕이 이르기를 “내가 이모를 대우하는 것이 아직도 지극하지 못하다.” 하고는, 본 관직에다 밀직사 우부대언(밀직사우부대언)을 더 제수하였으며, 겨울에는 봉익대부(봉익대부)로 올려 판서 군부(판서군부)에 임명하였고, 또 이듬해에는 전리(전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그해 겨울 10월에 명릉이 이르기를 “이모를 이제는 크게 쓰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밀직 제학(밀직제학)으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선생에게 서연(서연)에서 진강(진강)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용모가 엄숙한 데다 언사(언사)가 간결하면서도 무게가 있었으므로, 명릉이 매번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송연(송연)해진다.”고 하였다.
이해에 선군(선군)인 가정공(가정공)이 충렬(충렬)ㆍ충선(충선)ㆍ충숙(충숙) 세 왕에 대한 실록(실록) 편찬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익재(익재 이제현(이제현)) 이 시중(이시중)과 근재(근재 안축(안축)) 안 찬성(안찬성)이 연도(년도)를 나누어 집필하게 되었는데, 공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봄에 밀직 부사(밀직부사)로 승진하고, 뒤이어 가을에 지사(지사)로 승진하였으며, 겨울에 다시 좌사(좌사)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1)에 정동행성(정동행성)의 도사(도사)에 제수되면서, 본국의 관직을 모두 그만두었다.
신묘년(1351)에 현릉(현릉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임진년 가을에 조일신(조일신)이 도당을 끌어모아 난동을 부리면서 한밤중에 황후(황후)의 오빠 기원(기원)을 죽이고는 왕궁에 들어와서 또 숙위(숙위)하는 근신(근신)들을 살해한 뒤에, 스스로 정승(정승)이 되어 내외(내외)를 호령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겁에 질려 떨기만 할 뿐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상이 선생을 은밀히 불러 하문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는데, 선생이 “신하의 신분으로서 감히 난동을 부렸으니, 여기에는 당연히 처벌할 형법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원(원)나라 조정의 위엄이 당당하여 그 법령이 분명하게 행해지고 있으니, 만약 머뭇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 허물이 상에게까지 미치게 될까 신은 걱정됩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조일신을 법대로 사형에 처하였다. 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상이 선생에게 글을 지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평소에 공을 중하게 여겨 크게 등용하려고 하던 차에, 이번 사건으로 면대(면대)를 하고 나서는 더더욱 공을 중히 여기게 되었다.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밀직 판사재시사(밀직판사재사사)가 되었다. 가을에 광정대부(광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정당문학진현관대제학지춘추관사상호군)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감찰대부(감찰대부)를 겸하였다. 을미년 봄에 선생이 정부(정부)의 관직을 사퇴하고 성산군(성산군)에 봉해졌으며, 가을에 다시 정당문학으로 복귀하였다. 겨울에 정동성 원외랑(정동성원외랑)을 제수받고 또 감찰대부를 겸하였다. 병신년에 관제(관제)를 새로 시행할 때 금자대부(금자대부)의 직첩(직첩)을 받고 예전처럼 정당문학 보문각태학사 동수국사 판한림원사(정당문학보문각태학사동수국사판한림원사)를 맡았으며, 또 어사대부(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이때 중국 조정에서 사면(사면)을 반포하기 위해 보낸 사신이 돌아가자, 표문(표문)을 올려 사은(사은)하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사은사에 적임자를 뽑기가 어려웠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재상(재상) 가운데 대체(대체)를 알고 절의(절의)를 지킬 사람을 찾는다면 이모(이모)만 한 이가 없다.” 하고는 선생에게 그 일을 명하자, 선생이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중국에 가서 상의 뜻에 걸맞게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정유년(1357, 공민왕6)에 감수국사(감수국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공거(지공거)가 되어 현재 정당문학으로 있는 염흥방(염흥방)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얻었다고 일컬었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상서 좌복야(상서좌복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외람되게 재주가 없는 몸으로 대간(대간)의 일을 섭행(섭행)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지만, 한 번도 조정의 기강을 떨쳐서 일으켜 세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상께 아뢰어 귀찮게 해 드릴 수가 없었고, 큰일에 대해서는 또 묘당(묘당)이 처리할 것이라서 중간에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도 아뢸 만한 것이 있지 않았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대간의 직책을 맡으면서부터 백관(백관)의 기강이 바로잡혀 숙연해졌으니, 선생의 겸손한 태도가 대개 이러하였다.
경자년에 참지중서정사(참지중서정사)에 임명되었다. 신축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적(사적 홍건적)이 침입하자, 조정이 남쪽으로 옮겨 우선 그 예봉(예봉)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시중공 이인임(이인임))과 함께 충주(충주)에 가서 상의 행차를 영접하고 배알(배알)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수행(수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경성(경성)을 수복하였다. 큰 병란(병란)을 치른 뒤끝이라서 모든 일을 급히 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상이 선생을 판개성부사(판개성부사)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첨의 평리(첨의평리)에 임명하였다가, 겨울에 중대광(중대광)으로 품계를 올려 삼사 좌사(삼사좌사)를 제수하였다.
계묘년(1363, 공민왕12) 봄에 도첨의찬성사(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승진하여 우문관 대제학(우문관대제학)과 감춘추관사(감춘추관사)가 되었으며, 단성좌리공신(단성좌리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갑진년에 흥안군(흥안군)에 봉해지고 판예문춘추관사(판예문춘추관사)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삼중대광(삼중대광)의 품계로 오르면서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도첨의찬성사판판도사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패라첩목아(패랄첩목아)가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승상(승상)을 내쫓고 자기가 대신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주달(주달)할 인물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에 상이 또 이르기를 “이모(이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중국에 들어가서 승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언사가 간결하고 분명한 데다 용모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므로, 승상이 여러 차례 선생을 눈여겨보더니, 선생이 물러가자 종자(종자)에게 말하기를 “앞에 나아가서도 두려워할 만한 점을 보지 못했다[취지불견소외]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상이 선생을 정동행성(정동행성)의 막료(막료)로 천거하고 나서 또 선생을 좌우사 낭중(좌우사랑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서 마침내 선생의 품계를 봉의대부(봉의대부)로 올려 주었다.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흥안부원군(흥안부원군)에 봉해지고, 얼마 뒤에 판삼사사(판삼사사)에 임명되었다. 윤10월에 내가 선생을 모시고 공원(공원 과거 시험장)에 함께 있을 적에 선생에게 봉군(봉군)의 명이 또 내려졌는데, 그때 지금의 전교시 승(전교사승)인 윤소종(윤소종) 등 28인을 시취(시취)하였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선생이 지공거(지공거 주시관(주시관))를 맡고 내가 동지공거(동지공거 부시관(부시관))로 있을 때에, 지금의 좌헌납(좌헌납)인 유백유(유백유) 등 33인을 시취하였다. 경술년에 검교시중(검교시중)에 임명되고, 신해년에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는데, 품계와 작위는 예전 그대로였다.
선생의 연세 67세 되던 갑인년(1374, 공민왕23) 3월에 부스럼이 등에 생겼다. 선생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의복을 갖춰 입고 북쪽을 향해 마치 상에게 고별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아우인 시중공(시중공)에게 이르기를 “재신(재신)이 죽으면 관청에서 장례를 치러 주는데, 이것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평소에 털끝만큼도 국가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부끄러움만 남길 뿐이다. 그러니 공은 내 입장을 생각해서 그런 은혜를 받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원복(원복 관(관))을 몸 위에 얹어 놓도록 명한 뒤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상이 부음(부음)을 듣고는 매우 애도하여 소선(소선)을 행하고 조회(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고 문충(문충)이라는 시호(시호)를 내렸다. 선생이 서거(서거)한 지 3일 만에 성남(성남) 속촌(속촌)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선생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듬해에 충정왕(충정왕)의 사당에 배향(배향)되었다.
증조부는 모관(모관)에 증직되었다. 조부(조부) -관직을 갖추어 썼음- 는 문열(문열)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현릉(현릉 공민왕) 21년에 공(공)을 논할 때 성산후(성산후)로 추증되고 충혜왕(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부친 -관직을 갖추어 썼음- 은 경원(경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증조모 모씨는 모군부인(모군부인)에 추증되었다. 조모 정씨(정씨)는 모군부인에 봉해졌다. 모친 설씨(설씨)는 성균 대사성(성균대사성) 문우(문우)의 딸인데, 모군부인에 봉해졌다.
선생은 모두 세 번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다. 첫째 부인은 판사(판사) 강거정(강거정)의 딸인데, 낭장(랑장)을 지낸 아들 향(향)을 낳았다. 강씨가 죽고 나서 두 번째로 장가든 이씨(이씨)는 모관(모관) 모(모)의 딸로서, 용(용)이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관직이 봉상대부(봉상대부) 전법 총랑(전법총랑)에 이르렀다. 두 아들은 모두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로 장가든 하씨(하씨)는 모관 모의 딸인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손자가 하나 있으니 낭장이 낳은 지금의 대언(대언)이다. 증손녀는 둘이다. 대언의 전 부인은 모관 윤모(윤모)의 딸인데, 딸을 낳고 죽었다. 지금의 부인은 판개성부사(판개성부사) 이공 성림(이공성림)의 딸이다.
내가 과거에 선생의 뒤를 따르면서 일찍이 살펴보건대, 선생은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비록 자그마한 일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였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을 보면 반드시 노여워하며 안색에 모두 드러내었으나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 모두가 선생을 어눌하다고 평하기도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선생이 언젠가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속이 좁고 성질이 급해서 혹시라도 말하다가 실수할 걱정이 있기에 말조심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늙어서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곤 하니, 이는 나의 수양이 아직도 지극하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아, 선생은 학문이 정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독실하게 지켜 온 분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기질(기질)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고 보면, 어떤 일이라도 미리 자세히 살펴서 행했을 것이니,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명)을 짓는 바이다.

성주(성주)의 영걸(영걸)께서 / 성산지영
천자의 뜨락에 입공을 하자 / 입공천정
동쪽 바다 물결 환히 빛나고 / 류광동해
문성이 찬란하게 비치었도다 / 유란문성
행동은 얼마나 신중하였으며 / 유행사신
말은 또 얼마나 조심하였던가 / 유언사인
옛사람의 재질을 모두 갖추고서 / 유고지재
오늘날 세상의 준걸이 되셨도다 / 유금지준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도 험악해서 / 유시지간
사명을 받드는 일 어렵게들 여겼는데 / 유사지난
우리 공은 몸이 비록 초췌했어도 / 공궁수췌
반드시 관문을 나서곤 하였어라 / 공필출관
황친(황친)을 죽이고 명을 거역함은 / 주친거명
모두가 왕정을 범한 죄악이라 / 실간왕정
만인이 바라보며 겁에 질려 떨었으나 / 만목구구
공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어라 / 공불소병
우리 공이 서쪽에서 돌아오실 때 / 공귀자서
바로 유마의 시와 같았는지라 / 유마지사
집집마다 서로들 경축하면서 / 실가상경
우리 공이 오셨다고 환호하였지 / 아공귀혜
생각하면 우리나라 뼈만 남았다가 / 유시아국
다시 살이 붙어 살아났다고나 할까 / 여골이육
우리가 공에게 귀의하지 않는다면 / 비아공귀
추위에 떠는 우리를 누가 구해 줄까 / 여한수욱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 인언아공
우리 공은 문장의 종장(종장)이라고 / 문장지종
집안일도 잊은 채 오직 나라 위해 / 국이망가
전대한 일 얼마나 걸출하였던가 / 전대시공
빛나고 빛나도다 공의 행실이여 / 렬렬행실
태묘(태묘)에 올라 배향(배향)되었도다 / 승배대실
후세의 상서로움 이끌어 주심이여 / 적후강상
자손들이 앞으로 길하게 되리로다 / 자손기길
공이 잠든 양지바른 속촌의 언덕 / 속촌지양
선조들이 묻히신 성산의 선영(선영) / 성산지강
영혼이야 가지 않는 곳이 없으리니 / 혼무불지
손자와 할아버지 서로들 만나시리 / 조손상망
아 흥안부원군 우리 선생이여 / 오호흥안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으리로다 / 영세불망

고려국(고려국)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곡성부원군) 증시(증시) 충경공(충경공) 염공(염공)의 신도비 병서(병서)
 

금상(금상 우왕(우왕)) 즉위 9년째 되는 임술년(1382) 봄 3월에, 태평 재상(태평재상) 곡성부원군(곡성부원군)이 79세로 병이 들었다. 이에 공경대부(공경대부)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가운데,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 모여 조석으로 탕약(탕약)을 받들었으며, 하늘과 땅에 기도를 올리는 등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상 역시 중관(중관)을 보내 문병하고 약과 술을 하사하였다. 아, 이쯤 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끝내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하였다. 아, 그러니 이것은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공은 평소에 건강해서 오래도록 앓는 일이 없었을뿐더러 늙어갈수록 정신과 풍채가 오히려 더 뛰어났으므로, 공이야말로 더욱 높은 수명을 향유할 것이라고 사람들 모두가 확신하였다. 그런데도 그만 이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이 병들었을 무렵에 자신의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고 자제들에게 훈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사흘째 되는 날에 곧장 매장하여 유사(유사)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부음(부음)을 듣고는 상이 슬퍼해 마지않았는데, 장례와 관련하여 재상(재상)이 아뢰기를 “곡성(곡성)이 삼일장(삼일장)을 치르라고 유명(유명)을 내렸으니, 이를 감히 어길 수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에서 장례를 행하는 것이 곧 나라의 법이니, 이를 어긴다면 장차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공 같은 분에게 국장(국장)을 행하지 않는다면, 국장의 예법을 어떤 사람에게 써야 한단 말입니까.” 하고는, 도당(도당)의 관원을 특별히 소집해서 한 가지도 누락되는 일이 없게끔 유사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아, 공이 국장을 사양한 것이나 재상이 국장을 거행하도록 한 것이나 모두 예(예)의 정신에 입각해서 나온 것이니, 예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아름답게 하는 근본이라고 할 것이다. 나의 직분은 바로 이러한 일들을 기록하고 편찬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번에 신도비의 명(명)을 새기라고 분명히 유시(유시)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내가 감히 그 분부를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곡성(곡성)의 성은 염씨(염씨)요, 이름은 제신(제신)이요, 자는 개숙(개숙)이요, 소자(소자)는 불노(불노)이니, 서원(서원 파주(파주)의 옛 이름)의 대족(대족) 출신이다. 먼 선조 가운데 휘(휘) 현(현)이 문묘(문묘 문종(문종))를 도와 성균관(성균관)에서 인재를 시취(시취)하고 재상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휘 신약(신약)이 명묘(명묘 명종(명종))를 도와 지공거(지공거)를 두 차례 역임하고 지위가 태사(태사)에 이르렀다. 증조 휘 순언(순언)은 죽을 때의 관직이 소부 승(소부승)으로, 은청광록대부(은청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문하시랑평장사판이부사)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승익(승익)은 흥법좌리공신(흥법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도첨의중찬상장군판전리감찰사사)로서 시호가 충정(충정)인데, 충렬왕(충렬왕)을 도와 허 시중(허시중 허공(허공)) 및 조 시중(조시중 조인규(조인규))과 함께 서로 잇따라서 정권을 쥐었으므로, 당대의 유명한 공경(공경)들도 감히 항례(항례)하는 이가 없었다. 부친 휘 세충(세충)은 죽을 때의 관작이 중현대부(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감문위대호군)이었다. 모친인 가순택주(가순택주) 조씨(조씨)는 추충보절동덕공신(추충보절동덕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첨의(판도첨의) 평양부원군(평양부원군)으로 시호가 정숙(정숙)인 휘 인규(인규)의 딸인데, 대덕(대덕) 갑진년(1304, 충렬왕30) 10월 무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6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다. 공은 내가(내가)와 외가(외가)가 모두 시중(시중)의 집안이었던 만큼 공을 교육시키는 것이 또한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11세가 되었을 때에는 또 고모부인 원(원)나라의 중서평장(중서평장) 말길(말길)이 공을 불러다가 좌우에 놔두고는 유생(유생)을 초빙하여 10년 동안이나 수업을 받게 하였으므로, 덕행과 지식 면에서 당대의 으뜸가는 인물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태정(태정)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진저(진저 원 진종(원진종))가 들어와서 대통(대통)을 이을 적에, 말길공(말길공)이 공을 데리고 화림(화림)에 가서 대가(대가)를 영접하였는데, 그때 황제가 공을 한 번 보자마자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금중(금중)을 숙위(숙위)하라고 명을 내리고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총애하였다. 말길공이 또한 대신(대신)으로서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병 때문에 조회(조회)에 나가질 못하였는데, 황제가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여 집에 가서 자문(자문)하게 하였고, 말길공이 아뢸 것이 있으면 또 공이 모두 황제에게 전달하곤 하였다. 이때에 대부(대부) 첩실(첩실)이 복주(복주)되고 나서 그의 여동생이 공에게 하사되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아는 것은 없으나, 역적의 무리와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자, 황제가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임술년에 공이 황제에게 청하기를 “신이 모친을 오래도록 뵙지 못했으니, 말미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공의 말에 감격한 나머지 금강산(금강산)에 향(향)을 내리고 금자(금자)의 원패(원패)를 지니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공의 행차를 영광스럽게 해 주기 위함인 동시에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때에 원나라의 사자(사자)가 빈번하게 드나들었는데, 모두가 조정의 위령(위령)을 빙자하여 고려의 재상(재상) 등 중신(중신)들을 능욕하였는가 하면 수령(수령)들을 마치 개나 말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공은 재상을 대할 적에 공경한 자세를 취하였고 수령에게도 예모를 갖추었으며, 사적(사적)인 일로 상에게 청탁하는 일이 또 하나도 있지 않았다. 원나라에 귀환하여 상의사(상의사)를 제수받았다. 지순(지순) 신미년(1331, 충혜왕1)에 또 향을 내려 주는 은혜를 받고 본국에 왔을 적에도 더더욱 조심스럽게 처신하였으므로, 부로(부로)들이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얼마 안 되지만, 노성(노성)한 사람과 비교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참으로 내외(내외) 모두 시중(시중)인 집안의 자손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하였다.
지순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공이 자시(자시)의 이유로 원나라 조정에 청하여 정동행성(정동행성)의 낭중(랑중)이 되었다. 이때 동료들이 꽤나 심하게 위복(위복)의 권한을 행사하며 농간을 부리자 공이 그들과 극력 다투면서 억제시킨 바가 많았으며, 토지와 백성에 관한 송사(송사)에 대해서도 일체 유사(유사)에게 되돌려 주었으므로, 충숙왕(충숙왕)이 감탄하면서 “염 낭중(염랑중)은 청렴하고 간소하기도 하다.” 하였다. 그리고 좌우사(좌우사)에서 공문의 결재(결재)를 청할 적에도 상이 “우리 낭중이 서명을 하였는가?” 하고 물어보고는, 공의 서명이 있으면 결재를 하고 서명이 없으면 결재를 보류하였는데, 상이 우리 낭중이라고 호칭한 것 역시 공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친근하게 부른 것이었다.
공을 정동행성에 머물러 있게 한 지 9년째 되는 해에 왕이 훙(훙)하였다. 이에 공이,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원나라 조정에서 익정사 승(익정사승)의 명을 내려 불렀는데, 품계는 봉훈대부(봉훈대부)였다. 지정(지정)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사명(사명)을 받들고 강절성(강절성)에 가서 중정원(중정원)의 돈과 재물에 대해서 회계 감사(회계감사)를 실시하였는데, 관리들이 뇌물을 많이 바치면서 아부하였으나 공이 일절 받지 않고 물리쳤다. 이에 승상(승상) 별가불화공(별가불화공)이 공을 각별히 예우하였는데, 조정에 들어가서 재상이 되자 황제에게 공을 천거하여 아뢰기를 “노신(노신)이 강절(강절)에 있을 적에 염불노(염불노)가 보통 이상으로 청렴결백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황제에게 보고를 드렸다. 그리하여 장차 공을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대부인(대부인)의 병환 소식을 듣고는 속히 귀국해서 근친(근친)하게 해 줄 것을 극력 청하였으므로, 결국 등용되지 못하였다.
병술년(1346, 충목왕2) 6월 17일에 명릉(명릉 충목왕(충목왕))이 이르기를 “염모(염모)는 황제를 모시면서 중국 조정의 신하로 있다가, 나의 대부(대부 조부) 충숙왕(충숙왕)을 도와 막료(막료)로 있으면서 함께 국정을 의논하였다. 오늘날 나의 시대에 와서는 본국(본국)에서 벼슬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하더라도, 상법(상법)으로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는, 이에 광정대부(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삼사우사상호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에 중대광(중대광)의 품계로 올리고 수성익대공신(수성익대공신)의 호(호)를 내렸다가 이윽고 도첨의평리(도첨의평리)로 옮겨 주었으며, 겨울 12월에 찬성사(찬성사)로 승진시켰다.
이때 정동행성의 재속(재속)이 대신(대신)의 장단점을 거론하며 문책을 하려고 하였으니, 대부(대부) 이공수(이공수)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대간(대간)의 기강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이 대부(리대부)로 말하면 한 시대의 인걸인데, 그를 욕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동안 배운 것을 저버리는 격이 될 것이다.” 하고는, 중국에 들어가서 보고한 결과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무자년(1348, 충목왕4)에 판판도사사(판판도사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국상(국상)을 당해 정승 왕후(왕후)가 천자에게 조회(조회)하러 가면서 국정을 공에게 위임하였는데, 공이 공평하고 타당하게 나랏일을 처결하였으므로 중외(중외)가 모두 편안하였다. 기축년에 총릉(총릉 충정왕(충정왕))이 즉위하여, 공을 중대광(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도첨의찬성사판판도)에 임명하였다. 경인년에 나라의 표문(표문)을 받들고 경사(경사)에 가서 성절(성절)을 축하하였다.
신묘년(1351)에 현릉(현릉 공민왕(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을 중용(중용)하려 하였는데, 공의 외가(외가)에 속한 조일신(조일신)이라는 자가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는 이를 저지하였다. 조일신이 복주(복주)된 그 이듬해에 상이 이르기를 “염모(염모)가 훌륭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다만 일신이 너무도 미워했기 때문에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을 다시 찬성사(찬성사)에 임명하였다. 갑오년(1354, 공민왕3) 정월 11일에 공을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도첨의좌정승판군부사사상호군영경령전사)에 임명하고 뒤이어, 2월 16일에 다시 우정승 판전리 영효사관(우정승판전리영효사관)에 승진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과 같이 하였다.
이에 공이 바야흐로 뜻을 가다듬고서 제반(제반) 정사를 새롭게 개혁하려고 하였는데, 그해 여름에 정승(정승) 채하중(채하중)이 원나라 탈탈 태사(탈탈태사)의 위세를 등에 업고서 왕에게 청병(청병)을 하며 복직(복직)을 꾀하였으므로, 공이 이를 알아채고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도 핍박을 당한 나머지 채(채)를 다시 재상으로 앉히고는 공을 곡성(곡성)에 봉하였다. 이때 태사가 원나라로 불러들인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재상과 날래고 용감한 장수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공도 그 일행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평양)에 이르렀을 때 장수들이 모의하기를 “우리가 친족을 떠나고 조상의 무덤을 버린 채 죽을 곳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어느 날에나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에게 고하면서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그것은 바람직한 계책이 못 된다. 우리 임금은 하늘과 같으니, 하늘 아래 어디로 도망을 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충신(충신)과 의사(의사)라면 어찌 두마음을 품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정승(정승) 유탁(유탁)과 함께 샛길로 빨리 달려갔다. 연경(연경)에 도착한 뒤에 상이 사람을 급히 보내 공을 귀환시켜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염모(염모)는 고려의 대신(대신)이요 또 대족(대족) 출신이니, 예우를 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고는, 휘정원(휘정원)에서 연회를 베풀어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병신년(1356, 공민왕5)에 기씨(기씨 기철(기철)) 일당을 죽이고 나서, 공에게 명하여 북쪽 변방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였다. 대장(대장) 인당(인당)이 제멋대로 부장(부장) 강중경(강중경)을 죽이자, 국가에서 그가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즉시 토벌하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계책을 써서 죽이도록 하니,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원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자가 국경에 이르러서 변란이 일어난 까닭을 힐문하였는데, 공이 나라를 뒤엎으려 한 기씨 일당의 명확한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뒤에 보고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의 노여움이 풀리게 하고 한 지방에 사전(사전)이 내리게끔 하였으니, 이 모두가 공이 응대(응대)를 잘한 덕분이었다.
그해 겨울에 도원수(도원수)로서 북쪽 변방을 진무(진무)하게 되었다. 상이 절월(절월)을 주면서 이르기를 “공이 떠난 뒤에는 내가 북쪽을 염려하지 않겠다.” 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도 감히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전하를 번거롭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염공(염공)은 나의 만리장성(만리장성)이다.” 하였다. 공이 군정(군정)을 행함에 있어서는, 마초(마초)와 군량의 비축을 급선무로 삼고, 성곽과 보루의 수축을 그 다음으로 하였으며, 병장기와 기계의 정돈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그리고 공이 비록 평소에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던 일이라도, 반드시 최 부사(최부사)에게 자문을 구하곤 하였으니, 부사는 바로 지금의 영삼사공(영삼사공)이다. 공이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바로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에 개부의동삼사(개부의동삼사) 상주국(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수문하시중상장군판병부사영경령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판이부사 영효사관사(판이부사영효사관사)로 승진하였다.
신축년(1361, 공민왕10) 겨울에 공이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법이니 미리 경계해야 한다면서 사직하였는데, 사론(사론)이 모두 말하기를 “염공이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은 것이 모두 다섯 차례나 되는데, 사사로운 은혜나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진퇴(진퇴)시킨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의 종족(종족)이 비록 많았으나 화려한 요직을 차지한 자가 있지 않았으니, 이는 담박해서 욕심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이 후(후)에 봉해져서 집에 거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홍건적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임인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곡성후)로 바꿔 임명되었다. 대가(대가)를 상주(상주)로 호종(호종)하였다가 다시 청주(청주)로 옮겼는데, 이때 공이 시중(시중) 윤공 환(윤공환), 이공 암(이공암)과 함께 실제로 상을 수행하였다. 이듬해 3월에 또 공을 시중에 기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상이 신돈(신돈)의 말을 듣고서 출척(출척 등용하고 배척하는 것)을 행하였다. 신돈이 공이 자기에게 빌붙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상에게 참소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공을 삼중대광(삼중대광)으로 특진시킴과 동시에 곡성백(곡성백)에 봉하였다. 신돈이 또 상에게 공을 참소하니, 상이 공의 자서(자서)에게 명하여 신돈과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공에게 유시(유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자신의 지키는 바를 더욱 굳건히 할 뿐이었는데, 이를 통해서 상이 더욱 공을 신임하게 되었다. 올라성(올라성)의 전역(전역)에서도 여러 장수들이 공의 절제(절제)를 받고는 감히 사람들을 많이 죽이지 않았다.
신돈이 복주(복주)된 뒤에 상이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겨, 보국(보국)이라는 두 글자를 공에게 더 가하고 봉읍(봉읍)을 예전과 같이 하였으며, 친히 초상화를 그려 하사하고 공의 딸을 맞아들여 신비(신비)로 삼았다. 그리고 부인 권씨(권씨)를 봉하여 진한국대부인(진한국대부인)의 호를 내렸으니, 이는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모친에게 봉록(봉록)을 지급하는 고사(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중자(중자)인 평리(평리 염흥방(염흥방))가 또 두 번이나 지공거(지공거)를 맡았으므로, 당시 세상에서 모두 부러워하였다.
계축년(1373, 공민왕22)에 공을 문하 시중(문하시중)으로 기용하였는데, 품계와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판개성 겸 감춘추관사(판개성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곡성부원군)을 가해 주었으니, 이는 공을 지극히 총애하였기 때문이었다. 행신(행신) 김흥경(김흥경)이 사적으로 청탁을 많이 하였으나 공이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흥경이 원망하는 말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중은 중국에서 학업을 쌓은 데다가 성품이 또 고결하니, 다른 조정의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대신(대신)의 마음 씀에 대해서는 네가 또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였으므로, 흥경이 감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금상(금상 우왕(우왕))이 즉위하여 공을 영문하사(영문하사)에 임명하고 다시 영서연(영서연)을 맡게 하였으니, 이는 5세(세)에 걸친 원로를 예우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375, 우왕1) 정월 5일에 상이 거상(거상)을 마치고 정전(정전)에 거둥하였다. 재신(재신)이 축수(축수)를 올릴 적에 공이 맨 먼저 “임금이 되기도 어렵고 신하가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등의 말을 진달드렸는데, 말의 뜻이 분명하고 간결하였으므로 상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였다. 공에게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영삼사사)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과 같이 하였다.
병진년 10월에 원나라 조정의 예부 상서(예부상서) 적흠(적흠)이 와서 조칙을 내리고 공에게 자덕대부(자덕대부) 장작원사(장작원사)를 명하니, 공이 절하고 받은 뒤에 사신에게 말하기를 “신이 늙은 몸으로 성은(성은)을 받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답해 드릴 길이 없어 구구한 정만 그저 천지처럼 아득합니다.” 하였다. 정사년에 도총도감(도총도감)을 설치하여 오부(오부)의 병마(병마)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는데, 그 일을 공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기미년(1379, 우왕5)에 판문하사(판문하사)가 되었다가 경신년에 영삼사사(영삼사사)로 옮겼으며 그해 겨울에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공이 이미 늙었지만 나라에 큰 의혹이 있을 때에는 재상이 반드시 공과 윤 칠원(윤칠원 윤환(윤환))을 청하여 회의를 하였는데, 공은 단연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기필코 할 말을 다하였다.
공이 집안에서 거처할 때에는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게 하였다. 집을 몇 번이나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별원(별원)을 두어 마치 산림(산림)처럼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매헌(매헌)이라는 편액(편액)을 내걸고는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담박하게 지내곤 하였다. 손님이 찾아와서 술자리를 벌일 적에도 안주를 지극히 정결하게 하여 기분 좋게 취하면 그만두었으며, 풍류(풍류)가 워낙 소쇄(소쇄)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금년 정월에 기로(기로)와 함께 현릉(현릉)을 참배하였는데, 감회에 젖은 채 물러 나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주도 없는 몸으로 현릉의 과분한 총애를 받고서 시중(시중) 자리에 있은 지 29년이나 된다. 그리고 나이도 벌써 79세에 접어들었는데, 병이 자꾸 발작하곤 하니 내가 필시 세상에 오래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유명(유명)을 내렸다. 3월 2일에 병이 들어 18일 정묘에 정침(정침)에서 별세하였다. 그달 20일 기사에 임강현(임강현) 대곡(대곡)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은 공이 평소에 터를 잡아 놓은 곳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아무런 유감이 없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이에 앞서 상이 중관(중관)인 판후덕부사(판후덕부사) 김실(김실)을 공에게 보내 문병하자, 공이 의관(의관)을 갖추고서 어약(어약)과 궁온(궁온 궁중의 술)을 받은 뒤에, 김실에게 말하기를 “공은 노신(노신)을 대신해서 상에게 말을 잘 전해 달라. 상께서 노신에게 생각이 미치는 까닭은 단지 신이 선군(선군)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일 텐데, 신이 이제 와서는 몸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상께서 스스로 날이 갈수록 더욱 조심하시어 하늘의 복을 영원히 받게 되시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이것이 신의 소원이다.” 하였다. 이날 근비(근비)와 의비(의비)가 사람을 보내 궁온을 내렸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아무런 유감이 없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다. 완산군부인(완산군부인) 배씨(배씨)는 중대광(중대광) 완산군(완산군) 휘(휘) 정(정)의 딸인데,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진한국대부인(진한국대부인) 권씨(권씨)는 원조(원조) 조열대부(조열대부) 태자 좌찬선(태자좌찬선) 추성동덕협찬공신(추성동덕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영예문관사)로서 시호가 문탄(문탄)인 휘 한공(한공)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근검(근검)하였고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쳤으며, 평소에 비단옷을 몸에 두르지 않았다. 공보다 몇 년 앞서서 병이 들었는데, 공이 부인의 병을 낫게 하려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애썼다.
3남 5녀를 낳았다. 장남 국보(국보)는 추충보리공신(추충보리공신) 중대광(중대광) 서성군(서성군) 예문관 대제학(예문관대제학)이다. 그 다음 흥방(흥방)은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 전(전) 광정대부(광정대부) 문하평리 겸 성균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상호군(문하평리겸성균대사성예문관대제학상호군)이다. 그 다음 정수(정수)는 정순대부(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지전리내시다방사(밀직사지신사겸판전의사사우문관제학지제교충춘추관수찬관지전리내시다방사)이다.
장녀는 봉익대부(봉익대부) 밀직 부사(밀직부사) 홍징(홍징)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제학(판내부사사진현관제학) 임헌(임헌)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추성좌리공신(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밀직사상호군) 정희계(정희계)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바로 신비(신비)이다. 다음은 중정대부(중정대부) 삼사 우윤(삼사우윤) 이송(이송)에게 출가하였다.
혜주(혜주)는 통제원 주지(통제원주지)인데, 공의 부실(부실)인 김씨(김씨)의 소생이다. 광원(광원)은 봉순대부(봉순대부) 판사복시사(판사복사사)인데, 공의 부실인 이씨(이씨)의 소생이다. 중랑장(중랑장) 홍문필(홍문필)에게 출가한 딸이 있는데, 김씨의 소생이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서성(서성)은 현복군(현복군) 권공(권공) 휘 염(염)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남 치중(치중)은 친어군 호군(친어군호군)이고, 다음 치용(치용)은 전의 부령(전의부령)이고, 딸은 사헌 지평(사헌지평) 안조동(안조동)에게 출가하였다. 평리(평리)는 종부 부령(종부부령) 조문경(조문경)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녀는 위위 소윤(위위소윤) 임치(임㮹)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지신사(지신사)는 판전농시사(판전농사사) 조득주(조득주)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외손자와 외손녀가 약간 명 있다. 밀직(밀직)의 아들 상빈(상빈)은 성균 학유(성균학유)이고, 다음 상부(상부)는 산원(산원)이고, 다음 상연(상연)은 권무(권무)인데 모두 성균시(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딸은 모두 어리다. 내부(내부)의 아들 공위(공위)는 낭장(랑장)이고, 다음 공진(공진)은 별장(별장)이고, 나머지 아들은 어리며, 딸들도 모두 어리다. 밀직사(밀직사)의 아들 길상(길상)은 중랑장(중랑장)이고, 딸은 어리다. 우윤(우윤)의 아들 길(길)은 권무(권무)이고, 다음은 일(일)인데 어리다. 판사(판사)는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다. 중랑장(중랑장)은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증손자와 증손녀가 약간 명 있다. 호군(호군)은 전법 판서(전법판서) 박사신(박사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이)를 낳았는데 지금 권무(권무)이다. 부령(부령)은 밀직 제학(밀직제학) 윤방안(윤방안)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순(순)을 낳았는데 지금 권무이다. 지평(지평)은 아들 금강(금강)을 낳았는데 지금 권무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아, 공이 다섯 가지 복을 모두 갖추고 자손들이 창성한 것이 바로 이와 같다.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베풀어 준 이면에는 필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할 것이니, 세신(세신) 구가(구가)의 남은 경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공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푼 분명한 증험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를 통해서 실로 흥기(흥기)되는 바가 없지 않다. 가령 우리 공과 같은 분이 서로 뒤를 이어서 묘당(묘당)의 위에 계신다면, 태평 시대를 구가하는 날을 바로 오늘날에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 공은 떠나셨다. 아, 공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 이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명)을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이미 젊은 나이 때부터 / 공재묘령
황제의 뜨락에서 특출하였나니 / 양교제정
돌아와 정동성의 낭중이 되어서는 / 귀장성막
정치도 안정되고 백성도 편했다오 / 리정민녕
임금님 다섯 분을 차례로 섬기면서 / 역사오조
나라의 위엄을 국외에 떨쳤나니 / 양국위령
가라앉힐 때는 산악과 같았었고 / 진지산악
한 번 발동하면 천둥 벼락이었어라 / 동이뇌정
시대 상황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 시지간의
때마침 공이 나와 일을 처리하자 / 공내적정
군사들이 기꺼이 목숨 바쳤고 / 삼군효명
백 가지 법도가 바르게 잡혔어라 / 백도유정
백성들이 제대로 길러짐은 물론이요 / 생민시육
종사도 든든한 울타리를 얻었나니 / 종사시병
이는 공이 바로잡고 곧게 펴 주면서 / 이광이직
정성껏 양육하며 보살폈기 때문이라 / 이독이정
그러니 온갖 병이 일시에 완쾌되고 / 중병이전
취했던 자들도 맑은 정신 될 수밖에 / 군취이성
그래서 태평 재상 칭호를 붙였나니 / 대평지목
신명도 듣고서는 머리 끄덕이리라 / 신명소청
아 위대하신 우리 현릉께서도 / 어목현릉
공의 초상화 친히 그려 주셨나니 / 친도기형
높은 공훈과 성대한 공의 덕성이여 / 풍공성덕
단청으로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 / 환호단청
공은 그야말로 원로 대신으로서 / 전야원로
한 나라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는데 / 일국의형
백 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다니 / 호불기이
천지가 온통 아득하게 어두워졌네 / 천지묘명
높은 언덕 낮은 늪 판연히 나눠지고 / 유절원습
냇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곳 / 천류령령
산이 멈춰 서서 정기가 쌓였나니 / 산지기축
아름다워라 공의 영원한 안식처여 / 유미천경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빗돌 하나 / 유돌풍비
위로 솟아 하늘의 별에 닿을 듯 / 상마우성
천년토록 와전(와전)되는 일 없이 / 천재물와
우리 동쪽 땅을 환히 비추리라 / 조아동경
고려국 대광(대광) 완산군(완산군) 시(시) 문진(문진) 최공(최공)의 묘지명 병서(병서)
 

완산 최씨(완산최씨)의 족보 중에서 상고할 만한 이로 순작(순작)이라는 분이 있는데, 관직이 검교신호위 상장군(검교신호위상장군)에 이르렀다. 이분이 숭(숭)을 낳았으니 관직은 중랑장(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남부)를 낳았으니 관직이 통의대부(통의대부) 좌우위대장군 지공부사(좌우위대장군지공부사)에 이르렀다. 공부가 휘(휘) 전(전)을 낳았으니 좌우위 보승 낭장(좌우위보승랑장)이요, 낭장이 휘 정신(정신)을 낳았으니 좌우위 중랑장(좌우위중랑장)이다. 중랑장이 휘 득평(득평)을 낳았는데, 통헌대부(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선부전서상호군)으로 치사(치사)하였다.
선부(선부)는 청렴과 공정을 신조로 자신을 굳게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경외하며 어렵게 여겼다. 충렬(충렬)ㆍ충선(충선)ㆍ충숙(충숙)의 세 임금을 차례로 섬겼는데, 그중에서도 충선왕이 특히 재능을 인정하고 중히 여겼다. 당시에 충선왕이 비록 왕위를 넘겨주기는 하였지만 나라의 정사에는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에 대한 인사 행정이 충선왕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선부가 대간(대간)을 맡으면 기강이 확립되었고, 형부(형부)에 있으면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었다. 김해(김해)와 상주(상주)의 목민관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였고, 전라도(전라도)를 두 번 안찰(안찰)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이 그 풍도를 두려워하였다. 양전(양전 토지 조사)을 행할 적에 재상(재상) 채홍철(채홍철)의 부관(부관)이 되어 전라도 주현(주현)의 토지를 분담해서 처리하였는데,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면서도 백성들이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향년(향년)은 75세였다.
선부의 부인은 봉익대부(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승지 세자원빈(지밀직사사감찰대부문한학사승지세자원빈) 곽공(곽공) 휘 예(예)의 딸이다. 대덕(대덕) 계묘년(1303, 충렬왕29)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재(재)요, 자(자)는 재지(재지)이다. 지치(지치) 원년(1321, 충숙왕8)에 동대비원 녹사(동대비원녹사)에 보임(보임)되었다. 태정(태정)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내시부(내시부)로 들어갔다가 태정 4년에 산원(산원)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별장(별장)으로 옮겼다. 천력(천력) 경오년(1330, 충혜왕 즉위)에 순흥군(순흥군) 안공 문개(안공문개)와 심악군(심악군) 이공 담(이공담)이 공동으로 관장한 과거에서 공이 급제하였는데, 6년이 지난 뒤에 단양부 주부(단양부주부)로 개임(개임)되었고, 또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중부령(중부령)에 제수되면서 승봉랑(승봉랑)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뒤에 지서주사(지서주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복제)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 충숙왕이 쓸모없는 관원들을 도태시켰다. 이때 어떤 사람이 공을 천거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원래 그의 부친을 알고 있다. 풍헌관(풍헌관)으로는 이 사람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감찰 지평(감찰지평)을 제수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취임하였다가, 영릉(영릉 충혜왕(충혜왕))이 복위하자 이에 체직(체직)되었다.
그러다가 고씨(고씨)의 난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무릇 왕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뜯어고치려 하면서 도감(도감)을 세우고는 공을 판관(판관)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상부(상부)가 자못 독촉하면서 협박을 가해 오자, 공이 천천히 나가서 도감의 판사(판사)인 재상에게 말하기를 “왕이 물론 덕을 잃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하 된 입장에서 임금의 불미스러운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안한가? 왕의 잘못은 왕에게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영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앞에서는 영합하다가 뒤에 가서 들추어내다니, 나는 이를 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니, 그 재상이 입을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명릉(명릉 충목왕(충목왕))이 즉위한 뒤 처음 행한 정사(정사)에서 공에게 전법 정랑(전법정랑)을 제수하였다. 그해 겨울에 흥주(흥주)를 다스리러 나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전적(전적)이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공이 이를 개수(개수)하였는데, 소장되어 있던 구본(구본)과 일일이 확인하여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인 정승(인정승 인당(인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평소에 공을 꺼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교체시켰다.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정승인 왕공 후(왕공후)와 김공 영돈(김공영돈)이 성지(성지)를 받들고서 전민(전민)의 송사(송사)를 정리할 적에, 공을 판관(판관)으로 천거하고는 역마(역마)를 치달려 불러오게 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착하자,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장흥부(장흥부)는 지금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니, 최모(최모)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고는 다시 외방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공이 장차 부임하려고 하였는데, 두 정승이 또 상의하기를 “최모는 전에 지평(지평)으로 있을 적에 위엄과 명망을 떨쳤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두어 재임(재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외씨(외씨)인 곽공 영준(곽공영준)이 대부(대부)로 있었기 때문에 법제상 상피(상피)해야 했으므로 전법 정랑(전법정랑)으로 옮겨졌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경상도안찰사)가 되었으며, 1년 중에 전객 부령(전객부령)과 자섬사사(자섬사사)로 자리를 두 번 옮겼다. 공이 빈객을 접대하는 일과 궁중의 수요(수요)를 충당하는 일을 함께 담당하면서 남는 물품이 있으면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으므로 그동안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양주(양주)의 목민관으로 나갔다. 원(원)나라의 사자(사자)가 향(향)을 내려 주러 와서 존무사(존무사)를 능욕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무례한 일이 장차 나에게도 닥칠 것이다.” 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에 집정(집정)하던 자가 기뻐하며 상에게 아뢰어 감찰 장령(감찰장령)을 제수하자 대간(대간)의 기강이 다시 떨쳐지게 되었는데, 1년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신묘년(1351)에 현릉(현릉)이 즉위하자, 대신(대신)에 뽑혀 다시 장령(장령)이 되었다. 이듬해에 개성 소윤(개성소윤)으로 옮겨지자 사직하고 청주(청주)로 돌아갔는데, 이때 조일신(조일신)의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1354, 공민왕3)에 전법 총랑(전법총랑)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뒤에 판도사(판도사)로 옮겨졌다. 그해 가을에 복주 목사(복주목사)로 나가서 민정(민정)을 살피고 조약(조약)을 지켰다. 공이 떠나던 날에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며, 그때 공이 설치해 놓은 것들을 지금까지도 준수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감찰집의직보문각)으로 조정에 불러들였다.
군사를 뽑을 때 전지(전지)를 주는 것은 예전부터의 제도였는데, 공을 명하여 그 도감사(도감사)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전지를 받을 경우, 그에게 자손이 있으면 자손이 전해 받고, 자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으며, 죄를 지어야만 그 전지를 환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전지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시끄럽게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백성들을 다투게 하면서 빼앗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격이니, 이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전지를 받아야 할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주고 당대(당대)로 그치게 하자, 이에 관한 송사(송사)도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대중대부) 상서 우승(상서우승)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정의대부(정의대부) 판대부시사(판대부사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지만 뜻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더욱 직무에 충실한 결과 순월(순월) 사이에 부고(부고)가 가득 차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판대부의 직책을 극진하게 수행한 자는 최모뿐이다.” 하였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공주 목사(공주목사)로 나가서 복주(복주)에 있을 때처럼 선정(선정)을 베풀었다. 신축년에 또 외방으로 나가서 상주 목사(상주목사)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조정이 병란을 피해서 남쪽으로 옮겨 갔다가 이듬해 봄에 상주로 대가(대가)가 거둥하였다. 이때 공이 있는 힘껏 접대를 하면서도 혹시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들로부터 차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3월에 봉익대부(봉익대부) 전법 판서(전법판서)로 본경(본경)에 가서 분사(분사)를 맡게 되었는데, 공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현릉이 인견(인견)하고는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위로하였다.
갑진년(1364, 공민왕13)에 감찰대부(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진현관제학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대광(중대광) 완산군(완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전리 판서(전리판서)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또 개성 윤(개성윤)으로 옮겼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새로운 관제(관제)가 시행되자 영록대부(영록대부)로 바뀌어졌다. 신해년에 안동(안동)의 수신(수신) 자리가 비게 되자, 현릉이 이르기를 “안동을 지킬 적임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는, 비답(비답)을 내리면서 위사(위사)를 보내 공의 출발을 재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봄에 노쇠했다고 청하여 허락을 얻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해 9월에 현릉이 훙(훙)하자, 공이 곡(곡)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다.
금상(금상 우왕(우왕))이 즉위하여 공을 밀직부사 상의(밀직부사상의)에 임명하였으나, 공이 고사(고사)하고 간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에게 완산군(완산군)이 봉해지고 대광(대광)의 품계로 올랐다. 이듬해 봄에 수레를 몰게 하여 강릉(강릉)의 밀직(밀직) 최안소(최안소)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그에게 영결(영결)을 고하려 함이었다. 그해 9월에 가벼운 질환을 앓게 되자,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꿈을 꾸니 이인(이인)이 나타나서 오시(오시)에 이르면 죽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올해가 무오년이고 또 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내가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기사일에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살던 집의 동쪽 감좌(감좌)의 산기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달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영산군부인(령산군부인) 신씨(신씨)는 봉익대부(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판밀직사사예문관제학)으로 치사(치사)한 휘(휘) 천(천)의 딸이요, 무안군부인(무안군부인) 박씨(박씨)는 군부 정랑(군부정랑) 휘 윤류(윤류)의 딸이다. 신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 사미(사미)는 봉익대부 예의 판서(례의판서)이고, 다음 덕성(덕성)은 급제(급제) 출신으로 중정대부(중정대부) 삼사 좌윤(삼사좌윤)이다. 박씨는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 유경(유경)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종부령지전법사사)이고, 딸은 성근익대공신(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문하평리상호군) 우인열(우인열)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선덕랑(선덕랑) 선공시 승(선공사승) 조령(조녕)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판서는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 서(서)는 호군(호군)을 거쳐 현재 전라도 안렴사(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 원(원)은 중랑장(중랑장)이고, 다음 각(각)은 별장(별장)이며, 장녀는 예의 총랑(례의총랑) 송인수(송인수)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좌윤은 자녀 넷을 두었다. 장남 복창(복창)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세창)은 별장이고, 다음 사창(사창)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으며, 딸은 어리다. 종부(종부)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사위(사위)는 낭장(랑장)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평리는 자녀 셋을 두었다. 아들 양선(양선)은 영명전 직(영명전직)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시승(사승)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좌윤은 나의 친구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술을 마실 때마다 호기를 곧잘 부리는데,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어디를 가나 그 일로 이름이 났다. 그가 와서 명(명)을 청하기에 이렇게 글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은 올곧았고 / 유공지직
공은 맑았나니 / 유공지청
공의 덕성에 걸맞게 / 유공지덕
공의 이름 떨쳤다네 / 유공지명
그 이름 그 덕이면 / 유명유덕
세상의 모범이 되련마는 / 유세지칙
어찌하여 크게 쓰이는 몸이 되어 / 호불대용
일찍이 우리 왕국 바로잡지 못했던가 / 정아왕국
우리 왕을 일단 보좌하게 된 뒤로는 / 기상아왕
조정의 어려운 일 주선을 하였는데 / 주선묘당
일흔 하고 여섯의 나이가 되었어도 / 년칠십육
건강하고 굳센 것은 여전하였다오 / 상이강강
물러날 때 보여 준 결단성이여 / 공퇴칙결
이것이 바로 명철함이 아니리요 / 윤의명철
아 우리 최공이시여 / 오호최공
세상에서 그 풍도 흠모하리라 / 세흠기풍

한 문경공(한문경공)의 묘지명 병서(병서)
 

내 나이 열예닐곱 살 되었을 적에 시승(시승)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한 번은 묘련사(묘련사)에서 유자(유자)와 승려들이 뒤섞여 앉아 차를 마시며 연구(연구)를 지었는데, 그때 문경공(문경공 한수(한수))이 겨우 열두어 살의 나이로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정확하게 대구(대구)를 지어 응답하였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경탄하였다. 그리하여 늙도록 문묵(문묵)에 종사한 사람들도 공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그때부터 벌써 마음속으로 비범한 인물로 여겨 왔다.
그러다가 정해년(1347, 충목왕3)에 나의 선군(선군 이곡(이곡))께서 지공거(지공거)를 맡으셨을 적에 공이 과연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5세였다. 그리고 당시에 낙제(락제)한 자들도 공의 재주에 탄복하면서 모두들 “한생(한생)이 급제한 것은 결코 요행이 아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공은 이미 문음(문음)으로 두 번에 걸쳐서 진전 직(진전직)과 별장(별장)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벼슬길을 구하지 않은 채 고대(고대)의 전적(전적)을 토론하면서 익재(익재 이제현(이제현)) 선생을 따라 《춘추좌전(춘추좌전)》과 《사기(사기)》와 《한서(한서)》를 독파하였으며, 또 글씨 쓰는 법을 익혀서 진서(진서 해서(해서))와 초서(초서)에 모두 오묘한 경지를 이루었다.
총릉(총릉 충정왕(충정왕))이 왕위를 잇고 나서 공을 덕령부 주부(덕령부주부)에 보임(보임)하였으며, 정방(정방)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치(비도적)로 삼았다. 신묘년(1351, 충정왕3)에 총릉이 왕위를 내놓고 강도(강도)로 옮기자, 공이 그곳에 함께 따라가서 거처하였다. 현릉(현릉)이 즉위하여 공을 소환하였으나 즉시 등용하지 않고 있다가,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비로소 전의 주부(전의주부)를 제수하고 또 비도치로 삼았다. 이듬해에 전리좌랑 지제교(전리좌랑지제교)로 옮겼다가, 다시 이듬해에 두 번 승진시켜 통직랑(통직랑) 성균 직강(성균직강)과 봉선대부(봉선대부) 성균 사예(성균사예)를 삼았으며, 그때마다 모두 예문 응교(예문응교)를 겸대하게 하였다.
병신년(1356, 공민왕5)에 관제(관제)를 고칠 적에 중산대부(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비서소감지제고)가 되었다. 이듬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병부시랑한림대제)로 옮겼다가 가을에 직학사(직학사)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에 또 승진하여 중대부(중대부) 국자좨주 지제고(국자제주지제고)가 되었다.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국가가 사적(사적 홍건적)의 난을 만나 안동(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전의 영(전의령)과 전교 영(전교령)으로 두 번 전직(전직)되었는데, 품계는 모두 중정대부(중정대부)였다. 이듬해 가을에 환도(환도)하여 봉순대부(봉순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판사복사사우문관직제학)에 임명되고,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밀직사좌부대언보문각직제학지공부사)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공에게 전선(전선 인사 행정)의 책임을 맡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에 우부대언(우부대언)에 오르고 다시 좌대언(좌대언)으로 승진하였다.
을사년(1365, 공민왕14) 봄에 신돈(신돈)이 상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행적에 매우 비밀스러운 점이 있었다. 공이 이를 알아채고는 상에게 은밀히 알리면서 아뢰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닌 만큼 혹시 난리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되니, 상께서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일을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말씀드리겠습니까.” 하였으나, 그때는 상이 신돈을 총애하고 있던 중이라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여름에 공을 판서 예의(판서례의)로 삼은 뒤에 다시 가을에 군부(군부)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사실상 공을 소외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해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이 삼년상을 마쳤으나, 상은 전에 공이 아뢴 말 때문에 여전히 공을 중용(중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해년(1371, 공민왕20) 가을에 신돈이 몰락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모(한모)는 선견지명이 있으니, 급히 불러오라.” 하고는, 영록대부(영록대부) 이부상서 수문전학사(이부상서수문전학사)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상이 “전선(전선)은 중요한 일이니, 총민(총민)하고 정밀한 자가 아니면 그 권한을 맡길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오직 한모가 적임자이다.” 하고는, 공에게 정의대부(정의대부)의 품계를 내리고 우승선(우승선)에 임명하였으며, 겨울에 좌승선(좌승선)으로 승진시키면서 전선을 주관하게 하였다.
을묘년(1375, 우왕1) 여름에 밀직제학 동지서연(밀직제학동지서연)에 오르고, 가을에 첨서(첨서)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부사(부사)로 바뀌었다가 얼마 뒤에 동지(동지)로 승진하였다. 5월에 동지공거(동지공거)로 지금 판서(판서)로 있는 정총(정총) 등 33인을 시취(시취)하였는데, 당시에 제대로 인재를 뽑았다고 일컬었다. 가을에 지사(지사)로 승진하였다. 무오년(1378, 우왕4)에 상당군(상당군)에 봉해졌다. 대광(대광)의 품계로 오르면서 관직(관직)도 진현(진현)으로 바뀌었으며, 수충찬화공신(수충찬화공신)의 호를 받았다. 기미년 겨울에 광암사(광암사)의 비문(비문)을 쓴 공으로 다시 첨서(첨서)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청성군(청성군)에 봉해졌으니, 품계는 중대광(중대광)이었다. 임술년에 남경(남경)에 호종(호종)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광정대부(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판후덕부사우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상호군)에 임명되었으며, 공신(공신)의 호는 예전과 같았다.
갑자년(1384, 우왕10) 2월 28일에 자택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고 애도하면서 “이와 같은 인물이 나이 겨우 52세에 세상을 떠나다니, 천도(천도)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길일(길일)을 택해서 임진현(임진현) 서곡(서곡)의 남쪽 산기슭 선영(선영)에 장례를 행했으니, 이는 예법(예법)에 따른 것이었다.
한씨(한씨)는 상당(상당 청주(청주)의 옛 이름)의 대족(대족)이니, 난(난)이라는 분이 시조(시조)로서 삼한공신(삼한공신)이다. 사기(사기)라는 분이 첨의부우사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교(첨의부우사의대부보문각제학지제교)를 역임하였는데, 이분이 공에게 증조가 된다. 악(악)이라는 분은 선력좌리공신(선력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상당부원군)으로서 시호가 사숙(사숙)인데, 충숙왕(충숙왕)을 보좌하며 총재(총재)의 지위에 올라 사직(사직)에 공을 세웠으니, 이분이 공에게 조부가 된다. 사숙(사숙)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모두가 명철한 재상(재상)이었다. 그중에서 공의(공의)라는 분이 밀직(밀직)을 거쳐 중대광(중대광) 청성군(청성군)에 봉해지고 평간(평간)의 시호를 받았는데, 밀직사좌대언 겸 감찰집의(밀직사좌대언겸감찰집의)인 경공(경공) 휘 사만(사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공에게 고비(고비)가 된다.
공은 검교문하시중(검교문하시중) 길창부원군(길창부원군) 권공(권공) 휘 적(적)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6녀를 낳았다. 장남 상환(상환)은 전 삼사 우윤(삼사우윤)이고, 다음 상질(상질)은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평양윤(서북면도관찰출척사겸평양윤)이고, 다음 상경(상경)은 공조총랑 지제교 겸 상서소윤(공조총랑지제교겸상서소윤)이고, 다음 상덕(상덕)은 종부시 승(종부사승)이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우윤(우윤)은 문하평리(문하평리) 윤승순(윤승순)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출척(출척)은 문하시중 이성림(이성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그 딸은 전 종부시 승 강책(강책)에게 출가했고, 지청풍군사(지청풍군사) 송신의(송신의)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총랑(총랑)은 전 판도 판서(판도판서) 오준량(오준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시승(사승)은 전 대언(대언) 이귀생(이귀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의 장녀는 삼사 우윤(삼사우윤) 안경검(안경검)에게 출가하여 5녀 1남을 낳았고, 다음은 성균 직강(성균직강) 이작(이작)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은 대호군(대호군) 권방위(권방위)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전 호군(호군) 임중선(임중선)에게 출가하여 4남을 낳았다. 다음은 의덕부 승(의덕부승) 박등(박등)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랑장(중랑장) 전보(전보)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장남인 우윤은 총명하고 영민한 데다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병 때문에 과거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다. 출척은 경신년 과거에서 제3명(제삼명)으로 급제하였고, 총랑은 임술년 과거에서 제3명으로 급제하였으며, 막내인 시승은 을축년 과거에서 제9명으로 급제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아들 세 명이 등과(등과)할 경우에는 그 모친에게 종신토록 늠료(름료)를 지급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권씨 부인이 그 영광스러운 봉양을 향유하고 있으니, 공도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신선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난 지도 지금 벌써 9년이 된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 그 모습만은 아직도 나의 마음속과 내 눈앞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출척공이 형제들과 함께 유택(유택)에다 명(명)을 묻으려고 꾀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뜻을 더욱 간절히 하여 나에게 와서 글을 부탁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문경(문경)의 부탁을 받고서 공의 부친인 평간공(평간공)의 묘지명을 지었었는데, 지금 또 문경의 묘지명을 짓게 되다니, 이 또한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옥병에 담은 얼음처럼 / 옥호치빙
공의 인품 맑았고 / 유공지청
갑에서 꺼낸 거울처럼 / 진갑개경
공의 마음 밝았어라 / 유공지명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는데도 / 장우환기
사치라는 말을 전혀 몰랐고 / 무화미사
오직 시서의 세계에 노닐면서 / 유어시서
이끗은 추호도 좇지 않았어라 / 절사호리
효우와 충신을 타고난 데다 / 효우충신
염정과 관화로 일관하였으니 / 렴정관화
눈썹이 희도록 장수해야 마땅한데 / 의지미수
하늘이 어찌하여 일찍 데려가셨는가 / 천탈내하
그런 중에도 훌륭한 자제 많이 두어 / 유기다자
아름다운 재질을 한껏 발휘하는지라 / 유재유미
공의 명성 여전히 전해지는 것이 / 공명지전
세상에 계실 때와 다름이 없소이다 / 여재우세
부자의 명을 모두 내가 짓다니 / 아명부자
어찌 내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까 / 심호불상
부디 많은 복을 내려 주시어 / 서기수유
길이 자손이 번창하게 해 주소서 / 자손기창